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9. 00:41
나도 왕공이라는 시대의 웨이브에 타고 싶었던 이야기
두근두근하지 않나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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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의 세계와 땅 아래의 세계는 이어져 있었단다.]
그런 거 믿을 리가 없잖아.
유모 말 같은 건 다 거짓말이야.
[지금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길이 끊어져있지만 가끔 땅 아래의 세계의 흔적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돌고는 했지.]
나와 늘 함께 있어주겠다면서.
날 감싸고선 눈앞에서 죽어버렸잖아.
거짓말쟁이 말은 믿지 않아.
아니, 난 이제부터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을 거야.

불타는 성에서 아바마마의 충신이었던 자에게 안겨 도망쳐나오면서 오소마츠는 다짐했다.
간신히 도망친 곳에서 세력을 길러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죽이고 왕좌에 오른 숙부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왔다.
정통성이나 내분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그를 제거하지 못한 반란 세력들은 몇 년이 지나고 이쪽에서 먼저 숙청했다.
타오르는 불꽃과 끈적한 피를 딛고서 오소마츠는 <붉은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하아..."
살아남기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왕의 자리를 되돌려받기 위해서, 수많은 공부와 훈련의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바쳐온 날들의 반동일까.
오소마츠에겐 때때로 왕좌에 앉아있는 게 따분했고,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가곤 했다.
[어느 날, 근처 숲속에 땅굴이 생겨났는데 그 땅굴에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나는 그 땅굴을 보러 집을 조용히 빠져나와 숲으로 향했지.]
"왕이시어, 무엇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잠행 또한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혼자서 백성들을 살피러 잠시 다녀올 것이니 그 누구도 따라오지 말도록 하라."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채비와 칼 한 자루에 사냥용으로 기르는 말 한 마리를 탄 채 그는 왕궁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미친 거 아냐? 왕이라는 자각 있는 거냐고? 이럴때만 위엄있는 말투로? 사람 붙여! 얼른!"
오소마츠를 지지해준 친구이자 재상인 쵸로마츠의 당황하는 목소리.
"형님을, 아니지. 폐하를 잘 알고 있잖아. 사람 괜히 붙였다 그 사람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걱정마, 친구인 고양이 몇 마리를 붙여 뒀어..."
오소마츠의 동생이자 생물들, 특히 고양이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치마츠의 목소리.
그런 목소리들이 제멋대로인 오소마츠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오소마츠가 모는 말은 자신이 숨어살던 마을 방향으로 내달렸다.
[깊고 깊은 숲속을 헤쳐나가자 팔다리에는 수많은 상처가 나고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너덜너덜해졌지.]
달빛을 받아 어두운 길 위에 무언가 반짝 빛났다.
오소마츠는 말을 잠시 멈추고 말 위에서 내렸다.
[그렇게 헤매다 지쳐 울고 있을 때,]
"눈앞에 땅굴이 나타났단다."
날카로운 은빛의 무언가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두더지인가. 두더지 발톱이 아무렴 저렇게 빛날까.
은색 손톱은 점점 모습을 드러내더니, 거기서 푸른 옷자락과, 머리 같은 것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굴에서...사람이...튀어나왔...어?"
오소마츠의 유모가 들려준 옛이야기처럼, 방금 막 만들어진 땅굴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프리~~~~~덤!"
우렁차게 외치며 땅굴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두더지같은 강철 손톱에, 흙이 묻기는 했지만 한눈에 봐도 우아하고 반짝거리는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튀어나온 사람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일어서서는 갑자기 치마를 걷어올렸다.
이게 뭔 횡재냐! 오소마츠는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건강해보이는 실루엣의 다리에는 드릴같아 보이는 것이나 작은 가방 등 이것저것 매달려있었다.
거기서 그는 강철 손톱같은 걸 빼서는 가방같은 데 집어넣더니 왕관을 꺼내 썼다.
그리고서는 드레스를 털고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했다.
[마치 온기라곤 없다는 듯 새하얀 피부의 사람이 말이야.]
