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9. 02:11
https://heartrainon.tistory.com/m/185
여기서 이어지는(?) 정확히는 이전의 이야기+ a
전에 연결해둔 타래를 발견한 김에 업로드
이어나갈 힘이 있다면 이것도 장편으로 이어나가고 싶...음...

일단 세계관도 정리해보고 모아놓은 타래라도 같이 달아드리겠습니다.
https://twitter.com/heartrain_on/status/1170665372229324801?s=19

*
(오소마츠)
기억하는 것 몇 가지. 첫 번째는 태어났을 때의 기억. 7개의 두근거림이 하나로 줄어드는 그 때의 불안감. 나의 가족이 엄마, 아빠, 나 그리고 5명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걸 인식한 건 조금 지나고 나서였다. 두 번째는 가족을 잃어버리던 때. 선명한 총성이 두 번 울리고 싸늘하게 식은 부모의 몸. 세 번째. 우릴 맡아준 보육원이 망하고, 여섯 형제가 뿔뿔이 흩어지던 때. 그 세 가지는 모두 내가, 우리가 태어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버려지고, 카라마츠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지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내게 지은 그 미소가, 아마도 날 처음 구원해 준 것이리라.
신부가 나를 데리고 간 교회는 보육원과 다를 바 없었다. 같은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도 몇 있었고, 신부를 제외하면 아이들로 가득했기 때문일까. 신부는 글자나 산수같은 걸 알려주고, 신에 대한 이야기나 동화나 전설을 들려주기도 했다. 말썽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미소를 잊지 않았다. 그 미소가 좋아서일까, 안 좋은 기억에서 구원해준 사람이어서일까 나는 그를 잘 따랐다. 이름 없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떼를 써가며 그와 비슷한 이름을 만들어달라고 했을 정도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소마츠는 어때, 라고 말했을 때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공부하는 건 따분했지만 신부가 웃어주니까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도 그저 살아있을 뿐이던 존재는 이제야 오소마츠라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교회에서도 몇 년을 지내며 신부의 일을 돕거나 마을에 일하러 가는 등 자신의 가치가 느껴지는 나날을 보냈다. 그런 날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많은 걸 원해서는 안되는데, 신께 간만에 진심으로 기도한 탓이었나. 어느날 일상은 깨어졌다.
마을에 연방군이 반란분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거나 민간인을 죄를 씌워 죽인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교회에 맡겨진 나는 상관없는 일이려나, 하고 무시했지만.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소문은 사실이었는지 마을에 연방군이 나타났다. 탐문을 하며 돌아다니는 군인 무리를 일하는 중에 마주했다. 싸늘한 눈길.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그 눈길이 싫어서 재빨리 교회로 돌아와 마을 얘기를 모두에게 전하던 참이었다. 아까 마주친 군인 무리가 교회에 들이닥쳤다. 카라마츠 신부가 막아서서 아이들을 보호하자, 한 군인이 신부의 멱살을 잡으며 반란을 꾸미려 아이들을 모아온 건지 추궁했다. 곧바로 내가 달려들었지만 녀석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다시 달려들려 하자 이번엔 신부가 그만하라고 말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렴. 신께서 보고 있으시니 어떤 사람이든 용서해야 해. 이런 말을 하면서. 군인의 발길질은 신부를 향했고 그는 바닥에 내팽겨진채 군화 짓밟혔다. 이 때도 신부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였지만 눈만큼은 무언가 굳은 의지가 보였던 것 같다. 밤이 되고, 그런 사건이 있었던 뒤에도 교회에선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냈다. 아이들은 신께 아까의 나쁜 군인들을 혼내달라고 빌었지만 신부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며 기도를 이어나갔다. 취침 시간이 지나 다들 잠든 걸 확인하고 나는 신부의 처소에 들어가 따졌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하고 화를 내지 않는 거냐고. 그의 답은 한결같았다. 한참을 혼자서 분통을 터뜨렸을까. 바깥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신부는 나보고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보려 했고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함께 밖으로 향했다. 신부의 처소는 교회 안에 위치해 있었다. 아이들은 교회 바깥에 허름하지만 넓은 건물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신부의 방에 난 창문은 아이들의 숙소가 아니라 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판단하는 게 늦고 말았다. 아이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커지자 교회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 화염에 싸인 건물과 그 곳을 빙 둘러싼 군인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신부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산 쪽으로 가라고 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은 아까 봤던 무언가 결심한 눈이었다.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눈. 