2019. 12. 1. 16:19
자기만족용
필요한 장면은 얘기해주십셔...
뜨이따나 덧글 다...
뜨이따는 저장이 어려워서리
(하라는 연성은 안하고)
-딥디화질에서 더 낮아질 수도
-에이가 본편 및 전설(1~4는 영상크기문제로 현재는 좀 짤림)

Posted by 하리H( )Ri
2019. 9. 9. 02:11
https://heartrainon.tistory.com/m/185
여기서 이어지는(?) 정확히는 이전의 이야기+ a
전에 연결해둔 타래를 발견한 김에 업로드
이어나갈 힘이 있다면 이것도 장편으로 이어나가고 싶...음...

일단 세계관도 정리해보고 모아놓은 타래라도 같이 달아드리겠습니다.
https://twitter.com/heartrain_on/status/1170665372229324801?s=19

*
(오소마츠)
기억하는 것 몇 가지. 첫 번째는 태어났을 때의 기억. 7개의 두근거림이 하나로 줄어드는 그 때의 불안감. 나의 가족이 엄마, 아빠, 나 그리고 5명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걸 인식한 건 조금 지나고 나서였다. 두 번째는 가족을 잃어버리던 때. 선명한 총성이 두 번 울리고 싸늘하게 식은 부모의 몸. 세 번째. 우릴 맡아준 보육원이 망하고, 여섯 형제가 뿔뿔이 흩어지던 때. 그 세 가지는 모두 내가, 우리가 태어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버려지고, 카라마츠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지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내게 지은 그 미소가, 아마도 날 처음 구원해 준 것이리라.
신부가 나를 데리고 간 교회는 보육원과 다를 바 없었다. 같은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도 몇 있었고, 신부를 제외하면 아이들로 가득했기 때문일까. 신부는 글자나 산수같은 걸 알려주고, 신에 대한 이야기나 동화나 전설을 들려주기도 했다. 말썽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미소를 잊지 않았다. 그 미소가 좋아서일까, 안 좋은 기억에서 구원해준 사람이어서일까 나는 그를 잘 따랐다. 이름 없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떼를 써가며 그와 비슷한 이름을 만들어달라고 했을 정도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소마츠는 어때, 라고 말했을 때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공부하는 건 따분했지만 신부가 웃어주니까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도 그저 살아있을 뿐이던 존재는 이제야 오소마츠라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교회에서도 몇 년을 지내며 신부의 일을 돕거나 마을에 일하러 가는 등 자신의 가치가 느껴지는 나날을 보냈다. 그런 날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많은 걸 원해서는 안되는데, 신께 간만에 진심으로 기도한 탓이었나. 어느날 일상은 깨어졌다.
마을에 연방군이 반란분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거나 민간인을 죄를 씌워 죽인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교회에 맡겨진 나는 상관없는 일이려나, 하고 무시했지만.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소문은 사실이었는지 마을에 연방군이 나타났다. 탐문을 하며 돌아다니는 군인 무리를 일하는 중에 마주했다. 싸늘한 눈길.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그 눈길이 싫어서 재빨리 교회로 돌아와 마을 얘기를 모두에게 전하던 참이었다. 아까 마주친 군인 무리가 교회에 들이닥쳤다. 카라마츠 신부가 막아서서 아이들을 보호하자, 한 군인이 신부의 멱살을 잡으며 반란을 꾸미려 아이들을 모아온 건지 추궁했다. 곧바로 내가 달려들었지만 녀석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다시 달려들려 하자 이번엔 신부가 그만하라고 말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렴. 신께서 보고 있으시니 어떤 사람이든 용서해야 해. 이런 말을 하면서. 군인의 발길질은 신부를 향했고 그는 바닥에 내팽겨진채 군화 짓밟혔다. 이 때도 신부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였지만 눈만큼은 무언가 굳은 의지가 보였던 것 같다. 밤이 되고, 그런 사건이 있었던 뒤에도 교회에선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냈다. 아이들은 신께 아까의 나쁜 군인들을 혼내달라고 빌었지만 신부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며 기도를 이어나갔다. 취침 시간이 지나 다들 잠든 걸 확인하고 나는 신부의 처소에 들어가 따졌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하고 화를 내지 않는 거냐고. 그의 답은 한결같았다. 한참을 혼자서 분통을 터뜨렸을까. 바깥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신부는 나보고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보려 했고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함께 밖으로 향했다. 신부의 처소는 교회 안에 위치해 있었다. 아이들은 교회 바깥에 허름하지만 넓은 건물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신부의 방에 난 창문은 아이들의 숙소가 아니라 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판단하는 게 늦고 말았다. 아이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커지자 교회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 화염에 싸인 건물과 그 곳을 빙 둘러싼 군인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신부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산 쪽으로 가라고 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은 아까 봤던 무언가 결심한 눈이었다.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눈. 교회를 빙 돌아 산쪽으로 달리는 동안 신부는 군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무서워서, 나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총성은 부모님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총성은 계속 울렸다. 진짜 소리인지 환청인지 알 길은 없었다. 산으로, 산으로, 산으로... 총성이 멈추자 뒤돌아 볼 용기가 생겼다. 아니, 그건 용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숙소도, 교회도,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도 불타고 있었다. 태양이 땅에서 솟은 듯 불길은 어둠을 가르고 일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째서. 어째서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군인들은 날 뒤쫓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도망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눈에 띄지 않은 건, 카라마츠 신부가 나섰기 때문일 거다. 내 귀에 울린 총성 중 몇 번째가 신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몇 시간을 주저앉아 있었을까.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기세좋게 내린 비는 하마터면 산불로 번질뻔한 불길을 금세 잠재웠다. 이것이 신의 조화일까. 그렇다면, 신은 왜 신부를 구해주지 않은 것인가. 신의 뜻에 따라 무엇이든 용서할 줄 알았던 그를. 왜. 그제서야 내 감정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절규를 토해낸 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잿더미 앞에서. 신을 원망했다. 상황을 보자마자 날 살리려 한 신부를 원망했다.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군인을 원망했다. 총성을 원망했다. 부모도, 형제도 잃은 내겐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원망은 분노로 바뀌어갔다. 군인이 하고 간 말 중 반란이 떠올랐다. 이딴 세상이다. 연방의 횡포는 분명 다른 곳에도 뻗쳐 있을 터다. 어디엔가는 연방군에 맞서는 데가 있겠지. 그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일어섰다. 여기서 다른 마을로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하니까.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곳을 찾아서.

*
(카라마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길바닥에서 살았다. 그 어렸을 때가 언제인진 모른다. 첫 기억이 길바닥이니까. 나보다 큰 형이나 누나가 있어 그들이 구걸해서 얻은 걸 같이 버려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나날이었다. 그런 나날도 어느새 끝나버렸지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들은 우릴 떠나버렸다. 하필, 그들이 떠나고 나선 내가 연장자 취급을 받았다. 내가 구걸하고 대여섯 명이 나눠먹는 삶. 얍삽이라고 불리는 나와 닮았고 아마도 나와 나이가 비슷할 아이가 있었지만 그도 내게 의존했다. 모두가 가난한 곳에서 구걸은 점점 어려워졌고, 어떻게든 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나는 힘이 센 편이었다. 힘쓰는 일을 어른만큼은 못하지만, 어떻게든 일할만한 것을 찾아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축복이었다. 그렇게 함께 있는 아이들을 먹여살렸다. 내게 모지리라며 바보취급을 하다가도 품삯을 받아오거나 먹을걸 가져오면 녀석들은 기뻐했다. 다른 녀석들도 구걸이나 일거리 찾기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걔 중에 꾸준히 생을 이어갈 만큼을 벌어오는 게 나뿐이었던 것이다. 적당한 잠자리를 찾아서 옮겨다니거나 장작 모아오기 같은 다른 잡일은 다른 아이들이 나눠서 했으니까. 이렇게 살다보면 절로 남의 것에 손대게 될법한데, 들키면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걸 아는 우리 무리는 도둑질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한 번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산속 동네 유지의 창고를 턴 적이 있는데 창고지기에게 들켜서 죽을만큼 두들겨맞았다. 그러고보니 그때 얍삽이는 이미 도망갔던가. 나를 개패듯 팬 창고지기는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일자리를 하나 알선해주었다. 부자들의 유흥거리인 사냥에 함께 나서는 것이었다. 그때 라이플을 처음 들고 쏘는 방법이나 장전하는 법, 빠른 사냥감이나 멀리있는 사냥감을 저격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내가 라이플을 들고 끙끙대는 꼴이 유흥의 일부였는지 사냥에 나선 사람들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의 사냥터에 나섰다. 비웃음을 견디며 돈을 벌었다. 걔중에는 나를 창고나 자기 방으로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날 깨끗이 씻기고 알몸으로 벗겨 찬찬히 감상하거나 더듬거나 했다. 수치스러움을 느낀 건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뒤였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던 거였다. 반항하기 시작하자 얻어맞고는 했다. 벌어오는 돈은 많았지만 수치심을 느끼고 얼마 안 가 이 일을 관뒀다. 얼마 안 가라고 해도 모지리였던만큼 저 일을 당한 기간은 꽤 길었다. 그 이후 육체노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수입이 되니까. 모두를 먹여살리는 일에 불만없이 바보처럼 살았다만, 지나고 나면 조금 후회가 되기는 한다. 하여간, 길바닥 인생이어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굶어 죽는 아이들도 제법 되는 시대니까.
지나다니는 가게의 라디오에서 듣기로 부랑자들을 일거 소탕한다는 말이 있었다. 슬프게도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매일 듣는 말들만 알고 있으니까. 알아들었다면 조금 더 조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거에 대비하기도 전에 살고 있던 동네의 부랑자 소탕 작전이 시작됐다. 우리도 당연히 그 표적이 되어 근처에서 구걸하던 다른 부랑자들과 같이 도망쳤다. 군인들은 인적이 드문 산으로 우리를 몰아갔다. 죽이려는 건지 도회지에서 쫓아내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총과 칼을 든 그들에게서 도망가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다른 무리의 아이가 넘어지고 그 아이가 짓밟히는 꼴을 보고서 정신이 들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살아온 나날들이다. 쫓겨온 부랑자들 중 어린 아이들은 얼마 안 가 붙잡혀 맞고 있었다. 그 중엔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도망치던 와중에 그게 눈에 띄고 말았다. 그리고 근방에 내게 수치스러운 기억을 남긴 그 창고가 있었다. 창고지기의 알선 탓에 그 창고를 얼마나 드나들었던가. 한때 쓰던 라이플을 꺼내와 군인들의 머리에 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살짝 미쳐있었던 걸까. 맨정신에는 맞지 않던 탄환이 이상하게도 그들의 두개골을 뚫고 붉은 분수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그 자리의 군인들을 다 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앞에 펼쳐진 모습은 끔찍해서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뒤로 하고 달아났다. 사람을 죽였다. 암만 거리에서 못 배운 채 살아온 사람이라도 알고 있다.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붉은 흔적은 잔상이 되어 눈앞을 흐리게 했다. 기묘한 의존에 의한 책임감같은 건 알 바가 아니었다. 순간에 저지른 죄는 그것을 넘어섰다. 다른 아이들을 구하려는 거였잖아라고 변명하지만 방아쇠를 당겨 표적을 맞췄을 때의 쾌감이 그걸 부정했다. 사냥에 따라다닐 때는 알지 못한 감정을 긴박한 그 순간 알아버린 것이다. 잠시 멈춰 토하고는 다시 내달렸다. 가련하게도, 난 그 죄를 더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손이 더럽다고 느껴져서 눈앞에 보이는 물에 손을 박박 씻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실감하면서. 제5지구에서 4지구로 넘어가는 셔틀을 탔다. 화물 속에 낑겨들어갔다. 4지구에 내리자 묘한 안심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안심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레지스탕스의 소문을 들었다. 이미 연방군을 죽인 전과가 있는 그였다. 차라리 대의 속에 숨기로 했다. 죄책감이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 속의 선택지가 많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는 혼자서도 멋대로 성장했다. 그날로 그는 합리화를 할 줄 아는 어른의 길로 들어섰다.

*
"헤에..."
제6지구, 고철 더미 옆에 임시로 건물을 세워 만든 어느 바. 간판은커녕 이름조차 없는 이런 곳에는 온갖 사람이 모인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연방정부에 찍힌 지명수배자,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신분세탁을 하며 사는 사람, 동네 불량배에서부터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어둠의 세력까지. 그렇기에 이곳에는 암묵의 룰이 존재한다. 이 바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면 안된다는 것.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도 이름을 불러선 안되며 모른다고 물어봐서도 안된다는 것. 접선이 필요하다면 은밀한 암호를 통해서 해야만 한다. 그런 곳이다보니, 지명수배자 신세인 오소마츠도 이곳만큼은 편안히 드나든다. 뭐, 다른 곳도 변장을 하거나 하면서 잘도 드나들지만. 지명수배라고는 해도, 그는 평범하고 흔한 얼굴인 뿐더러 정부 측의 인물이 아니라면 그다지 탐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수십명의 현상금 사냥꾼을 골탕먹이고 당한 것은 갚아준다는 주의 아래 괴멸시킨 뒷골목의 조직도 많고,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알려져있어 눈에 띄지 않는 지지자가 많고, 연방정부가 첩보를 받고 실행한 소통 작전마다 번번이 정부를 엿먹이고는 하는 사람이었다. 생명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가며 살아가는 그는 나름대로 삶의 목적이 있다고 했지만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이곳의 분위기도 제법 편안해졌군, 하고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위스키, 온 더 락으로."
커다란 얼음덩어리에 위스키가 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나 식혀볼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 소문 들었어? 얼마 전에 울프가 또 한 건 했다는데."
"그 가면 쓰고 활동한다는 현상금 사냥꾼 말이지?"
"그러니까. 누가 움직이고 있는 녀석인지, 아니면 정말 혼자 내키는대로 활동하는지 감이 안 온단 말이지. 언제 누구의 등을 노릴지도 모르고, 얼굴을 까고 다니지 않는 게 영 맘에 안 들어."
"대비를 제대로 해두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 녀석만 위협인 건 아니니까. 세상 천지에 다 적이지."
울프라고 이름을 숨기고 얼굴을 가린 채 활동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라. 만나면 한 번 놀아볼까? 오소마츠의 흥미가 동하던 때 새로운 인물이 바에 걸어들어왔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묘하게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 바의 마스터는 살짝 한심한 듯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주문대로 쉐이커에 보드카와 베르무트를 담아 흔든다. 오소마츠는 슬쩍 그 남자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오소마츠가 앉은 방향쪽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얼굴을 묘하게 가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목소리에 넘치는 여유와는 달리 그는 생각할 것이 많은 듯 오소마츠의 반대 방향, 그러니까 사람이 없는 쪽을 보면서 연신 한숨을 쉬었다. 지쳐 보였다. 마스터가 그 앞에 마티니를 내자 오소마츠는 그의 옆에 다가갔다.
"어이, 형씨. 심심하면 나랑 수다나 떨지 않을래? 한숨만 쉬지 말고."
그는 오소마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동시에, 두 사람은 소리를 지르려던 걸 입을 틀어막아 저지했다. 매우 닮은 얼굴의 두 사람.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 남자가 먼저 마티니를 음미할 새도 없이 들이키자 오소마츠도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켰다. 남자는 오소마츠의 몫까지 빠르게 계산한다. 둘은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채 바를 나와 고철 더미 뒷편으로 갔다.
"너, 카라..."
"오랜만이다, 오소마츠. 잘 지냈어?"
잘 지냈냐고.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 뒤로 이런저런 일 있었지. 잘 지냈냐면, 그건 아닐걸?"
"그런가."
뭐야, 그 덤덤한 반응은.
"그 날, 왜 사라진 거야? 누가 끌고가기라도 한 거야?"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아니. 내가 도망간거다. 너에게서 말이지."
"무슨 소리야. 나한테서 왜 도망치는데."
"너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유약한 소년 둘이서 살아남을 순 없어. 사지를 거쳐왔다고 해도."
"혼자서도 살아남았잖아. 너도, 나도."
"그러니까."
"둘이면 서로 더 의지해서..."
"오소마츠,"
그가, 아니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부른다.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무척이나 건조한 목소리. 어릴 때와는 달리 깊은 저음의 목소리로.
"각오해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라마츠는 오소마츠 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오소마츠는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그 무언가가 팔에 스치는 건 막지 못했다. 찢긴 옷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아파! 이게 뭐야, 나이프? 하? 뭐하는 짓..."
오소마츠가 팔에 난 상처에 정신이 팔린 동안 카라마츠는 빠르게 달려와서 명치 쪽에 주먹을 날렸다. 깊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급소에 맞은 충격에 오소마츠는 기침을 해댔다.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오자 오소마츠는 일단 허리를 꺾어 피하고는 땅을 짚고 카라마츠를 힘껏 걷어찼다. 겨우 나이프에 스쳤을 팔이 아파온다. 카라마츠는 살짝 비틀거리며 섰다. 정강이에 제대로 직격했나.
"만나자마자 이렇게 과격하게 대화해야해?"
오소마츠는 다시금 카라마츠에게 말을 건다.
"내란죄 및 연방정부를 능욕한 혐의."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본다. 설마.
"지명수배범 오소마츠. 얌전히 잡혀주실까."
여전히 건조하기만 한 카라마츠의 목소리.
"너...정부의 개가 된 거야?"
오소마츠의 목소리엔 이제 분노가 묻어난다.
"잊어버린거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난 건데! 목숨을 걸고 우릴 탈출시켜준 아저씨들을 잊어버렸어? 너도! 복수하고 싶다며! 약속했잖아! 미래를 같이 만들자고..."
격해지던 감정은 급격히 가라앉는다. 힘이 쭉 빠져나가더니 오소마츠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아, 나이프인가. 아까 명치 쪽에도. 뭔가 약이나 독을 쓴 건가. 어째서.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카라마츠는 어느새 가면을 썼다. 그의 눈동자, 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보는 거지? 몽롱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마음을 알고 싶어 손을 뻗었다.

*
삑삑삑삐익, 삑삑삑삐익.
기묘한 새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소마츠는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켜고선 그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방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나무들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팔 다쳤었지, 하고 보면 깨끗하게 처치가 되어있다. 아프지도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보았다. 한 청년이 나뭇가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아, 카라마츠인가. 아까 본 카라마츠와는 달리 좀더 생기있는 표정이었다. 어릴 때의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쳤다. 카라마츠는 민망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원예용 가위를 내려놓고 오소마츠 쪽으로 왔다. 오소마츠는 뒷걸음질을 쳤으나 도망가기 어려운 상황인 걸 깨닫고 주먹에 힘을 잔뜩 넣고 있었다.
"깼는가, 오소마츠."
깊고 낮은, 그러나 상냥한 목소리. 거기에 오소마츠는 주먹에 넣었던 힘을 풀고 말았다.
"상황을 설명하게 해 주겠나. 용서받기 어렵다는 건 알지만. 우선은 식사를 하자. 사흘을 꼬박 누워있었으니 배가 엄청 고플거야."
그 말을 들으니 배가 고픈 듯도 했다. 그러나 경계를 쉽게 풀 수는 없었다. 카라마츠는 어딘가로 연락을 했고, 곧 정원 쪽으로 누군가 음식을 가져왔다.  그도 오소마츠나 카라마츠와 닮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토도마츠입니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오소마츠 씨."
토도마츠라는 청년은 나무 그늘에 천을 깔더니 가지고 온 음식을 늘어놓았다. 여기로 오라는 듯 손짓하면 카라마츠는 거기에 응해 가서 앉는다. 오소마츠는 멍하게 그 모습을 보다 토도마츠의 채근에 와서 앉았다. 샌드위치를 집어 크게 베어먹는 카라마츠를 보자, 오소마츠도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하여간, 카라마츠 형도 무리한다니까. 사람을 독으로 꼼짝못하게 하면 당한 사람은 경계하지! 거기다 6지구에서 여기 5지구까지 자력으로 이동해오다니, 안 들켜서 망정이지 원."
토도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카라마츠는 날 잡아가려 그런 건 아니었구나, 하고 오소마츠는 조금 안심했다.
"그래서, 상황을 설명해주겠단건 뭔데."
토라진 목소리로 오소마츠가 얘기를 꺼낸다.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채로.
"난 지금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고 있어. 여기 토도마츠는 탐정을 하고 있고. 혹시 기억나? 얍삽이라 부르던..."
"헤에, 넌 기억나냐고 편하게 얘기하는구나."
카라마츠의 말에 그는 정색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카라마츠가 나타나자마자 그에게 한 일은 냅다 공격해서 약에 취해 재운 것이었으니까.
"난 반가웠어. 거기서, 다시 만나서 놀랐어. 보고싶었단말은 커녕 넌 나보고 각오하라면서 상처나 줬어. 뭐하자는 거야? 그래놓고 지금은? 왜 갑자기 상냥한 건데! 우리가 잠깐 함께 있던 그 시간 나눈 대화를 내가 행복한 기억으로 둘 거 같아? 괴로워도 널 찾고 싶어서 나 열심히 돌아다녔어! 아저씨들이 맡긴 미래만큼이나 너도 소중했으니까! 거창한 신념이 있어서 레지스탕스로 복귀한 게 아냐. 너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어서였으니까. 그런데, 10년만의 재회가 그런 식이었어. 좋았던 기억으로 두고 싶었던 그 시간이 순식간에 잊어버리고픈 기억이 된 거야. 그거 알아? 나도 사선을 넘나들었어. 몇 번이고 배신도 당해보고, 함정에 빠졌지.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이번이 처음이야. 짧은 시간 동안, 너가 나를 차지해버린걸까."
오소마츠의 말을 카라마츠는 그저 듣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
토도마츠가 조용히 오소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오소마츠 씨는 카라마츠 형을 굉장히 좋아하는군요. 열렬한 고백 잘 들었네."
푸풉, 하고 웃는 소리에 오소마츠는 터뜨렸던 분통과 감정이 부끄러워지며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찔끔 나는것도 같았다.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나직이 오소마츠를 부른다.
"난 말야, 그때 난 말야, 지금도 난 말야,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오소마츠는 가렸던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너에게 구원받았어. 카라마츠라는 이름도 너에게 받았고, 너가 있어서 난 내가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럼, 어째서..."
"동시에 난 불안했어. 나와 같이 있다가는 너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어. 오소마츠와 미래를 만들어가고 싶었지만 두 번이나 소중한 걸 잃은 나는 불안했어. 그리고..."
카라마츠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스스로의 몸을 감싸고서 떨고 있었다.
"역시 말 못하겠어. 그건 봐주지 않을래?"
어느새 카라마츠는 10년 전 전장에서 처음 만났던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소마츠에게도 전해졌다. 이것만큼은 말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게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떠났던 이유라고.
"알았어. 안 물어볼게. 용기가 나면 말해줘. 평생 말 안해도 괜찮으니까. 화난 거 아니야? 화가 난 건 사흘 전 6지구에서 있었던 그거뿐이니까? 그건 말해줄 수 있지?"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건 아니겠지. 오소마츠는 두 개 째의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서 이번에는 두 입에 해치웠다. 볼 가득히 넣고 우물거리는 버릇은 어릴 때부터 고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든 우겨넣어야 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그때 토도마츠가 일어섰다.
"잠시 일 좀 보고 올테니 오소마츠 씨는 카라마츠 형과 같이 있어줘요. 이거 하나만 말할게요. 카라마츠 형은 오소마츠 씨를 보호하고 싶었던 거야. 오소마츠 씨가 노려진다는 말을 듣고선 쏜살같이 날아갔어. 형은 지금 울프라는 이름으로 현상금 사냥꾼을 하고 있는데, 그 이름값이면 자기가 노리는 척 하면서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 오소마츠 씨를 데려오자마자, 형은 그쪽을 치료하고선 한참을 죄책감에 울며 보냈어.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두렵다면서. 솔직히 부러웠어. 나는 형에게 몇 번 목숨을 구해졌지만 이렇게까지 혼신을 다하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 그러니까. 제대로 들어줘요. 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도 있을 테니까."
토도마츠는 살짝 삐진 듯한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오소마츠는 대충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6지구의 그 바에 종종 간다는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간 거였을 지도 모른다. 암살자나 현상금 사냥꾼을 고용해서 그를 덮치거나 죽일 계획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거봐."
카라마츠가 다시 입을 뗐다.
"넌 나를 보자마자 긴장을 다 풀어버렸어. 심지어 내가 던진 나이프에 다쳐서도. 네가 말했지. 신부를, 친구들을 두고, 아저씨들을 두고 도망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너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그래서...넌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어째서...
"내가 만약 진심이었다면, 진심으로 널 잡으려들고 죽이려 했다면, 넌 어땠을 거 같아? 지금까지 그래왔듯 넌 무리하게 뛰어들어 죽음도 개의치않는 미친 개처럼, 나를 막았을까? 꽉 쥔 주먹과 분노와 결의에 찬 눈빛을 난 잊을 수 없었어. 오소마츠 혼자선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나랑 있다가는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카라마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다가가 손을 떼고 대신 입술을 댔다. 두 손은 카라마츠의 양 볼을 감싼 채, 카라마츠의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카라마츠는 가만히 있다 오소마츠의 혀를 받아들였다. 오소마츠는 왼팔로 카라마츠의 허리를 감싸고 오른팔로는 목과 머리를 받친 채 바닥에 깔린 천 위로 카라마츠를 넘어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포개져서 몸이 닿은 채, 입술이 닿은 채 한동안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입술이 마침내 떨어지고 카라마츠는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거야. 그것도 아까 말할 수 없다던 그것 때문이야? 싫어. 네가 밀처내도 난 널 다시 놓고 싶지 않아. 오소마츠는 말없이 그의 감정을 카라마츠의 안에 들이밀었다. 소년시절의 높은 신음소리가 간만에 들려온다. 처음이지만 둘은 능숙하게 서로를 받아들였다. 말로 할 수는 없는 그 이유가,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가, 이런 걸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Posted by 하리H( )Ri
2019. 9. 9. 00:41
나도 왕공이라는 시대의 웨이브에 타고 싶었던 이야기
두근두근하지 않나요? 그냥...
---------------------------------------------



