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말해야 할 진 모르겠지만.
좋아합니다. 저와 평생을 함께해 주세요.

이게 아닌데. 이미 평생을 함께 하고 있잖아.

—좋아해요. 저와 결혼해주세요. 행복하게 해줄게요. 진심으로.

으아아아아! 프로포즈란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그냥 결혼해달라고 하면 안돼? 너무 복잡하지 않음? 오소마츠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가 방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머리를 굴리던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움찔하며 멈추자 문을 열고 카라마츠가 들어왔다.
"뭐 하는 건가, 오소마츠. 방에서 뒹굴거릴 거라면 잠깐 같이 산책이라도 하자."
"산책? 그럼 나간 김에 빠칭코..."
"그럼 안 되지, 오소마츠. 빠칭코를 가면 나이스한 나를 눈에 담을 시간이 줄어들어버린다만."
"뭐래는 거야. 아무튼, 알았어. 어디 마주 앉아서 오래도록 널 보고 있을 테니까.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고."
오늘 프로포즈를 하기는 글렀네 생각하며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앞세워 집을 나섰다. 사귄다고 해도, 연인이 됐다고 해도, 손을 잡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사람이 드문 데서야 겨우 손을 잡고, 충동적이던 첫 키스 이후에는 눈치를 봐가며 입을 맞춰선지 의외로 그렇게까지 많은 키스나 애정 행각을 나눠보질 못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라고 전에 카라마츠는 체념한 투로 말했다. 너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다며 제 나름은 시원한 투로 이야기하는 그도 사실은 아쉬워 하는 걸 오소마츠는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래서 제 맘대로 안거나 할 수 없었다. 카라마츠는 의외로 조심스럽구나. 평소에는 그렇게나 무방비하고 쉽게 다가오는 녀석이건만, 오소마츠에게 고백하는 것만은 오래도록 망설여왔다고 했다. 오소마츠가 먼저 고백하고 나서야 털어놓은 제법 오래된 카라마츠의 연심은 그의 안에 여전히 갇혀있는 듯 했다.



"결국은 여기밖에 없나~ 너도 참 여길 좋아한다니까."
"여기서 오소마츠가 고백해주지 않았나. 좋아할 수밖에 없지."
특별할 거 없는 강둑에서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서,  서로를 보며 덤덤히 이야기하는 이 장면을 카라마츠는 꿈꿔왔을까. 어느 날, 카라마츠의 마음을 눈치채고서는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오늘처럼 고민했었던가.

—어떻게 하지. 사내 새끼가, 그것도 얼굴부터 똑같은 쌍둥이 동생이 날 성적으로 좋아하는 거 같은데?! 잠, 잠깐. 이거 거짓말이지? 내가 잘못 생각한거지?