교회를 빙 돌아 산쪽으로 달리는 동안 신부는 군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무서워서, 나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총성은 부모님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총성은 계속 울렸다. 진짜 소리인지 환청인지 알 길은 없었다. 산으로, 산으로, 산으로... 총성이 멈추자 뒤돌아 볼 용기가 생겼다. 아니, 그건 용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숙소도, 교회도,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도 불타고 있었다. 태양이 땅에서 솟은 듯 불길은 어둠을 가르고 일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째서. 어째서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군인들은 날 뒤쫓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도망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눈에 띄지 않은 건, 카라마츠 신부가 나섰기 때문일 거다. 내 귀에 울린 총성 중 몇 번째가 신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몇 시간을 주저앉아 있었을까.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기세좋게 내린 비는 하마터면 산불로 번질뻔한 불길을 금세 잠재웠다. 이것이 신의 조화일까. 그렇다면, 신은 왜 신부를 구해주지 않은 것인가. 신의 뜻에 따라 무엇이든 용서할 줄 알았던 그를. 왜. 그제서야 내 감정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절규를 토해낸 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잿더미 앞에서. 신을 원망했다. 상황을 보자마자 날 살리려 한 신부를 원망했다.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군인을 원망했다. 총성을 원망했다. 부모도, 형제도 잃은 내겐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원망은 분노로 바뀌어갔다. 군인이 하고 간 말 중 반란이 떠올랐다. 이딴 세상이다. 연방의 횡포는 분명 다른 곳에도 뻗쳐 있을 터다. 어디엔가는 연방군에 맞서는 데가 있겠지. 그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일어섰다. 여기서 다른 마을로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하니까.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곳을 찾아서.

*
(카라마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길바닥에서 살았다. 그 어렸을 때가 언제인진 모른다. 첫 기억이 길바닥이니까. 나보다 큰 형이나 누나가 있어 그들이 구걸해서 얻은 걸 같이 버려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나날이었다. 그런 나날도 어느새 끝나버렸지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들은 우릴 떠나버렸다. 하필, 그들이 떠나고 나선 내가 연장자 취급을 받았다. 내가 구걸하고 대여섯 명이 나눠먹는 삶. 얍삽이라고 불리는 나와 닮았고 아마도 나와 나이가 비슷할 아이가 있었지만 그도 내게 의존했다. 모두가 가난한 곳에서 구걸은 점점 어려워졌고, 어떻게든 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나는 힘이 센 편이었다. 힘쓰는 일을 어른만큼은 못하지만, 어떻게든 일할만한 것을 찾아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축복이었다. 그렇게 함께 있는 아이들을 먹여살렸다. 내게 모지리라며 바보취급을 하다가도 품삯을 받아오거나 먹을걸 가져오면 녀석들은 기뻐했다. 다른 녀석들도 구걸이나 일거리 찾기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걔 중에 꾸준히 생을 이어갈 만큼을 벌어오는 게 나뿐이었던 것이다. 적당한 잠자리를 찾아서 옮겨다니거나 장작 모아오기 같은 다른 잡일은 다른 아이들이 나눠서 했으니까. 이렇게 살다보면 절로 남의 것에 손대게 될법한데, 들키면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걸 아는 우리 무리는 도둑질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한 번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산속 동네 유지의 창고를 턴 적이 있는데 창고지기에게 들켜서 죽을만큼 두들겨맞았다. 그러고보니 그때 얍삽이는 이미 도망갔던가. 나를 개패듯 팬 창고지기는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일자리를 하나 알선해주었다. 부자들의 유흥거리인 사냥에 함께 나서는 것이었다. 그때 라이플을 처음 들고 쏘는 방법이나 장전하는 법, 빠른 사냥감이나 멀리있는 사냥감을 저격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내가 라이플을 들고 끙끙대는 꼴이 유흥의 일부였는지 사냥에 나선 사람들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의 사냥터에 나섰다. 비웃음을 견디며 돈을 벌었다. 걔중에는 나를 창고나 자기 방으로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날 깨끗이 씻기고 알몸으로 벗겨 찬찬히 감상하거나 더듬거나 했다. 수치스러움을 느낀 건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뒤였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던 거였다. 반항하기 시작하자 얻어맞고는 했다. 벌어오는 돈은 많았지만 수치심을 느끼고 얼마 안 가 이 일을 관뒀다. 얼마 안 가라고 해도 모지리였던만큼 저 일을 당한 기간은 꽤 길었다. 그 이후 육체노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수입이 되니까. 모두를 먹여살리는 일에 불만없이 바보처럼 살았다만, 지나고 나면 조금 후회가 되기는 한다. 하여간, 길바닥 인생이어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굶어 죽는 아이들도 제법 되는 시대니까.