[옛날 옛날에,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의 세계와 땅 아래의 세계는 이어져 있었단다.]
그런 거 믿을 리가 없잖아.
유모 말 같은 건 다 거짓말이야.
[지금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길이 끊어져있지만 가끔 땅 아래의 세계의 흔적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돌고는 했지.]
나와 늘 함께 있어주겠다면서.
날 감싸고선 눈앞에서 죽어버렸잖아.
거짓말쟁이 말은 믿지 않아.
아니, 난 이제부터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을 거야.

불타는 성에서 아바마마의 충신이었던 자에게 안겨 도망쳐나오면서 오소마츠는 다짐했다.
간신히 도망친 곳에서 세력을 길러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죽이고 왕좌에 오른 숙부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왔다.
정통성이나 내분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그를 제거하지 못한 반란 세력들은 몇 년이 지나고 이쪽에서 먼저 숙청했다.
타오르는 불꽃과 끈적한 피를 딛고서 오소마츠는 <붉은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하아..."
살아남기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왕의 자리를 되돌려받기 위해서, 수많은 공부와 훈련의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바쳐온 날들의 반동일까.
오소마츠에겐 때때로 왕좌에 앉아있는 게 따분했고,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가곤 했다.
[어느 날, 근처 숲속에 땅굴이 생겨났는데 그 땅굴에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나는 그 땅굴을 보러 집을 조용히 빠져나와 숲으로 향했지.]
"왕이시어, 무엇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잠행 또한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혼자서 백성들을 살피러 잠시 다녀올 것이니 그 누구도 따라오지 말도록 하라."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채비와 칼 한 자루에 사냥용으로 기르는 말 한 마리를 탄 채 그는 왕궁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미친 거 아냐? 왕이라는 자각 있는 거냐고? 이럴때만 위엄있는 말투로? 사람 붙여! 얼른!"
오소마츠를 지지해준 친구이자 재상인 쵸로마츠의 당황하는 목소리.
"형님을, 아니지. 폐하를 잘 알고 있잖아. 사람 괜히 붙였다 그 사람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걱정마, 친구인 고양이 몇 마리를 붙여 뒀어..."
오소마츠의 동생이자 생물들, 특히 고양이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치마츠의 목소리.
그런 목소리들이 제멋대로인 오소마츠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오소마츠가 모는 말은 자신이 숨어살던 마을 방향으로 내달렸다.
[깊고 깊은 숲속을 헤쳐나가자 팔다리에는 수많은 상처가 나고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너덜너덜해졌지.]
달빛을 받아 어두운 길 위에 무언가 반짝 빛났다.
오소마츠는 말을 잠시 멈추고 말 위에서 내렸다.
[그렇게 헤매다 지쳐 울고 있을 때,]
"눈앞에 땅굴이 나타났단다."
날카로운 은빛의 무언가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두더지인가. 두더지 발톱이 아무렴 저렇게 빛날까.
은색 손톱은 점점 모습을 드러내더니, 거기서 푸른 옷자락과, 머리 같은 것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굴에서...사람이...튀어나왔...어?"
오소마츠의 유모가 들려준 옛이야기처럼, 방금 막 만들어진 땅굴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프리~~~~~덤!"
우렁차게 외치며 땅굴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두더지같은 강철 손톱에, 흙이 묻기는 했지만 한눈에 봐도 우아하고 반짝거리는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튀어나온 사람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일어서서는 갑자기 치마를 걷어올렸다.
이게 뭔 횡재냐! 오소마츠는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건강해보이는 실루엣의 다리에는 드릴같아 보이는 것이나 작은 가방 등 이것저것 매달려있었다.
거기서 그는 강철 손톱같은 걸 빼서는 가방같은 데 집어넣더니 왕관을 꺼내 썼다.
그리고서는 드레스를 털고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했다.
[마치 온기라곤 없다는 듯 새하얀 피부의 사람이 말이야.]
달빛 아래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하기엔 새하얀 피부, 푸른 보석이 달린 화려한 은색 왕관에 푸른 드레스를 입고 그는 서 있었다.
그 모든 것에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나...나오자마자 지...지상인과 마주칠 줄이야...그보다 다...당황했구나, 지상인!"
그리고 예상치 못한 굵고 낮은 목소리.
"하? 당황한 건 그쪽인 거 같은데? 갑자기 자기 치마를 들추다니, 무슨 포상인가 했지."
오소마츠는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받아친다.
불편했던 왕으로서의 위엄은 잠시 내려놓은 편한 마음으로.
"그보다 지상인? 여기는 장미의 나라야. 지상이라는 나라가 있던가?"
"장미? 나라? 여기는 지상이 아닌건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지상이 땅 위라는 의미라면 여기도 지상이 맞겠지."
"그런가. 다행이다. 몇 번 올라오긴 했지만 지상인과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안도하는 그를 보며 오소마츠는 유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설마.
"그러는 너는 어디서 온 거지? 설마 땅 밑에서 온 거?"
"그래. 나는 지하에서 왔다. 지하 세계의 공주로서 말이지."
지하 세계면 보통 저승을 얘기하지 않나? 그보다 공주? 차림새만 보면 공주같기는 한데...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지하 세계에서도 지상 세계의 존재는 전설로만 전해져왔고,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은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지상 세계도 비슷한 상황이지 않을까 생각했지."
"아...응...지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생명이 다하면 가는 곳이라고 하고 있어서 말이지.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뺴면 거의 전설조차도 안 남아 있다고 할까."
죽음이라는 말에 그는 드레스를 주먹으로 꼭 부여잡았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지상에도 있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건 비슷한 모양이다. 참고로 나는 저승에서 온 사람은 아니야. 죽은 사람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오소마츠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는 다정하게 말을 한다.
나쁜 녀석은 아닌가. 오소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던 긴장을 살짝 풀었다.
"이렇게 말도 통하는데 너는 누구야? 지하 세계의 공주님?"
공주님이라는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힌다.
"카라마츠. 카라마츠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오소마츠. 오소마츠야."
"오소마츠인가. 어...잘 부탁합니다."
뭘 잘 부탁한다는 거야.
지금껏 살짝 고압적인 말투로 말하다가 갑자기 높임말을 쓴다고 해도 말이지.
"나도 잘 부탁해, 카라마츠 공주."
"잘 부탁합니다. 처음으로 지상인을 만나면 쓰려고 수없이 연습했던 말이다. 생각보다 편하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
첫인상과는 달리 카라마츠는 어딘가 바보같고 허술해보였다. 그리고 상냥해보였다.
"지상에 겨우 왔으니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내가 먼저 물어봐도 돼?"
"상관없다. 뭔가?"
"카라마츠 공주는 남자지? 어째서 공주인 거야?"
"남자인 게 상관있는가?"
"에?"
오소마츠는 당황했다. 지상과 지하는 공주의 개념이 다른가?
"공주는 세대교체 시기에 그 세대에서 선발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5명 정도를 선발하여 그 중에 왕이나 여왕으로 지명되는 것이지. 예컨대 나는 우리 세대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공주로 선발되었다만."
"아...그렇군. 에? 가장 강하다고?"
"그렇다. 뭐, 여왕님께는 미치지 못하지만."
힘으로 선발된 건가? 혹시 지상을 침략하거나 하기 위한 첨병같은 건가?
"그런가...공주라고 하면 보통 여성이거든. 개념이 좀 다른가보네."
"뭐, 지하도 공주에 선발된 자들은 여자가 많은 편이다. 왕보다도 여왕이 많고 말이지."
"지상에 온 이유는 뭐야?"
"그야 뭐, 지상의 이것저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지."
이것저것이라...
"문헌으로만 읽었던 다양한 생물들을 만나보고 싶다! 예를 들면 늑대라든가 호랑이라든가! 하늘이라든가, 바다라든가,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이내 눈을 반짝인다. 너무 지나친 생각이었나. 연기라면 참 소름돋을 만큼 순수함이 눈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보다 오소마츠, 어쩐지 주변에 생물이 늘어난 거 같다만...저건 음...고양이라고 하던가?"
"고양이? 어느새 이렇게 늘었...아! 이치마츠!"
수많은 고양이의 존재를 눈치챘을 즈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말에 탄 쵸로마츠였다.
"에...쵸로마츠?"
쵸로마츠는 오소마츠를 노려보다 앞에 있는 카라마츠를 눈치채곤 살짝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누구...신지...?"
아마 오소마츠를 막 부를지 왕으로서 높여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네. 카라마츠 공주, 이 쪽은 쵸로마츠. 내 신하야. 나는 아까 말했던 이 곳 장미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고."
"카라마츠...공주...?"
"아. 오소마츠는 왕이었군...에에! 지상의 임금이었던 건가! 제대로 예의를 갖추질 못했는데..."
"됐어됐어. 안 들키면 왕이라고 밝힐 생각 없었고. 아까 말했지만 나는 장미의 나라의 왕이야. 지상의 극히 일부만을 다스리고 있으니까, 너 쪽에서 낮출 필요는 없어. 편하게 하자고~"
"왕으로서의 위엄이라곤 없어! 카라마츠 공주? 어느 나라에서 오신 공주님이신지..."
"들어보라고, 쵸로마츠! 카라마츠 공주 엄청 반짝거리지? 지하 세계에서 왔대! 그 전설 속의 지하세계..."
"물러나시죠, 왕이시여."
쵸로마츠는 정색을 하더니 오소마츠 앞을 가로막고 칼을 꺼내든다.
"어디서 온 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이 나라의 지존을 속이려 들다니. 제대로 정체를 밝히거나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라!"
단호한 쵸로마츠에 오소마츠는 당황했다. 오소마츠를 막 대하면서 한편으로 아끼고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지키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무작정 말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등장의 임팩트 탓인가 카라마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렸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쵸로마츠의 호통에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아까 받았던 바보같으면서도 상냥한 느낌을 따라가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만. 행여나 아까 다리에 매달려있던 무기를 꺼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카라마츠는 당황했던 얼굴을 거두고 다시금 왕관과 드레스를 매만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레스를 살짝 잡고서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온화하면서도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 달빛을 받아 빛나는 새하얀 피부. 아까 땅굴에서 나와 막 섰을 때보다도 더 그는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살짝 지은 미소가 전하는 위엄까지.
"저는 지하 세계의 공주, 카라마츠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카라마츠의 눈빛에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밤에 특별한 빛도 없건만 눈앞이 눈부셔서 견딜 수 없었다.
"지하 세계라니 그런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쵸로마츠는 대단해. 저렇게 흘러나오는 기품조차 의심하고 있다니. 오소마츠는 생각한다. 그는 그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했었다. 그는 카라마츠를 믿고 싶은 것일까. 아, 닮았다. 그는 오소마츠의 숙부와 닮았다. 생긴 게 닮았다는 건 아니고. 숙부는 상냥하고 살짝 허술한 사람이었다. 정사에 바쁜 아바마마와 성을 돌봐야 하는 어마마마를 대신해 오소마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숙부였다. 오소마츠는 숙부를 잘 따랐다. 뭐든 척척 해내고 뭐든 척척 대답해주는 숙부를 그는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숙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은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유모는 오소마츠와 숙부가 가는 곳마다 따라와 오소마츠를 지켜보고 있었다. 늘 함께 있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숙부의 야망이 실천에 옮겨진 날, 유모의 희생으로 불타는 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오소마츠는 그의 순진무구함을 버렸다. 뭐든 쉽게 믿던 그 시절을 버렸다. 냉혹해질 수는 없었지만 복수심을 누르며 살아왔다. 자신과 피가 이어진 동생, 자신의 안목으로 우정을 이어나간 친구, 그 외에 그가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기반으로 서서히 세력을 늘려 몇 년 뒤 숙부에게 복수하러 갔다. 오소마츠는 선봉에 서서 그를 막아서는 신하들을 짓밟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망치지 않고 어전에 남아있던 숙부의 목을 직접 베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칼과 손이 피로 물들었다. 숙부의 목을 벤 칼을 떨어뜨리고 피묻은 손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과 지금까지의 인생이 스쳐지나가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성이 불타던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듯, 불타버리는 듯, 마음이 아파왔다. 사태를 수습하고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이 고통은 종종 밀려왔다. 그 고통을 숨긴 채, 따분하다며 장난으로 넘기곤 했다.
"괜찮다."
머리 쪽이 시원해졌다. 동시에, 뜨겁게 불태우던 고통은 따스함으로 바뀌어갔다.
"괜찮다."
오소마츠는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는 카라마츠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카라마츠는 한 손을 오소마츠의 머리에 짚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쪽을 토닥여주었다. 쵸로마츠는 칼을 거두고 무릎을 꿇은 채 그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손에서는 물 같은 게 느껴졌다.
"이게...어떻게 된..."
"정신이 들어? 괜찮아? 여기 카라마츠 공주님이 널 구해주셨어. 물의 마법으로 네 고열을 가라앉혀주셔서... 종종 있었잖아, 갑자기 열이 올라서 쓰러지는 일이... 기운차게 나가길래 약 같은 건 생각도 못했는데...정말...다행...훌쩍..."
쵸로마츠는 걱정했다는 듯 눈물을 쏟았다. 오소마츠는 이마를 짚고 있던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 살짝 내렸다. 카라마츠의 손에서는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흘러내리지 않고 그 손 안에서만 작은 분수처럼 솟아나는 물에 손가락을 슬쩍 대니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쓰러져서 걱정했다. 종종 열이 올라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 미약하게나마 힘을 써봤다. 그저 물을 조금 다룰 수 있는 것뿐이지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다."
오소마츠가 갑자기 쓰러지자 쵸로마츠는 카라마츠를 경계하던 걸 포기하고 오소마츠 쪽으로 갔다. 평소라면 은밀히 약을 챙겨와 먹이거나 찬물을 적신 수건을 얹기만 하면 됐을텐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의식이라도 차리게 하려고 어깨 쪽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머리에 손을 짚었다. 일단은 이걸로 응급조치를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네며 카라마츠는 손에서 물이 솟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쵸로마츠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자칭 공주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기적처럼 물이 솟아나오는 것을 보고선 경계심을 풀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오소마츠를 구할 수 있는 게 카라마츠밖에 없었으니까.
"여전히 믿기 어렵지만, 임금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지하 세계와 마찬가지로 거의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으니까요. 물론 아는 사람중에 마법 비슷한 것을 쓰는 사람이 있기에 마법에 대해서는 믿고 있습니다만."
"그런가. 지하 세계는 그래도 이런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꽤 된다. 땅의 기운을 근원으로 삼아서라고 들은 적은 있지만. 마법이라기보단 잔재주에 가깝다. 목이 말라서 곤란한 일은 없을 정도의 작은 힘이지만..."
"그 덕에 내가 살았잖아. 고마워, 카라마츠 공주."
"그럼, 오소마츠도 깼으니. 쵸로마츠여. 당신의 충성심, 그리고 그 이상의 우정은 잘 알았다. 솔직히 나도 당신과 같은 신하가, 아니 친구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소마츠가 부럽다. 하지만 그와는 정말 방금 막 만난 거 뿐이다. 지하 세게에서 지상으로 막 나온 나와 우연히 마주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절대로 오소마츠를 속이거나 할 생각은 없다. 오소마츠, 아니 장미의 나라의 왕이시여. 친구도 걱정하고 있고, 이제 성으로 돌아가 쉬지 않겠나. 잠시나마 만나서 즐거웠다. 지상에서의 첫 만남이 오소마츠여서 정말 다행이다."
이별의 말을 건넨다. 쵸로마츠의 진심과 오소마츠의 몸 상태. 카라마츠가 앞으로 어디서 뭘 할지는 모르지만, 처음 마주한 오소마츠와는 여기서 헤어져야 할 거라는 판단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오소마츠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제부턴...어떻게 할 거야? 지상의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싶다며?"
"여기저기 다녀보면서 배우면 되겠지. 지상에 대한 책도 들고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
여기서 놓치면 영영 카라마츠를 못 보게 될 것 같았다.
"장미의 나라에서 정식으로 지하 세계의 공주 카라마츠를 초대하겠다!"
오소마츠는 간절하게 외쳤다. 믿고 싶으니까 믿는다고. 믿음에 배신을 당한 적도 있지만 운명같은 끌림에 그는 마음을 열고 카라마츠를 믿어보기로 했다.
"공주라고는 해도 호위 하나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혼자서 헤쳐나가는 건 힘드니까, 외로우니까, 그러니까, 당분간은 나의 성에 머물며 찬찬히 지상을 알아가는 건 어떤가?"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와 쵸로마츠를 바라보았다. 쵸로마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이지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미의 나라의 왕이시여."
오소마츠는 안도한 듯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 고로, 성에 귀하신 손님을 초대하게 되었으니 임금님께서도 성으로 돌아가시죠. 말은 탈 수 있겠어? 공주님은 어디에 태워야 하지?"
"에에...쵸로마츠, 조금 더 쉬면 안 돼?"
"안 돼. 이치마츠도 걱정하고 있고, 네 성격에 다른 사람을 보내면 가만두지 않을 거 같아서 급하게 찾으러 온 거니까. 하여간 위기감도 뭣도 없다니까."
"헤헤..."
"내가 오소마츠를 데리고 거기 탈 테니 쵸로마츠가 성까지 안내해주면 어떤가? 다루는 법을 알려주면 비슷한 것은 타 봤으니 금방 탈 수 있을 거다."
카라마츠는 쵸로마츠에게 말을 다루는 법을 듣고 잠깐 타 보더니 내려서 오소마츠를 번쩍 들어올렸다.
"잠깐? 내가 공주한테 공주님 안기를 당하는 거야? 에? 그보다 카라마츠, 정말 힘이 세네."
"말했잖아. 우리 세대에서 가장 강하다고, 훗."
"의기양양하다못해 자기애로 가득한 표정! 아프네! 하하하..."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말에 먼저 태운 후 올라탔다.
쵸로마츠를 따라 성으로 향하는 길, 어느새 살짝 주변이 밝아지고 있었다.
"카라마츠, 깜깜해졌다가 살짝 밝아지는 이 풍경, 이걸 하늘이라 그래."
"이게 하늘? 하늘은 푸른색이라고 들었다만."
"꼭 그렇진 않아. 하늘은 다양한 색으로 물들고 구름도 있고 해도 있고 아까처럼 달도 뜨고 별도 뜨고... 하늘 하나만 봐도 정말 다양해. 그런 세계를, 카라마츠 공주가 알아갔으면 좋겠어."
"그냥 카라마츠라고 불러줘, 오소마츠. 처음 만날 때부터 호칭도 말투도 다 꼬였지만, 이름을 부르는 게 더 친해진 거 같아서 좋아. 물론 공적으로는 제대로 격식을 갖춰야 겠지만."
"그럼, 카라마츠. 잘 부탁해."
"잘 부탁합니다, 오소마츠."
그건 여전히 높임말인거냐. 그렇게 핀잔을 줄까 하다가 슬쩍 바라본 카라마츠의 새하얀 목덜미를 보고선 얼굴을 붉힌 채 카라마츠의 등에 기대어갔다.
그렇게 카라마츠 공주는 장미의 나라의 성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지상에 온 그가 겪을 수많은 이야기에 이제 막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

세계관이 머릿속에 구축되었지만 최대한 친절하게 크게 떡밥을 던지지 않고 썼습니다. 떡밥 던지면 또 나만 알아보는 글이 되니까...단편인데 장편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하여간 단편으로 썼습니다. 뒤에 똥냥꽁냥 복닥복닥은 이미 많은 왕공이 있으니까...둘이 결혼하겠지!
Posted by 하리H( )Ri
2019. 5. 24. 23:46
생일이라고 즐거운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야. 사람은 꼬여서 축하가 아니라 무슨 잔뜩 암울한 글을 씁니다. 정작 이야기가 길어지면 거기서 못 헤어나와서 못 쓰는 게 함정이지만.