달빛 아래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하기엔 새하얀 피부, 푸른 보석이 달린 화려한 은색 왕관에 푸른 드레스를 입고 그는 서 있었다.
그 모든 것에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나...나오자마자 지...지상인과 마주칠 줄이야...그보다 다...당황했구나, 지상인!"
그리고 예상치 못한 굵고 낮은 목소리.
"하? 당황한 건 그쪽인 거 같은데? 갑자기 자기 치마를 들추다니, 무슨 포상인가 했지."
오소마츠는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받아친다.
불편했던 왕으로서의 위엄은 잠시 내려놓은 편한 마음으로.
"그보다 지상인? 여기는 장미의 나라야. 지상이라는 나라가 있던가?"
"장미? 나라? 여기는 지상이 아닌건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지상이 땅 위라는 의미라면 여기도 지상이 맞겠지."
"그런가. 다행이다. 몇 번 올라오긴 했지만 지상인과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안도하는 그를 보며 오소마츠는 유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설마.
"그러는 너는 어디서 온 거지? 설마 땅 밑에서 온 거?"
"그래. 나는 지하에서 왔다. 지하 세계의 공주로서 말이지."
지하 세계면 보통 저승을 얘기하지 않나? 그보다 공주? 차림새만 보면 공주같기는 한데...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지하 세계에서도 지상 세계의 존재는 전설로만 전해져왔고,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은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지상 세계도 비슷한 상황이지 않을까 생각했지."
"아...응...지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생명이 다하면 가는 곳이라고 하고 있어서 말이지.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뺴면 거의 전설조차도 안 남아 있다고 할까."
죽음이라는 말에 그는 드레스를 주먹으로 꼭 부여잡았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지상에도 있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건 비슷한 모양이다. 참고로 나는 저승에서 온 사람은 아니야. 죽은 사람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오소마츠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는 다정하게 말을 한다.
나쁜 녀석은 아닌가. 오소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던 긴장을 살짝 풀었다.
"이렇게 말도 통하는데 너는 누구야? 지하 세계의 공주님?"
공주님이라는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힌다.
"카라마츠. 카라마츠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오소마츠. 오소마츠야."
"오소마츠인가. 어...잘 부탁합니다."
뭘 잘 부탁한다는 거야.
지금껏 살짝 고압적인 말투로 말하다가 갑자기 높임말을 쓴다고 해도 말이지.
"나도 잘 부탁해, 카라마츠 공주."
"잘 부탁합니다. 처음으로 지상인을 만나면 쓰려고 수없이 연습했던 말이다. 생각보다 편하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
첫인상과는 달리 카라마츠는 어딘가 바보같고 허술해보였다. 그리고 상냥해보였다.
"지상에 겨우 왔으니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내가 먼저 물어봐도 돼?"
"상관없다. 뭔가?"
"카라마츠 공주는 남자지? 어째서 공주인 거야?"
"남자인 게 상관있는가?"
"에?"
오소마츠는 당황했다. 지상과 지하는 공주의 개념이 다른가?
"공주는 세대교체 시기에 그 세대에서 선발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5명 정도를 선발하여 그 중에 왕이나 여왕으로 지명되는 것이지. 예컨대 나는 우리 세대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공주로 선발되었다만."
"아...그렇군. 에? 가장 강하다고?"
"그렇다. 뭐, 여왕님께는 미치지 못하지만."
힘으로 선발된 건가? 혹시 지상을 침략하거나 하기 위한 첨병같은 건가?
"그런가...공주라고 하면 보통 여성이거든. 개념이 좀 다른가보네."
"뭐, 지하도 공주에 선발된 자들은 여자가 많은 편이다. 왕보다도 여왕이 많고 말이지."
"지상에 온 이유는 뭐야?"
"그야 뭐, 지상의 이것저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지."
이것저것이라...
"문헌으로만 읽었던 다양한 생물들을 만나보고 싶다! 예를 들면 늑대라든가 호랑이라든가! 하늘이라든가, 바다라든가,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이내 눈을 반짝인다. 너무 지나친 생각이었나. 연기라면 참 소름돋을 만큼 순수함이 눈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보다 오소마츠, 어쩐지 주변에 생물이 늘어난 거 같다만...저건 음...고양이라고 하던가?"