지나다니는 가게의 라디오에서 듣기로 부랑자들을 일거 소탕한다는 말이 있었다. 슬프게도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매일 듣는 말들만 알고 있으니까. 알아들었다면 조금 더 조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거에 대비하기도 전에 살고 있던 동네의 부랑자 소탕 작전이 시작됐다. 우리도 당연히 그 표적이 되어 근처에서 구걸하던 다른 부랑자들과 같이 도망쳤다. 군인들은 인적이 드문 산으로 우리를 몰아갔다. 죽이려는 건지 도회지에서 쫓아내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총과 칼을 든 그들에게서 도망가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다른 무리의 아이가 넘어지고 그 아이가 짓밟히는 꼴을 보고서 정신이 들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살아온 나날들이다. 쫓겨온 부랑자들 중 어린 아이들은 얼마 안 가 붙잡혀 맞고 있었다. 그 중엔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도망치던 와중에 그게 눈에 띄고 말았다. 그리고 근방에 내게 수치스러운 기억을 남긴 그 창고가 있었다. 창고지기의 알선 탓에 그 창고를 얼마나 드나들었던가. 한때 쓰던 라이플을 꺼내와 군인들의 머리에 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살짝 미쳐있었던 걸까. 맨정신에는 맞지 않던 탄환이 이상하게도 그들의 두개골을 뚫고 붉은 분수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그 자리의 군인들을 다 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앞에 펼쳐진 모습은 끔찍해서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뒤로 하고 달아났다. 사람을 죽였다. 암만 거리에서 못 배운 채 살아온 사람이라도 알고 있다.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붉은 흔적은 잔상이 되어 눈앞을 흐리게 했다. 기묘한 의존에 의한 책임감같은 건 알 바가 아니었다. 순간에 저지른 죄는 그것을 넘어섰다. 다른 아이들을 구하려는 거였잖아라고 변명하지만 방아쇠를 당겨 표적을 맞췄을 때의 쾌감이 그걸 부정했다. 사냥에 따라다닐 때는 알지 못한 감정을 긴박한 그 순간 알아버린 것이다. 잠시 멈춰 토하고는 다시 내달렸다. 가련하게도, 난 그 죄를 더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손이 더럽다고 느껴져서 눈앞에 보이는 물에 손을 박박 씻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실감하면서. 제5지구에서 4지구로 넘어가는 셔틀을 탔다. 화물 속에 낑겨들어갔다. 4지구에 내리자 묘한 안심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안심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레지스탕스의 소문을 들었다. 이미 연방군을 죽인 전과가 있는 그였다. 차라리 대의 속에 숨기로 했다. 죄책감이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 속의 선택지가 많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는 혼자서도 멋대로 성장했다. 그날로 그는 합리화를 할 줄 아는 어른의 길로 들어섰다.

*
"헤에..."
제6지구, 고철 더미 옆에 임시로 건물을 세워 만든 어느 바. 간판은커녕 이름조차 없는 이런 곳에는 온갖 사람이 모인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연방정부에 찍힌 지명수배자,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신분세탁을 하며 사는 사람, 동네 불량배에서부터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어둠의 세력까지. 그렇기에 이곳에는 암묵의 룰이 존재한다. 이 바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면 안된다는 것.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도 이름을 불러선 안되며 모른다고 물어봐서도 안된다는 것. 접선이 필요하다면 은밀한 암호를 통해서 해야만 한다. 그런 곳이다보니, 지명수배자 신세인 오소마츠도 이곳만큼은 편안히 드나든다. 뭐, 다른 곳도 변장을 하거나 하면서 잘도 드나들지만. 지명수배라고는 해도, 그는 평범하고 흔한 얼굴인 뿐더러 정부 측의 인물이 아니라면 그다지 탐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수십명의 현상금 사냥꾼을 골탕먹이고 당한 것은 갚아준다는 주의 아래 괴멸시킨 뒷골목의 조직도 많고,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알려져있어 눈에 띄지 않는 지지자가 많고, 연방정부가 첩보를 받고 실행한 소통 작전마다 번번이 정부를 엿먹이고는 하는 사람이었다. 생명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가며 살아가는 그는 나름대로 삶의 목적이 있다고 했지만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이곳의 분위기도 제법 편안해졌군, 하고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위스키, 온 더 락으로."