알고 있었다. 잘못 생각한 게 아니라는 건. 카라마츠가 겨우겨우 드러내지 않던 마음을 알아채버린, 발렌타인데이 며칠 전에 있던 작은 사건. 카라마츠 본인과는 인연 없을 것만 같던 커다란 제과점에 스스로 걸어들어가길래 맛있는 걸 사면 뺏어먹을 생각으로 몰래 뒤따라 들어가 뒤쪽에서 깜짝 놀래켜주려던 그때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상자를 집어들며 '오소마츠는 이런 거 좋아할까'라며 중얼거린 그 일을. 오소마츠는 놀라서 다른 진열대로 뒷걸음질쳐 그대로 아래로 숨어버렸다. 카라마츠는 그 초콜릿을 사지 않았고, 혹시나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선물을 고르러 온 걸까 하는 가능성은 역시나 발렌타인데이를 빈손으로 마침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 오소마츠의 눈길이 카라마츠를 좇게 되었다. 왜 나를, 형제가 아닌 다른 의미로 좋아하게 된 거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마도 카라마츠는 거짓말을 했을거다. 고등학생 시절의 카라마츠라면 눈을 피하며 무슨 소리냐고 했을 거다. 성인이 된 카라마츠라면 '나는 모두를 사랑한다제! 에브리바디 러브!' 같은 소리를 지껄였을 거다. 아니면, 정말, 혹시나 오소마츠 자신이 잘못 짚었을까 두려워서. 어쩌면, 그렇게 물어보는 것으로 오소마츠도 제 마음이 확정되는 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날들이 지나고 지나 여러 해를 거치며 둘의 마음은 오래도록 숙성되어갔다. 카라마츠는 제 마음을 숨기는 덴 능숙해져갔지만 견딜 수 없는 날이면 오소마츠를 피해버렸다. 오소마츠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을 때마다 카라마츠의 꿈을 꿨다. 꿈을 꾸는 그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섰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을 피하는 카라마츠를 강둑에서 붙잡고 바닥에 넘어뜨린 채 엉망진창인 고백을 카라마츠에게 해버렸다. 무슨 말을 해댔는지 그 모두를 제대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랑 하자는 말을 내뱉고 바로 미안하다며 사과했던 것만은 뚜렷이 기억한다. 내려다본 카라마츠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흐르기에 오소마츠는 저질러버렸구나 하고 어쩔줄 몰라했는데, 카라마츠는 손을 내밀어 오소마츠의 뺨을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말하며 웃었다. 바로 둘의 몸과 입술이 포개졌다. 그런 강렬한 고백의 장소지만, 창피한 기억일지도 모르는데 카라마츠는 자주 이 곳을 데이트 장소로 골랐다.
"고맙다. 오소마츠라면 마음껏 사랑을 나누고 싶을텐데, 나 때문에 많이 참아주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사람을 성욕에 미친 사람 취급하지 말아줄래. 뭐어, 지금은 여러모로 참고 있긴 하지만. 나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아껴주고 싶어하는 면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지 뭐야. 멋지지."
"그래, 그래. 멋있어, 오소마츠."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심인 양 부드럽게 말하는 말투라니.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역시 슬슬 독립을 해야하나 싶어. 독립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복잡하지만, 우리 둘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오소마츠가 참는 것도, 내가 눈치보는 것도, 너무 오래 끌고 싶진 않다."
잠깐, 이거 프로포즈 아님? 지금 선수치기를 당한 건가? 싶어 오소마츠는 살짝 당황했지만, 한숨을 쉬며 오소마츠가 아닌 강가의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는 카라마츠에 살짝 안도했다. 돌아오는 길은 그냥 평소처럼 걸었다. 저녁 반찬은 뭘지, 또 둘이 같이 들어오냐며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형제들에게 뭐라고 할지 등의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며.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뒹굴거라는 평소와 같은 저녁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오소마츠는 프로포즈를 어떻게 할지 줄곧 고민했지만 도저히 멋들어지게 구상이 나오지 않았다. 괜히 안달이라도 난 듯 뜨거워지는 자신을 탓했다.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뜨고 바라본 창문에 오늘은 커튼이 치는 걸 모두  깜빡해서 달빛이 새어들어왔다. 아, 이젠 고민하는 거 그만둘래. 그대로 이불을 빠져나와 카라마츠를 깨웠다. 카라마츠도 잠에 들지 않았던 건지 바로 이불 밖으로 나왔다. 조심히 오소마츠가 지붕으로 올라가면 카라마츠도 그 뒤을 따라 올라왔다. 달빛 아래서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안았다. 지나가는 누가 보면 어떠랴. 둘은 이어 키스를 했다. 밤공기가 선선해서 기분이 좋았다. 둘의 혀와 입술이 떨어지고 강둑에서처럼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달과 얼마 보이지 않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잠시 보다가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왼손을 자신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지금 당장은 없는 반지 대신으로 카라마츠의 왼손 약지에 입맞춤을 했다. 카라마츠의 손을 줄곧 들어올린 채, 오소마츠는 고민을 던져버리고 이야기한다.
"평생 내 것이 되어줘, 카라마츠."
카라마츠는 말이 없다. 다만, 고백을 한 그 때처럼 또 눈물을 조용히 흘리면서 미소를 짓는다.
"평생 네 것이 될게, 오소마츠."
아마 이 프로포즈를 오소마츠도 카라마츠도 나중에는 좀 더 제대로 할 수 없었는지 후회하겠지만, 아마도 둘의 부끄럽고도 행복한 추억이 될 거라고 오소마츠는 믿어본다.



