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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09 [오소카라]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
  2. 2018.05.14 [오소카라] 너에게 준 것
2019. 9. 9. 02:11
https://heartrainon.tistory.com/m/185
여기서 이어지는(?) 정확히는 이전의 이야기+ a
전에 연결해둔 타래를 발견한 김에 업로드
이어나갈 힘이 있다면 이것도 장편으로 이어나가고 싶...음...

일단 세계관도 정리해보고 모아놓은 타래라도 같이 달아드리겠습니다.
https://twitter.com/heartrain_on/status/1170665372229324801?s=19

*
(오소마츠)
기억하는 것 몇 가지. 첫 번째는 태어났을 때의 기억. 7개의 두근거림이 하나로 줄어드는 그 때의 불안감. 나의 가족이 엄마, 아빠, 나 그리고 5명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걸 인식한 건 조금 지나고 나서였다. 두 번째는 가족을 잃어버리던 때. 선명한 총성이 두 번 울리고 싸늘하게 식은 부모의 몸. 세 번째. 우릴 맡아준 보육원이 망하고, 여섯 형제가 뿔뿔이 흩어지던 때. 그 세 가지는 모두 내가, 우리가 태어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버려지고, 카라마츠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지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내게 지은 그 미소가, 아마도 날 처음 구원해 준 것이리라.
신부가 나를 데리고 간 교회는 보육원과 다를 바 없었다. 같은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도 몇 있었고, 신부를 제외하면 아이들로 가득했기 때문일까. 신부는 글자나 산수같은 걸 알려주고, 신에 대한 이야기나 동화나 전설을 들려주기도 했다. 말썽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미소를 잊지 않았다. 그 미소가 좋아서일까, 안 좋은 기억에서 구원해준 사람이어서일까 나는 그를 잘 따랐다. 이름 없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떼를 써가며 그와 비슷한 이름을 만들어달라고 했을 정도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소마츠는 어때, 라고 말했을 때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공부하는 건 따분했지만 신부가 웃어주니까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도 그저 살아있을 뿐이던 존재는 이제야 오소마츠라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교회에서도 몇 년을 지내며 신부의 일을 돕거나 마을에 일하러 가는 등 자신의 가치가 느껴지는 나날을 보냈다. 그런 날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많은 걸 원해서는 안되는데, 신께 간만에 진심으로 기도한 탓이었나. 어느날 일상은 깨어졌다.
마을에 연방군이 반란분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거나 민간인을 죄를 씌워 죽인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교회에 맡겨진 나는 상관없는 일이려나, 하고 무시했지만.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소문은 사실이었는지 마을에 연방군이 나타났다. 탐문을 하며 돌아다니는 군인 무리를 일하는 중에 마주했다. 싸늘한 눈길.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그 눈길이 싫어서 재빨리 교회로 돌아와 마을 얘기를 모두에게 전하던 참이었다. 아까 마주친 군인 무리가 교회에 들이닥쳤다. 카라마츠 신부가 막아서서 아이들을 보호하자, 한 군인이 신부의 멱살을 잡으며 반란을 꾸미려 아이들을 모아온 건지 추궁했다. 곧바로 내가 달려들었지만 녀석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다시 달려들려 하자 이번엔 신부가 그만하라고 말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렴. 신께서 보고 있으시니 어떤 사람이든 용서해야 해. 이런 말을 하면서. 군인의 발길질은 신부를 향했고 그는 바닥에 내팽겨진채 군화 짓밟혔다. 이 때도 신부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였지만 눈만큼은 무언가 굳은 의지가 보였던 것 같다. 밤이 되고, 그런 사건이 있었던 뒤에도 교회에선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냈다. 아이들은 신께 아까의 나쁜 군인들을 혼내달라고 빌었지만 신부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며 기도를 이어나갔다. 취침 시간이 지나 다들 잠든 걸 확인하고 나는 신부의 처소에 들어가 따졌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하고 화를 내지 않는 거냐고. 그의 답은 한결같았다. 한참을 혼자서 분통을 터뜨렸을까. 바깥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신부는 나보고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보려 했고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함께 밖으로 향했다. 신부의 처소는 교회 안에 위치해 있었다. 아이들은 교회 바깥에 허름하지만 넓은 건물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신부의 방에 난 창문은 아이들의 숙소가 아니라 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판단하는 게 늦고 말았다. 아이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커지자 교회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 화염에 싸인 건물과 그 곳을 빙 둘러싼 군인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신부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산 쪽으로 가라고 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은 아까 봤던 무언가 결심한 눈이었다.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눈. 교회를 빙 돌아 산쪽으로 달리는 동안 신부는 군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무서워서, 나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총성은 부모님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총성은 계속 울렸다. 진짜 소리인지 환청인지 알 길은 없었다. 산으로, 산으로, 산으로... 총성이 멈추자 뒤돌아 볼 용기가 생겼다. 아니, 그건 용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숙소도, 교회도,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도 불타고 있었다. 태양이 땅에서 솟은 듯 불길은 어둠을 가르고 일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째서. 어째서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군인들은 날 뒤쫓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도망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눈에 띄지 않은 건, 카라마츠 신부가 나섰기 때문일 거다. 내 귀에 울린 총성 중 몇 번째가 신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몇 시간을 주저앉아 있었을까.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기세좋게 내린 비는 하마터면 산불로 번질뻔한 불길을 금세 잠재웠다. 이것이 신의 조화일까. 그렇다면, 신은 왜 신부를 구해주지 않은 것인가. 신의 뜻에 따라 무엇이든 용서할 줄 알았던 그를. 왜. 그제서야 내 감정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절규를 토해낸 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잿더미 앞에서. 신을 원망했다. 상황을 보자마자 날 살리려 한 신부를 원망했다.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군인을 원망했다. 총성을 원망했다. 부모도, 형제도 잃은 내겐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원망은 분노로 바뀌어갔다. 군인이 하고 간 말 중 반란이 떠올랐다. 이딴 세상이다. 연방의 횡포는 분명 다른 곳에도 뻗쳐 있을 터다. 어디엔가는 연방군에 맞서는 데가 있겠지. 그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일어섰다. 여기서 다른 마을로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하니까.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곳을 찾아서.