극장판이 한국에서도 개봉해서 기쁩니다. 보러 가야지...그러면서 스포가 섞인 소설을 씁니다. 뭐가 스포인지는 영화를 봐야 알 수 있을지도... 그러니까 신경쓰이시면 이 거지같은 소설 나부랭이도 읽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오롯이, 스포를 안 읽고 안 봐야 더 재밌으니까요.




*영화의 오소마츠상(극장판 오소마츠 6쌍둥이) 스포
*맘대로 각색하고 내용 넣어서 뭐가 스포인지는 모르겠지만...















생일날 아침이지만, 거실은 적막했다. 엄마와 아빠가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해도 짧게 답할 뿐.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고3의 어느 날일 뿐이었다. 오늘로, 18살이 되었다. 카라마츠는 늘 그렇듯 밥을 느릿느릿 씹어 삼켰다. 그 사이에 다른 형제들은 밥을 다 먹고 나가버렸다. 말없이 불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는 오소마츠, 그 불쾌함에 어두워진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돌리는 이치마츠, 억지로 인상을 쓰는 쥬시마츠, 하이톤으로 밝게 답하며 도수 없는 안경을 고쳐쓰지만 다른 형제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쵸로마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하다 쵸로마츠를 쫓아가는 토도마츠. 카라마츠는 식탁에서의 짧은 순간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마츠노 형제들이 이렇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3이 되고 미묘한 기류들이 부딪혀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서로 말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 식사하는 시간조차 긴장과 불안이 가득했다. 카라마츠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었다. 그도 짧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선 학교로 향했다.

"잇치! 오늘 생일이라며? 축하해."
쉬는 시간, 이치마츠에게 친하게 구는 류타가 이치마츠를 보자 인사를 건넨다. 멋쩍은 웃음으로 이치마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타는 손바닥을 내밀고 눈을 찡긋거렸다. 이치마츠는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며 그 손에 자기 손을 갖다댔다. 웨이~
"학교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따로 약속 있어?"
생일날은 항상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했었다. 엄마가 평소보다 힘을 준 요리를 먹기도 하고,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같은 분위기라면, 오늘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작은 기뢰들이 그들 사이를 떠다니고 있다. 잘못 건들면 폭발할 지 모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6쌍둥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댔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발버둥을 붙잡지 못한채 손을 뻗으려 움찔거릴 뿐이다.
"응! 좋아."
이치마츠는 애써 밝게 웃었다.
쯧, 혀를 차며 오소마츠는 교실을 나섰다. 억지로 웃는 이치마츠가 꼴보기 싫어서인지, 생일날조차 잔뜩 뭉쳐진 짜증을 걷어낼 수 없어서인지. 계단을 오르고 오르면 옥상에 다다른다. 고3이 되고 나선 옥상 입구로 들어가는 계단에 카라마츠가 혼자 앉아있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못본 척하고 지나쳤다. 오늘은...있다면 말이라도 걸어볼까. 일단 나 장남인걸, 하고 마음먹으면 이런 날엔 꼭 없는 법이다. 그것마저 짜증이 나 오소마츠는 옥상에 들어가 벌렁 누웠다. 햇살이 따갑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딩-동-댕-동- 작년 점심때는, 마츠요 특제 도시락을 다같이 먹었다. 성장기 소년들에게 필요한 고기, 고기, 고기. 서로 하나 더 먹겠다며 싸워댔지만 그것만으로 즐거웠던 시절. 그런 시절에 태클을 걸어온 것은 그래도 장남이니 네가 잘해야 한다며 생애 처음으로 짐을 지우는 교사들과, 여섯이 같이 있으면 뒤에서 낄낄대는 무리들과, 점차 장난에 어울려주지 않는 형제들.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가도 한숨을 쉰다. 이대로, 이런 게 익숙해지려나.

"기다려, 쵸로마츠 형아~"
화장실에 가는 쵸로마츠를 토도마츠가 바짝 쫓았다. 매번 그렇지만, 18살이 돼서도 혼자서 화장실을 못 간다니 말이 돼?쵸로마츠의 마음 속에선 이런 말들이 요동쳤지만, 성실한 학생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 그는 내색하지 않고 뻣뻣하게 걸었다. 오늘이 생일이라도 그다지 다를 일 없는 날. 모두가 사이가 좋지 않든 그렇지 않든 18살이 된 것엔 변함이 없다. 오늘은 그냥 그런 것으로 두자고 생각했다. 오소마츠가 저래선, 그 누구도 화해의 손길을 내밀 거 같지 않으니까. 이렇게 줄곧 똑같기만 했던 6쌍둥이는 달라질 수 있겠지, 하고 긍정적으로 보기로 한다. 거기에 약간의 체념이 섞여있다는 걸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채.
토도마츠는 쵸로마츠를 쫓아 화장실로, 복도로, 운동장으로, 그리고 다시 교실로 왔다. 생일날조차 형제끼리 한 마디 섞지 않는다니, 이상하잖아. 하지만 그 말을 쵸로마츠에게 할 용기가, 다른 형제에게 할 용기가, 토도마츠에게는 없었다. 그나마 쵸로마츠는 토도마츠를 쫓아내거나 날카로운 말을 던지지 않고 어리광을 받아주니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니까. 그나마 안심이 된다. 따로 떨어져 점심을 먹고, 다른 친구들에게 붙잡혀 생일 축하를 받아도, 토도마츠의 마음 한 구석엔 쓸쓸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교할 때가 되자, 살짝 풀어져있던 쥬시마츠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가 봐도 일부러 하는 거지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는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은 쥬시마츠를 피했다. 앙? 뭘봐? 양아치같은 말을 내뱉으며 칠렐레팔렐레한 복장에 엉덩이 골이 보이는지는 모르는지 쥬시마츠는 길을 나섰다. 6쌍둥이인게, 모두 똑같아서 누가 누군지 알아봐주지 못하는 게 싫었을 뿐인데. 정작 달라지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집에는 돌아가기 싫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거리를 걸었다. 강둑에 다다랐을때야 그는 얼굴을 푼 채 잔잔한 봄날의 강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 차라리 제대로 마음을 부딪힌다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면. 그러나 쥬시마츠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마음은 반대로 뒤집혀 자신도 남들도 서로 피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쥬시마츠를 눈으로 쫓던 카라마츠도 자리에서 일어나 학교를 나왔다. 스쳐지나간 형제들은 눈길을 마주쳐주질 않았다. 하교길, 상점가에 들러 과자 봉지를 몇 개 집었다. 사실 일란성의 6쌍둥이라 해도 조금씩 다른 것이다. 좋아하는 과자부터 좋아하는 것들, 성격, 관심있는 것, 옷을 입는 스타일, 그런 하나하나가. 그럼에도 6쌍둥이니까. 이대로 서로를 남처럼 대하는 나날들이 될까 두려웠다. 이건 토도마츠가 좋아했었지. 아, 이건 이치마츠가. 쥬시마츠는 이걸 잘 먹어. 오소마츠는 이거. 쵸로마츠는 특히 이걸 좋아하고. 이건 내가... 좋아하는 과자도 다같이 나눠먹던, 그러다 곧잘 싸움을 하며 왁자지껄했던 시간이 너무 멀리 느껴졌다. 직접 건네줄 수 있을까. 다른 곳을 들러 집에 와도 오늘도 누가 먼저 와있질 않았다. 과자들을 가지고 거실로 들어서니 여섯 색의 파카를 늘어놓고 고민하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이건?"
"왔구나, 카라마츠. 올해 선물할까 하고 사둔 파카란다. 다스로 사긴 했지만, 색이 다르니까 늘 똑같은 옷이라 불평하던 것도 없으려나 했지. 그런데 얼마 전부터 다들 사이가 안 좋으니, 이런 걸 건넸다 싫어할까봐. 결국 너희들이 그다지 공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필기구를 다시 사왔단다."
빨강. 파랑. 초록. 보라. 노랑. 분홍. 색색의 파카를 보고 다정하게 웃는 6쌍둥이의 모습이 두 사람의 눈앞에서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아마도, 오늘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카라마츠는 과자를 건네며 엄마에게 부탁하고 말았다.

그날 저녁밥은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음식을 먹는 표정들은 마치 맛없는 음식을 먹는듯 했다. 엄마는 한 명씩 불러 선물과 카라마츠가 사온 과자를 같이 주며 다시 축하해주었다. 작게 고맙다며 하는 아들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가, 그래도 기다려보기로 마음먹는다. 모두 제각각 흩어져버린 형제들을 보고 토도마츠가 울먹이자 카라마츠가 옆에 다가와 아까 보았던 6색의 파카 이야기를 했다. 같이 입었으면 좋겠네, 하고 카라마츠가 얘기하자 토도마츠는 분명 서로 입고 싶은 색으로 싸우겠지? 하고 답한다. 그날이 올 지는 그들은 알 수 없었지만. 18세가 된 첫 날이, 암울하게 막을 내렸다.

다음날,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따로따로 밥을 먹고 따로따로 등교 준비를 하던 중 토도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두드렸다. 귓속말로, 어제 말한 파카를 다같이 입는 꿈을 꾸었다면서 순진하게 웃어보였다. 카라마츠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토도마츠는 다시 카라마츠의 귀에 속삭였다. 그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토도마츠의 손을 쵸로마츠와 오소마츠가 잡아주고 있었다고. 모두가 서로 손을 잡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고. 눈시울이 불거진 채, 카라마츠는 간만에 미소를 지었다.
Posted by 하리H( )Ri
2019. 1. 9. 14:17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인터미션1―

《장형마츠의 중학교 1학년 여름》

(맏형마츠라고도 함)

-오소카라 요소 조금 있음.

-늘 그렇듯 망상폭주기관차

-단편으로 읽어도 되도록 했습니다.















이번 여름은 유독 길다.



*



올해는 여름이 빨리 찾아왔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빨리 30도를 넘었다던가. 그래서 예년같으면 6월이 되어서야 여름 분위기가 났을텐데 올해는 5월부터 쭉 더워서 지금은 벌써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느낌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며 들뜬 마음으로 맞춘 가쿠란을 채 두 달도 못 입고 반팔 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두고 학생들은 시험에서 해방된 기쁨과 금방이라도 푹 쪄질 거 같은 더위 사이를 오가며 방학이 어서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중학생이 되고 어느새 많이 변해버린 내 '동생'들도 그럴까. 어리광으로 시작했던 맏형 자리는 의외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전에도 이미 난 모두를 주도하는 역할이었으니까 별 달라진 점이 없는데. 형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히 기쁘기만 한데. 엄마가 우리를 찾을 때 나부터 부르는 건 태어날 때부터였으니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닌데. '동생'들이 변해서겠지, 역시. 그 중에서도, '둘째'라는 위치를 해내고 있는 카라마츠가 가장 큰 원인인 거 같다. 그에게 이끌려 맏형이 될 때마다 이 자리가 어쩐지 부담스러워진다. 말 안듣는 쵸로마츠나 토도마츠도 물론 큰 골칫거리지만. 그러고보니, 카라마츠에게서 왜 그렇게 차남 역을 열심히 하는지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차피 물어봤자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며 웃어 넘길 게 뻔하지만.
"하? 폐건물 탐험? 어린애냐고?"
"언제가 되어도 오소마츠 형만큼은 어른이 되지 않을 거 같아."
얼마 전부터 이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재개발이 한창이다. 어릴 때는 그런 곳의 폐건물을 종종 가고는 했다. 나와 쵸로마츠가 앞장서고 나머지도 벌벌 떨면서 건물을 돌아다니다 정말 별 거 아닌 구슬이나 긴 못 같은 걸 주워서 건물을 정복했다며 뻐기곤 했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분명 작년에도 버려진 학원에 가서 책상에 실컷 낙서를 하고 돌아왔을 터다. 그걸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는 먼 옛날 얘기인 양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치마츠와 쥬시마츠 쪽을 바라봤지만 둘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내 눈을 피한다.
"쳇. 형아의 로망을 이해해주지 못하다니."
몸을 홱 돌리며 삐진 척을 해보지만,
"형다운 짓을 하면서 형이라고 좀 해봐라. 덕분에 1학기 내내 전원 교무실 단골이 되었다고? 교내 방송에 '마츠노'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 지 이젠 스피커에서 소리 날 때마다 절로 고개숙이고 일어서는 기분을 알아?"
기다렸다는 듯 쵸로마츠가 쏘아붙인다. 그렇게 불만이었냐. 하긴, 내가 사고를 치고 나선 매번 다른 이름을 대면서 도망쳐 다녔기에 동생들도 제법 고생했을 것이다. 그걸 알아도, 장난은 그만둘 수 없지만.
"바보짓은 그만 좀 해! 금쪽같은 쉬는 시간도 다 뺏기고 말야."
토도마츠도 거들고 나서고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는 여전히 내 눈을 피한 채 끄덕거리고 있다.
"이래서야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4명의 눈이 이쪽을 향한다.
"나쁜 사람 맞잖아!"
그 후, 저녁 먹기 전까지 쵸로마츠에게 설교를 들었다. 교칙으로 위험한 장소는 가지 말라는 게 정해져 있다고. 폐건물 같은 데를 갔다 들키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말과, 갔다가 만약 누구에게 걸리지 않더라도 바보짓에 질린 자신이 직접 선생에게 말할 거라는 협박도 함께. 무거운 분위기의 거실에서 날 구원해준 건 언제나처럼 늦게 귀가한 카라마츠였다. 닭고기 냄새에 혹했는지 어린애처럼 밥을 보채는 그에 동조하듯 모두 밥을 달라며 떼를 썼고,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도 "어쩔 수 없네"라며 밥상을 차려주셨다.

다음날도 볕이 뜨거웠다. 교복의 등은 벌써 땀으로 젖어 있다. 시험이 끝나서인지 더위를 못 참는 기분을 이해해서인지 책상에 엎드려있어도 용서해주는 자비로운 수업시간. 지루한 톤의 말소리는 살짝 스쳐가고, 오히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더 귓속을 울리는 오후 시간. 그러다 문득, 카라마츠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떠올랐다. 거기에 폐건물. 종합병원이 폐업한 거라 분명 재밌을 텐데. 둘이 그런 곳에서 얘기하면 좀더 솔직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예로부터 귀신의 집이나 담력훈련은 사랑이 싹트는...어라? 갑자기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선생의 눈길이 잠시 나를 향했다 이내 다른 쪽으로 향했다. 뭐, 연인이 되는 이벤트를 형제한테 못 한다는 법은 없지. 생각난 김에, 오늘 해 버리는 게 좋겠다...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수업종이 울리고, 난 교실을 뛰쳐나갔다.

방과 후, 연극부로 향하는 카라마츠를 뒤에서 붙잡았다. 흐엑! 같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놀라는 점이 카라마츠의 숨겨진 볼거리다. 그랬다가 한심하다는 듯 째려보는 눈길이 조금 쓰라렸지만.
"자자, 아우여. 오늘은 이 형님과 갈 곳이 있으니 잔말말고..."
"싫다."
"잠깐!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지 말고~"
"시험은 끝났지만 연극부는 가을공연을 준비해야 하니까 쉬지 않는다. 모처럼 1학기에 잘 심어둔 인상과 여기에 바친 열정을 단 하루의 실수로 놓아버리고 싶진 않아."
"은근히 빡빡하네, 연극부."
"학기마다 적어도 한 번은 공연하니까. 많이 익숙해졌고, 남아있는 1학년들 모두 열심히 하자고 선배들이 응원해준 게 바로 어제인걸. 그런 다음 날 연습을 빼먹으면 누가 신뢰를 주겠어?"
카라마츠가 연극부에 푹 빠져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겨우 하루 빼먹는 걸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이야. 하지만, 이미 손은 써 놨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말없이 빠지는 게 싫은거지?"
"응...하지만 집합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갑자기 안 간다고 하긴 좀..."
"그건 걱정마."
"에?"
"이미 말해뒀음."
카라마츠가 벙찐 얼굴로 날 봤다. 못 믿겠다는 게 얼굴에 쓰여 있었다.
"3학년에...그...아사노였나? 연극부 선배지? 그 사람한테 오늘 볼 일이 있다고 아까 말해뒀어. 귀엽더라, 그 선배~ 혹시 그 선배 때문에 연극부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아...어...그건 아니야...아사노 선배는 어떻게 알고 연극부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저번 공연 때 눈여겨 봤지. 네가 몇번 얘기한 적도 있잖아?"
벙 찐 카라마츠의 얼굴은 살짝 경외가 묻어나 보였다. 내 생각이지만.
"뭐...형제의 주변을 챙기게 되다니 역시 맏형답군."
그냥 그 사람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던 거 뿐이지만, 카라마츠는 이 틈에도 나를 괜스레 맏형이라 추켜세운다.
"처음에는 너인 척하고 가서 꾀병부렸는데 너가 아닌 것도 꾀병인 것도 금방 들키더라? 그래서 사나이 대 사나이로 긴히 할 말이 있어 널 데려간다 했더니 엄청 웃던데? 눈물까지 찔끔이면서. 그러더니 오늘은 카라마츠를 잘 부탁한다며 보내줬어."
카라마츠는 내 말을 유심히 듣더니 의심이 걷힌 듯 끄덕였다.
"...그래서?"
"응?"
"어디 갈 건데, 오소마츠 형."
급격히 진지해졌다. 이런 점은 확실히 예전과 다르다. 녀석이 정색할 줄 알았던가.
"재개발하는 쪽에 종합병원이 폐업하고 남은 폐건물이 있거든. 거기 한 번 가 볼까 해. 다른 녀석들은 애취급하면서 안 간다잖아. 가기 싫으면 그냥 안 가면 되지 거기서 왜 어른이 못 될 거냐느니 하는 말이 나오냐고."
"작년까지만 해도 종종 그런 데 가긴 했지. 그런데 지금은 교칙으로 못 가게 되어있지 않아?"
"내가 교칙을 지키는 쪽이 아닌 건 잘 알잖아?"
"하긴...입학하자마자 덕분에 고생했어. 특히 내 이름 대고 자주 튀었잖아."
"그건 뭐..."
머쓱한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본다. 생각해보면 나 때문에 자주 혼났으니, 장난에 꾀어내는 걸 싫어할 지도 모른다.
"좋아. 오랜만에 한 번 가보지 뭐."
카라마츠는 살짝 웃어보였다. 아마도, 그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본 건 오랜만이라 생각한다.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지 않게 된 것도 벌써 반 년이다.



*



한때는 종합병원이었던 건물은 철로 된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덩그러니 놓여있다. 울타리들엔 락카로 수놓은 욕망의 잔재들, 각양각색의 광고지, 으레 새겨진 사랑의 화살표 등이 수놓아져 있다. 울타리를 따라 빙 돌다보면 발로 찼는지 삽 같은 것으로 쳤는지는 모르지만 철판이 안으로 휘어진 개구멍이 만들어져있다. 낑낑대며 들어가면 바닥에 씨처럼 흩뿌려진 담배 꽁초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그런 건 나나 카라마츠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한때는 정문이었을 유리문은 돌이라도 맞았는지 깨져있고, 그 곳에 너덜너덜하게 폐업일 안내와 철거일 안내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내일 철거하나 보네."
카라마츠는 답이 없다.
"운이 좋았네, 우리. 그렇지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움찔하며 내 쪽을 본다. 맞아, 이 녀석 겁쟁이였지. 암만 철 든 척 형인 척 해도 겁이 많던 그가 갑자기 대담해지지는 않았을 터다.
"본방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안에 들어가서 재밌는 게 있나 살펴봐야지!"
손을 덥썩 잡았다. 카라마츠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름날이라 그런지 겁이 나서 그런지 그의 손은 촉촉했다.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꼭 붙든다. 이거야 원... 형에게 의지해 주다니 기쁜데.
"...귀신이라던가...원혼 같은 건 없겠지?"
"그런 게 세상에 어딨냐? 있으면 이 '형'이 혼내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그렇게 떠는 와중에도 불신의 눈으로 그가 나를 쳐다본다. 그게 하늘같은 형님 보는 눈빛이냐. 뭐, 어떠랴. 그의 손을 붙잡은 채 깨지지 않은 쪽 문을 열었다. 떨면서 멈칫서리는 카라마츠를 끌어당겨 안으로 들어왔다.
"자, 손전등 가져왔어. 하나 받아."
"오...오우..."
"이젠 좀 떨어져도 되지 않냐? 괜히 붙잡고 있다가 넘어져서 다칠 수도 있다고?"
"그럴지도..."
카라마츠는 손을 놓고 그 자리서 우뚝 섰다. 희미하게 비치는 햇빛에 의지해 그의 눈은 공포와 호기심이 뒤섞인 채 이 공간을 파악해가고 있다. 나도 그를 시야에서 놓지 않도록 주의하며 주위를 살폈다. 맥주 캔이나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지만, 대체로 휑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게, 이 건물은 내일이면 사라질 곳이니까. 카라마츠는 이번엔 옷깃을 붙잡은 채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계단..."
"올라가볼까? 여섯이 왔을 때보다 너무 떠는 거 아님?"
"그땐 사람이 많았잖아. 오늘은 단 둘이니까."
"두고 도망가면 볼 만 하겠는 걸~"
"그랬다간 형이고 자시고 패버릴테니까 알아서 해. 아마 다들 기회 잡으면 좋다고 널 패러 달려들걸."
부들부들 떨면서 강한 어조로 그가 말해온다. 나한테 쌓인 거라도 있었나. 사람은 몰리면 본심이 튀어나온다고 하던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자, 올라가자!"
2층, 3층, 4층...6층 하고 옥상. 옥상 문을 열고 나갔지만 높이 솟아오른 철조망과 한때는 이것저것 빨래가 널려 있었을 줄들이 수거되지 않은 채 곳곳의 기둥에 묶여 있었다.
"내일이면 사라질 건물이니까 망정이지, 누군가 여길 진작 알았다면 분명 안 좋은 일이 있었을 거야..."
카라마츠는 걱정스럽게 옥상을 둘러보았다. 폐건물의 탐험 놀이도 시간이 지나면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걸까. 고작 반 년밖에 안 됐는데. 녀석이 '둘째 형'이 된 지도, '중학교 1학년생'이 된 지도, '성실한 연극부원'이 된 지도. 억지로 '첫째 형'이 된 나와는 다르게 그 변화가 자연스럽다. 여전히 겁쟁이고 바보인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푹푹 찌는 더위에도 살짝 바람이 부는 이곳은 어째선지 선선했다. 흔들리는 빨랫줄과 철조망에 부서진 주위 풍경과, 계단을 오르느라 땀에 젖은 카라마츠와, 나와. 그곳에 계속 있다가는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릴 거 같아 땀이 식자마자 6층으로 내려왔다.