재활(?) 겸. 구상하던 이야기의 일부분이기도.
이 이야기의 전체도 시간이 꽤 지나 묘사나 방향성이 멋대로 굴러가면서 갈피가 안 잡히네요. 파편화된 채 몇 개가 끊어지고 버젼이 다른 채 존재하는 중.


차오르는 달이 검푸르게 펼쳐진 밤하늘을 하얗게 비추는 아무도 없는 어느 시골길. 그림자를 뒤집어쓴 채 조그만 불빛이 듬성듬성 삐져나온 저택의 모습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용케 이런 길을 걸어 올 생각을 했군. 차나 오토바이, 하다못해 자전거라도 있었다면… 그저 가볍게 조사를 하러 왔을 뿐인데 별 다른 단서도 못 건지고 빠르게 지는 해에 길까지 잃어버린 채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기는 글렀고, 길바닥에서 노숙이라도 했다가는 날씨 탓이든 뭐든 목숨을 내놓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저택의 불빛은 구원과도 같았다. 설마 이 마을에 떠도는 늑대인간의 소문이 저 저택과 관련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갔지만, 이내 주린 배와 추위가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늑대인간은 몰라도 이런 곳에선 무슨 일이든 날 것만 같은 두려움과 어디서 우는 지도 모르게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의 울음소리, 이따금 개가 짖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걸음을 재촉해서 저택에 다가갔다. 저택의 형태가 뚜렷이 드러날 정도로 가까워지자 조금 안심하던 그때, 앞에서 새하얀 천 같은 게 느릿느릿 다가왔다. 피가 묻은 건지 붉은 얼룩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새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하얀 천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하얀 천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달려 나왔을 뿐인데, 바로 드러난 검은 머리칼에 그대로 오소마츠는 주저앉았다.

“저어… 괜찮은가?”

새하얀 바스로브 차림에 붉은 장미 다발을 든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소마츠를 쳐다보았다.

“깜짝이야. 유령인 줄 알았네.”

“훗. 내가 유령으로 보였던 건가. 겁이 많은 편이군.”

“그런 거 아니거든! 타이밍 좋게 달빛이 댁의 옷과 그 장미꽃잎만 잘 비춰서 놀랐을 뿐이야.”

달빛때문에 착각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이상한 차림새라고,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오소마츠는 참았다. 이 남자가 저택의 주인인가? 설마하니 고용인이 이런 차림을 하고 있진 않을 테니까.

“병에 꽂아놓을 장미를 꺾으러 정원에 있다가 사람 그림자가 이쪽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 같길래 나와봤을 뿐인데. 나에게 볼 일이 있는가? 아니면 그냥 지나가던 길인가?”

“음… 혹시 저택의 주인인 거야? 어… 그렇다면 오늘 밤 신세 좀… 져도 될까요?”

에헤헤…하며 오소마츠는 머쓱해 하면서도 바로 부탁을 했다. 사람이 좋아 보이니, 거절하진 않을 것 같은데.

“부탁하려고 바로 존대하는 건가. 이렇게 어두워져서야 위험하니, 일단 들어가기로 하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그에게 또다시 달빛이 비춰,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는 어쩌면 정말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의 손에 들린 붉은 장미 다발과 이제 막 가시에 찔린 듯 붉은 방울이 터져 나온 손바닥이 그것을 간신히 부정하고 있었다.