*
(카라마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길바닥에서 살았다. 그 어렸을 때가 언제인진 모른다. 첫 기억이 길바닥이니까. 나보다 큰 형이나 누나가 있어 그들이 구걸해서 얻은 걸 같이 버려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나날이었다. 그런 나날도 어느새 끝나버렸지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들은 우릴 떠나버렸다. 하필, 그들이 떠나고 나선 내가 연장자 취급을 받았다. 내가 구걸하고 대여섯 명이 나눠먹는 삶. 얍삽이라고 불리는 나와 닮았고 아마도 나와 나이가 비슷할 아이가 있었지만 그도 내게 의존했다. 모두가 가난한 곳에서 구걸은 점점 어려워졌고, 어떻게든 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나는 힘이 센 편이었다. 힘쓰는 일을 어른만큼은 못하지만, 어떻게든 일할만한 것을 찾아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축복이었다. 그렇게 함께 있는 아이들을 먹여살렸다. 내게 모지리라며 바보취급을 하다가도 품삯을 받아오거나 먹을걸 가져오면 녀석들은 기뻐했다. 다른 녀석들도 구걸이나 일거리 찾기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걔 중에 꾸준히 생을 이어갈 만큼을 벌어오는 게 나뿐이었던 것이다. 적당한 잠자리를 찾아서 옮겨다니거나 장작 모아오기 같은 다른 잡일은 다른 아이들이 나눠서 했으니까. 이렇게 살다보면 절로 남의 것에 손대게 될법한데, 들키면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걸 아는 우리 무리는 도둑질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한 번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산속 동네 유지의 창고를 턴 적이 있는데 창고지기에게 들켜서 죽을만큼 두들겨맞았다. 그러고보니 그때 얍삽이는 이미 도망갔던가. 나를 개패듯 팬 창고지기는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일자리를 하나 알선해주었다. 부자들의 유흥거리인 사냥에 함께 나서는 것이었다. 그때 라이플을 처음 들고 쏘는 방법이나 장전하는 법, 빠른 사냥감이나 멀리있는 사냥감을 저격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내가 라이플을 들고 끙끙대는 꼴이 유흥의 일부였는지 사냥에 나선 사람들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의 사냥터에 나섰다. 비웃음을 견디며 돈을 벌었다. 걔중에는 나를 창고나 자기 방으로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날 깨끗이 씻기고 알몸으로 벗겨 찬찬히 감상하거나 더듬거나 했다. 수치스러움을 느낀 건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뒤였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던 거였다. 반항하기 시작하자 얻어맞고는 했다. 벌어오는 돈은 많았지만 수치심을 느끼고 얼마 안 가 이 일을 관뒀다. 얼마 안 가라고 해도 모지리였던만큼 저 일을 당한 기간은 꽤 길었다. 그 이후 육체노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수입이 되니까. 모두를 먹여살리는 일에 불만없이 바보처럼 살았다만, 지나고 나면 조금 후회가 되기는 한다. 하여간, 길바닥 인생이어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굶어 죽는 아이들도 제법 되는 시대니까.