커다란 얼음덩어리에 위스키가 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나 식혀볼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 소문 들었어? 얼마 전에 울프가 또 한 건 했다는데."
"그 가면 쓰고 활동한다는 현상금 사냥꾼 말이지?"
"그러니까. 누가 움직이고 있는 녀석인지, 아니면 정말 혼자 내키는대로 활동하는지 감이 안 온단 말이지. 언제 누구의 등을 노릴지도 모르고, 얼굴을 까고 다니지 않는 게 영 맘에 안 들어."
"대비를 제대로 해두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 녀석만 위협인 건 아니니까. 세상 천지에 다 적이지."
울프라고 이름을 숨기고 얼굴을 가린 채 활동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라. 만나면 한 번 놀아볼까? 오소마츠의 흥미가 동하던 때 새로운 인물이 바에 걸어들어왔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묘하게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 바의 마스터는 살짝 한심한 듯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주문대로 쉐이커에 보드카와 베르무트를 담아 흔든다. 오소마츠는 슬쩍 그 남자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오소마츠가 앉은 방향쪽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얼굴을 묘하게 가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목소리에 넘치는 여유와는 달리 그는 생각할 것이 많은 듯 오소마츠의 반대 방향, 그러니까 사람이 없는 쪽을 보면서 연신 한숨을 쉬었다. 지쳐 보였다. 마스터가 그 앞에 마티니를 내자 오소마츠는 그의 옆에 다가갔다.
"어이, 형씨. 심심하면 나랑 수다나 떨지 않을래? 한숨만 쉬지 말고."
그는 오소마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동시에, 두 사람은 소리를 지르려던 걸 입을 틀어막아 저지했다. 매우 닮은 얼굴의 두 사람.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 남자가 먼저 마티니를 음미할 새도 없이 들이키자 오소마츠도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켰다. 남자는 오소마츠의 몫까지 빠르게 계산한다. 둘은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채 바를 나와 고철 더미 뒷편으로 갔다.
"너, 카라..."
"오랜만이다, 오소마츠. 잘 지냈어?"
잘 지냈냐고.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 뒤로 이런저런 일 있었지. 잘 지냈냐면, 그건 아닐걸?"
"그런가."
뭐야, 그 덤덤한 반응은.
"그 날, 왜 사라진 거야? 누가 끌고가기라도 한 거야?"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아니. 내가 도망간거다. 너에게서 말이지."
"무슨 소리야. 나한테서 왜 도망치는데."
"너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유약한 소년 둘이서 살아남을 순 없어. 사지를 거쳐왔다고 해도."
"혼자서도 살아남았잖아. 너도, 나도."
"그러니까."
"둘이면 서로 더 의지해서..."
"오소마츠,"
그가, 아니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부른다.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무척이나 건조한 목소리. 어릴 때와는 달리 깊은 저음의 목소리로.
"각오해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라마츠는 오소마츠 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오소마츠는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그 무언가가 팔에 스치는 건 막지 못했다. 찢긴 옷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아파! 이게 뭐야, 나이프? 하? 뭐하는 짓..."
오소마츠가 팔에 난 상처에 정신이 팔린 동안 카라마츠는 빠르게 달려와서 명치 쪽에 주먹을 날렸다. 깊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급소에 맞은 충격에 오소마츠는 기침을 해댔다.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오자 오소마츠는 일단 허리를 꺾어 피하고는 땅을 짚고 카라마츠를 힘껏 걷어찼다. 겨우 나이프에 스쳤을 팔이 아파온다. 카라마츠는 살짝 비틀거리며 섰다. 정강이에 제대로 직격했나.
"만나자마자 이렇게 과격하게 대화해야해?"
오소마츠는 다시금 카라마츠에게 말을 건다.
"내란죄 및 연방정부를 능욕한 혐의."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본다. 설마.
"지명수배범 오소마츠. 얌전히 잡혀주실까."
여전히 건조하기만 한 카라마츠의 목소리.
"너...정부의 개가 된 거야?"
오소마츠의 목소리엔 이제 분노가 묻어난다.