저택은 외관만큼 웅장한 내부를 자랑했다. 그러나 금이 간 벽이나, 저택 분위기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너구리나 복고양이 조형물이 부서졌다 붙인 자국이나, 그 외에 보잘 것 없는 미술품만 몇 점 놓여있다거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홀 등에서 기대했던 저택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널찍한 응접실에 들어서자 남자는 편한 소파로 오소마츠를 안내한 뒤, 비어있는 꽃병에 장미 다발을 꽂았다. 그리고 곧 간단한 먹거리와 따뜻한 차를 내왔다. 다행히도 응접실은 벽난로가 지펴져 있어서 홀만큼 춥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여러 의문을 품었지만 일단 주린 배부터 채웠다. 더 달라는 눈치 없는 부탁도 흔쾌히 응하는 남자가 짓는 미소는 쓸쓸함과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오소마츠가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자 남자는 일인용 소파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

“아직 서로 자기소개도 안 했군. 난 카라마츠다. 이 저택의 주인이지.”

“난 오소마츠. 이 마을에 재밌는 소문이 돌길래 조사하러 왔다가 이렇게 신세를 지네.”

두 사람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늑대인간 같은 흉흉한 소문을 듣고 조사하러 왔다면서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고 온 오소마츠를 카라마츠는 질책하면서도, 자신은 이 저택에 살게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과 별로 교류를 하지 않아 그런 소문은 잘 모르겠다며 넘겼다.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라며 카라마츠는 2층의 손님방으로 안내를 하고 잠자리를 살펴주었다. 오소마츠는 침대에 누워 저택 어딘가에 있을 카라마츠를 생각했다. 둘만이 덩그러니 있는 넓은 저택에서, 오소마츠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오소마츠가 눈을 뜨고 옆에 있는 커튼을 걷으니 이미 해가 가운데에 떠 있었다. 붉은 장미가 듬성듬성 핀 정원도 카라마츠와 마찬가지로 쓸쓸함이 느껴졌다. 겨울이 다 되어가는데, 요새는 장미도 오래 피어 있구나, 하고 정원 너머 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시골 마을도 쓸쓸한 곳이네. 밤과 별 다를 바가 없이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카라마츠가 응접실에서 나와 반겨주었다. 낮이라 그런가 바스로브 차림이 아니구나. 그게 당연한 거겠지만. 그때 솔솔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절로 오소마츠의 배가 울렸다.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응접실로 들어가는 걸 따라가자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이렇게 신세를 져도 괜찮은 건지 잠깐 생각하고선 또다시 주린 배를 채우는 오소마츠 옆에서 카라마츠도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자 그제야 식당이 따로 있지 않냐고 물었지만 카라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넓은 저택을 쓰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쓰는 공간만 쓰게 된다며. 손님이 오는 일도 드물고 거의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니 특히나 식당같이 사람이 많이 와서 채워야 하는 곳은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또 다시,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이 이상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걸까. 오소마츠는 정원을 보고 싶다고 조르며 카라마츠와 밖으로 나왔다. 정원은 꽃이 듬성듬성 피어있는 점 빼고는 나름 잘 가꿔진 곳이었다. 저택 안쪽에 비하면 손길이 많이 닿은… 카라마츠가 훨씬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미를 좋아해?"

"응. 특히 붉은 장미를 좋아한다. 강렬하게 시선을 붙드는 색인데다, 꽃잎이 마르면 마르는 대로 깊은 색깔을 내거든. 오소마츠는 좋아하는 꽃이라든지, 색이라든지 있는가?"

"나도 빨간색을 좋아해. 눈에 띄는 색이라는 점도 카라마츠랑 같은가. 꽃은 그다지 흥미가 없어서. 그 외에 좋아하는 거라면... 호기심이 동하는 것? 아니면 사람들이 날 보고 재밌어해 주는 거라든가."

"그런가. 오소마츠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군."

"에... 어떤 점이?"

"탐정 같은 거 아닐까 싶다가 이렇게 준비 없이 달려오는 것도 그렇고, 재밌어해 주길 바란다는 건 아직 잘 모르겠고..."