"고양이? 어느새 이렇게 늘었...아! 이치마츠!"
수많은 고양이의 존재를 눈치챘을 즈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말에 탄 쵸로마츠였다.
"에...쵸로마츠?"
쵸로마츠는 오소마츠를 노려보다 앞에 있는 카라마츠를 눈치채곤 살짝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누구...신지...?"
아마 오소마츠를 막 부를지 왕으로서 높여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네. 카라마츠 공주, 이 쪽은 쵸로마츠. 내 신하야. 나는 아까 말했던 이 곳 장미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고."
"카라마츠...공주...?"
"아. 오소마츠는 왕이었군...에에! 지상의 임금이었던 건가! 제대로 예의를 갖추질 못했는데..."
"됐어됐어. 안 들키면 왕이라고 밝힐 생각 없었고. 아까 말했지만 나는 장미의 나라의 왕이야. 지상의 극히 일부만을 다스리고 있으니까, 너 쪽에서 낮출 필요는 없어. 편하게 하자고~"
"왕으로서의 위엄이라곤 없어! 카라마츠 공주? 어느 나라에서 오신 공주님이신지..."
"들어보라고, 쵸로마츠! 카라마츠 공주 엄청 반짝거리지? 지하 세계에서 왔대! 그 전설 속의 지하세계..."
"물러나시죠, 왕이시여."
쵸로마츠는 정색을 하더니 오소마츠 앞을 가로막고 칼을 꺼내든다.
"어디서 온 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이 나라의 지존을 속이려 들다니. 제대로 정체를 밝히거나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라!"
단호한 쵸로마츠에 오소마츠는 당황했다. 오소마츠를 막 대하면서 한편으로 아끼고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지키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무작정 말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등장의 임팩트 탓인가 카라마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렸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쵸로마츠의 호통에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아까 받았던 바보같으면서도 상냥한 느낌을 따라가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만. 행여나 아까 다리에 매달려있던 무기를 꺼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카라마츠는 당황했던 얼굴을 거두고 다시금 왕관과 드레스를 매만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레스를 살짝 잡고서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온화하면서도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 달빛을 받아 빛나는 새하얀 피부. 아까 땅굴에서 나와 막 섰을 때보다도 더 그는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살짝 지은 미소가 전하는 위엄까지.
"저는 지하 세계의 공주, 카라마츠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카라마츠의 눈빛에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밤에 특별한 빛도 없건만 눈앞이 눈부셔서 견딜 수 없었다.
"지하 세계라니 그런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쵸로마츠는 대단해. 저렇게 흘러나오는 기품조차 의심하고 있다니. 오소마츠는 생각한다. 그는 그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했었다. 그는 카라마츠를 믿고 싶은 것일까. 아, 닮았다. 그는 오소마츠의 숙부와 닮았다. 생긴 게 닮았다는 건 아니고. 숙부는 상냥하고 살짝 허술한 사람이었다. 정사에 바쁜 아바마마와 성을 돌봐야 하는 어마마마를 대신해 오소마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숙부였다. 오소마츠는 숙부를 잘 따랐다. 뭐든 척척 해내고 뭐든 척척 대답해주는 숙부를 그는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숙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은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유모는 오소마츠와 숙부가 가는 곳마다 따라와 오소마츠를 지켜보고 있었다. 늘 함께 있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숙부의 야망이 실천에 옮겨진 날, 유모의 희생으로 불타는 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오소마츠는 그의 순진무구함을 버렸다. 뭐든 쉽게 믿던 그 시절을 버렸다. 냉혹해질 수는 없었지만 복수심을 누르며 살아왔다. 자신과 피가 이어진 동생, 자신의 안목으로 우정을 이어나간 친구, 그 외에 그가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기반으로 서서히 세력을 늘려 몇 년 뒤 숙부에게 복수하러 갔다. 오소마츠는 선봉에 서서 그를 막아서는 신하들을 짓밟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망치지 않고 어전에 남아있던 숙부의 목을 직접 베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칼과 손이 피로 물들었다. 숙부의 목을 벤 칼을 떨어뜨리고 피묻은 손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과 지금까지의 인생이 스쳐지나가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성이 불타던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듯, 불타버리는 듯, 마음이 아파왔다. 사태를 수습하고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이 고통은 종종 밀려왔다. 그 고통을 숨긴 채, 따분하다며 장난으로 넘기곤 했다.