지나다니는 가게의 라디오에서 듣기로 부랑자들을 일거 소탕한다는 말이 있었다. 슬프게도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매일 듣는 말들만 알고 있으니까. 알아들었다면 조금 더 조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거에 대비하기도 전에 살고 있던 동네의 부랑자 소탕 작전이 시작됐다. 우리도 당연히 그 표적이 되어 근처에서 구걸하던 다른 부랑자들과 같이 도망쳤다. 군인들은 인적이 드문 산으로 우리를 몰아갔다. 죽이려는 건지 도회지에서 쫓아내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총과 칼을 든 그들에게서 도망가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다른 무리의 아이가 넘어지고 그 아이가 짓밟히는 꼴을 보고서 정신이 들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살아온 나날들이다. 쫓겨온 부랑자들 중 어린 아이들은 얼마 안 가 붙잡혀 맞고 있었다. 그 중엔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도망치던 와중에 그게 눈에 띄고 말았다. 그리고 근방에 내게 수치스러운 기억을 남긴 그 창고가 있었다. 창고지기의 알선 탓에 그 창고를 얼마나 드나들었던가. 한때 쓰던 라이플을 꺼내와 군인들의 머리에 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살짝 미쳐있었던 걸까. 맨정신에는 맞지 않던 탄환이 이상하게도 그들의 두개골을 뚫고 붉은 분수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그 자리의 군인들을 다 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앞에 펼쳐진 모습은 끔찍해서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뒤로 하고 달아났다. 사람을 죽였다. 암만 거리에서 못 배운 채 살아온 사람이라도 알고 있다.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붉은 흔적은 잔상이 되어 눈앞을 흐리게 했다. 기묘한 의존에 의한 책임감같은 건 알 바가 아니었다. 순간에 저지른 죄는 그것을 넘어섰다. 다른 아이들을 구하려는 거였잖아라고 변명하지만 방아쇠를 당겨 표적을 맞췄을 때의 쾌감이 그걸 부정했다. 사냥에 따라다닐 때는 알지 못한 감정을 긴박한 그 순간 알아버린 것이다. 잠시 멈춰 토하고는 다시 내달렸다. 가련하게도, 난 그 죄를 더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손이 더럽다고 느껴져서 눈앞에 보이는 물에 손을 박박 씻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실감하면서. 제5지구에서 4지구로 넘어가는 셔틀을 탔다. 화물 속에 낑겨들어갔다. 4지구에 내리자 묘한 안심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안심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레지스탕스의 소문을 들었다. 이미 연방군을 죽인 전과가 있는 그였다. 차라리 대의 속에 숨기로 했다. 죄책감이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 속의 선택지가 많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는 혼자서도 멋대로 성장했다. 그날로 그는 합리화를 할 줄 아는 어른의 길로 들어섰다.

*
"헤에..."
제6지구, 고철 더미 옆에 임시로 건물을 세워 만든 어느 바. 간판은커녕 이름조차 없는 이런 곳에는 온갖 사람이 모인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연방정부에 찍힌 지명수배자,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신분세탁을 하며 사는 사람, 동네 불량배에서부터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어둠의 세력까지. 그렇기에 이곳에는 암묵의 룰이 존재한다. 이 바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면 안된다는 것.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도 이름을 불러선 안되며 모른다고 물어봐서도 안된다는 것. 접선이 필요하다면 은밀한 암호를 통해서 해야만 한다. 그런 곳이다보니, 지명수배자 신세인 오소마츠도 이곳만큼은 편안히 드나든다. 뭐, 다른 곳도 변장을 하거나 하면서 잘도 드나들지만. 지명수배라고는 해도, 그는 평범하고 흔한 얼굴인 뿐더러 정부 측의 인물이 아니라면 그다지 탐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수십명의 현상금 사냥꾼을 골탕먹이고 당한 것은 갚아준다는 주의 아래 괴멸시킨 뒷골목의 조직도 많고,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알려져있어 눈에 띄지 않는 지지자가 많고, 연방정부가 첩보를 받고 실행한 소통 작전마다 번번이 정부를 엿먹이고는 하는 사람이었다. 생명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가며 살아가는 그는 나름대로 삶의 목적이 있다고 했지만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이곳의 분위기도 제법 편안해졌군, 하고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위스키, 온 더 락으로."
커다란 얼음덩어리에 위스키가 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나 식혀볼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 소문 들었어? 얼마 전에 울프가 또 한 건 했다는데."
"그 가면 쓰고 활동한다는 현상금 사냥꾼 말이지?"
"그러니까. 누가 움직이고 있는 녀석인지, 아니면 정말 혼자 내키는대로 활동하는지 감이 안 온단 말이지. 언제 누구의 등을 노릴지도 모르고, 얼굴을 까고 다니지 않는 게 영 맘에 안 들어."
"대비를 제대로 해두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 녀석만 위협인 건 아니니까. 세상 천지에 다 적이지."
울프라고 이름을 숨기고 얼굴을 가린 채 활동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라. 만나면 한 번 놀아볼까? 오소마츠의 흥미가 동하던 때 새로운 인물이 바에 걸어들어왔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묘하게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 바의 마스터는 살짝 한심한 듯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주문대로 쉐이커에 보드카와 베르무트를 담아 흔든다. 오소마츠는 슬쩍 그 남자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오소마츠가 앉은 방향쪽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얼굴을 묘하게 가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목소리에 넘치는 여유와는 달리 그는 생각할 것이 많은 듯 오소마츠의 반대 방향, 그러니까 사람이 없는 쪽을 보면서 연신 한숨을 쉬었다. 지쳐 보였다. 마스터가 그 앞에 마티니를 내자 오소마츠는 그의 옆에 다가갔다.
"어이, 형씨. 심심하면 나랑 수다나 떨지 않을래? 한숨만 쉬지 말고."
그는 오소마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동시에, 두 사람은 소리를 지르려던 걸 입을 틀어막아 저지했다. 매우 닮은 얼굴의 두 사람.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 남자가 먼저 마티니를 음미할 새도 없이 들이키자 오소마츠도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켰다. 남자는 오소마츠의 몫까지 빠르게 계산한다. 둘은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채 바를 나와 고철 더미 뒷편으로 갔다.
"너, 카라..."
"오랜만이다, 오소마츠. 잘 지냈어?"
잘 지냈냐고.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 뒤로 이런저런 일 있었지. 잘 지냈냐면, 그건 아닐걸?"
"그런가."