"폐건물 탐험의 룰은 알고 있겠지?"
"호...혼자 다니게 할 셈이야? 더 좋은 거 주워오기 경쟁이잖아?"
혼자 다녀본 적은 없었다. 예전엔 짝지어서 다녔으니까. 생각해보니 카라마츠와는 짝을 지어서 폐건물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쳇. 어차피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니까 같이 다니면서 경쟁하는 걸로 하지 뭐. 여기는 병실만 있어서 별 거 없을 거 같으니까 다른 데 찾으러 가자."
가지고 온 손전등을 켜고, 본격적으로 병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검사실, 진료실, 약품 보관실...종합병원이라곤 해도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아보였는데, 크고 작은 방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마 가져가기에 골칫거리인 침대나 소파나 책상같은 큰 물건들을 제외하곤 주사기 바늘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요소들은 안전하게 치워놓고 비워주는 게 당연하지만, 이런건 너무 정 없잖냐. 로망을 모른단 말이지. 이래서야 그냥 죽음을 앞둔 건물일 뿐이잖아. 생각만큼 수확이 없었던 데다 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닌 탓에 지친 우린 3층의 휴게실에서 우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아~ 간만에 하는 탐험이 이다지도 무의미할 줄이야."
"그러게, 별 거 없었네 정말."
하아. 동시에 한숨을 쉬고선 눈이 마주쳤다. 뭐, 마침 잘 됐어. 둘이서 진득하게 이야기나 하지 뭐.
"카라마츠, 있잖아."
"왜?"
"있잖아...음..."
큰일이다. 막상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니 입이 안 떨어져.
"중학생이 되니까 어때?"
"중학생? 아...글쎄."
그리고 어색한 침묵.
"사실 교복을 늘 입고 다녀도 항상 한 다스로 사서 세트로 입고 다니던 우리 여섯 쌍둥이에겐 별 새로운 느낌은 없었지. 중학생이 되서보다는, 중학생이 되기 전 오소마츠 형이 형으로 불러달라고 했던 그 날, 그렇게 형동생이 생겨버린 그 때가 더 영향이 컸다 해야 할까? 뭐냐고, 갑자기. 그런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 조금씩 달라지고 싶었던 거 같다. 나도 그렇게 찌면 둘째 가는 형이니까. 그리고 연극부가 재밌다! 연기력따위 늘지 않고 처음에 주연을 해서 그런가 살짝 열정이 시들해진 감도 있지만, 그래도 재밌어. 수업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등교하자마자 방과후가 됐으면 하면서."
카라마츠가 의외로 떠들어준다.
"오소마츠 형이야말로, 어떤가. 누가 보면 행복하다못해 폭발하는 청춘을 보내고 있지?"
"음...글쎄다."
다른 녀석들하고 어울리기도 하고, 치고받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매일 즐겁긴 하지만.
하지만.
혼자인걸.
괜한 짓으로 나는 너희들과, 너와, 멀어져버린 거 같아.
"너무 미움사지는 말라고? 쵸로마츠는 저렇게 직접 얘기하는데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 같아. 성실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하지. 다른 녀석들도 내가 속마음까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형에게 휘둘려서 조금은 힘들어하고 있다. 다들 조금씩, 그렇게 자기를 찾아가는 거 아닐까."
뭐냐고.
혼자 훌쩍 커버린 소리 하지 말라고.
어쩌다 그런 소리를 하게 된거야, 바보 주제에.
"난 그런게 아니라, 너에 대해..."
다시 분위기를 잡아보려 했는데, 카라마츠가 갑자기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시선은 휴게실의 창문 너머였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고 다시 카라마츠 쪽을 보는데, 카라마츠가 손을 덥썩 잡았다.
"여...역시...얼른 나가자..."
무섭다라는 말은 자존심 때문인지 하지 않는다. 녀석은 뭘 본 걸까. 더 이상 여기 있기도 그러고, 분명 둘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도 많겠지. 손을 잡고 넘어지지 않게 계단을, 계단을 달려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개구멍을 지나서 폐건물이 멀어질 때까지 달리는 동안 제법 해가 내려앉은 것이 보였다. 하늘엔 어느새 붉은 빛이 한 방울 떨어뜨려졌다. 집에 들어가기 전 공터에서 서로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 카라마츠가 가지고 있던 용돈으로 아이스바를 7개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둘이 같이 오다니 별일이네."
집에 먼저 와 있던 이치마츠가 마루에서 부채질을 하며 인사한다. 옆에 있던 쥬시마츠가 봉지를 눈치채고 다가와서 아이스바를 두 개 빼갔다. 카라마츠도 아이스바를 두 개 꺼내서 내 손에 쥐어주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이치마츠 옆으로 가서 앉아 아이스바의 껍질을 깠다. 파란 색의 소다맛. 혀로 핥으면 여름이 묻어나오는 그런 맛. 냉장고에 남은 아이스바를 넣고 온 카라마츠도 내 옆에 앉아서 어느새 살짝 녹은 아이스바를 입에 문다.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며 잠시의 일탈을 씻어냈다.



*



멍하니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쿵, 쿵, 하고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 어제 갔던 그 폐건물이 철거된다고 했던가. 창문은 열려 있고, 바람이 불어서 그런가 간만에 선선했지만 여기까지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잖아. 마치 어제 오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일매일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다. 옆동네에선 폐건물을 철거하는 소리가 한동안 소란스럽겠지만 어느새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또 그 건물이 항상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조금씩 달라져버린 카라마츠도, 다른 녀석들도, 언젠가는 늘 그랬다는 듯이 받아들여지겠지. 그런건 싫지만, 그땐 그랬지 하며 어제 일을 별 거 아닌 양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러는 동안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며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복도를 바라보면 평소와 같이 카라마츠가 들뜬 표정을 하고서 지나간다.

여름방학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번 여름은 유독 길다.
















-----------------------------------------------------------------------------------------------

또(가 도대체 몇 번 째인지) 쉬어가는 겸 단편 먼저 갑니다. 흐에에...
원래는 끝나고 외전 몰아쓰고 마치는 게 작년까지의 계획이었는데...재작년...재작년...하...
쉬는 동안 덕질은 안 쉬었습니다. 단타로 굵직굵직하게 즐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삶이 여러모로 글러먹은데다 지리멸렬해서 힘들군요(진행중)
작년이 재작년이 되고 또 한 해 지나고...아...미치겠...
어느새 2기도 끝나고 극장판이 학생마츠 코피팡! 그리고 설정 다 붕괴하면서 극장찬 보고 오면 쳐울며 지울 거 같아서 그 전에 어떻게든 쥐어짰습니다 흑흑

겨울에 하는 여름 이야기입니다! 아 넘모넘모 추운거시에요
폐건물에 로망은 없나요? 아지트라든가.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지금도 그런 로망이 있습니다. 저기서 보통 진한 ■■■■■■■■■를 상상하지만 건전하게 가봤습니다. 자신이 없어...
Posted by 하리H( )Ri
2018. 10. 4. 02:54
앞에서 이어집니다. (http://heartrainon.tistory.com/186)
- 망상가득한 이치카라 소설
- 나의 ~마츠는 이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여러모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
- 글쓴이의 머릿속이 꽃밭
- 제목은 별 거 없습니다.

******

이치마츠와 사귄 지 어언 한 달이 넘었다. 지금도 그 강둑에 산책하러 가는 게 페이버릿 데이트 코스다. 이치마츠에게 고백을 받고, 키스를 하고. 세계가 부서지는 가운데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나눈 입술과 혀의 감촉은 아마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세상이 부서졌다가 기적처럼 다시 붙어서 원래대로 돌아온, 그런 세계를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들인 것이 정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덕에 아직 우리는 이 세계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아직. 분명 세계가 다시 돌아오면서 내 머릿속에 울렸던 목소리가 말하길 다른 세계에서 있었던 일, 내가 세상을 부수는 존재라는 일 같은 건 점점 잊혀질 거라고 했다.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라고. 나를 묶었던 데스티니에서 해방되어, 그렇게 나는 그저 소중한 형제인 이치마츠의 연인이 돼버린 마츠노 카라마츠로서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옅어진 듯 보였던 균열은 한 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의외로 세계가 회복되는 건 느린 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수없이 많은 세계의 내가 세계를 부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내 머릿속에 남아서 날 괴롭힌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나날이 이어졌다. 행복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치마츠는 그런 나를 걱정한다. 하지만, 이젠 그가 나의 걱정을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세계의 기억이 사라졌다. 이치마츠의 말에 따르면 다른 형제들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에게서도 역시 사라진 모양이었다. 강둑에 가서, 이치마츠를 슬쩍 떠본 것도 몇 번이고 한 일이다.
"이 강둑에서 너에게 고백을 받고 거절할 지 받아들일 지 고민했었지."
이렇게 운을 띄우면,
"그때 용기내서 널 안기를 잘했어. 설마 그러고 바로 키스를 하다니 진도가 빨랐네, 우리."
히힛, 하며 이치마츠는 부끄러워 하지만,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라고 생각하며 세상이 부서지는 속에서 끝을 맞이할 때까지 따뜻함을 나누자고 생각했다 말해주었던 그다. 나와의 첫 키스의 여운은 사라져버렸을까.  그 뒤로도 우린 거의 매일같이 키스를 했고 그때마다 이치마츠는 입술을 떼고 나서는 부끄러워하며 멋쩍은듯 웃어버린다. 그것 또한 사랑스럽지만, 가장 소중했던 순간의 기억을 혼자서만 알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것에서, 균열이 사라지지 않은 것에서 나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헤에~ 왠일로 이치마츠랑 같이 있지 않네, 카라마츠."
오소마츠가 어깨를 탁 치고선 옆에 앉는다.
"혹시 싸운 거? 이치마츠가 무리하게 러브호텔 끌고 가려 하진 않았지? 그 녀석 그래뵈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엔 어그레시브한 면 있다고? 분명 너 휘둘리고 살 거 같은데."
"무슨 일로 걱정해주는 건가. 이치마츠는 분명 어그레시브하지만 내가 싫다고 하면 참을 줄 아는 착한 아이다. 만약 오소마츠였다면 돈 생기는 대로 러브호텔 끌려가서 수없이 만져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에, 나 그런 이미지? 아직 동정인데 벌써 그런 이미지?"
"그런 이미지 갖고도 남는다는 걸 잘 알아두라고,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할걸."
"쳇. 모처럼 걱정해줬더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소마츠는 내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평소에는 이치마츠가 붙어있고, 알아서 둘이 해결하겠지 생각해 주었던 걸까.
"형제가 연인이 되는 거 보고, 서로 행복하기만 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쵸로마츠는 밖에 다닐때만큼은 주의해달라고 하는 거 보면 아직 완전히 인정하진 못한 거 같아. 엄마나 아빠한테는 말도 못하고 있고. 그래도 이 형은 완전 괜찮아. 둘이 행복하면 그걸로 괜찮아. 그런데, 행복해야 할 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까 걱정된다고. 이치마츠도 걱정해주고 있기야 하겠지만, 애초에 이치마츠가 고백한 그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닐까 생각해버린다고. 그래도 깨어 있을 때 둘이 지내는 모습 보면 안심한다고. 혹시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 거 아냐? 벌써 미래설계 하는 거 아니지? 둘이 따로 살림을 차리러 사람의 도피행같은 거 계획하는 거 아니지? 그런 것만은 절대 안 돼. 둘이 연인이든 부부가 되서 살림을 차리든 이 집에서 내 손에 닿는 곳에 있다면 상관없으니까."
걱정해주네. 며칠을 참은 말들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적도 없는데 오버하기는. 하지만 내 고민은 오소마츠에게 털어놓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털어놔도 어차피 황당무계한 일로 받아들이겠지. 아니지. 믿어준다고 해도, 그저 믿어줄 뿐.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겠지. 이건 오소마츠만이 아니라 쵸로마츠도, 쥬시마츠도, 토도마츠도, 그리고 이치마츠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계의 일 같은 것, 내가 무엇인가 같은 것.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고, 설령 끌어들인다 해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날 괴롭힌다. 아아, 이치마츠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겠지. 날 안아주고, 키스해주고, 만져주고, 사랑해주고...나의 말도 믿어줄 것이고, 첫 키스를 한 그 때처럼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에도 나와 함께 있어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오소마츠, 아니 형님. 이치마츠는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랑받는 이 몸이 길티 그 자체일 뿐. 연인의 그건 아니지만, 형님에게도 다른 동생들에게도 분명 사랑받는 러브 헌터, 길티 가이!인 나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허세다. 최악의 허세다. 분명 바보인 이 장남 녀석도 알아챌 정도의 허세다.
"여전히 갈비뼈 아프네에! 이치마츠 갈비뼈는 부러뜨리지 말라고."
장난으로 받아들여주는 건가. 그건 그거대로 고마울 따름이지만.
"잠도 잘 자야 착한 아이라고, 카라마츠?"
대답을 피하는 나의 정곡을 찌르며, 바보지만 바보지 않은 하나뿐인 형이 얘기한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다. 그 뒤 쥬시마츠와 외출했던 이치마츠가 돌아왔다. 이치마츠는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벌렸고, 나는 그에게 달려가서 그의 품에 안겼다.

*******

잠들지 못하는 나날은 계속되었다. 꿈은,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은, 깨어있을 때나 잠에 들었을 때나 나를 괴롭혔다. 이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 벌에서 해방됐다며 기뻐해 주던 운명의 여신, 아니 어딘가 다른 세계의 목소리는 이제 와서는 다른 소리를 한다.
'한번 부서진 세계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어.'
'넌 분명 세계를 부수는 존재라는 벌에서는 해방됐지만, 이미 이 세계는 네가 부숴버린 거야.'
'저 균열, 네가 어떻게든 붙들어놓고 있는 거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겠지.'
균열을 붙잡아두고 있다는 의식은 없지만, 그 탓이었나. 균열이 사라지지 않은 건. 오히려 이제 그 틈이 점점 벌어지고, 이 세계는 결국 부서질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거라고. 이치마츠가 나를 살짝 두드렸다. 팔을 뻗어주는 그에게 살짝 애교를 부려 팔베게를 받았다.
그렇게 잠시 꿈을 꾸었다. 세계의 틈새 같은 곳에서 무수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이 있다. 아니, 형제인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곳에서 눈부신 빛이 말한다.
"너희 여섯명은 세계의 운행에 간섭했다. 영영 세계의 틈새에 가둬두는 것도, 무수한 세계에서 벌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너희가 속죄하는 방법이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해낸 너희의 대단함을 높이 사겠다. 이 세계가 열리고, 수없이 긴 시간이 흘러 이른바 평행세계라는 것도 수없이 생겨나고 말았다. 가능성과 가능성이 부딪혀 세계는 실제로는 한 세계가 선택을 받아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만, 평행세계가 증식한 탓에 그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는 평행세계를 부수는 역할을 주겠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그 권능을 온전하게 누릴 수 있게 되면 지금처럼 세계의 운행에 간섭하는 일이 다시 벌어지리란 것은 불보듯 뻔한 일. 너희 여섯이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이 살던 세계를 부수는 고통을 알면서 속죄를 해야만 한다."
"잠깐."
오소마츠가, 아니 분명 오소마츠일 녀석이 눈부신 빛의 말에 끼어들었다. 녀석답다면 녀석다운 행동이다.
"속죄라고는 해도, 우리들 원해서 세계의 운행에 간섭한 것도 아니고, 우연에 우연이 겹쳤던 것 뿐이라고? 세계의 이치에 간섭하는 거, 너무 허술하지 않아?"
"건방진 자로군. 그럼에도 그 자체가 중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자칫 '올바른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랬다간 '올바른 흐름'이 무너져 모든 세계가 사라져버리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헤에, 그런가. 그럼 딱 하나만 부탁하자고. 수많은 평행세계를 우리 손으로 부수며 속죄하는 큰 일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우리들 평행세계들 안에서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지 않겠어? 세계를 부숴버렸다는 무서운 죄책감을 적어도 여섯 등분으로 나눠서 가져갈 수 있도록 말야."
"그런 걸로는 벌이 되지 않을 터. 수많은 평행세계를 돌며, 수많은 죄책감을 가져야 할 너희들이다.그걸 여섯이 서로 나눈다면 그게 무슨 속죄가 될 수 있지?"
"그렇다면..."
이번엔 쵸로마츠인가.
"수많은 평행세계를 돌며 우리가 그 세계들을 부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줘. 세계가 부서지는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좋아. 우리 탓에 세계가 부서지는 걸 깨닫고서, 후회하고 죄를 뉘우치고, 그럼에도 그 역할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게 해줘."
겁에 질려 떨고 있었지만, 오소마츠의 말에 동조하고 싶었던 거겠지. 여섯이 함께 있자는 그 말을 위로삼아 앞으로 있을 속죄의 순례에 조건을 거는 그 모습이 쵸로마츠답다.
"부탁드려요. 열심히 할테니까. 언제 끝나냐고 불평하지 않을 테니까."
쥬시마츠가 고개를 숙였다.
"저도 부탁드려요. 서로가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서로 흩어져서 벌을 받는다면, 그 여정의 한 틈에서 분명 누군가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이런 죄를 저지를 지 모르니까 불안하기도 해요. 서로가 서로를 저지할 수 있도록 같은 세계를 돌게 해주세요."
토도마츠는 살짝 협박하듯 말한다. 이 녀석들, 어느 세계를 가도 대단한 녀석들 뿐이구나.
"우리의 벌은, 그런 소중한 사람들을 계속 잃으며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를 부수는 거니까, 분명  함께 벌을 받는 편이 속죄 난이도가 높아지는 거라고?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도 괴롭겠지만, 수없는 이별을 반복하는 편이 더 괴로울거야."
이치마츠는 조곤조곤 설득한다. 말하는 투는 심하지만.
"나도, 이들의 말에 찬성이다. 물론 죄인인 우리가 이렇게 요구할 처지가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리고 내가 말한다.
"그렇다면 그 조건, 받아들이지. 그러나 너희가 원한 길은 너희 생각대로 갈 수 있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아두도록."
눈부신 빛은 이윽고 커져 우리들을 감쌌다. 그 빛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나를 꿰뚫었다.
"너희 여섯은 어떤 세계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겠지만, 그 끝은 파국일 것이다. 가장 처음으로 이 세계의 틈새에 들어와버린 네가 그 파국의 촉매가 되어줘야겠다. 여섯이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너에게는 세계의 파괴자라는 역할을 주지. 너희들이 함께 모이고, 너희들이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 뒤 언젠가엔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가 부서지는 그 순간 너희들이 부순 평행세계의 마지막을 다들 떠올릴 것이다. 다만 딱 하나,  그 마지막을 떠올리고도 너희가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때 너희의 속죄도 끝날 것이라 약속해주지. 그럴 수 있다면 더는 세계의 운행에 손대고 싶은 마음같은 걸 가지지 않을 테니까."
저 빛은 분명 전지전능한 신 같은 거겠지. 우리가 이렇게 세계의 운행에 손을 댄 이유는 떠오르지 않지만 살고있던 세계에 불만을 품었던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쳤지만 우리는 바벨의 탑을 오르고 만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위험한 영역으로 몰고 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서로가 소중했다는 토도마츠의 말이 마음 속에 남았다. 그 서로가, 여섯 명 전부를 얘기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우리의 속죄의 평행세계 순례가 시작됐다. 그 뒤는 알고 있는 대로다.
서로를 생각해주는 사람으로 남는다라, 그래서 벌이 끝난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남는다한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얼마 없다. 이제 다른 세계의 우리는, 이 굴레에서 해방되고 나서 행복하게 될 테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수많은 평행세계 속에서 내가 왜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알았다.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고 만 자신은 분명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들여도 마지막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을 이야기해야 하는 게 두려웠다. 쭉 사랑하는 채로 있고 싶었다. 세상이 끝날때까지, 라는 흔해빠진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을 탓했다. 세계가 끝나버린다는 절망감이 가득한 차에 그롸 함께 행복한 종말을 맞이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까 도망쳤다. 적어도 혼자서 끝내고 싶었다. 세계를 부수는 그 죄책감을 혼자만 끌어안고 싶었다. 그렇게 지금 세계에 이르렀다. 여섯이 나누었어야 할 죄는 신의 변덕에 자신에게만 향했지만 그걸 알게 된 건 이번뿐이다. 그리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 고통은 끝난다. 이제 다른 세계의 나도 모두도 세계가 부서지는 고통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세계의 이치마츠는 나를 좋아한다고 해줄까. 나는 이런 걸 재지 않고 솔직하게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줄까. 우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