오소마츠가 살짝 흔들리는 눈빛으로 침을 삼키는 건 눈치채지 못한 채 카라마츠는 사뿐사뿐 앞으로 걸어갔다. 낮의 카라마츠도 밤과 마찬가지로 유령 같았다. 햇빛 아래서도 여전히 그의 얼굴은 새하얗다. 파릇파릇함을 잃어버린 장미 덩굴 사이로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그를 쫓아서 정원을 돌고 나서는, 고맙게도 며칠 더 머물러도 괜찮다는 권유를 받았다. 원한다면 조사를 위해 마을에도 함께 가주겠다는 그의 과한 호의를 받아들이며, 둘째 날은 그냥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오소마츠는 고민하다 탐정 복으로 갈아입고 카라마츠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때 카라마츠가 당황했다 터트린 웃음은 지금까지 카라마츠의 표정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나름 '안식탐정'이라는 이명이 있다며 사건 현장을 온화하게 만들어준다고 주로 활동하는 지역의 경부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하자, 카라마츠는 무언가 해결된 듯 시원하게 웃어주었다.

"안식탐정이란 말이지. 어울리는군..."

뭐가 어울린다는 건지. 하긴 내가 좀 편안한 사람이긴 하지. 오소마츠는 의기양양하게 한 번 더 안식탐정의 포즈를 취해주었다.



다음날은 함께 마을의 상점가에 갔다. 사람이 없어 보였던 마을에도 상점가만큼은 나름대로 사람이 있었다. 식자재를 사는 카라마츠의 동선을 따라 오소마츠는 사람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카라마츠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사는 것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이나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에 늑대 울음소리가 평소보다 더 자주 들린다는 소문과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왔다.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아버리니 서둘러 장을 봐야 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느릿한 걸음의 카라마츠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질 것만 같이 투명해 보였다. 잠시라도 카라마츠를 잊어버리면 곧 사라져버릴 듯한 투명함. 손을 잡으면 잡히지 않을 것만 같이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카라마츠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약국이었다. 따라 들어오려는 오소마츠를 멋쩍은 듯 쳐다본 뒤, 카라마츠는 말없이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오소마츠도 따라 들어갔지만, 카라마츠는 그저 늘 먹는 그걸 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해가 기우는 인적 없는 시골길을 둘이 걸으며 저택으로 돌아가는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만이 흘렀다. 오소마츠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별 소득 없었다며 휘파람을 불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날 밤은 와인과 간단한 안주가 차려졌다. 와인잔을 돌리다 음미하듯 붉은 와인을 입 안에 흘려 넣는 카라마츠를 보고선 오소마츠도 와인잔을 돌렸으나 답답함에 홀짝 들이켰다.

"카라마츠는, 왜 혼자 있어?"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너무나도 직설적인 말.

"그런 건 묻지 않는 게 배려가 아닐까, 오소마츠."

쏘아붙이듯 답하는 카라마츠.

"궁금하니까. 나도 탐정이라는 나름 비밀스러운 정체를 밝힌 참이고? 그 정도는 물어봐도 되지 않아?"

"멋대로 알려주지 않았나. 궁금했긴 했지만, 소문을 조사하러 왔다는 말을 한 시점에서 대충 그런 거라고 알 수는 있었으니까."

"그럼, 안식탐정이라니 어울린다는 건 뭐야. 어제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말이었다고."

"말 그대로다. 취조하듯이 몰아붙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만."

"지금 혼자 있으면 안되는 상황 아냐? 어딘가 아프다면 간병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거 아니냐고."

"......"

카라마츠는 말없이 와인잔을 비웠다. 입 옆으로 살짝 흘러내린 붉은 와인 방울을 오소마츠가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지만, 카라마츠는 그 손을 쳐냈다. 살짝 닿은 카라마츠의 볼은 역시나 차가웠다.

"먼저 들어가 보겠다. 탁자 위는 그냥 내버려 둬도 되니 더 마시다 가도 된다."