뭐야, 그 덤덤한 반응은.
"그 날, 왜 사라진 거야? 누가 끌고가기라도 한 거야?"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아니. 내가 도망간거다. 너에게서 말이지."
"무슨 소리야. 나한테서 왜 도망치는데."
"너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유약한 소년 둘이서 살아남을 순 없어. 사지를 거쳐왔다고 해도."
"혼자서도 살아남았잖아. 너도, 나도."
"그러니까."
"둘이면 서로 더 의지해서..."
"오소마츠,"
그가, 아니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부른다.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무척이나 건조한 목소리. 어릴 때와는 달리 깊은 저음의 목소리로.
"각오해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라마츠는 오소마츠 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오소마츠는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그 무언가가 팔에 스치는 건 막지 못했다. 찢긴 옷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아파! 이게 뭐야, 나이프? 하? 뭐하는 짓..."
오소마츠가 팔에 난 상처에 정신이 팔린 동안 카라마츠는 빠르게 달려와서 명치 쪽에 주먹을 날렸다. 깊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급소에 맞은 충격에 오소마츠는 기침을 해댔다.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오자 오소마츠는 일단 허리를 꺾어 피하고는 땅을 짚고 카라마츠를 힘껏 걷어찼다. 겨우 나이프에 스쳤을 팔이 아파온다. 카라마츠는 살짝 비틀거리며 섰다. 정강이에 제대로 직격했나.
"만나자마자 이렇게 과격하게 대화해야해?"
오소마츠는 다시금 카라마츠에게 말을 건다.
"내란죄 및 연방정부를 능욕한 혐의."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본다. 설마.
"지명수배범 오소마츠. 얌전히 잡혀주실까."
여전히 건조하기만 한 카라마츠의 목소리.
"너...정부의 개가 된 거야?"
오소마츠의 목소리엔 이제 분노가 묻어난다.
"잊어버린거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난 건데! 목숨을 걸고 우릴 탈출시켜준 아저씨들을 잊어버렸어? 너도! 복수하고 싶다며! 약속했잖아! 미래를 같이 만들자고..."
격해지던 감정은 급격히 가라앉는다. 힘이 쭉 빠져나가더니 오소마츠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아, 나이프인가. 아까 명치 쪽에도. 뭔가 약이나 독을 쓴 건가. 어째서.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카라마츠는 어느새 가면을 썼다. 그의 눈동자, 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보는 거지? 몽롱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마음을 알고 싶어 손을 뻗었다.

*
삑삑삑삐익, 삑삑삑삐익.
기묘한 새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소마츠는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켜고선 그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방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나무들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팔 다쳤었지, 하고 보면 깨끗하게 처치가 되어있다. 아프지도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보았다. 한 청년이 나뭇가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아, 카라마츠인가. 아까 본 카라마츠와는 달리 좀더 생기있는 표정이었다. 어릴 때의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쳤다. 카라마츠는 민망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원예용 가위를 내려놓고 오소마츠 쪽으로 왔다. 오소마츠는 뒷걸음질을 쳤으나 도망가기 어려운 상황인 걸 깨닫고 주먹에 힘을 잔뜩 넣고 있었다.
"깼는가, 오소마츠."
깊고 낮은, 그러나 상냥한 목소리. 거기에 오소마츠는 주먹에 넣었던 힘을 풀고 말았다.
"상황을 설명하게 해 주겠나. 용서받기 어렵다는 건 알지만. 우선은 식사를 하자. 사흘을 꼬박 누워있었으니 배가 엄청 고플거야."
그 말을 들으니 배가 고픈 듯도 했다. 그러나 경계를 쉽게 풀 수는 없었다. 카라마츠는 어딘가로 연락을 했고, 곧 정원 쪽으로 누군가 음식을 가져왔다.  그도 오소마츠나 카라마츠와 닮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토도마츠입니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오소마츠 씨."
토도마츠라는 청년은 나무 그늘에 천을 깔더니 가지고 온 음식을 늘어놓았다. 여기로 오라는 듯 손짓하면 카라마츠는 거기에 응해 가서 앉는다. 오소마츠는 멍하게 그 모습을 보다 토도마츠의 채근에 와서 앉았다. 샌드위치를 집어 크게 베어먹는 카라마츠를 보자, 오소마츠도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하여간, 카라마츠 형도 무리한다니까. 사람을 독으로 꼼짝못하게 하면 당한 사람은 경계하지! 거기다 6지구에서 여기 5지구까지 자력으로 이동해오다니, 안 들켜서 망정이지 원."
토도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카라마츠는 날 잡아가려 그런 건 아니었구나, 하고 오소마츠는 조금 안심했다.
"그래서, 상황을 설명해주겠단건 뭔데."
토라진 목소리로 오소마츠가 얘기를 꺼낸다.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채로.
"난 지금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고 있어. 여기 토도마츠는 탐정을 하고 있고. 혹시 기억나? 얍삽이라 부르던..."
"헤에, 넌 기억나냐고 편하게 얘기하는구나."
카라마츠의 말에 그는 정색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카라마츠가 나타나자마자 그에게 한 일은 냅다 공격해서 약에 취해 재운 것이었으니까.