"미안, 이제 질렸어"
우리에게 특별한 장소인 강둑, 첫 키스를 했던 그 자리에서 카라마츠는 돌연 이렇게 말했다.
"무슨...소리야?"
오늘은 내내 카라마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카라마츠는 웃어주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다니는 그에게 솔직히 화가 났지만,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였다. 갑자기 나와 사귀게 되어서 걱정이 늘었나? 그러고보니 우리 사이를 인정해 준 건 오소마츠 형이나 쥬시마츠 정도. 토도마츠는 한숨을 쉬며 맘대로 하라고 했고, 쵸로마츠는 여섯 명의 썩을 동정 니트들 사이에 호모까지 출연하면 도대체 뭐가 되냐고 당황하며 일단 우리 형제 사이에서만 알고 있자고 했으니까. 미안, 동정은 뗐어. 정확히는 동정도 처녀도 둘 다 잃었지만.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일부러 우리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배려가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돌려보고 싶은 걸로 고민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게 카라마츠라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어젯밤만 해도 팔베개를 해주니 내게 안겨 잠들던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생각해보았다. 우리 관계에 대해서. 너와 사귀고나서부터 난 행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서운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만 것이다. 그래서 질렸다고 말하는 거다."
언젠가처럼, 그는 딱딱하게 말했다. 분명, 고백하던 그날 카라마츠가 내게 이런 느낌으로 말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를 붙잡으려 애썼으니까. 왜 애썼지? 차였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걸까. 그날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 같은 게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왜 조용히 품어왔던 연심을 그때는 고백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쟁취한 자의 여유 같은 거? 아무리 쓰레기인 나라고 해도, 그건 너무한 일이었다.
"이치마츠는 우리의 첫 날, 네가 고백했던 날을 제대로 기억해주지 않는다. 나는 몇 번이나 너를 떠봤지만, 키스했던 그 순간만을 기억하는 너에게 아쉬움을 느꼈다. 그날 나는 사실 너를 밀어내려 했다. 네가 한 번 차였다가 나에게 다시 용기내서 고백한 건 고맙지만, 그렇게 필사적인 고백의 순간을 네가 잊어버린 거 같아서 아쉬웠다. 그러다 생각했다. 너는 그저 나를 얻고 나면 그걸로 끝이 아닌가 하고. 왜 나를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그런 필사적인 고백을 해놓고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웃어버리는 네게 실망한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조차 질린다. 그저 서로 사랑하면 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해버리는 나도 제법 이기적인 녀석이다. 그러다, 너무 고백을 빨리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미쳤다. 생각없이 너의 고백을 받고, 사랑을 나누고 말았다."
무언가 내 머리를 세게 강타하는 느낌이었다. 카라마츠는 의외로 섬세한 편이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고백의 순간을, 첫 키스의 순간을 되새기고 싶어하는 것만으로 생각했다. 물론 자신도 그 순간이 소중해서 몇 번이고 되새기며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키스를 나눴다. 설마 그게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지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줄이야. 은근 속좁은 부분이 있구만. 그 정도 집착은 해주는 게 좋기야 하지만. 문제는 카라마츠의 저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일까. 어째선지 그날의 기억이 모호하다. 나를 피하던 카라마츠를 쫓아갔더니 차이는 듯한 말을 듣고, 거기에 북받힌 감정에 카라마츠에게 고백을 하고, 그가 받아들이고 키스를 했다. 어둑어둑해진 강둑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아니야. 충분하지 않아. 그날 나를 떠민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지. 그냥 단순히, 카라마츠가 나를 피하는 데 상처를 받아서였나.
"거봐. 얼빠진 표정을 보아하니 이렇게 말해도 너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조금만 시간을 줬으면 한다.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권태기가 온 거야? 맨날 붙어사는 형제니까 그런가? 아니지. 한 달을 고민한 카라마츠 나름의 결론이었다. 카라마츠는 주먹을 꽉 쥐기도 하고 눈을 질끈 감기도 하고 입술을 꽉 물기도 했다. 내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걸 어째선지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바보같은 소리에 응해줄 리가 없잖아. 그런 시간 가진다고 해도 우리들 같은 집 안에서 사는 형제니까 만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일단 거부했다. 당연하지. 그렇다고 카라마츠가 마음을 바꿔줄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단 둘이 있는 시간만 피하면 된다. 내가 꺼낸 말이니까,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할테니 너무 신경쓰지 마라."
"아니, 신경쓰이거든.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면서 뭘 혼자서 끌어안으려 하는거야."
무언가 카라마츠에게 숨기는 게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추측한 것, 카라마츠가 한 말 모두 틀렸을 수 있다. 신경쓰지 말라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니. 나를 탓하는 척 했지만 사실 자기의 문제 때문에 나랑 거리를 두려는 거 아니야?
"아무튼! 이치마츠는 이치마츠대로 우리가 사귀기 전의 일들이나 마음들을 생각해냈으면 한다. 내 변덕에 너를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지만, 시작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연인하고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저거에 서운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는 거 보통 이별 플래그니까. 이대로 이별하게 되면 어쩌지. 어떻게 해도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집을 나와서 다른 형제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말 것이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카라마츠가 그런 선택을 해버린다면 아마 살고 싶지 않아질거야. 그 날이 오면 죽자. 아니지, 그 날이 오기 전에 죽는게 나을까.
"...재촉은 하지 않을게. 카라마츠. 기억을 제대로 못하는 건 미안하지만, 나는 너만으로도 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어.  사랑해. 첫 키스의 감촉, 고백하면서 안았을 때 느꼈던 너의 온기 무엇 하나 잊지 않았어. 그건 알아줬음 좋겠어. 기다릴게."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이대로 이별해버릴까봐 불안했지만, 나는 카라마츠가 잠시 샛길을 걷는 걸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카라마츠는 언젠가처럼 혼자 거실에 내려가 잠을 잤다. 팔을 뻗으면 빈 자리가 느껴진다. 조금 따스한 느낌을 받아 눈을 뜨면 토도마츠의 얼굴이었다거나. 갑자기 바뀐 분위기를 다들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겠지만, 다들 우리를 배려해주려 애썼다. 쥬시마츠는 나에게 놀자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토도마츠는 쇼핑에 어울려달라고 하며 나를 끌고간다. 쵸로마츠는 나와 단 둘이 있으면 조금 어색해서인지 집에서 나를 챙겨주려 한다. 오소마츠 형은 내가 혼자 고양이와 노는 듯 하면서 멍때리고 있을 때 다가와 그 녀석을 믿어달라고 말한다. 그런 배려에도 난 외로움을 떨칠 수 없었다. 고백하기 전보다도 더, 카라마츠를 찾고 있는 내가 있었다.

*********

시간을 더 달라며 이치마츠를 멀리하기 시작한 그 날로부터, 내 눈에 띄는 세계의 균열은 점차 심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균열을 붙들어두고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였나. 나의 심란함에 반응해 균열은 커지고 있었다. 아니다. 사실은 이치마츠와 처음 사귀게 된 그날로부터 계속 균열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모른척했다. 언젠간 사라질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잠들면 내게 묶인 운명의 사슬이 나를 조여오고 있다는 걸 신경쓸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 세계의 파괴자. 이 세계의 누군가의 행복을 부수는 존재. 그 누군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치마츠도, 소중한 가족들도, 카라마츠 걸즈와 보이즈도, 세계의 그 모든 것이 들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에 와서 이 죄책감을 짊어진 게 정말로 자기뿐이라는 걸 알아도, 다른 형제들이 그걸 느끼지 않게 되어서 좋았다. 아마 그 신 같은 녀석의 말로 미루어볼 때 그동안 다른 세계에선 세계가 부서지며 다른 형제들은 나를 원망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이번에는 나를 믿어주고 나를 붙잡아주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벌이 끝났다. 이치마츠도 세계를 몇번 돌고 돌았을 때 나를 원망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런건 덮어두기로 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다른 세계를 기약하며 나는 이치마츠를 놓아줄까도 생각했다. 이치마츠와 사귀기 시작했던 그날, 사실은 세계가 끝났어야 했던 그날, 나를 붙잡아서 안아주고 키스해줬던 이치마츠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세계가 부서지는 그 한가운데 이치마츠가 있는 게 싫었다. 이번 세계는 상냥해서 이치마츠가 고백하고 난 뒤에 내가 나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저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상냥했던 세계는, 그래도 부서져야 하는 운명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미안하다. 내 탓에, 세계의 질서에 선택되지 못했던 세계는 무수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희망과 함께 나와 함께 부서져주지 않겠나, 상냥하고 아름다운 나의 세계여. 이치마츠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고마운 세계여.
나는 이치마츠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피하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내게 주어진 운명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적어도 이미 다른 세계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들에게는 행복하게 종말을 맞이하게 하고 싶었다. 사실 지금도 나때문에 그들은 조금 불행해졌을테지만. 마지막 순간에, 꼭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은 모른채로 이 세계가 끝났으면 했다. 균열은 그런 내게 반응해 무수한 조각의 금으로 갈라졌다. 건들면 분명 한번에 무너져버리겠지만, 아직까진 어떻게든 버텨주는 상냥한 세계. 그 수많은 금들을 보며 끝을 향해 착실히 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선 울어버린다. 공원 벤치에 앉아 꼴사납게 울고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슬쩍 보더니 가버릴 뿐. 이 균열은 내게만 보이는 것이라서, 암만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고통을 나눌 순 없어서 외로움을 떨칠 수 없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엔, 나는 너무나도 나쁜 사람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제, 마지막이 와버려.
종막이다. 해피 엔딩을 가장한 새드 엔딩이다. 나는 웃기로 했다. 웃는 표정을 잃지 않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오늘 하루만큼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한다. 나는 신같은 게 아니라서 모두를 축복해 줄 수 없지만. 적어도 부서지는 그 순간은 최대한 짧게, 행복한 감정 그대로 마지막을 맞이하도록 노력할테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이치마츠에게 사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런 심한 말 해서 미안하다고. 지금 나를 소중히 해주는 감정이 중요한데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고. 웃는 얼굴은 무너져내렸다. 이치마츠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어제보다도 심하게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의 연인, 이치마츠는 그런 나를 안고서 키스를 했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는 달콤했다. 그리고 격렬했다. 이치마츠는 정말 열심히 참았구나. 그리고선 모두에게도 사과했다. 내가 바보같아서 이치마츠와 모두를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다들 괜찮다며 웃어주었다.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에 미소를 품었다. 쥬시마츠는 다행이라며 폴짝 뛰었다. 오소마츠 형만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그래, 다행이네. 하고 씨익 웃었다. 미안하다. 그래도 너희가 웃어서 다행이야.
집을 비워준 상냥한 형제들 덕택에 집에서 이치마츠와 육체의 대화를 했다. 이치마츠가 얼마나 참아왔는지 격렬하게 느꼈지만, 그의 품이 따스하다는 걸 다시금 느끼고 말았다. 마지막 쾌락. 사랑하는 이치마츠를 마지막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몸이 뜨거워져서 나도 모르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미안하다고 말이 나올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서 갈 수 있었다. 마무리의 키스가 멈추지 않을 땐 세상이 이대로 끝나버리길 바랐다. 그리고 나서 같이 씻고, 이치마츠가 아끼는 고양이들을 만나는 비밀장소로 향했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내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지만, 강아지풀을 흔드는 내 움직임에는 맞춰 놀아주었다. 그러고 나선 공원에서 캔커피를 마시며 시덥잖은 대화를 하고, 강둑을 걸으며 어둑어둑해지는 거리에서 키스를 나누는 지금까지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데이트를 했다. 이번이 마지막 키스겠지, 하고 눈물이 절로 맺혔다. 얼마나 서운했던 거냐고. 이치마츠는 미안한 듯 말했다. 미안하다. 미안한 건 나인데. 강둑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계속 웃는 가면을 썼다. 가면을 썼다곤 해도 웃으며 울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손을 꽉 잡고 걸어주었다. 걸음이 느려지면 그도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언제나와 반대다. 걸음이 느려지는 건 이치마츠 쪽이었는데, 오늘은 아니네. 아무렇지 않게 하루의 마무리를 하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잠들기 전 이불 안에서 이치마츠는 내 손을 꼭 붙들었다. 그런 그에게 맞춰주면서 그가 깊이 잠들길 기다렸다. 손을 몇번 꼼지락거리니 그의 손이 풀렸다. 손을 놓고서 다들 잘 자는지 확인하고서 조용히 옷을 챙겨 나왔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었다. 마당에서 푸른 파카와 반짝이는 바지를 입고, 밤중에 써봤자 소용없을 선글라스를 썼다. 집도 무엇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균열만큼은 잘 보였다. 톡 건들면 부서질 그런 균열이. 웃는 표정을 잃지 말자고 했지만 오늘 하루 도대체 몇번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결국 마지막에도 나는 울고 있다. 누군가는 잠들어 있고, 누군가는 깨어 있다. 만난 적 없는 월드 에브리씽, 아이 엠 쏘리.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시간을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치마츠.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린다. 적어도 너는 나와의 사랑이 오늘을 계기로 계속 이어질 거라 믿는 달콤한 결말을 주고 싶었다. 미안하다. 그것도 내 이기심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니다. 미안하다. 그 날처럼, 너와 처음으로 사귀었던 그 날처럼, 종말이 한 번 변덕을 부려준 그 날처럼, 사실은 너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다. 그 또한 내 이기심이다. 미안하다. 잘 자라. 안녕이다. 심장이 부서지며 내 몸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들자 금갔던 세계는 한번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파편이 떨어져내리는 속에서 차마 나는 이치마츠의 흔적을 좇을 수 없었다. 이내 어둠이 세계를 순식간에 삼켰다. 이 세계에는 나만이 남고 말았다. 그리고 나도 어둠에 삼켜졌다.










**********

"브라더, 오늘도 이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켁. 또 그런 밥맛 없는 소릴. 아침부터 그런 말 안 하면 입에 가시라도 돋치냐고."
"참~ 일어나자마자 싸우지 말고, 정말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은 건지 좋은 건지."
"이치마츠가 맨날 화내는 데도 매번 저런 소릴 하는 네 멘탈 정말 어떻게 된 거 아닌지 모르겠다고, 카라마츠."
"멘탈? 멘탈이 뭐야? 먹는거?"
"먹는 거 아니라고, 쥬시마츠. 아침부터 팔팔하잖냐, 너희들."
마츠노 가 6쌍둥이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된다. 20세 넘어서도 백수에 동정. 매일매일이 별다를 바 없는 그들의 삶은 평범하다못해 최저다만, 그다지 다들 벗어날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형제들이 정말 좋다. 운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어 말하면 안쓰럽다며 조롱받기는 하지만. 정말 소중한 형제들이다.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고 있다고? 바보지만 종종 믿음직한 오소마츠 형, 잔소리쟁이에 촌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모두를 신경쓰는 쵸로마츠, 어둠 가득하고 심한 소리를 내뱉지만 사실은 상냥한 이치마츠, 예측불가능하지만 활기가 넘치고 착한 쥬시마츠, 자기 생각이 가득하지만 형들을 의지하는 귀여운 토도마츠. 그리고 나 카라마츠. 영원히 일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만, 언젠간 독립해야겠다는 모순된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런 하루하루에, 어느날 누군가 돌을 던졌다.
"썩...썩을마츠...나 네가 좋다고."
청춘드라마도 아니고, 벚꽃 흩날리는 강둑에서 이치마츠가 갑자기 고백을 한 것이다.
"좋다는 의미는?"
"성적으로 좋다는 거. 만지고 키스하고 잔뜩 안고 박고 싶어."
"하항~ 격렬하군, 브라더의 러브가."
예상도 못했다. 나를 싫어하는줄만 알았던 이치마츠가 날 이렇게 격렬하게 사랑한다니. 아니지, 누군가의 장난 아닌가? 이치마츠에게 이런 말을 시키는 장난을 누가 쳤다거나, 아니면 이치마츠 본인이 장난을 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받아줄거야 말거야?"
"미안하지만 그 사랑은 받아줄 수가 없다. 나는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니까, 이치마츠에게만 사랑을 줄 수는 없다는 거지. 좀 더 멋진 사랑을 찾아가는 건 어떻겠는가."
누가 봐도 어른스러운 대응이지 않은가, 하항?
"쳇, 재수없는 대답하기는. 알았어. 내가 노력할 테니까. 그러고 나서 다시 고백할 테니까 목 씻고 기다려."
이치마츠는 내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뒤돌아서 반대편으로 격렬히 도망쳤다. 으아아아아아하는 소리만을 내지르며. 붙잡을까 하다가 말았다. 진심이었나. 그보다 목씻고 기다리란 말은 보통 죽이겠단 말 아닌가? 으응? 이치마츠가 도망치는 모습 뒤로 벚꽃이 떨어지는 게 어쩐지 아름다웠다. 부끄러움을 타는 브라더인가. 사랑을 받아주려면 나도 노력해야 하나. 입을 맞춘 감촉이 갑자기 떠오르며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아, 아아, 아아아. 이치마츠.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그러다보니 문득 이런 고백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카라마츠 걸일 거라 생각했지만 보이가, 그것도 쌍둥이 친동생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제 곧 그와는 동생이자 연인이 될 지도 모른다. 조금은 애타게 만들어볼까. 쉽게 넘어가주는 건 재미없다고, 브라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편의 마무리가 조금 허술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번 편이라고 허술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앞편의 마지막에서 이치마츠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게 제대로 전해졌을까요. 그게 아니라도 써놓기야 했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요. 세계의 파괴자같은 소재거리를 쓰면서 해피 엔딩으로 갈 지 새드 엔딩으로 갈지 조금 고민했지만 해피 엔딩을 선사해주고 싶다는 게 앞편이었다면, 여지를 일부러 남겨놓고 새드 엔딩을 맞이하는 뒷편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그도 그럴게 세계를 파괴하는 그런 거 보통 악역이 하는 거라고요? 그걸 저지하는 게 주인공. 저지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다른 세계를 맞이하려 노력하는 것도 있죠. 이번 편 또한 아주 조금이지만 라이더 네타(빌드...)를 쓸까말까 엄청 고민했습니다만 마이너카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쪽도 마지막편 보면 토끼용 커플링을 파던 사람들이 비명 지를 급의 반쯤 오피셜 BL엔딩이라고요(아님 절대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하여간, 이번 편에 나름대로 왜 카라마츠가 이렇게 된 건지, 굴레에서 벗어난 6쌍둥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카라마츠가 바란대로 이치카라가 한 걸음 다시 내딛게 되는 결국은 해피엔딩을 썼습니다. 그리하야 진엔딩입니다. 기세로 쓰느라 피곤하네요. 스트레스를 이걸로 풀고 있네요. 이치카라 강화주간에 이어서 곧 빈잔 다음편도 가지고 오겠습니다. 2년만에 말이죠...하...ㅅ...
Posted by 하리H( )Ri
2018. 10. 1. 02:43
- 망상가득한 이치카라 소설
- 나의 ~마츠는 이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여러모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
- 글쓴이의 머릿속이 꽃밭
- 제목은 별 거 없습니다.

*

숨을 들이쉬면 너의 체취가 코로 스며든다. 그 체취만이 나를 안심시켜준다는 말을 차마 너에겐 할 수 없겠지. 몇 번이고 내 곁에서 네가 달아나고 말았던 건 내가 평생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내 곁에 있어달라고 말하고 난 뒤였으니까. 마치 헛소리인 양 하던 말들이 사실이었다는 듯.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데 할 수 없다는 건 이리도 답답한 거였구나. 이 체취를 영영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내 품에서 잠투정하는 널 살짝 쓰다듬으며 차라리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원을 빌어본다.

"아아―선샤인이 나의 안식을 방해하는군. 언제까지라도 잠들어 있을 줄 알았건만, 저 햇살에게마저 사랑받는 게 바로 이, 카라―"
"일어나자마자 잘도 지껄이는군, 쿠소마츠."
기본적으로 나는 카라마츠에게 좋게 말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할 수 없다. 상냥한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 것도 있지만, 그를 놓쳤던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가며 카라마츠를 잃느니 미움받는 사람으로나마 남아야 한다고 말해주기 때문일까. 그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리자 가슴 한 켠이 아파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난 이치마츠에게 미움받는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짓지만 입술 끝의 떨림에서 전해지는 숨길 수 없는 그의 마음은 바늘과도 같이 내 심장을 찌른다. 하지만 그의 서운함을 위로해줬다가 그가 떠나버리는 순간이 올까봐, 더욱 독을 품고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라마츠는 보기에 안쓰러운 패션을 하고선 집을 나선다. 자기 얼굴이 박힌 탱크탑은 대부분의 사람들 눈엔 자의식 과잉의 상징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의 자의식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은 같이 지내는 나라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치마츠! 카라마츠하고 잠자리 정리는 다 했어? 엄마가 집에 있는 거로 알아서 밥 챙겨먹으라 하셨는데 너만 밥 안 먹었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
쵸로마츠의 말에 정신차리고 방을 둘러보았다. 늦게 일어난 사람이 잠자리 당번, 그런 규칙이었는데. 너 이 새끼, 튀었겠다! 소중한 건 소중한 거고, 이따 오면 한 대 치리라. 6명이 누워 자는 커다란 이불을 정리하고, 적당히 남은 밥을 뭉쳐서, 적당히 주먹밥을 만들어 먹으면 쥬시마츠가 다가와 한 입 나눠주고, 설거지를 하고, 마당 쪽으로 나가 고양이들과 노는 시간. 매일매일이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백수 생활. 그런 매일에 변화가 찾아온 건 두세 달 전쯤이었나. 오늘처럼 마당에서 고양이들과 노는 와중에 느닷없이 낯선 기억들이 물밀듯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기억 속에서 나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내가 무엇이었는지 그 기억들 속에서 찾아내는 것조차 어려운 기억도 있었다. 다만, 딱 하나만은 같았다. 카라마츠와 내가 만나고,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면 그가 떠나버린다는 것. '내가 있으면 이 세계는 부서져버린다'는 말도 몇 개의 기억에서 들을 수 있었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뿌리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 후에도 오늘 아침처럼 불쑥 그 기억들이 떠오르고는 해서 혼란스러운 채다. 또다른 당사자인 그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털어놓기엔 믿기에 어려운 이야기라 속앓이하며 화풀이를 겸해 카라마츠에게 거칠게 대할 수밖에. 그도 지금, 자신이 있으면 이 세계가 부서진다는 생각을 끌어안고 사는 걸까. 그 전에, 정말로 그가 있으면 세계는 부서지는 걸까.
"오늘은 밖에 안 나가?"
등뒤에서 토도마츠가 등을 살짝 두드리며 말을 건다.
"그다지...나가든 안 나가든 별 다를 거 없잖아. 나가봐야 골목에서 고양이 찾아다닐걸."
"그래도 상관없어. 나가자, 이치마츠 형!"
수상한 하이텐션. 토도마츠에게는 분명 꿍꿍이가 있어보였다. 어차피 머릿속이 복잡한 거, 그 꿍꿍이에 타주도록 할까.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손목을 붙잡힌 채 토도마츠에게 끌려나간다.