"잊어버린거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난 건데! 목숨을 걸고 우릴 탈출시켜준 아저씨들을 잊어버렸어? 너도! 복수하고 싶다며! 약속했잖아! 미래를 같이 만들자고..."
격해지던 감정은 급격히 가라앉는다. 힘이 쭉 빠져나가더니 오소마츠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아, 나이프인가. 아까 명치 쪽에도. 뭔가 약이나 독을 쓴 건가. 어째서.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카라마츠는 어느새 가면을 썼다. 그의 눈동자, 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보는 거지? 몽롱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마음을 알고 싶어 손을 뻗었다.

*
삑삑삑삐익, 삑삑삑삐익.
기묘한 새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소마츠는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켜고선 그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방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나무들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팔 다쳤었지, 하고 보면 깨끗하게 처치가 되어있다. 아프지도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보았다. 한 청년이 나뭇가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아, 카라마츠인가. 아까 본 카라마츠와는 달리 좀더 생기있는 표정이었다. 어릴 때의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쳤다. 카라마츠는 민망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원예용 가위를 내려놓고 오소마츠 쪽으로 왔다. 오소마츠는 뒷걸음질을 쳤으나 도망가기 어려운 상황인 걸 깨닫고 주먹에 힘을 잔뜩 넣고 있었다.
"깼는가, 오소마츠."
깊고 낮은, 그러나 상냥한 목소리. 거기에 오소마츠는 주먹에 넣었던 힘을 풀고 말았다.
"상황을 설명하게 해 주겠나. 용서받기 어렵다는 건 알지만. 우선은 식사를 하자. 사흘을 꼬박 누워있었으니 배가 엄청 고플거야."
그 말을 들으니 배가 고픈 듯도 했다. 그러나 경계를 쉽게 풀 수는 없었다. 카라마츠는 어딘가로 연락을 했고, 곧 정원 쪽으로 누군가 음식을 가져왔다.  그도 오소마츠나 카라마츠와 닮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토도마츠입니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오소마츠 씨."
토도마츠라는 청년은 나무 그늘에 천을 깔더니 가지고 온 음식을 늘어놓았다. 여기로 오라는 듯 손짓하면 카라마츠는 거기에 응해 가서 앉는다. 오소마츠는 멍하게 그 모습을 보다 토도마츠의 채근에 와서 앉았다. 샌드위치를 집어 크게 베어먹는 카라마츠를 보자, 오소마츠도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하여간, 카라마츠 형도 무리한다니까. 사람을 독으로 꼼짝못하게 하면 당한 사람은 경계하지! 거기다 6지구에서 여기 5지구까지 자력으로 이동해오다니, 안 들켜서 망정이지 원."
토도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카라마츠는 날 잡아가려 그런 건 아니었구나, 하고 오소마츠는 조금 안심했다.
"그래서, 상황을 설명해주겠단건 뭔데."
토라진 목소리로 오소마츠가 얘기를 꺼낸다.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채로.
"난 지금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고 있어. 여기 토도마츠는 탐정을 하고 있고. 혹시 기억나? 얍삽이라 부르던..."
"헤에, 넌 기억나냐고 편하게 얘기하는구나."
카라마츠의 말에 그는 정색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카라마츠가 나타나자마자 그에게 한 일은 냅다 공격해서 약에 취해 재운 것이었으니까.
"난 반가웠어. 거기서, 다시 만나서 놀랐어. 보고싶었단말은 커녕 넌 나보고 각오하라면서 상처나 줬어. 뭐하자는 거야? 그래놓고 지금은? 왜 갑자기 상냥한 건데! 우리가 잠깐 함께 있던 그 시간 나눈 대화를 내가 행복한 기억으로 둘 거 같아? 괴로워도 널 찾고 싶어서 나 열심히 돌아다녔어! 아저씨들이 맡긴 미래만큼이나 너도 소중했으니까! 거창한 신념이 있어서 레지스탕스로 복귀한 게 아냐. 너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어서였으니까. 그런데, 10년만의 재회가 그런 식이었어. 좋았던 기억으로 두고 싶었던 그 시간이 순식간에 잊어버리고픈 기억이 된 거야. 그거 알아? 나도 사선을 넘나들었어. 몇 번이고 배신도 당해보고, 함정에 빠졌지.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이번이 처음이야. 짧은 시간 동안, 너가 나를 차지해버린걸까."
오소마츠의 말을 카라마츠는 그저 듣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
토도마츠가 조용히 오소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오소마츠 씨는 카라마츠 형을 굉장히 좋아하는군요. 열렬한 고백 잘 들었네."