"난 반가웠어. 거기서, 다시 만나서 놀랐어. 보고싶었단말은 커녕 넌 나보고 각오하라면서 상처나 줬어. 뭐하자는 거야? 그래놓고 지금은? 왜 갑자기 상냥한 건데! 우리가 잠깐 함께 있던 그 시간 나눈 대화를 내가 행복한 기억으로 둘 거 같아? 괴로워도 널 찾고 싶어서 나 열심히 돌아다녔어! 아저씨들이 맡긴 미래만큼이나 너도 소중했으니까! 거창한 신념이 있어서 레지스탕스로 복귀한 게 아냐. 너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어서였으니까. 그런데, 10년만의 재회가 그런 식이었어. 좋았던 기억으로 두고 싶었던 그 시간이 순식간에 잊어버리고픈 기억이 된 거야. 그거 알아? 나도 사선을 넘나들었어. 몇 번이고 배신도 당해보고, 함정에 빠졌지.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이번이 처음이야. 짧은 시간 동안, 너가 나를 차지해버린걸까."
오소마츠의 말을 카라마츠는 그저 듣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
토도마츠가 조용히 오소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오소마츠 씨는 카라마츠 형을 굉장히 좋아하는군요. 열렬한 고백 잘 들었네."
푸풉, 하고 웃는 소리에 오소마츠는 터뜨렸던 분통과 감정이 부끄러워지며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찔끔 나는것도 같았다.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나직이 오소마츠를 부른다.
"난 말야, 그때 난 말야, 지금도 난 말야,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오소마츠는 가렸던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너에게 구원받았어. 카라마츠라는 이름도 너에게 받았고, 너가 있어서 난 내가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럼, 어째서..."
"동시에 난 불안했어. 나와 같이 있다가는 너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어. 오소마츠와 미래를 만들어가고 싶었지만 두 번이나 소중한 걸 잃은 나는 불안했어. 그리고..."
카라마츠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스스로의 몸을 감싸고서 떨고 있었다.
"역시 말 못하겠어. 그건 봐주지 않을래?"
어느새 카라마츠는 10년 전 전장에서 처음 만났던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소마츠에게도 전해졌다. 이것만큼은 말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게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떠났던 이유라고.
"알았어. 안 물어볼게. 용기가 나면 말해줘. 평생 말 안해도 괜찮으니까. 화난 거 아니야? 화가 난 건 사흘 전 6지구에서 있었던 그거뿐이니까? 그건 말해줄 수 있지?"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건 아니겠지. 오소마츠는 두 개 째의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서 이번에는 두 입에 해치웠다. 볼 가득히 넣고 우물거리는 버릇은 어릴 때부터 고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든 우겨넣어야 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그때 토도마츠가 일어섰다.
"잠시 일 좀 보고 올테니 오소마츠 씨는 카라마츠 형과 같이 있어줘요. 이거 하나만 말할게요. 카라마츠 형은 오소마츠 씨를 보호하고 싶었던 거야. 오소마츠 씨가 노려진다는 말을 듣고선 쏜살같이 날아갔어. 형은 지금 울프라는 이름으로 현상금 사냥꾼을 하고 있는데, 그 이름값이면 자기가 노리는 척 하면서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 오소마츠 씨를 데려오자마자, 형은 그쪽을 치료하고선 한참을 죄책감에 울며 보냈어.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두렵다면서. 솔직히 부러웠어. 나는 형에게 몇 번 목숨을 구해졌지만 이렇게까지 혼신을 다하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 그러니까. 제대로 들어줘요. 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도 있을 테니까."
토도마츠는 살짝 삐진 듯한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오소마츠는 대충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6지구의 그 바에 종종 간다는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간 거였을 지도 모른다. 암살자나 현상금 사냥꾼을 고용해서 그를 덮치거나 죽일 계획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거봐."
카라마츠가 다시 입을 뗐다.
"넌 나를 보자마자 긴장을 다 풀어버렸어. 심지어 내가 던진 나이프에 다쳐서도. 네가 말했지. 신부를, 친구들을 두고, 아저씨들을 두고 도망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너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그래서...넌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어째서...
"내가 만약 진심이었다면, 진심으로 널 잡으려들고 죽이려 했다면, 넌 어땠을 거 같아? 지금까지 그래왔듯 넌 무리하게 뛰어들어 죽음도 개의치않는 미친 개처럼, 나를 막았을까? 꽉 쥔 주먹과 분노와 결의에 찬 눈빛을 난 잊을 수 없었어. 오소마츠 혼자선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나랑 있다가는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카라마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다가가 손을 떼고 대신 입술을 댔다. 두 손은 카라마츠의 양 볼을 감싼 채, 카라마츠의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카라마츠는 가만히 있다 오소마츠의 혀를 받아들였다. 오소마츠는 왼팔로 카라마츠의 허리를 감싸고 오른팔로는 목과 머리를 받친 채 바닥에 깔린 천 위로 카라마츠를 넘어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포개져서 몸이 닿은 채, 입술이 닿은 채 한동안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입술이 마침내 떨어지고 카라마츠는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거야. 그것도 아까 말할 수 없다던 그것 때문이야? 싫어. 네가 밀처내도 난 널 다시 놓고 싶지 않아. 오소마츠는 말없이 그의 감정을 카라마츠의 안에 들이밀었다. 소년시절의 높은 신음소리가 간만에 들려온다. 처음이지만 둘은 능숙하게 서로를 받아들였다. 말로 할 수는 없는 그 이유가,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가, 이런 걸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Posted by 하리H( )Ri
2018. 5. 14. 00:42
스팀펑크AU로 설정을 짜다 몇 가닥이 나왔습니다. 간만에 쓰네요. 뒷얘기를 써야 하는데, 이것 말고도 써야할 뒷얘기가 너무 많아서 일단은 단편인 것으로. 세계관이 넓어져서 솔직히 괴롭군요.