"괜찮다."
머리 쪽이 시원해졌다. 동시에, 뜨겁게 불태우던 고통은 따스함으로 바뀌어갔다.
"괜찮다."
오소마츠는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는 카라마츠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카라마츠는 한 손을 오소마츠의 머리에 짚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쪽을 토닥여주었다. 쵸로마츠는 칼을 거두고 무릎을 꿇은 채 그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손에서는 물 같은 게 느껴졌다.
"이게...어떻게 된..."
"정신이 들어? 괜찮아? 여기 카라마츠 공주님이 널 구해주셨어. 물의 마법으로 네 고열을 가라앉혀주셔서... 종종 있었잖아, 갑자기 열이 올라서 쓰러지는 일이... 기운차게 나가길래 약 같은 건 생각도 못했는데...정말...다행...훌쩍..."
쵸로마츠는 걱정했다는 듯 눈물을 쏟았다. 오소마츠는 이마를 짚고 있던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 살짝 내렸다. 카라마츠의 손에서는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흘러내리지 않고 그 손 안에서만 작은 분수처럼 솟아나는 물에 손가락을 슬쩍 대니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쓰러져서 걱정했다. 종종 열이 올라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 미약하게나마 힘을 써봤다. 그저 물을 조금 다룰 수 있는 것뿐이지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다."
오소마츠가 갑자기 쓰러지자 쵸로마츠는 카라마츠를 경계하던 걸 포기하고 오소마츠 쪽으로 갔다. 평소라면 은밀히 약을 챙겨와 먹이거나 찬물을 적신 수건을 얹기만 하면 됐을텐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의식이라도 차리게 하려고 어깨 쪽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머리에 손을 짚었다. 일단은 이걸로 응급조치를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네며 카라마츠는 손에서 물이 솟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쵸로마츠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자칭 공주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기적처럼 물이 솟아나오는 것을 보고선 경계심을 풀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오소마츠를 구할 수 있는 게 카라마츠밖에 없었으니까.
"여전히 믿기 어렵지만, 임금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지하 세계와 마찬가지로 거의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으니까요. 물론 아는 사람중에 마법 비슷한 것을 쓰는 사람이 있기에 마법에 대해서는 믿고 있습니다만."
"그런가. 지하 세계는 그래도 이런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꽤 된다. 땅의 기운을 근원으로 삼아서라고 들은 적은 있지만. 마법이라기보단 잔재주에 가깝다. 목이 말라서 곤란한 일은 없을 정도의 작은 힘이지만..."
"그 덕에 내가 살았잖아. 고마워, 카라마츠 공주."
"그럼, 오소마츠도 깼으니. 쵸로마츠여. 당신의 충성심, 그리고 그 이상의 우정은 잘 알았다. 솔직히 나도 당신과 같은 신하가, 아니 친구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소마츠가 부럽다. 하지만 그와는 정말 방금 막 만난 거 뿐이다. 지하 세게에서 지상으로 막 나온 나와 우연히 마주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절대로 오소마츠를 속이거나 할 생각은 없다. 오소마츠, 아니 장미의 나라의 왕이시여. 친구도 걱정하고 있고, 이제 성으로 돌아가 쉬지 않겠나. 잠시나마 만나서 즐거웠다. 지상에서의 첫 만남이 오소마츠여서 정말 다행이다."
이별의 말을 건넨다. 쵸로마츠의 진심과 오소마츠의 몸 상태. 카라마츠가 앞으로 어디서 뭘 할지는 모르지만, 처음 마주한 오소마츠와는 여기서 헤어져야 할 거라는 판단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오소마츠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제부턴...어떻게 할 거야? 지상의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싶다며?"