"저기, 이치마츠 형. 요즘 고민이라도 있어? 안 그래도 어둠 오라가 넘치는 형인데 요즘은 뭐랄까, 어둡긴 어두운데 전보다도 혼자 끙끙대는 느낌이 들어서 말야."
토도마츠가 정곡을 찔러온다. 그런다고, 섞여든 기억에 관한 이야기같은 건 할 수 있을 리 없다.
"내버려 둬."
더 파고들지 못하게 날카로운 말투로 받아친다. 그럼에도 토도마츠는 팔짱을 끼며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오늘의 행선지도 카페일까. 토도마츠와 외출하면 카페에 들어가 신작 음료를 권유받아 토도마츠와 나눠마신다. 토도마츠 마음에 드는 음료라면 똑같은 음료를 한 잔 더 시켜서 마시고 그렇지 않다면 와플이라든가 케이크라든가 디저트 하나를 시켜서 먹는다. 이번에 끌려간 카페의 신작은 사과맛인가. 애플 어쩌고라고 써져 있는 이름도 참 긴 음료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는 그런 카페. 토도마츠는 들어가자마자 메뉴를 가리킨다.
"뭐 마실래? 아니면 디저트 먹을래? 여기 애플파이 맛있다고 SNS에서 소문나있던데, 오늘은 이치마츠 형이 먹고 싶은 걸 고르고 내가 거기 맞춰서 고를게. 언제나 내가 먹고 싶어하는 거 먹고 마셔줬으니까 오늘은 특별히!"
토도마츠는 기본적으로 밝은 편이지만, 방금은 유독 하이텐션이였다. 무슨 이유가 있나. 하여튼 그동안 고를 일이 없었다보니 메뉴를 봐도 핑 돌 뿐이었다.
"그럼 난 저거...애플 시나몬 어쩌고 하는 신작 메뉴로."
"그걸로 괜찮겠어? 날 위해서 신작 음료 골라준 건 아니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보더니 계산대에 가서 메뉴를 유창하게도 얘기하는 토도마츠였다. 나라면 분명 혀가 꼬였을 테지. 토도마츠는 자기가 계산하는 대신 음료가 나오면 받아달라고 하고 먼저 자리를 잡으러 갔다. 평소와는 다른 구석진 자리. 창밖에서 여자들이 지나가는 모습이나 커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짜증을 내던 녀석이었는데. 무언가 고민이 있나. 나보고 고민있냐고 물어보더니 사실은 자기가 비밀스런 일을 털어놓고 싶어하는 것인가. 음료 두 잔과 애플파이를 받아들고 자리로 향하면 토도마츠는 고맙다며 웃음짓는다.
"...이치마츠 형은 전생이라든가 윤회설? 뭐 그런 거 믿어?"
"글쎄... 있을 거 같긴 한데."
"하기야, 형은 내세내세 그러면서 가끔 지금 삶에 미련없는 척하니까 믿으려나."
미련없는 척이라니.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난 그런 거 안 믿었는데, 정확힌 안 믿었다기보단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뜸을 들인다. 신작 음료라던 라떼를 토도마츠가 한 입 마시고 나자 입술에 거품이 묻어났고 그는 자연스레 거품이 묻었을 부분을 혀로 핥아냈다. 어쩐지 목이 타서 집어든 다른 음료는 핫쵸코였나. 달지만 텁텁해서 더 목이 타고 말았다.
"만약에, 우리 6쌍둥이중 누군가가 세상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들으면 어떻게 할 거야?"
에?
"단순한 악몽이겠지만, 그런 꿈을 한 두 달 전부터 계속 꾸고 있어서. 그것도 흘러가는 결말은 똑같은데 꿈에 나오는 세계는 계속 바뀐단 말이지. 그리고 그 세계의 내가 사라질 때마다 얘기하는 거야. 그 녀석을 없애야 했어. 내가 주저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사라져버렸다고."
내가 꾸는 꿈과 같다. 아니, 조금 다른가.
"...요즘 원한이라도 품은 사람이 있는 거 아냐? 누굴 없애야 한다고 후회하는 꿈이라니 무서운데, 드라이 몬스터."
그냥 꿈 얘기일지도 모르니 시덥잖은 투로 얘기했지만, 목소리나 표정에 불안이 묻어날 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형들한테 원한같은 거 품지 않은 건 아니지만."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중에 누군가 세상을 파괴하는 사람이라 그 사람을 없애야 한다면, 형은 어떻게 하고 싶은가야. 꿈에서 내가 하는 절규가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사실은 꿈이라기보단 길을 가던 중에 머릿속으로 멋대로 흘러들어온 기억들이라 농담처럼 넘길 일도 아닌 거라 생각해. 그래도 말이야. 그런 말을 듣는다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무표정은 이내 일그러지며 눈물이 고인다.
"그런 말 하기 전에 그 녀석이 누군지를 얘기해야지. 설마 그게 나라고 얘기하고 싶은거야?"
같은 기억인걸까, 아니면 다른 걸까. 확실히 해둬야 했다. '그 녀석'이 카라마츠였다면 카라마츠를 부르지 않았을까. 왜 나를 불러낸 거지.
"형의 잠꼬대 들은 적 있어. 카라마츠 형한테 사라지지 말라고. 그걸 듣고 확신했어. 나랑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카라마츠 형이 어딘가의 세계에서 '자기가 있으면 이 세계가 부서져버린다'는 말을 해서, 그리고 어딘가의 세계에서 나는 그런 카라마츠 형을 없애지 못해서 후회하며 사라져버리는 거였다고. 꿈하고는 달랐어, 하지만 어딘가 털어놓기도 어렵고 믿고 싶지도 않고, 그럼에도 점점 믿게 되버리는 그런 심정이라 일단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었어..."
평소와는 달리 주위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눈물을 닦으며 우는 토도마츠에게 냅킨을 건네주었다.
"나도 비슷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나는 세계가 부서지는 장면은 못 봤지만 카라마츠가 그 말을 하는 건 몇 번이고 들었어."
최대한 덤덤하게 얘기를 한다. 그도 그럴게, 난 매번 카라마츠에게 고백을 했고 카라마츠가 떠나는 일의 반복이었으니까. 카라마츠가 세계를 부순다, 같은 스케일이 다른 황당무계한 얘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부끄러운 감정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기억들을 믿어야 하는 걸까. 카라마츠가 있으면, 이 세계는 부서지는 걸까..."
한가한 카페에서 갑작스런 세계의 종말론을 이야기한다.
"이치마츠 형은 고를 수 있어? 만약 카라마츠 형을 없애서 세계가 무사하다면, 그 길을 고를 수 있어?"
흐느끼면서 토도마츠는 말을 이어간다.
"애초에 이런 걸 믿고 고민하는 것도 바보같잖아. 그런데, 카라마츠 형이 소중해서, 다른 형들도 엄마 아빠도 소중해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소중해서, 만약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토도마츠는 진지하게 고민해왔던 모양이다. 아니, 나도 나 나름대로 진지했지만 방향성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내가 카라마츠에게 고백하면 카라마츠가 사라져버릴까봐, 그러니까 카라마츠를 사랑하는 일 따위 없게 하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세계가 사라지는 스케일이라. 그건 뒷전이었던 것이다. 그걸 뒷전으로 하는 게 잘못된 것인가? 애초에 어디서 흘러들어온 지도 모르는 기억이지만. 그걸 믿어야 할 지조차 모르는 거지만.
"카라마츠한테 물어보는게 가장 빠르지 않을까..."
나도 물어보질 못하면서. 그리고 그걸 물어보는 자체가 분명 카라마츠에게 상처를 줄 일이란걸 알면서, 편하게 대답해버린다. 토도마츠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또한 생각해 봤던 일일 것이며, 그게 카라마츠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뒤엔 서로 나누는 이야기 없이 나는 애플 어쩌고 하는 라떼를, 토도마츠는 핫쵸코를 홀짝이며 애플파이를 먹었다. 과연 맛있는 애플파이였지만, 미각을 느끼는 순간은 찰나였고 그저 씹어 삼키는 시간만이 길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을 데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치마츠 형도, 조금은 고민이 줄었어?"
토도마츠는 무리하게 밝은 톤으로 말했지만, 카페에 들어왔을 때보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도마츠는 어쩌면 나에게 답을 얻으려 했던 것일지 모른다. 의존하고 싶었던 거다. 카라마츠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아니, 그보다는 자신에게 흘러들어왔던 기억을 부정해주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조차도, 카페에 들어왔을 때보다 고민이 커졌다. 카라마츠가 나를 떠나버리고 나면 그 뒤 세계는 부서져버리는 결말이 오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그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은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길은 우연찮게도 인적이 드물었다. 그 장면이 유독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심란할 대로 심란한 나와 토도마츠는 그저 걸었다. 집에 카라마츠만 있다면 최고로 심란하겠는걸.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행히도 집에는 파칭코에서 털리고 왔는지 널브러진 오소마츠 형과 자격증 수험서를 거꾸로 읽고 있는 쵸로마츠와 야구배트를 코에 올리고 넋나간 듯 누워있는 쥬시마츠가 거실에 있었다. 아니지, 이것 또한 심란한 상황인데.
"헤에, 다들 심한 꼴 하고 있잖아. 무슨 날인가."
시덥잖은 농담을 내뱉었다.
"그쪽 두 사람도 충분히 심한 얼굴 하고 있는데. "
책을 거꾸로 든 쵸로마츠가 태클을 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더더욱 무서운 일이었지만.
"카라마츠 빼곤 다 있는 건가?"
널브러져 있던 오소마츠 형이 몸을 일으키며 얘기한다.
"그 녀석 오늘은 저녁 늦게 들어온다고 얘기했으니까 빼놓고 형제 회의 하자고."
형제 회의라. 그것도 카라마츠 빼놓고. 어쩐지 주제가 예상이 갔다. 2층으로 올라가 모여앉았다. 다시보니 쵸로마츠도 평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다들 심란함이 끼어있었던 탓일까 애써 태연하려 만들어낸 얼굴 표정인지도 모른다.
"까놓고 얘기해도 되지? 다들 이상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지? 카라마츠가 세계를 부순다던가 하는 그런 황당한 기억 말이야."
오소마츠 형이 말을 꺼냈다. 그는 황당하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런 점이 모두를 안심시켰는지 조금 긴장이 풀어진 표정을 했다.
"너희들 일이라면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지만 사실 쵸로쨩 얘기 듣고 떠본 거지만."
떠본거냐.
"쵸로쨩이라 하지마. 기껏 고민하다가 털어놓았더니 그런거 믿냐고 실컷 웃고선 자기도 그런 일 있었다며 말했던 것도 분해 죽겠는데.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더더욱."
불만스럽게 얘기했지만, 쵸로마츠는 오소마츠 형에게  털어놓고 마음이 편했던 걸까.
"그래서, 우리는 뭘 하면 돼?"
쥬시마츠가 사뭇 진지하게 묻는다. 우린 뭘 하면 될까.
"일단 모두의 이야기를 모아보는 게 좋지 않겠어? 다들 어떤 기억들이 들어왔는지 얘기해보자고."
쵸로마츠가 의견을 내서 모두가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다. 다들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이름과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갔지만 어떻게든 여섯이 얽혔던 모양으로, 카라마츠가 자신이 세상을 부수는 존재라고 얘기했던 몇 번의 일이 있었던 것과 그 말마따나 카라마츠에 의해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카라마츠가 어떻게 세계를 부수는 지는 누구도 정확히 보질 못했지만 카라마츠로부터 서서히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딱 한 번이지만 쥬시마츠가 봤다고 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치마츠는 혹시,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지 못한거야?"
오소마츠 형이 물어온다. 그렇지. 사실 나는 카라마츠가 떠나는 장면만 수없이 봤을 뿐 그 뒤에 세계가 부서지는 일은 보지 못했으니까.
"나 알고 있는 게 있는데 이야기해도 될까, 이치맛쨩?"
이렇게 또 그는 집요하게 밀고 들어온다. 알고 있는 거라니...
"이치맛쨩, 엄청난 순애보던데?"
에? 순애보? 아, 설마!
"순애보라니 무슨..."
토도마츠가 물어본다. 다들 내 쪽을 보고 있다. 잠깐!
"그렇게 세계가 부서지는 강렬한 기억 속에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좋아하는 모습이 몇 번 보였단 말이지. 마치 지금처럼 말이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데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방황하는..."
"그런 거 아니야!"
오소마츠 형의 말을 끊었다.
"미안한데 다들 눈치채고 있거든? 아, 카라마츠는 모를지도. 그 녀석 눈치는 너무 왔다갔다 한단 말야."
쵸로마츠도 한 마디 거든다.
"어...그러니까...어..."
말문이 막혔다. 일부러 더 튕겨내고 구박하고 그랬는데. 눈치채고들 있었던 거야? 그리고 다른 세계의 내가 그러고 있는 거조차 다 들킨거야? 죽자. 당장.
"걱정마. 다들 응원할거야, 그쪽 면은. 사람의 감정이란게, 그런 거잖아?"
그런 식으로 위로하지 말라고! 망할 장남 새끼가!!!
"너처럼 그 뭐냐...연인이 되고 싶다던가 그런 감정이 아니더라도 우린 카라마츠가 소중하니까. 카라마츠를 없애야 한다고 듣는다면 그 말대로 정말 없애야 할지 어떨지 고민하게 되잖아? 저울질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없애야 했다는 절규조차도 정말 그걸로 세계가 부서지는 게 막아지는 것인지 알 길도 없고 말야."
냉정한 척 하면서 얘기하지만 쵸로마츠의 말에는 역시 카라마츠를 없앤다거나 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다는 말이 담겨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안심해도 되는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럼...이미 알고 있으니까...내 기억도 얘기할게..."
내가 고백하면 카라마츠가 떠난다는 것을 말했다. 내게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카라마츠가 날 떠나는 이후에 세계가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하는 결론을 조심스래 내리자, 다들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쳐내기만 하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토도마츠는 슬픈 표정으로 얘기했다.
"카라마츠 형이 떠난다는 것이 형의 고백을 받지 못하고 떠나든 자신을 미워한다고 하는 형을 위해 떠나든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떠난다고 했지만 우린 카라마츠 형이 세계를 부수는 걸 봤으니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린다는 의미랑은 좀 다른 거 아닐까? 어떻게 해서 세계가 부서지는지, 그 원인을 모르는 이상..."
"하긴. 다른 세계에서는 지금처럼 서로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을테니 단순히 없애면 된다는 결론을 내려도 이상할 것 없었지만,  이치마츠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다면 얘기가 좀 다른가."
음? 얘기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러면 아예 이러면 어떨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주고 둘이 사이좋은 연인 사이가 되면 해결되는 거 아냐? 다른 세계에서 그런 모습 못 봤고, 시도해 볼 만한 거 같은데."
황당한 소리하지 말라고 장남!!!
"카라마츠를 때려 죽이는 것보다는 나은 거 아닐까. 애초에 카라마츠를 없애면 이 세계도 같이 빠이빠이 해버리는 걸지도 모르고. 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동조하지 말라고 딸딸마츠!
"그것 참 뭔가 세계를 구하는 아름다운 작전 같아서 어쩐지 마음에 들어. 열심히 도와줄게, 이치마츠 형!"
아까 울면서 카페에서 얘기한 건 뭐가 되는 거냐고!
"아하하, 카라마츠 형이 웃으면 분명 해결되는 걸거야, 힘내 이치마츠 형아."
그런 문제였던 거냐, 쥬시마츠!
"잠깐...나 이 상황을 따라갈 수 없는데?"
얼떨떨한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대응하자는 것인지.
"당연하지.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이 상황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으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에 걸어보는 거야."
오소마츠 형이 씨익 웃으면, 어쩐지 그 말대로 하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모두에게 해피 엔딩을. 그 해피 엔딩을 자기가 억제해왔던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 것이다. 다만, 수많은 세계에서 나는 카라마츠에게 거절당했다. 허튼 고백은 수많은 세계에서와도 같이 절망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말 것이다. 도와줘,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나를 보고서 웃어주었다. 세계를 구하는 고백 작전의 막이 올랐다.

**

언제나의 다리에서 헌팅, 산책, 그리고 치비타네 가게에서 오뎅을 먹으며 수다떨기. 우연히 마주친 오소마츠에게는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간다고 말을 해 뒀지만, 사실 별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일찍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이치마츠에게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잠결에 그가 따뜻하게 자신을 안아줬던 걸 느꼈다.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솔직하게 얘기해주질 않았다. 최근의 이치마츠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가시돋친 말들에 애정이 담겨있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데에선 나를 아껴주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이지.
기분나쁘다고.

***

고백이라고는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도 그럴게 우리 모두 동정이고. 고백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성공해본 적이라곤 없었고. 그리고, 그동안 미워하는 모습만 보였던 상대에게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카라마츠도 우리처럼 다른 세계의 기억을 가졌다면 경우의 수는 더 복잡해진다. 그가 자신이 세계를 부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다른 세계에서처럼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런 사람이니까. 상냥하니까. 어느 세계에선가, 그 세계의 카라마츠는 그 세계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세계를 부숴버리는 천하의 악당이라, 누군가 곁에 있어달라고 바란다고 해도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 가장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 나같은 건 나쁜 녀석으로 남겨두고 더욱 사랑하는 것을 찾기를 바란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푸른 불꽃이 세상을 뒤덮었던 기억이 난다. 그 불꽃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지만, 아마 그 불꽃에 그 세계가 삼켜졌던 것이겠지.
다른 형제들은 박아뒀던 연애지침서나 스마트폰, 잡지 같은 걸 뒤적이고 있다. 보기만 해도 촌스러운 고백하는 방법 찾기에 열을 올린다. 자기가 할 고백이 아닌데도 진지하게 임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솔직히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좋은 방법을 찾는다 한들, 내가 그걸 해낼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치마츠 형도 생각하고 있는거지?"
토도마츠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물어본다. 아마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보다 이치마츠 형아는 카라마츠 형한테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 아냐? 분명 카라마츠 형아는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
이런데서 예리하네. 쥬시마츠 말도 맞다만. 어느날 맨날 괴롭히던 녀석이 미안하다고 하면 상대방은 어떤 기분일지 모른다. 용서하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전에 에스퍼 냥이 써보면 어때? 진심을 전해줄 거 아냐?"
"가볍게 말하지 마, 바보 장남. 자기 입으로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사과가, 사랑 고백이, 그렇게 쉽게 상대방의 마음을 열 것 같아?"
"하아? 어느 입이 그런 소리를 할까? 맨날 사과할 일 있으면 눈치보다 미안하다고 작게 중얼거리고 뻔뻔하게 아무일 없는 양 구는 딸딸마츠가 할 말일까나?"
"조금만 틈이 나면 놀리지! 그러는 넌 사과 제대로 하기는 하냐? 놀림받고 난 뒤에 제대로 사과받은 적 거의 없거든?"
차라리 저런 관계였다면 고백이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차에 카라마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달려나갔지만 나는 방 안에 주저앉고 말았다. 카라마츠가 돌아오자 조금 무거운 공기가 되고 말았다. 황급하게 고백 관련한 것들을 숨기고 이 방 저 방에 흩어져서 태연한 척을 하느라. 카라마츠는 어떻지? 다른 세계의 기억을 갖고 있는 걸까? 그래서 그 무거운 마음에 이제야 들어온 것일까. 저녁밥을 혼자 밖에서 때우고 온다는 건 드문 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만 카라마츠는 나 혼자 있는 방에 잠시 들렀다 나가버렸다. 곧이어 TV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모두가 잠들 때까지 카라마츠는 거실에 머물렀다. 아니, 아예 거실에서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오늘의 옆자리는 허전했다.

****

불행 하나. 카라마츠는 고백을 결심한 그날부터 날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엄마 앞에서 능숙하게 기침을 하며 감기 걸렸다는 핑계를 대며 거실에서 혼자 잠을 잔 지 벌써 일주일 째. 나와 단 둘이 남는 일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집에도 잘 남아있질 않았다. 공원에서 자주 시간을 때운다는 쥬시마츠의 보고가 있었다. 거기서 기타를 치기도 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고도 했다. 다른 세계의 일을 알고 있는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조차 물어볼 수 없었다.
불행 둘. 썩을 동정놈들답게 고백을 어떻게 할지조차 난항을 겪고 있다. 그냥 심플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리라는 말을 들어도, 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고백 얘기를 하기 전에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 사과를 할 타이밍을 찾기도 어려운 게 현재 상태.
불행 셋. 다른 세계의 기억들은 점점 더 우리 형제를 잡아먹어만 갔다. 모두 악몽을 꾸고 일어난다. 나에게도 이젠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에 카라마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마다 거절당하는 내가 있다. 반쯤 연인이었을 때에도, 종속관계로 얽혀 날 거부할 수 없을 때에도, 나는 수많은 세계의 카라마츠에게 끌렸고 그때마다 지금 세계의 형제인 카라마츠에게도 강하게 끌렸지만 그 마음이 전달되지 못하고 좌절하는 순간을 반복했다. 아니지, 마음은 전달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때로 웃으며, 때로는 날 힐난하며, 때로는 무표정으로 내 마음을 쳐냈다. 그 결말이 모두 세계를 부수는 카라마츠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싫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나를 좋아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제각각의 나의 고백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실패의 암시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나의 고백이 성공할 가능성 같은 건 0에 수렴해가고 있었다. 고백방법을 의논해주던 모두도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더이상 누군가에게 맡겨둘 수는 없었다. 깊게 생각한 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고백하자. 그런데 만약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땐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거절당한다면 그걸로 괜찮지만, 고백에 실패한다면 세계가 부서질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기세좋게 달려나갔다가도 멈추고 만다. 일단 공원으로 향한다. 아, 정말로 카라마츠가 있어. 카라마츠는 기타를 치고 있었다. 노래까지 부르면 안쓰러웠을텐데 그저 기타만을 튕긴다. 입고 있는 복장의 안쓰러운이 주변 사람들이 다가오는 걸 물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멀찍이 기타 선율을 듣고 있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나도 멀찍이서 그 선율을 듣고 있었다. 아쉽게도 무슨 노래인지 모르지만. 자작곡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타 소리가 멈추고 정신을 차려보니 카라마츠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기타를 챙겨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셈인지 공원 밖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뒤를 쫓았다. 둘 다 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걸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지 않도록. 신호등에 걸려 카라마츠를 놓칠까 싶으면 카라마츠는 그 자리에 멈춰서 나를 보았다. 초록불로 바뀌면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그렇게 강둑에 도착해서 또 걸었다.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으려 했고, 그는 속도를 올리지 않은채 그저 걸었다. 어느새 나는 카라마츠 옆에 와있었다. 그 상태로 계속 걸어나갔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말 한마디 없이 걷다 카라마츠가 멈춰섰다.
"이치마츠. 나는 잘 모르겠다."
며칠만에 나에게 한 첫 말이다.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날 좋아해주는 네가 보인다. 그런 게 언젠가 기분나쁘게 느껴져서 며칠은 널 피해보려 했다. 그러면 네가 날 찾으려 한다. 네 마음을 모르겠다. 싫어한다면 싫어하는대로 좋아한다면 좋아하는대로 표현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걸 기다리기는 게 지친다. 이런 게 보통의 형제의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투닥거리는 오소마츠와 쵸로마츠와는 달라. 서로 다정하게 아껴주는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와도 달라. 깨어있을 땐 독을 품고서 심한 소리를 해대는 네가 내가 잠든 사이에 다정하게 대하는 걸 느껴버리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의 감정이 한 가지로 수렴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이제는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을 하든 싫어한다고 말하든 네 감정을 생각하는 일을 포기하고 말 것만 같다. 더는 상처받기 싫고, 널 생각하느라 고민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며칠 이렇게 너에게서 도망쳐서 다니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마 이전처럼 널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
고백도 전에 차였다. 그것도 엄청 딱딱한 말투로.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카라마츠는 나를 이해하려다 포기하려 한다. 안돼. 그러지마. 포기하지 마. 그것보다. 내 말을 들어줘. 사과하게 해줘. 내 마음을 전하게 해줘.
"그건 안돼."
작지만 분명하게 말을 꺼냈다.
"너무 늦었지만, 얘기하게 해줘."
카라마츠는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놀랐던 모양인지 눈이 평소보다 커진 느낌을 받았다. 물론 카라마츠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미워하지 않아...그보다 좋아하고 있다고. 안쓰러운 말투나 행동에 심술을 부렸던 게 어느샌가 평범하지 않은 감정이 커지면서 카라마츠를 밀쳐내는 걸로 바뀌어가고 말았어. 상처를 줘서 미안해. 늘 상냥하니까, 이해해준다고 멋대로 착각해서 미안해. 잠들었을 때같이 직접 대면하지 않을 때에야 상냥하게 대해서 미안해. 이렇게 카라마츠가 배려해줘서 시간을 만들어 줄 때에야 비겁하게 사과하는 나라서 미안해."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꽉 쥐었다. 용서받지 못해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이렇게 사과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기회를 만들어준 덕이니까. 카라마츠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깜깜해지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쌀쌀한 바람이 스친다.
"진작 이렇게 얘기해줬으면 좋았을 걸. 나도 빨리 용서할 수 있었을텐데. 서로가 더 상처받기 전에 끝났을 텐데."
과거형으로 말하는 그로부터, 어쩐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용서할 수 있어. 이해했으니까. 하지만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겠네."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어? 어째서?
"평범하지 않은 감정이 커져서 날 밀쳐냈다고 하니까. 형제애 이상의 감정인거지?"
아.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개를 끄덕일 때가 아니지.
"그래. 언젠가부터, 카라마츠가 좋아졌어. 늘 같이 있고 싶고, 손 잡고 싶고, 더한 것도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졌어. 평범하게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그런데..."
그러고보니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흘러들어오기 전에도 나는 그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형제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그 감정을 묻어두기만 했다. 묻어두는 반발로 카라마츠에게 심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흘러들어온 기억 속에서 카라마츠가 떠나기보단 차라리 내 감정을 숨기고서라도 옆에 남아있어줬으면 하는 게 우선시되어 더 밀쳐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말하고 붙잡아야 한다. 수 십번을, 수 백번을, 셀 수 없는 삶을 돌고 돌아 여기서 그를 붙잡아야 한다.
"카라마츠, 사랑해."
그렇게 말하고 끌어안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저 고백하는 걸로 끝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세계가 부서진다니, 황당무계한 사랑 이야기라면 당연히 행복한 결말이어야 한다고. 카라마츠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 상태에서 입을 맞췄다. 입을 꾹 다물고 버티던 카라마츠는 이내 저항을 멈추고 혀를 내 입술로 밀어넣었다. 혀를 섞으며, 눈을 감으며,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으...으으..."
갑자기 카라마츠가 혀를 빼더니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고선 비명을 질렀다.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과 터져나오는 절규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이치...마츠..."
이름을 겨우 불러주었다.
"미안...하다...역시...혼자 있게..."
"무슨 일이야? 많이 아픈 거야?"
"내가...내 탓에...이 세계가 부서진대..."
이 시점에서 다른 세계의 기억이 흘러들어와버린 것인가?
"어느 세계에서의 내게 내려진 벌이라나봐...그런가...이치마츠..."
카라마츠는 한 손으로 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미안하다...넌 수없이 많은 세계에서...지금처럼 날 좋아해 줬구나...그리고 난 그걸 다 거절했지...여기서 나는 널 받아들여야 할지...거절해야 할지...그걸로 무언가 바뀌는지..."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이 고통과 불안감은 가슴팍을 타고 내게 전해졌다.
"밑을...보지 마...그리고 여기서...전력을 다해 도망쳐..."
카라마츠는 나를 밀쳤다. 어느새 카라마츠의 심장 부근으로부터 바닥을 향해 균열이 이어지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발바닥에는 검은 균열이 점차 퍼져 내 발밑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 균열이 뻗어가 세상이 부서지는 것일까. 순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형제들이, 부모님이, 친구인 고양이들이, 알고 있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달린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할 수야 없겠지만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카라마츠를 다시 끌어안았다.
"무슨 짓이야, 이치마츠..."
"널 두고 갈 수 있을리가 없잖아. 마지막을 함께 하자고. 대신 딱 한 마디만 해줘."
"무슨..."
"이번엔 거절하지 말아줘."
"그런가. 나도 사랑한다고, 이치마츠."
조금 무서웠다. 조금이 아닌가. 바지에 오줌을 지려도 넘칠 정도로 무서웠다. 그래도 카라마츠가 함께 있다. 세계가 카라마츠 탓에 부서져버린대도, 거기에 내가 끼어드는 운명이 계속 된대도, 그 결과 이런 결말을 맞는대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서로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진다면, 그건 분명 해피 엔딩이겠지. 메리 배드 엔딩이라고 하던가. 이런거.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며 다시금 키스했다. 이 감촉을 잊지 말고 다른 세계로 전하자. 카라마츠가 날 끌어당겼다. 나도 카라마츠를 끌어당기고서 세계의 종말을 맛봤다.