지구가 환경이나 자원 문제 등으로 파괴되고 우주 개척시대로 제 7지구까지 거주지구를 만들고 지구는 모성이라 부르며 복원하고 있는 세계 연방정부가 부패하며 민중을 핍박하게 되고 그 횡포에 못 견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데 헤소쿠리에 있던 스팀펑크를 2차 혁명전쟁 즈음으로 대강 짜고 얘는 뭐, 얘는 뭐 짜는데 아무래도 오소마츠는 무법자, 카라마츠는 현상금 사냥꾼(정확히는 모르겠음) 이게 그림이 딱 나와서리... 망상전개 풀파워! 로 그 프리퀄 느낌으로 썼지만 솔직히 짜놓은 설정 내에서 쓴 거라 저 말고는 뭔 내용인지 잘 모를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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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점을 잃은 눈에 비치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 그를 봤을 때 든 생각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자신과 닮아있다는 점이나 내 또래가 이런 곳에 또 있다는 점은 그 후에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곳의 어른들보다도 더 깊고, 흐려진 그 눈에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내가 다가가서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쪽으로 날 데려온 아저씨에게 눈짓하자, 아저씨는 녀석 옆에 있던 사람을 불렀다.
“이쪽에 쓸 만한 꼬맹이가 있다고 들어서, 우리 쪽 꼬맹이를 데려왔는데…”
“오! 꼭 닮았구만. 하긴, 집 잃은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 게 요즘 세상인데, 헤어진 형제가 이런 데서 만나도 이상할 건 없겠지.“
녀석은 이쪽을 바라봤다. 여전히 깊고도 흐린 그 눈에 정말 내가 비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녀석은 무표정인 채였다.
“자, 자기소개라도 해두라고. 너도 그동안 또래가 없어서 외로웠을 테니 저 애를 너와 같은 조로 편성해줄까 하거든.”
아저씨가 등을 세게 두드리며 격려해줬다.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안녕? 난 오소마츠! 우리 둘 얼굴도 상당히 닮았고 해서…하여간 무언가 인연이 있는 거 같은데 친하게 지내보자고~”
대답 대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그 눈에는 내가 비치는 건가. 손을 내밀자 그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고 내가 다시 입을 열려 하자 그가 답을 했다.
“난…이름은 없고…그동안 같이 지내던 애들은 날 모지리라 불렀어. 잘…부탁해…오소마츠.”
말투는 건조할지언정 성실하기 그지없는 대답이다. 무심코 피식, 하고 웃자 그도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아저씨들은 우리를 배려해선지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기.”
모지리…라고 초면에 참 실례되는 말을 하긴 그래서 그냥 불렀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옆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한…2주 정도.”
“그렇구나. 난 1달 반 쯤 있었나?”
그는 나를 슥 쳐다보더니 들고있던 라이플을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 뭘 했어?”
여기서 뭘 했냐라. 이런 데서 보기 드문 또래에게 물을 만한 건 이런 거 정도려나.
“너한텐 내 얘기를 아무도 안 해준 모양이네. 나도 너처럼 총 들고 전선에 있었지 뭐. 여기 모인 사람들이 뭐 별 거 있냐, 다 연방의 횡포에 들고 일어난 사람들인데.”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녀석은 날 봤지만 이내 아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너도 비슷한 거야?”
“비슷할 지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총을 들고 맞서는 것밖에 없으니까…”
운좋게도 교전이 없던 날이었다. 나는 그와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잃어버린 쌍둥이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그 얘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있던 곳에도 얍삽이라 불리던 얼굴이 똑같은 아이가 있었다는 말엔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이 곳에 오기 전 그 아이를 포함해 함깨 있던 아이들과 헤어져버린 처지에 놓인 그에게 차마 먼 기억 속의 흐릿한 이야기 같은 걸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도 어떤 신부에게 거두어져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교회에서 이것저것 배우며 자라왔던 얘기를 했다. 글자라든가 산수라든가, 아것저것 배운 것들을 자랑스레 떠들면 반짝이는 눈으로 그가 바라보았다. 이곳저곳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버려진 아이들의 가장 노릇을 허며 살아온 그는 무언가 배우는 걸 동경했던 것일까. 변변찮은 이름 하나 없을 정도로 고단했던 삶이었지만, 그마저도 부서져버린 채 사지에 몰린 것에 동정심이 생겼다. 뭐, 그렇게 치자면 눈앞에서 자신을 받아들여준 것들이 모두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도 만만찮게 불쌍한데. 불쌍한 사람끼리 뭐 어때. 선물이라도 하나 주자고.
“저기, 괜찮다면 내가 이름를 지어줘도 될까?”
“에?”