그렇게 말하며 응접실을 나가버리는 카라마츠를 오소마츠는 쉽사리 붙잡지 못했다. 대충 짐작이 가는 그의 사정을 좀 더 신경 써서 얘기할 걸 그랬나. 그래도 사흘을 함께 있었으니 이 정도면 가까워졌다 싶었는데, 카라마츠는 처음부터 줄곧 벽을 세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어색해져서야 더 머무르긴 곤란할지도... 내일이 되면 떠나야 할까.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유령 같았던 카라마츠가, 아픈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그걸 태도에선 드러내지 않은 채 오소마츠를 환대해주었던 그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오소마츠도 응접실을 나서서는 1층부터 닫힌 문을 열었다 닫으며 돌아다녔다. 2층에서 오소마츠가 묵고 있는 손님방과 반대편에 있는 방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찾아낸 오소마츠는 벌컥 문을 열었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인가! 하고 소리쳤지만,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카라마츠의 우는 얼굴을 본 오소마츠는 입을 열지도, 나가지도 않고 문을 닫고서 카라마츠가 누운 침대의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오소마츠를 카라마츠는 밀어냈지만, 침대가 넓은 탓인지 너무 세게 밀었다가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질까 걱정한 탓인지 오소마츠는 그다지 밀려나지 않았다. 다시금 다가와서는 손가락으로 카라마츠의 차가운 볼에 손을 갖다 댄 뒤, 그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그런데도 카라마츠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따뜻... 하다."

"줄곧, 이렇게 해주고 싶었어. 처음 본 그때부터 카라마츠는 차가웠거든."

"차갑게 대하지 않았는데... 아까는 미안했다만..."

"그게 아냐. 이렇게 따뜻하게, 이 세상에 붙들어주고 싶었어."

"무슨..."

"사라지지 마. 함께 있어 줄 테니까. 있을 수 있는 그날까지 있어 줄 테니 벌써 유령같이 살지 마, 카라마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 쪽으로 더 다가와 카라마츠를 안아주었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다가와 안쪽으로 폭 들어갔다. 카라마츠의 눈물이 오소마츠의 몸을 적셨다. 이내 두사람은 입을 맞추고, 서로를 따뜻하게 데워갔다. 그 후 이틀은 두 사람 모두 저택에서 나가지 않았다. 정원을 산책하고,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밤을 함께 보냈다. 새하얀 카라마츠의 얼굴의 붉게 물든 뺨을 바라보며,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카라마츠는 마음을 열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릴 적 이 저택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서 파티를 여는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며,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제 나름의 소박한 소원을 털어놓으며, 오소마츠가 다른 사람을 재밌게 해주고 싶다면 카라마츠도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카라마츠의 건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어딘가의 파티에 놀러 가서 함께 즐겨보자는 약속을 나누었다. 오소마츠가 여기 눌러앉기 위해 내일은 짐을 챙기러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을 꺼낸 밤의 달은 어느새 보름달이 다 되었다.



왜 하필이면 그날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그날 밤이었을까. 늑대인간의 소문을 조사하면서 간과해왔던 보름달과의 연관성. 보름달이 뜬 밤, 저택에 혼자 있는 카라마츠를 늑대인간이 습격해서 죽여버릴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집을 챙기며 잊고 있다 바라본 보름달에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새벽에 어떻게든 저택에 도착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저택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눈물을 삼키고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했다. 적어도 네가 행복한 마음으로 이승을 떠날 수 있도록. 나는 기꺼이 해골이 되어 버린 너와 마지막 춤을 추고, 사람들을 모아서 저택에서 즐거운 파티를 열고, 그 파티를 달아오르게 하는 멋진 공연의 주인공은 네가 되어줄 거고, 네가 마음을 쏟던 정원에 아직도 지지 않은 장미꽃 아래에 널 잠들게 할 거고, 그런 네 앞에선 끝까지 웃어줄 거라고. 널 잃은 슬픔보다도, 네 목숨을 병마보다도 빠르게 앗아가 버린 범인에 대한 분노보다도, 널 재밌게, 행복하게 해주는 게 널 위한 것 아닐까. 그게 '안식탐정'인 나 오소마츠의 역할이니까. 저택을 나서기 전까지 참아왔던 슬픔을 저택을 등지고 쏟아내더라도, 네 앞에서는 웃어줄게. 저택을 뒤로하는 발걸음은 느려지고 눈물범벅이 된 채 저택을 돌아보면, 붉은 장미꽃잎이 흩날리며 아마도 진짜 유령일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바라보고 있다. 손을 뻗어도 이제는 진짜 잡히지 않을 너와 작별하는 데에는, 너와 지냈던 시간의 수십, 수백 배는 걸릴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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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 10화 인랑편 보면 슬프거든요. 나고관주적으로? 다른 시점으로? 웃으며 무덤 만들어주고 해골하고 춤추고 공연하고 살해현장인 저택이 파티장이고... 이건 오카뇌를 너무 돌려서인진 모르지만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과도 같은 그런 인상을 받았던... 거기서 이어져온 아이디어인데 이것도 1년 이상은 묵혀둔 거 같음...
12월 12일 오카의 날❤️💙 기념으로 올해도 너무 많은 걸 놓쳤지만 일단 이건 안 놓쳐야지 하는 마음으로 써봤습니다. 뭔가 그래서 결말이 (늘 그렇지만) 급전개