*****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다. 니트 여섯 쌍둥이는 늘어져 있다가 한낮이 되서야 몸을 일으킨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은 카라마츠. 커다란 이불을 개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한다. 쌀쌀해진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다같이 산책을 하러 나섰다. 왁자지껄 떠들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제각각 자신의 놀거리를 찾아 나선다. 카라마츠와 나는 단둘이 남겨졌다. 공원에 들러 벤치에 앉아 고양이와 놀았다. 고양이와 논 것은 나 혼자로 카라마츠의 주변에는 고양이가 다가오지 않아 카라마츠는 울먹거렸다. 공원을 나와 걸었다. 내가 뒤쳐지면 카라마츠는 멈춰서서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강둑에 도착해 계속 걸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어둑해졌다. 오늘 하루동안 낙엽이 제법 떨어졌는지 사각사각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쌀쌀한 바람이 스쳤다. 그럼에도 우리는 걸어나갔다.
"시간 참 빠르네."
"벌써 가을이라니 빠르긴 하지. 벌써 올해가 다 가버리는군."
그 말도 맞네. 벌써 올해가 다 간다니. 니트라 실감은 못 하지만.
"오늘 하루가 빨리 간다는 얘기였어. 해가 빨리 져서 그런가."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딱 밤이 되기 전 이 시간이 참 로맨틱하지 않은가."
"로맨틱은 무슨. 추워서 얼어죽게 생겼어. 바보 아냐?"
"이런 날에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따뜻해지라고 불을 질러줄 수 있을 것 같다만."
"로맨틱은 무슨 음흉하잖아. 최고야."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강둑 어느 지점을 돌아 다시 집 방향으로 걸었다.
"불이라도 지필까."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브라더?"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길을 걸을 예정이거든. 1초 뒤에."
그러고선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
"훗, 과연. 혀의 마찰열로 불을 지펴볼까."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갖다대는 그를 맞이하여 입술을 부딪히고 혀를 섞었다. 시간 참 빠르다.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며칠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의 종말을 맞이했을 터였다. 어둠에 삼켜져,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며, 그럼에도 서로를 끌어안고 세계가 부서질 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아득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계가 무너지기 전 강둑에서 카라마츠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카라마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런 카라마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이치마츠."
"뭐가 정답인데."
"너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길 잘했다는 거다.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왔어."
그런 게 어딨어. 편의주의 전개인가? 겨우 고백 받아준 걸로 세계를 구한 거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네.
"다른 세계인거 아냐? 우리들 기억만 가지고 있는 거라든가."
"그렇지 않다. 아직 이 세계는 다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서 균열이 보이거든."
주변을 둘러봤지만 균열이 있지는 않았다. 이것만큼은 카라마츠에게만 보이는 건가.
"벌이라면 이제 충분하다고, 나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라는군."
카라마츠는 세계를 부수는 존재라는 벌에서 해방된 모양이다. 애초에 왜 그런 벌을 받게 되었는지, 그런 일이 왜 필요했는지 궁금증은 산더미같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마도 곧,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은 잊혀진다고 하네. 다른 세계의 기억 같은 거, 갖고 있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원래라면 그렇지만, 조금 서운했다. 카라마츠가 고백을 받아준 이유 중에는 수많은 세계에서 이치마츠가 고백했던 것과 그걸 거절한 그의 기억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테니까.
"중요한 건, 감정이겠지. 그런 기억 없이도 난 널 좋아했다고."
조금 삐진 듯 얘기해버렸다.
"아, 알고 있다. 그런 기억 없어도 나도 널 좋아할 테니까."
그렇게 돌아와서 모두에게 보고를 하고, 커플이 된 기념으로 모두에게 쳐맞고, 간만에 같은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슬슬 기억이 옅어지는 거 같네." 
"훗, 세계의 균열도 제법 옅어졌다."
"나도 보고 싶은데, 그 균열. 발밑에 시커먼 균열만 봐서 세계가 어떻게 갈라졌는지 궁금하거든."
"별로 좋은 것도 아니다. 마음 한 켠에 죄책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세계가 나를 트리거 삼아 사라진 것도 사실이니까."
"이젠 괜찮으니까. 그렇게 떨지 마. 끌어안고 있기보다 뛰어서 집에 가는 편이 훨씬 따뜻하겠어."
"그러지. 가서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강렬한 아픔을 희석시켜 보자고, 허니."
"허니라는 말은 집어치워, 썩을마츠."
"슬슬 애칭으로 부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치마츠."
"이치마츠로 됐어."
"논논. 허니, 베이비, 마이 리틀 이치~"
"어디서든 그런 식으로 부르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을거야...제발 평범하게 불러."
발걸음이 빨라졌다. 카라마츠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내 속도가 느려지자 카라마츠가 손을 잡아주었다. 손을 잡고 함께 달렸다. 달리다 보면, 겨우 고백해서 그와 연인이 되었다는 실감이 난다. 무엇이 날 고백하도록 떠밀어주었던가. 아. 카라마츠가 삐져서 며칠을 날 피해다녔었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고백하려 했었지. 왜 다른 형제들이 나를 위해 고백 방법을 찾아주었지. 아무렴 어때. 이렇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다. 그걸로 분명, 충분하다.


 

----------------------------------------------------------------------------------------------------------------------------------------
제목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라이더 네타를 썼다 해야하나.
전부터 가면라이더 디케이드의 설정은 한 번 쯤 써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별 생각 없이 깊게 이야기를 안 짜고 써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파괴자라니 이 무슨 중2중2한 설정인가. 거기서도 왜 주인공이 파괴자인지 목적은 무엇이고 그런 거 안 나왔으니 여기서도 대충입니다. 고백이 성공하면 세계가 구원받는다는 건 데이트 어 라이브도 생각나고 하여튼 그렇군요. 평행세계를 좀더 자세히 쓸까 하다가 살짝이 힌트만 넣었습니다. 평행세계의 기억들이 들어왔을때 반응도 좀더 쓰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집중하기 위해 뺐습니다. *만큼만 썼을 땐 카라마츠를 없애자는 1356과 그럴 수 없어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는 4의 이야기였는제 1356의 태세전환을 시켜줬습니다. 사실 오소마츠는 그렇게 해서라도 다른 형제들을 지키려면 카라마츠를 없애자는 쪽으로 내볼까 하다가 관뒀습니다. 모두의 해피 엔딩을 꿈꿨습니다. 간만에 단편치고 좀 길게 썼는데 반으로 나눌 계획이었을 때와 플롯이 또 틀어져서 그렇네요. 단편 쓸때도 이럴진데 장편 쓸때는 엄청 흔들리죠...늘 죄송합니다...
이치마츠가 무척 이치마츠답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기세로 이해해주세요.
오소마츠상이나 2차창작에 대한 열의가 많이 식었지만 망상이 멈추지 않으니 가끔 이렇게 쓰는 것도 좋네요. 극장판 영화도 나오고 하니 3기가 또 기대되는 건 저만은 아니겠죠.대충 뭐, 늘 이치카라 행쇼입니다. 카라른 행쇼고, 그 외에도 다 행쇼에요ㅠㅠ 올해 안엔 장편 저거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편 준비했습니다. 이어지지만 이 편 하나로도 자체완결이니 꼭 읽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만 조금 더 설정설명이 된 부분이 있어서 읽어주시면 진자 떙큐합니다. 진엔딩...같은 거?
Circle of Life (true end)
http://heartrainon.tistory.com/188
Posted by 하리H( )Ri
2018. 5. 14. 00:42
스팀펑크AU로 설정을 짜다 몇 가닥이 나왔습니다. 간만에 쓰네요. 뒷얘기를 써야 하는데, 이것 말고도 써야할 뒷얘기가 너무 많아서 일단은 단편인 것으로. 세계관이 넓어져서 솔직히 괴롭군요.
지구가 환경이나 자원 문제 등으로 파괴되고 우주 개척시대로 제 7지구까지 거주지구를 만들고 지구는 모성이라 부르며 복원하고 있는 세계 연방정부가 부패하며 민중을 핍박하게 되고 그 횡포에 못 견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데 헤소쿠리에 있던 스팀펑크를 2차 혁명전쟁 즈음으로 대강 짜고 얘는 뭐, 얘는 뭐 짜는데 아무래도 오소마츠는 무법자, 카라마츠는 현상금 사냥꾼(정확히는 모르겠음) 이게 그림이 딱 나와서리... 망상전개 풀파워! 로 그 프리퀄 느낌으로 썼지만 솔직히 짜놓은 설정 내에서 쓴 거라 저 말고는 뭔 내용인지 잘 모를 거 같네요.

----------------------------------------------------------------

  초점을 잃은 눈에 비치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 그를 봤을 때 든 생각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자신과 닮아있다는 점이나 내 또래가 이런 곳에 또 있다는 점은 그 후에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곳의 어른들보다도 더 깊고, 흐려진 그 눈에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내가 다가가서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쪽으로 날 데려온 아저씨에게 눈짓하자, 아저씨는 녀석 옆에 있던 사람을 불렀다.
“이쪽에 쓸 만한 꼬맹이가 있다고 들어서, 우리 쪽 꼬맹이를 데려왔는데…”
“오! 꼭 닮았구만. 하긴, 집 잃은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 게 요즘 세상인데, 헤어진 형제가 이런 데서 만나도 이상할 건 없겠지.“
녀석은 이쪽을 바라봤다. 여전히 깊고도 흐린 그 눈에 정말 내가 비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녀석은 무표정인 채였다.
“자, 자기소개라도 해두라고. 너도 그동안 또래가 없어서 외로웠을 테니 저 애를 너와 같은 조로 편성해줄까 하거든.”
아저씨가 등을 세게 두드리며 격려해줬다.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안녕? 난 오소마츠! 우리 둘 얼굴도 상당히 닮았고 해서…하여간 무언가 인연이 있는 거 같은데 친하게 지내보자고~”
대답 대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그 눈에는 내가 비치는 건가. 손을 내밀자 그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고 내가 다시 입을 열려 하자 그가 답을 했다.
“난…이름은 없고…그동안 같이 지내던 애들은 날 모지리라 불렀어. 잘…부탁해…오소마츠.”
말투는 건조할지언정 성실하기 그지없는 대답이다. 무심코 피식, 하고 웃자 그도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아저씨들은 우리를 배려해선지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기.”
모지리…라고 초면에 참 실례되는 말을 하긴 그래서 그냥 불렀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옆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한…2주 정도.”
“그렇구나. 난 1달 반 쯤 있었나?”
그는 나를 슥 쳐다보더니 들고있던 라이플을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 뭘 했어?”
여기서 뭘 했냐라. 이런 데서 보기 드문 또래에게 물을 만한 건 이런 거 정도려나.
“너한텐 내 얘기를 아무도 안 해준 모양이네. 나도 너처럼 총 들고 전선에 있었지 뭐. 여기 모인 사람들이 뭐 별 거 있냐, 다 연방의 횡포에 들고 일어난 사람들인데.”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녀석은 날 봤지만 이내 아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너도 비슷한 거야?”
“비슷할 지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총을 들고 맞서는 것밖에 없으니까…”
운좋게도 교전이 없던 날이었다. 나는 그와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잃어버린 쌍둥이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그 얘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있던 곳에도 얍삽이라 불리던 얼굴이 똑같은 아이가 있었다는 말엔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이 곳에 오기 전 그 아이를 포함해 함깨 있던 아이들과 헤어져버린 처지에 놓인 그에게 차마 먼 기억 속의 흐릿한 이야기 같은 걸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도 어떤 신부에게 거두어져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교회에서 이것저것 배우며 자라왔던 얘기를 했다. 글자라든가 산수라든가, 아것저것 배운 것들을 자랑스레 떠들면 반짝이는 눈으로 그가 바라보았다. 이곳저곳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버려진 아이들의 가장 노릇을 허며 살아온 그는 무언가 배우는 걸 동경했던 것일까. 변변찮은 이름 하나 없을 정도로 고단했던 삶이었지만, 그마저도 부서져버린 채 사지에 몰린 것에 동정심이 생겼다. 뭐, 그렇게 치자면 눈앞에서 자신을 받아들여준 것들이 모두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도 만만찮게 불쌍한데. 불쌍한 사람끼리 뭐 어때. 선물이라도 하나 주자고.
“저기, 괜찮다면 내가 이름를 지어줘도 될까?”
“에?”
“뭐 지어준다고는 해도… 아는 사람 이름이긴 한데.”
이름이 입속에서 맴돌았지만 바로 얘기할 순 없었다.
“아까 한 얘기에서 나왔던 사람이야?”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가 묻는다.
“응. 나한테 오소마츠라는 이름 지어주고 돌봐줬다는 신부님.”
“소중한 사람 아니야? 나한테 같은 이름을 줘버리면…”
오늘 처음으로, 그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기 얘기를 할 때도 그다지 무표정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터였다. 나를 위해, 다신 만날 수 없는 신부를 위해 슬퍼해주는 구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다고 확신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 신부님하고 너하고 어쩐지 비슷한 느낌도 들고. 무척 소중한 사람이지만, 이렇게 해서 이름만이라도 계속 누군가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 이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까.”
그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락이라도 구하려는 걸까. 눈물이 살짝 맺히는 것을 난 놓치지 않았다.
“카라마츠, 라고 해. 자기 이름이랑 비슷하게 내 이름도 오소마츠라고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신부님도, 너도, 카라마츠야.”
“카라...마츠.”
“어떻게 쓰는지는 알겠어?”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고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다 흙바닥에 카라마츠라고 적었다. 그리운 이름이다. 카라마츠 신부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그의 상냥한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 했다. 돌을 건네주자 그는 글씨를 지렁이 기어가듯 따라쓰며 카라마츠, 카라마츠하고 중얼거렸다. 울컥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선 날 보고 생긋 웃었다. 눈에 맺힌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아. 역시나. 그의 미소는 신부의 상냥한 웃음과 닮아있어.
“고마워, 오소마츠. 이 이름 소중히 할게.”
“카...카라마쯔…흐아아…”
결국 눈물이 나왔다. 한번 흐르는 눈물은 깊이 묻기로 했던 슬픔을 데리고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날 이후 복수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혁명군에 뛰어들은 뒤 잊고 있던 그리움도 같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신부에게도, 그 작은 교회에서 함께 지내던 녀석들도, 구박하다가도 점점 마음을 열어준 마을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구나. 그날 미친듯이 달려 등진 불타는 풍경을 복수심으로만 바꿔 살아왔는데. 소중한 시간들이었다는 걸,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실감하고 말았다. 녀석은, 카라마츠는,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상하지. 아까 녀석한테 내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한참 눈물을 흘리고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게 울 정도면, 이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카라마츠의 미소가 사라지고 다시금 슬픈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냐. 미소, 아까처럼 미소를 징어주면 좋겠어.
“슬픈 기억이지만, 네 이름을 부른다고 항상 슬프거나 하지는 않을거야. 그러니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웃었음 좋겠어. “
멋쩍게 머리를 긁으면 카라마츠가 돌을 건넨다. 오소마츠 이름도 적어줄래? 하듯이. 오소마츠,라고 땅바닥에 적으면 카라마츠가 다른 돌을 주워다 오소마츠, 오소마츠, 카라마츠, 카라마츠, 중얼거리며 흙 위에 써내려간다.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며 다시 웃는다.
“기억했어.”

  연방에 대항해 일어난 레지스탕스의 이른바 ’혁명’은 처음부터 먹구름 일색이었다. 가족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물론 나름의 구심점이나 연방군 장교였던 사람 등에 의해 군사작전 같은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했고 일반 시민들이 연방의 보복이 두려워 도움을 주거나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것도 한몫했다. 대의, 또는 기폭제, 또는 희생이라는 게 부족했던 탓일까. 일반 시민을 움직이지 못한 혁명은 반란에 불과했다. 연방을 거스르는 자들의 본보기로 토벌될 운명이었다.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이들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싸운다는 선택지 외엔 남아있지 않았다. 항복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전처럼 핍박받는 삶으로라도 돌아갈 수 없다.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며 옥살이를 하거나 죽는다. 그런 막다른 길목에 놓인 채 몇 달이 흘렀다. 소규모 교전이 이어지다 연방이 대대적 소탕작전을 선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제 3지구에 있는 레지스탕스군의 최후 방어선, 그러니까 오소마츠와 카라마츠가 있는 전선에는 제 1,2지구의 비보가 연달아 전해졌다. 죽음은 파도처럼 서서히, 그러나 성내듯 밀려오고 있었다. 어른들은 결정했다. 두 소년을 여기서 쫓아내기로. 좋게 타일렀다가 총구를 들이댔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항의한 들 들어주지 않았다. 무작정 뛰어, 제 4지구로 가는 셔틀에 어떻게든 타라고. 아마 그렇게 하면 연벙군이 쫓지는 않을 거라고. 날 챙겨주던 아저씨가 나와 카라마츠를 끌어안고선 미래를 맡긴다며 얘기할 때서야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카라마츠 손을 붙잡고, 이 세상에서 다신 만날 수 없을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그 곳을 벗어났다. 새벽을 가로질러 잠의 신이 붙잡지 않도록, 한 맺힌 영혼들이 붙잡지 않도록, 끝내 이루지 못한 복수심이 붙잡지 않도록 달렸다. 여기 올 땐 분명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 비겁한 내가 걸음을 재촉했다. 카라마츠는? 내 손을 잡고 달리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같이 달렸다. 충격적인 건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이었다는 점이다.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여간 달렸다. 감시가 없는 곳을 찾아서, 셔틀이 있는 곳까지 달리느라 숨이 차 죽을 지경이었다.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화물 속에 들어가서야 긴장이 풀렸다.
“난 여기 죽으러 왔어. 죽으러 왔을 텐데……”
무표정한 카라마츠의 입에선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 나왔다.
“나도야. 죽을 각오로 녀석들에게 복수할 참이었어. 그런데 미래라니…… 너무하잖아. 그런 걸 맡기면, 거기 남아 있을 수 없잖아……”
분하기 짝이 없었다만, 카라마츠의 말에도 반발심이 생간건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다시금 복수하자고.