“뭐 지어준다고는 해도… 아는 사람 이름이긴 한데.”
이름이 입속에서 맴돌았지만 바로 얘기할 순 없었다.
“아까 한 얘기에서 나왔던 사람이야?”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가 묻는다.
“응. 나한테 오소마츠라는 이름 지어주고 돌봐줬다는 신부님.”
“소중한 사람 아니야? 나한테 같은 이름을 줘버리면…”
오늘 처음으로, 그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기 얘기를 할 때도 그다지 무표정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터였다. 나를 위해, 다신 만날 수 없는 신부를 위해 슬퍼해주는 구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다고 확신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 신부님하고 너하고 어쩐지 비슷한 느낌도 들고. 무척 소중한 사람이지만, 이렇게 해서 이름만이라도 계속 누군가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 이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까.”
그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락이라도 구하려는 걸까. 눈물이 살짝 맺히는 것을 난 놓치지 않았다.
“카라마츠, 라고 해. 자기 이름이랑 비슷하게 내 이름도 오소마츠라고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신부님도, 너도, 카라마츠야.”
“카라...마츠.”
“어떻게 쓰는지는 알겠어?”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고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다 흙바닥에 카라마츠라고 적었다. 그리운 이름이다. 카라마츠 신부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그의 상냥한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 했다. 돌을 건네주자 그는 글씨를 지렁이 기어가듯 따라쓰며 카라마츠, 카라마츠하고 중얼거렸다. 울컥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선 날 보고 생긋 웃었다. 눈에 맺힌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아. 역시나. 그의 미소는 신부의 상냥한 웃음과 닮아있어.
“고마워, 오소마츠. 이 이름 소중히 할게.”
“카...카라마쯔…흐아아…”
결국 눈물이 나왔다. 한번 흐르는 눈물은 깊이 묻기로 했던 슬픔을 데리고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날 이후 복수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혁명군에 뛰어들은 뒤 잊고 있던 그리움도 같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신부에게도, 그 작은 교회에서 함께 지내던 녀석들도, 구박하다가도 점점 마음을 열어준 마을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구나. 그날 미친듯이 달려 등진 불타는 풍경을 복수심으로만 바꿔 살아왔는데. 소중한 시간들이었다는 걸,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실감하고 말았다. 녀석은, 카라마츠는,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상하지. 아까 녀석한테 내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한참 눈물을 흘리고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게 울 정도면, 이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카라마츠의 미소가 사라지고 다시금 슬픈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냐. 미소, 아까처럼 미소를 징어주면 좋겠어.
“슬픈 기억이지만, 네 이름을 부른다고 항상 슬프거나 하지는 않을거야. 그러니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웃었음 좋겠어. “
멋쩍게 머리를 긁으면 카라마츠가 돌을 건넨다. 오소마츠 이름도 적어줄래? 하듯이. 오소마츠,라고 땅바닥에 적으면 카라마츠가 다른 돌을 주워다 오소마츠, 오소마츠, 카라마츠, 카라마츠, 중얼거리며 흙 위에 써내려간다.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며 다시 웃는다.
“기억했어.”

  연방에 대항해 일어난 레지스탕스의 이른바 ’혁명’은 처음부터 먹구름 일색이었다. 가족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물론 나름의 구심점이나 연방군 장교였던 사람 등에 의해 군사작전 같은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했고 일반 시민들이 연방의 보복이 두려워 도움을 주거나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것도 한몫했다. 대의, 또는 기폭제, 또는 희생이라는 게 부족했던 탓일까. 일반 시민을 움직이지 못한 혁명은 반란에 불과했다. 연방을 거스르는 자들의 본보기로 토벌될 운명이었다.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이들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싸운다는 선택지 외엔 남아있지 않았다. 항복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전처럼 핍박받는 삶으로라도 돌아갈 수 없다.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며 옥살이를 하거나 죽는다. 그런 막다른 길목에 놓인 채 몇 달이 흘렀다. 소규모 교전이 이어지다 연방이 대대적 소탕작전을 선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제 3지구에 있는 레지스탕스군의 최후 방어선, 그러니까 오소마츠와 카라마츠가 있는 전선에는 제 1,2지구의 비보가 연달아 전해졌다. 죽음은 파도처럼 서서히, 그러나 성내듯 밀려오고 있었다. 어른들은 결정했다. 두 소년을 여기서 쫓아내기로. 좋게 타일렀다가 총구를 들이댔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항의한 들 들어주지 않았다. 무작정 뛰어, 제 4지구로 가는 셔틀에 어떻게든 타라고. 아마 그렇게 하면 연벙군이 쫓지는 않을 거라고. 날 챙겨주던 아저씨가 나와 카라마츠를 끌어안고선 미래를 맡긴다며 얘기할 때서야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카라마츠 손을 붙잡고, 이 세상에서 다신 만날 수 없을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그 곳을 벗어났다. 새벽을 가로질러 잠의 신이 붙잡지 않도록, 한 맺힌 영혼들이 붙잡지 않도록, 끝내 이루지 못한 복수심이 붙잡지 않도록 달렸다. 여기 올 땐 분명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 비겁한 내가 걸음을 재촉했다. 카라마츠는? 내 손을 잡고 달리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같이 달렸다. 충격적인 건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이었다는 점이다.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여간 달렸다. 감시가 없는 곳을 찾아서, 셔틀이 있는 곳까지 달리느라 숨이 차 죽을 지경이었다.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화물 속에 들어가서야 긴장이 풀렸다.