"여기저기 다녀보면서 배우면 되겠지. 지상에 대한 책도 들고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
여기서 놓치면 영영 카라마츠를 못 보게 될 것 같았다.
"장미의 나라에서 정식으로 지하 세계의 공주 카라마츠를 초대하겠다!"
오소마츠는 간절하게 외쳤다. 믿고 싶으니까 믿는다고. 믿음에 배신을 당한 적도 있지만 운명같은 끌림에 그는 마음을 열고 카라마츠를 믿어보기로 했다.
"공주라고는 해도 호위 하나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혼자서 헤쳐나가는 건 힘드니까, 외로우니까, 그러니까, 당분간은 나의 성에 머물며 찬찬히 지상을 알아가는 건 어떤가?"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와 쵸로마츠를 바라보았다. 쵸로마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이지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미의 나라의 왕이시여."
오소마츠는 안도한 듯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 고로, 성에 귀하신 손님을 초대하게 되었으니 임금님께서도 성으로 돌아가시죠. 말은 탈 수 있겠어? 공주님은 어디에 태워야 하지?"
"에에...쵸로마츠, 조금 더 쉬면 안 돼?"
"안 돼. 이치마츠도 걱정하고 있고, 네 성격에 다른 사람을 보내면 가만두지 않을 거 같아서 급하게 찾으러 온 거니까. 하여간 위기감도 뭣도 없다니까."
"헤헤..."
"내가 오소마츠를 데리고 거기 탈 테니 쵸로마츠가 성까지 안내해주면 어떤가? 다루는 법을 알려주면 비슷한 것은 타 봤으니 금방 탈 수 있을 거다."
카라마츠는 쵸로마츠에게 말을 다루는 법을 듣고 잠깐 타 보더니 내려서 오소마츠를 번쩍 들어올렸다.
"잠깐? 내가 공주한테 공주님 안기를 당하는 거야? 에? 그보다 카라마츠, 정말 힘이 세네."
"말했잖아. 우리 세대에서 가장 강하다고, 훗."
"의기양양하다못해 자기애로 가득한 표정! 아프네! 하하하..."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말에 먼저 태운 후 올라탔다.
쵸로마츠를 따라 성으로 향하는 길, 어느새 살짝 주변이 밝아지고 있었다.
"카라마츠, 깜깜해졌다가 살짝 밝아지는 이 풍경, 이걸 하늘이라 그래."
"이게 하늘? 하늘은 푸른색이라고 들었다만."
"꼭 그렇진 않아. 하늘은 다양한 색으로 물들고 구름도 있고 해도 있고 아까처럼 달도 뜨고 별도 뜨고... 하늘 하나만 봐도 정말 다양해. 그런 세계를, 카라마츠 공주가 알아갔으면 좋겠어."
"그냥 카라마츠라고 불러줘, 오소마츠. 처음 만날 때부터 호칭도 말투도 다 꼬였지만, 이름을 부르는 게 더 친해진 거 같아서 좋아. 물론 공적으로는 제대로 격식을 갖춰야 겠지만."
"그럼, 카라마츠. 잘 부탁해."
"잘 부탁합니다, 오소마츠."
그건 여전히 높임말인거냐. 그렇게 핀잔을 줄까 하다가 슬쩍 바라본 카라마츠의 새하얀 목덜미를 보고선 얼굴을 붉힌 채 카라마츠의 등에 기대어갔다.
그렇게 카라마츠 공주는 장미의 나라의 성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지상에 온 그가 겪을 수많은 이야기에 이제 막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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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이 머릿속에 구축되었지만 최대한 친절하게 크게 떡밥을 던지지 않고 썼습니다. 떡밥 던지면 또 나만 알아보는 글이 되니까...단편인데 장편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하여간 단편으로 썼습니다. 뒤에 똥냥꽁냥 복닥복닥은 이미 많은 왕공이 있으니까...둘이 결혼하겠지!
Posted by 하리H( )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