  빛이 새어들자 잠에서 깼다. 화물을 열어본 남자는 눈을 찌뿌리더니 우리 둘을 내쫓았다. 거리의 풍경을 보아하니 제4지구인 모양이다. 이번엔 카라마츠가 내 손을 붙잡고 골목으로 들어가 여기저기로 움직였다. 라디오가 틀어진 가게 옆 골목에서 그는 멈췄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높으신 분의 더럽게 긴 연설이 끝나고, 제3지구에 남아았던 반란군 잔당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에도 연방은 시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라는 있으나마나 한 말과 함께. 운이 좋았다고 할까. 그날 새벽 도망치지 않았다면 우린 죽은 목숨이었다. 카라마츠는 자기 손을 쳐다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카라마츠은 왜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건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만, 지금 묻기엔 그가 괴로워보였다. 한동안 그 골목에서 쭈그려 앉아았었다. 눈물이 흘렀다가도 닦고 또 닦아 아닌 척 하려 애썼다. 옆의 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제4지구에는 ‘바다’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바다를 보면서 옛날 모성母星에 살던 사람들은 눈물을 삭혔다던가 하던 신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몸을 일으키면 그도 몸을 일으켜, 셔틀 정거장 쪽으로 되돌아갔다. 셔틀 정거장 옆에 조성된 바다는 푸른 물로 덮여있었지만, 별다른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 바다에, 카라마츠는 입고 있던 거적때기같은 옷을 벗어던지고서 뛰어든다. 아. 처음 만난 날 그의 깊은 눈은 분명 이걸 닮아 있었다. 마치 자기에게 있던 모든 걸 씻어내듯 카라마츠는 헤엄쳤다. 처음 만난 날 그가 보여준 미소를 마음껏 지어주었다. 거기에, 나는 빨려들어갔다. 후련해보이는 미소 뒤엔 무표정한 그가 여전히 숨어있다. 무표정 속에 그가 죄책감을 억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카라마츠는 자기와 함께 하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연방군을 몇 명 죽인 것이다. 살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이 그에겐 있었다. 제대로 된 도덕 관념을 배우진 않았지만 해서는 안 될 것을 카라마츠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피가 흐르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과 총을 든 자신의 손을 번갈아보면서,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 길로 카라마츠는 소문을 좇아 레지스탕스애 들어왔던 것이다. 이미 사람을 죽여 더럽혀진 손으로, 그나마 가치있는 일을 하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그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바다에서 헤엄치고 나온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런 거구나. 상관없다고. 그런 건. 이미 나는 너의 미소 속에 들어가버렸어. 그게, 미래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복수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단순한 동정심이나, 불확실한 형제애 같은 게 아니라 저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는 마음. 뭐냐고 신부님이여. 바다가 눈물을 삭히긴커녕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이상한 데잖아. 거짓말쟁이였잖아. 카라마츠는 웃으며 마무리지었다. 고마워. 이 이름을 네가 줘버린 이상, 난 살아야겠어. 오늘로 죄책감을 다 덜 수야 없겠지만. 살아서 잘못되지 않은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그런 말을 하는 카라마츠는 불안에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만큼은 어떻게든 지으려고 애쓰고 있어서, 끌어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도 거짓말쟁이네. 역시 닮았잖아. 허세부리지 말라고.
“그래, 살자. 살아서, 미래를 만들자고.”
미래가 무어냐. 수많은 목숨이 던져진 미래를 당장에는 뭐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알게 될까. 한 달 뒤면, 1년 뒤면 알 게 될까. 무슨 미래를 맡긴 건지. 평화로운 시대에 일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미래? 다시금 혁명을 일으켜 이번에야말로 연방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미래? 글쎄. 어떤 미래라도 카라마츠는 웃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그를 안고서 한참을 있었다.
  아침이 되었다. 바다 옆에 적당히 만든 잠자리에 카라마츠는 없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먹을 것이 머리맡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니 모래사장에 카라마츠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새 카라마츠는 많은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미래. 오늘 그의 발 밑에 적힌 글자다. 이쪽을 보고선 그가 미소지었다. 우선은 살아간다. 그거밖에 없나. 멋쩍은 듯 그에게 간다. 분명 그가 그리는 미래는 나와 같을 것이라 믿으며. 카라마츠는 어느 날 내 앞에서 사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의로 사라진 건지, 누군가에게 끌려가거나 해서 사라진 건지. 그를 찾아헤매다 나도 날 받아들여주는 곳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유야무야 흘러가버렸다. 그를 다시 만난 건 10여년 후였다. 분명 최악의 재회였다.
Posted by 하리H( )Ri
2017. 2. 15. 19:58

[카라른/이치카라]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9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카라마츠 중심, 결론적으로는 카라총수지만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캐붕,날조,글솜씨없음주의

※5화 카라마츠 사변 기반

 

9화가 데자뷰라고 느끼신 분은 정상입니다. 다만 안에 내용은 많이 바뀌었어요.

또 이렇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음 화 작업중이에요 ㅠㅠㅠㅠ 벌써 이것도 1년 되가는...

뭘 쓴게 있다고 ㅠㅠㅠㅠㅠ

 

---------------------------------------- 

병원 바깥을 배회하자면 머리 위에 떠 있던 해는 어느새 기울어 지평선을 향하고 있다. 그다지 기다릴 셈은 아니었지만 쵸로마츠가 생각보다 늦어지자 병원 입구를 자꾸 바라보게 된다. 병원 앞뒤를 둘러싼 작은 산책로에는 링거 거치대를 끄는 노인, 휠체어에 탄 소년과 그걸 미는 남자, 목발을 짚고 느리게 움직이는 여자 등이 보였다. 그리고 의외로 고양이도 몇 마리 돌아다녔다. 병원 직원이 먹이를 주는지 한켠에 빈 그릇과 물통도 놓여 있었다. 고양이들을 놀아주며 산책로 벤치에 앉아있자면, 고양이처럼 굽은 등을 한 쵸로마츠가 느릿느릿 입구로 걸어 들어온다. 빠른 걸음으로 짐을 받아주자 그는 한숨을 쉬면서 카라마츠가 입원한 병실 쪽을 바라보았다.

 

"좀 늦었네. 엄마 병수발이라도 하고 온 거?"

 

고개를 젓고선 쵸로마츠가 입을 떼려다 다물어버렸다.

 

"아니. 그건 아냐. 이따가, 다 같이 있을 때 말할게."

 

그는 능숙하게 숨기질 못한다. 분명 중요한 말이겠지. 그래서 다 같이 있을 때 말한다는 걸까. 그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저 표정을 본다면 누군가는 쵸로마츠에게 말을 해 달라 할 것이다.

 

"일단 올라가자. 어차피 계속 밖에서 있었을 거 아냐. 그 사이에 카라마츠가 일어났을 지도 모르니까."

 

 

쵸로마츠가 병실 문을 열자 모두가 이쪽으로 왔다. 오소마츠 형은 '쵸로마츠, 수고~'라는 말과 함께 쵸로마츠를 가볍게 맞아주며 나를 쳐다봤다. 어쩐지 그 눈길이 거북해서 눈을 피하며 다시금 복도 의자에 주저앉았다. 쵸로마츠는 훌쩍거리는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를 달래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오소마츠 형이 복도로 나왔다.

 

이치마츠, 뭐 하나만 물어도 돼?”

 

“...뭔데.”

 

아까 쵸로마츠랑 얘기 나눈 거 있어?”

 

별건 없어. 이따가 다 같이 있을 때 얘기해준다는 건 있었지만.”

 

내가 숨겨봤자 어차피 곧 쵸로마츠의 표정을 보고 알 테니까 그냥 말해버린다.

 

?”

 

글쎄.”

 

그리고, 왜 카라마츠를 보러 들어오질 않는 거야? 걱정은 엄청 하고 있는 주제에.”

 

하나가 아니잖아! 거기다 당황스런 질문이다.

 

...누가 걱정한다고...”

 

하고 있잖아? 엄청. 너도 힘들어하는 거 있는 거 아냐?”

 

그다지...암만 썩을마츠라 해도 저렇게 다쳐서 못 일어나면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거 말고.”

 

“......”

 

나는 형이니까, 카라마츠의 고민을 알아주지 못한 거라던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거든. 너도 그런 거 있지 않을까 해서.”

 

이럴 때 느낀다. 역시 장남은 장남. 바보 주제에 저런 건 잘 알아챈다.

 

쉽게 얘기하네.”

 

?”

 

그 정도잖아? 단지 형이니까 몰라줘서 미안한 거로 끝. 녀석을 저기까지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않아. 느끼는 죄책감이 있다고 해도, 그저 의무적인 것뿐이니까. 나랑은 다르다고. 나랑은...”

 

형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위험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런 중얼거림조차 끈질기게 물어올 게 분명하니 다시 병원 밖으로 나간다. 카라마츠의 병실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채 멍하니 지내고 있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푸른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릴 적 나비의 생태를 알아보자는 내용이었나, 하여간 교실에서 애벌레를 길렀던 적이 있다. 다들 어서 나비가 되기를 기다렸지만, 애벌레는 몇 번이고 허물만을 벗을 뿐, 나비가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잘난 척 하던 녀석이 이런 게 탈피라면서, 이걸 몇 번 해야지 나비가 된다고 말했던가. 애벌레에게 상추라던가 먹이를 주는 담당이 나였기 때문에, 벗겨진 허물을 보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이윽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어버렸다. 담임이 호들갑을 떨며 겁을 주면, 몇 명인가가 피식거리고 몇몇은 나비 죽었냐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우화해서, 사육장의 뚜껑을 열어주니 날아가는 모습에 그 당시에는 감동했었다. 하지만, 신비롭고 아름답게 남은 그 장면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본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긴 시간, 날 수 있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 채 자라온 녀석의 비참한 최후를 보며 여느 녀석들처럼 죽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비가 되기까지 허물을 벗으며 고통받았을 그 시간들이 아깝고 쓸모없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껍데기를 깨고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한들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하면, 어차피 약할 뿐이라고. 산소라든가, 세상이라든가, 무심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마는 나다. 그런 내게 카라마츠는 예나 지금이나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을 내내 뿌리쳤다. 미움을 샀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나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카라마츠의 마지막 연극을 하기 전, 봄이었다. 그 뒤,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우리의 마지막 학생시절을 소비하는 동안, 카라마츠는 급격히 안쓰러워졌다. 그 전에도 그는 남자다운 것을 좋아하고 종종 연극톤을 내뱉었으며 폼 잡으며 뜬구름 잡는 소리를 내뱉는 사람이었지만 그 시간을 거치며 카라마츠는 안쓰러운 캐릭터에 암묵적으로 무시하는 편이 낫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연극에 대한 어긋난 애정일 거라 생각했다. 5년을 빠져 살았던 연극이다. 그걸 어쨌건 타의로 관두게 되었으니 카라마츠의 변화에 동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졌다. 마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라도 한 양, 이상한 필터로 타인의 말을 걸러듣는가 하면(주로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오자키처럼 남자들이 동경할 법한 패션이나 말투를 과하게 써서 눈총을 받거나 자기애 넘치는 작품들을 양산해내곤 했다. 거기에 질려서 결국 형제들까지 안쓰럽다거나 무시하는 일이 된 게 고작 그 1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너무도 달라진 껍데기에 사람들은 적응하고 바뀌어갔다. 카라마츠의 상담에 제대로 대응해주지 못한 나에게도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전보다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짜증나서, 그리고 나도 만사가 부정적으로만 보여서, 카라마츠를 대하는 방식은 점점 심해졌다. 내가 자기혐오로 무장하고 땅굴을 파는 타입이라면 그는 전형적인 나르시스트였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으면서도 그 발현방식이 정반대라 그런지 이전보다도 그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는 관계. 거기에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갔다. 나도 상처받고 있잖아. 애초에 저런 안쓰런 모습 관두면 안 되나. 그렇게 자신이 단단한 척 애써봤자 남는 건 없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변하지 않았다. 이젠 카라마츠는 원래 저런 녀석이었지라고 여겨질 정도로. ‘이치마츠가 제일 걱정된다고라고 들을 때 그걸 감싸주는 카라마츠의 본질마저 안쓰럽다 여길 정도로. 물론 약한 모습도 자주 보이지만 그가 꾸며낸 껍데기는 단단해져서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화를 기대해본 적은 없다. 그 껍데기로 사는 게, 그 껍데기가 본질이 되는 게,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거 아닐까. 물론 저런 어른이 되는 건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지만. ‘어른은 좋은 의미로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고, 니트 생활을 하며 미루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고. 어릴 적에 생각했던 어른은 되고 싶은 존재였는데 삶이 이어지면서 어른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싶고. 훌륭한 어른이 있는가하면 쓰레기 같은 어른이 있고. 그 쓰레기도 타는 쓰레기와 타지 않는 쓰레기로 나뉘듯 내가 겪은 쓰레기어른과 내가 돼버린 쓰레기어른은 다르고. 더 이상은 자기가 누군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이 어른의 장점이라 멋대로 여긴다. 그 누구보다 고민 없는 남자 카라마츠도 영 쓸모없고 어른답지 않지만 어른은 어른인거다. 그런 판정을 내리며, 우리 여섯 쌍둥이가 모두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것에 조소하곤 했다. 설마, 껍데기가 깨지는 모습을 보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균열은 조그맣게, 예상치 못하게 생기는 법이니까. 카라마츠가 치비타에게 납치를 당했다 돌아온 날. 버릇처럼 그에게 툭툭대면서 엄살떨지 말라고 했지만 병원에 다녀와 붕대를 둘둘 감은 카라마츠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거실에 1인용 요를 깔고 카라마츠가 잘 수 있도록 해둬서, 늘 좁았던 6인용 이불은 넓어보였다. 도대체 납치 당일에는 왜 눈치를 못 챈 건지 의아할 정도로 카라마츠의 빈자리는 컸다. 잠결에 밖으로 나돌아다니다 우리의 먹튀에 열받은 치비타에게 잘못 걸렸던 거겠지 생각한다. 납치극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카라마츠를 위해서인지 스스로를 죄책감에 몰아넣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 뒤로 누구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으니까. 카라마츠의 잠자리를 살펴주자 붕대와 반창고로 뒤덮힌 그의 얼굴에 핀 미소는 여전히 해맑아서, 그날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리에 누우면 옆의 빈자리를 괜히 휘적거리고 요에 파묻혀 카라마츠의 흔적을 더듬기도 하고 원래는 건너였던 토도마츠를 괜히 건드리기도 하고, 그러다 정신이 맑아져 버렸다. 다사다난한 날이었다. 친구인 고양이가 본심을 말하는 약을 맞고, 내 본심이 들켜서 화내버리고, 나 때문에 도망간 고양이를 쥬시마츠가 찾아주고, 모두와 화해하고선 목욕을 끝내고 돌아오자 심한 꼴을 하고 있는 카라마츠가 있고, 카라마츠의 상태 탓인지 모두들 솔직하게 싹싹 빌었는데, 아마 에스퍼 냥이 사건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평소같았으면 그렇게 심하게 다쳐와도 별 신경 안 썼을 거라 생각하니까. 맑아진 정신에서는 끊임없이 그날 하루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때, 1층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인가? 하지만 문이 열리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리는 게 영 이상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지붕이 살짝 울렸다. 몸을 일으켜 조심히 방을 빠져나왔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누가 올라갔나 살피러 가자, 그곳에 익숙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핫...”

 

우는지 웃는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그의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은 분명 카라마츠였다. 왼쪽 손목에 무엇인가 반짝, 하고 빛났다. 으윽하는 소리를 내며 카라마츠가 움츠리고 다시금 아까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슬쩍 카라마츠의 몸이 틀어져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넋이라도 나간 듯이 그저 자신의 손목을 긋고, 긋고, 그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손목을 긋던 것을 떨어뜨렸다. 아까의 웃음소리, 아니 웃음소리라기엔 애처로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소리조차 목구멍에서 막힌 듯 작게 들려왔다. 울음이 섞여 마음껏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소리. 카라마츠는 망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리에 맷돌에 맞아 목이 꺾인 카라마츠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탓이야. 무서워. 서둘러 내 잠자리로 돌아왔다. 잠자리에서마저 비치는 달빛은 나의 가슴을 찌르고 잠 못 이루게 했다. 그 뒤론 카라마츠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카라마츠가 오는 걸 살피고 밖에 나가거나 했다. 병실에 있지 못하는 것도 그 탓이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고 숨이 막히는 것 같으니까.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날이 어둑해졌다.

 

이치마츠, 들어가자.”

 

쵸로마츠가 저녁밥은 먹어야 한다며, 병실에서 마중을 나왔다. 고개를 흔들자, 그는 머리를 감싸며 얘기한다.

 

밥은 먹어야지. 이런 상황에 한 명 더 쓰러지면 정말 곤란하다고? 밥 먹으면서, 모두에게 얘기 좀 할 거니까.”

 

...”

 

쵸로마츠의 손에 이끌려 병실로 들어왔다. 쥬시마츠가 애써 밝은 얼굴로 뭐하고 있었냐고 물으면, 그냥이라 작게 중얼거릴 뿐. 카라마츠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연스레 밥상에 둘러앉듯 작은 탁자에 모여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밥을 삼켰다.

 

슬슬 괜찮을까나. 모두에게 할 말이 있는데.”

 

좋다고, 답하는 사람은 오소마츠 형밖에 없었지만, 쵸로마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집에 간 김에, 카라마츠가 학창 시절에 무슨 일을 겪지는 않았을지 조금 알아보고 왔어. 내가 알아본 것만으로는 카라마츠가 이 지경에 이른 것까지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추측까지 더해서 정리하느라 바로 말하진 않았어. 이거 말고도 아마 각자가 알고 있는 일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 다 얘기하라고는 하지 않을게. 다만, 카라마츠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줘.”

 

쵸로마츠는 카라마츠의 중고등학교 시절 연극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봤자 제3자의 이야기로, 카라마츠가 겪었던 일이나 감정을 다 대변해주지는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상냥하고 의지되는 형으로 남고 싶었던 집에서의 카라마츠와는 다르게 학교에서의 그는 평범했다. 바보여서 수업에 따라가기 힘들어했다거나, 늘 즐겁게만 보였던 연극부 활동도 부원들간의 트러블이라든가에 말려서 곤란했다거나. 생각없어서 좋겠다느니,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느니, 그건 그가 한껏 꾸며낸 허세에 말려든 것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다만, 힘들 때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털어놓거나 하지 않은 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들 똑같았는데, 나도 그랬는데, 녀석만 강한 척 하다가 괜히 힘들어지게 된 거 아니냐고. 그런데, 학창 시절의 일들이 이제 와서 카라마츠를 조이는 이유가 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졸업하고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잖아. 나름대로 극복한 거 아니였냐고. 안쓰럽게 변해가면서.

 

“...그러다 요시다 군이라고, 이치마츠 기억나? 1때 같은 반이었던 녀석.”

 

1때라. 좋은 기억이 없어서 쵸로마츠 외의 동급생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녀석도 연극부였는데, 얼마 전에 카라마츠를 만났다고 하더라고. 그냥 예삿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연기 쪽으로 안 나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호들갑이더라. 카라마츠를 만났을 때도 그런 말을 했다고 했어. 확실치는 않지만 그때쯤부터 카라마츠가 우울해하기 시작했던 거 같아.”

 

그거였나.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마츠가 납치당했지. 시기를 더듬어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

 

납치극을 얘기하자, 표정들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럼, 카라마츠 형에게 있어서는 불행이 연달아 겹친 거...였을까...”

 

토도마츠가 힘없이 말했다.

 

그랬을지도...”

 

쵸로마츠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마무리를 지어버렸다.

 

 

 

병실을 나가서 복도에서 잠드려 하자, 쥬시마츠와 토도마츠가 붙들고선 카라마츠가 보이지 않을 법한 커튼 너머 자리로 데려왔다. 하필 잠버릇이 고약한 오소마츠 형과 함께 써야 했지만, 다시 나가기엔 두 사람에게 미안해져서 그대로 누웠다. 카라마츠가 자해하던 이야기, 했어야 했나. 데카판 박사에게 다시 고양이에게 기분 약을 주사해 달라고 부탁할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커튼 너머에서는 심장박동을 측정하는 비프음과 다른 녀석들의 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카라마츠, 내일은 깨어날까. 하지만, 그때의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원망할까봐 두려웠다. 쵸로마츠는 알고 있는 얘기들을 말해달라고 했지만, 다른 녀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조차 마음을 굳혀야 하는 일이었다. 쉽게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으면 불안한 생각들만 스쳐갔다. 이렇게 병원에서의 둘째 날이 지났다.

 

...”

 

창가 근처라 떠오르는 해의 빛이 눈을 자극하고, 거기에 조금씩 정신이 깨어났다. 거기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하악, 하악, 하아악...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한 숨소리는 카라마츠의 것이었다. 재빨리 일어나 그를 흔들어보아도 대답 없이 눈물과 식은땀,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거친 숨소리만이 나온다. 옆에 있는 응급 버튼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제발 누군가 와주기를 빌어본다.

 

카라마츠...카라마츠...!”

 

내 소리에 다들 잠이 깨어서 누군가는 복도로 달려나가고 누군가는 떨리는 내 몸을 잡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와 담당의가 카라마츠를 데려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녀석이 이마를 감싸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느끼는 고통이 저거다. 사고로 치인 곳보다 저번에 우리가 던졌던 집기들이 맞았던 이마가 더 아프다는 건가. 그 모습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 다시금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카라마츠에게 거리낌 없이 대했던 주제에, 이런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이렇게 소중한데,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그걸 표현하지 못해서, 그는 나를 의지해주지 않은 채 스스로 깊은 고통으로 빠져들었다. 참을 수 없어서 의사를 따라 중환자실 쪽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의 숨은 끊어질 듯 아슬아슬해서, 이대로 있다간 그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았다. 어느새 모두 카라마츠 옆으로 붙어서 중환자실 앞까지 왔지만, 의사는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보호자 분들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며. 닫힌 문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듯,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될 것처럼 느끼게 했다.

 

 

 

아직 카라마츠랑 헤어질 수 없는데.

 

카라마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카라마츠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잔뜩 있는데.

 

카라마츠가 왜 고통스러워 하는지조차 모른 채로, 그를 보낼 수 없는데.

 

옆에 있는 게 당연해서, 그동안 왜 잘해주지 않았는지, 저 문을 보면서 후회한다.

 

다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땐...

 

 

 

-------------------------------------------------------------------

 

 

 

 

 

 

 

 

 

와 진짜 양심없다...그쵸?

저에게 돌을 던져주...뭐 읽는 사람도 없겠구나.

이렇게 쓸쓸히 잊혀지고(※그 전에도 남은 적 없음)

어느새 이거 쓴 지도 1년 되어가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22일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장편감도 아닌데 ㅋㅋㅋㅋㅋㅋ 9화짼뎈ㅋㅋㅋㅋㅋㅋ

 

 

 

죽어야겠다.

그보다 카라마츠 잠자는 숲속의 미녀같다. 몇 달째 잠에서 못 깨네...미안...

Posted by 하리H( )Ri
2017. 1. 17. 23:41
[쵸로카라] 떨어지기보다 바스러지는 게 어렵다

*필자의 소재 취향은 5화 카라마츠 사변과 24화 편지 (최애에피는 다름)
*그런 의미에서 24화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날조했습니다.
*약간 고어하고 약간 그렇고 그런 이야기
*괜찮으신 분만 읽어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링크
http://heartrainon.tistory.com/77

비번: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device=pc&bid=6200138

해당링크 책의 페이지 수 확인
(모바일 접속 시 하단의 pc버젼 누르고 보기)
(변경될 수 있음)
Posted by 하리H( )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