“난 여기 죽으러 왔어. 죽으러 왔을 텐데……”
무표정한 카라마츠의 입에선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 나왔다.
“나도야. 죽을 각오로 녀석들에게 복수할 참이었어. 그런데 미래라니…… 너무하잖아. 그런 걸 맡기면, 거기 남아 있을 수 없잖아……”
분하기 짝이 없었다만, 카라마츠의 말에도 반발심이 생간건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다시금 복수하자고.

  빛이 새어들자 잠에서 깼다. 화물을 열어본 남자는 눈을 찌뿌리더니 우리 둘을 내쫓았다. 거리의 풍경을 보아하니 제4지구인 모양이다. 이번엔 카라마츠가 내 손을 붙잡고 골목으로 들어가 여기저기로 움직였다. 라디오가 틀어진 가게 옆 골목에서 그는 멈췄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높으신 분의 더럽게 긴 연설이 끝나고, 제3지구에 남아았던 반란군 잔당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에도 연방은 시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라는 있으나마나 한 말과 함께. 운이 좋았다고 할까. 그날 새벽 도망치지 않았다면 우린 죽은 목숨이었다. 카라마츠는 자기 손을 쳐다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카라마츠은 왜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건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만, 지금 묻기엔 그가 괴로워보였다. 한동안 그 골목에서 쭈그려 앉아았었다. 눈물이 흘렀다가도 닦고 또 닦아 아닌 척 하려 애썼다. 옆의 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제4지구에는 ‘바다’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바다를 보면서 옛날 모성母星에 살던 사람들은 눈물을 삭혔다던가 하던 신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몸을 일으키면 그도 몸을 일으켜, 셔틀 정거장 쪽으로 되돌아갔다. 셔틀 정거장 옆에 조성된 바다는 푸른 물로 덮여있었지만, 별다른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 바다에, 카라마츠는 입고 있던 거적때기같은 옷을 벗어던지고서 뛰어든다. 아. 처음 만난 날 그의 깊은 눈은 분명 이걸 닮아 있었다. 마치 자기에게 있던 모든 걸 씻어내듯 카라마츠는 헤엄쳤다. 처음 만난 날 그가 보여준 미소를 마음껏 지어주었다. 거기에, 나는 빨려들어갔다. 후련해보이는 미소 뒤엔 무표정한 그가 여전히 숨어있다. 무표정 속에 그가 죄책감을 억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카라마츠는 자기와 함께 하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연방군을 몇 명 죽인 것이다. 살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이 그에겐 있었다. 제대로 된 도덕 관념을 배우진 않았지만 해서는 안 될 것을 카라마츠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피가 흐르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과 총을 든 자신의 손을 번갈아보면서,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 길로 카라마츠는 소문을 좇아 레지스탕스애 들어왔던 것이다. 이미 사람을 죽여 더럽혀진 손으로, 그나마 가치있는 일을 하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그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바다에서 헤엄치고 나온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런 거구나. 상관없다고. 그런 건. 이미 나는 너의 미소 속에 들어가버렸어. 그게, 미래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복수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단순한 동정심이나, 불확실한 형제애 같은 게 아니라 저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는 마음. 뭐냐고 신부님이여. 바다가 눈물을 삭히긴커녕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이상한 데잖아. 거짓말쟁이였잖아. 카라마츠는 웃으며 마무리지었다. 고마워. 이 이름을 네가 줘버린 이상, 난 살아야겠어. 오늘로 죄책감을 다 덜 수야 없겠지만. 살아서 잘못되지 않은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그런 말을 하는 카라마츠는 불안에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만큼은 어떻게든 지으려고 애쓰고 있어서, 끌어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도 거짓말쟁이네. 역시 닮았잖아. 허세부리지 말라고.
“그래, 살자. 살아서, 미래를 만들자고.”
미래가 무어냐. 수많은 목숨이 던져진 미래를 당장에는 뭐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알게 될까. 한 달 뒤면, 1년 뒤면 알 게 될까. 무슨 미래를 맡긴 건지. 평화로운 시대에 일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미래? 다시금 혁명을 일으켜 이번에야말로 연방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미래? 글쎄. 어떤 미래라도 카라마츠는 웃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그를 안고서 한참을 있었다.
  아침이 되었다. 바다 옆에 적당히 만든 잠자리에 카라마츠는 없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먹을 것이 머리맡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니 모래사장에 카라마츠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새 카라마츠는 많은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미래. 오늘 그의 발 밑에 적힌 글자다. 이쪽을 보고선 그가 미소지었다. 우선은 살아간다. 그거밖에 없나. 멋쩍은 듯 그에게 간다. 분명 그가 그리는 미래는 나와 같을 것이라 믿으며. 카라마츠는 어느 날 내 앞에서 사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의로 사라진 건지, 누군가에게 끌려가거나 해서 사라진 건지. 그를 찾아헤매다 나도 날 받아들여주는 곳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유야무야 흘러가버렸다. 그를 다시 만난 건 10여년 후였다. 분명 최악의 재회였다.
Posted by 하리H( )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