표지? 낙서는 어제 새벽을 불태우고 글은 밤과 새벽을 불태우고 퀄은 이모냥인데 시간은 많이 걸리고😭

헤소센세의 마지막 이벤트를 위한 점검 연장전에 따라가며 오랜만에 낙서
는 트레지만 그래도 오래걸림
느와르 오카인데 홍란이라 부르던가 아무튼
디테일은 늘 그렇듯 잘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날림날림

효과 빡 준(...) 버젼

효과 덜 줌

...
참고작
ㄹㅋㄹㄱ ep11 아이캐치인데 모방위험인지 바뀐다고 하는
분위기가 참 개쩐다였는데 재현을 못하겠어요


12であのアイキャッチのパロ | H( )Ri #pixiv https://www.pixiv.net/artworks/101599486

짧글/주청/1 4개 우겨넣기식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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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1월 11일.

인간들의 시간으로는 이렇다고 하더군. 인간들의 자세한 시간을 알아두는 것도 괴담을, 이야기를 좋아하는 청행등에게 있어선 당연한 일이건만, 오늘도 그런 '시간'과 '이야기'를 어디 사는 누군가가 절묘하게 엮어내어 속고 있다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들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는 게 꽤나 재밌다. 물론 저 인간의 마음은 어떨지, 어떤 심정으로 막대 과자를 주고 받는지, 지나치게 인간의 마음에 몰입하기도 한다. 현대의 괴담이란 옛날과는 또 다른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게 그저 공포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이날의 훈훈함과 씁쓸함이 교차하는 풍경을 청행등은 그 눈에 담고 있었다. 

청행등은 잠시 풍경을 내려다보다 들고 있던 등에서 푸른 도깨비불을 내보내 제 몸을 감쌌다. 인간의 모습으로 사뿐히 땅 위에 내려서고선 익숙하게 사람들 속에 섞여든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옛날처럼 등을 걸어두고 모여앉아 괴담을 나누는 '햐쿠모노가타리'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괴담이든 괴이쩍은 일이든 청행등의 먹잇감이 되는 이야기는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넘쳐난다. 이렇게 인간 속에서 이야기를 얻어가지만, 그렇지만 예전과는 다른 단절된 섞임 속에서 조금 서글퍼지긴 했다. 뭐어, 오늘의 볼일은 막대과자 아닌가. 하나쯤 슬쩍해도 별로 큰 혼란은 안 생기겠지만, 대충 그 의미를 아는 입장에선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디 신사라도 들어가 세전이라도 슬쩍할까 하며 공원 벤치에 앉았더니, 웬 꼬마가 청행등 앞에 와서 멀뚱멀뚱 청행등을 쳐다보았다.

"나비- 빛나는 나비가 있어"

"으응?"

"이런 나비는 처음 봐- 형아 뿔도 나있네- 신기하다-"

"아아. 어린아이라 그런건가. 내 원래 모습이 보이는 건가."

"나비 만져봐도 돼?"

"그럼. 네 손에 옮겨주지."