푸풉, 하고 웃는 소리에 오소마츠는 터뜨렸던 분통과 감정이 부끄러워지며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찔끔 나는것도 같았다.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나직이 오소마츠를 부른다.
"난 말야, 그때 난 말야, 지금도 난 말야,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오소마츠는 가렸던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너에게 구원받았어. 카라마츠라는 이름도 너에게 받았고, 너가 있어서 난 내가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럼, 어째서..."
"동시에 난 불안했어. 나와 같이 있다가는 너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어. 오소마츠와 미래를 만들어가고 싶었지만 두 번이나 소중한 걸 잃은 나는 불안했어. 그리고..."
카라마츠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스스로의 몸을 감싸고서 떨고 있었다.
"역시 말 못하겠어. 그건 봐주지 않을래?"
어느새 카라마츠는 10년 전 전장에서 처음 만났던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소마츠에게도 전해졌다. 이것만큼은 말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게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떠났던 이유라고.
"알았어. 안 물어볼게. 용기가 나면 말해줘. 평생 말 안해도 괜찮으니까. 화난 거 아니야? 화가 난 건 사흘 전 6지구에서 있었던 그거뿐이니까? 그건 말해줄 수 있지?"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건 아니겠지. 오소마츠는 두 개 째의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서 이번에는 두 입에 해치웠다. 볼 가득히 넣고 우물거리는 버릇은 어릴 때부터 고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든 우겨넣어야 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그때 토도마츠가 일어섰다.
"잠시 일 좀 보고 올테니 오소마츠 씨는 카라마츠 형과 같이 있어줘요. 이거 하나만 말할게요. 카라마츠 형은 오소마츠 씨를 보호하고 싶었던 거야. 오소마츠 씨가 노려진다는 말을 듣고선 쏜살같이 날아갔어. 형은 지금 울프라는 이름으로 현상금 사냥꾼을 하고 있는데, 그 이름값이면 자기가 노리는 척 하면서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 오소마츠 씨를 데려오자마자, 형은 그쪽을 치료하고선 한참을 죄책감에 울며 보냈어.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두렵다면서. 솔직히 부러웠어. 나는 형에게 몇 번 목숨을 구해졌지만 이렇게까지 혼신을 다하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 그러니까. 제대로 들어줘요. 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도 있을 테니까."
토도마츠는 살짝 삐진 듯한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오소마츠는 대충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6지구의 그 바에 종종 간다는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간 거였을 지도 모른다. 암살자나 현상금 사냥꾼을 고용해서 그를 덮치거나 죽일 계획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거봐."
카라마츠가 다시 입을 뗐다.
"넌 나를 보자마자 긴장을 다 풀어버렸어. 심지어 내가 던진 나이프에 다쳐서도. 네가 말했지. 신부를, 친구들을 두고, 아저씨들을 두고 도망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너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그래서...넌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어째서...
"내가 만약 진심이었다면, 진심으로 널 잡으려들고 죽이려 했다면, 넌 어땠을 거 같아? 지금까지 그래왔듯 넌 무리하게 뛰어들어 죽음도 개의치않는 미친 개처럼, 나를 막았을까? 꽉 쥔 주먹과 분노와 결의에 찬 눈빛을 난 잊을 수 없었어. 오소마츠 혼자선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나랑 있다가는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카라마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다가가 손을 떼고 대신 입술을 댔다. 두 손은 카라마츠의 양 볼을 감싼 채, 카라마츠의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카라마츠는 가만히 있다 오소마츠의 혀를 받아들였다. 오소마츠는 왼팔로 카라마츠의 허리를 감싸고 오른팔로는 목과 머리를 받친 채 바닥에 깔린 천 위로 카라마츠를 넘어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포개져서 몸이 닿은 채, 입술이 닿은 채 한동안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입술이 마침내 떨어지고 카라마츠는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거야. 그것도 아까 말할 수 없다던 그것 때문이야? 싫어. 네가 밀처내도 난 널 다시 놓고 싶지 않아. 오소마츠는 말없이 그의 감정을 카라마츠의 안에 들이밀었다. 소년시절의 높은 신음소리가 간만에 들려온다. 처음이지만 둘은 능숙하게 서로를 받아들였다. 말로 할 수는 없는 그 이유가,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가, 이런 걸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Posted by 하리H( )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