도깨비불로 만들어진 나비가 꼬마의 손에 옮겨갔다. 꼬마는 따뜻해, 간지러, 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웃었다. 

"고마워, 형. 나비 만져보게 해줬으니까 이거 줄게."

꼬마가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막대과자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건넨 꼬마는 씨익 웃었다. 웃는 꼬마의 이앞니는 하나가 빠져 있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친구가 줬는데 우리 엄마는 이런 과자 못 먹게 하거든. 친구한테 고맙다고 하고 싶은데 버릴 수는 없으니까 형아 줄게! 안녕!"

그리고서는 재빨리 가버리는 조심성없는 꼬마다. 나같이 착한 요괴를 만나서 다행이군, 하고 청행등은 생각했다. 어쨌건 이렇게도 귀여운 사건이 생겨,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 청행등은 즐거워졌다. 

본모습으로 돌아와서도 막대과자를 쉽게 맛보지는 못하는 청행등이었다. 인간의 과자도 몇 번이고 먹어봤고, 사실 이 과자의 맛도 알고 있는 바니까. 하나가 이루어지면 또 하나 욕심이 생기는 건 왜일까. 역시 이런 건, 사랑하는 이와 나누어먹는 그런 이벤트를 꿈꾸고 마는 건... 청행등은 자신이 인간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움츠러들어있었다.

"모처럼 떠들썩한 날인데 왜 우울해 보이지? 내가 너무 오래 놀러갔다왔나? 하하핫!"

맞아. 꿈꾸고 말았던 건. 그런 이가 있으니까. 생각나는 상대가 있으니까. 청행등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 보이고 말았다.

"아니, 잠깐잠깐! 내가 그렇게 잘못한거야? 미안해... 그래도 청행등이랑 마시려고 맛있는 술도 구해왔... 우왓!"

당황하는 주탄동자에게 달겨들어 폭 안기는 청행등의 행동에 주탄동자는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술도 안 마셨는데 이렇게 애교가 넘치는 청행등은 오랜만인걸.

"괜히 인간들의 축제... 같은거에 심취해버린 거 아닌가 싶어서... 조금 우울해졌다만. 주탄동자가 돌아와줬으니, 주탄동자가 거기 어울려줄거라고 믿고... 있다제."

"에에... 우리는 뭐, 인간들의 축제니 놀이니 그런거 좋아하고 잘 끼어 놀고 그렇잖아. 뭘 새삼스레. 오늘은... 막대과자를 코에 끼우는 날이었나?"

퍼억! 하고 주탄동자의 배에 청행등의 주먹이 꽂힌다. 

"농담이라고, 농담. 청행등 쪽에서 먼저 그런 걸 하자고 할 줄이야. 매번 내쪽에서 할 때마다 투정부리면서 받아줬잖아. 엉큼해졌네, 아니 때리지는 말아줘..."

주탄동자는 능글맞게 막대과자상자를 열어 봉지를 연 뒤 막대과자를 하나 꺼낸다. 누가 먼저 입에 물까 재기도 전에 둘 다 격정적으로 달라들어 막대과자가 부서져버렸다. 다음 과자는 주탄동자가 청행등에게 건네주고 청행등은 과자를 살짝 이에 물었다. 주탄동자도 이에 물고 사각, 사각,사각, 사각, 거리를 좁혀갔다. 평소에도 하는 입맞춤이 이렇게 긴장할 일인가... 싶은 순간 청행등이 살짝 힘을 줘 막대과자가 부서졌다. 손톱만큼 남은 막대과자에 주탄동자는 이거면 원래 인간들이 하는 막대과자게임에선 거의 우승급이라며 추켜세워준다. 얼굴을 붉히는 청행등에게 주탄동자는 다시 막대과자를 건네는 척 하더니 제 입에 가져간다. 이번에는, 게임 말고 원하는 걸로 할까. 말없이 전해지는 눈빛으로. 서로의 이에 막대과자를 물고서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긴장감 끝에 맞닿은 감촉과 새로운 재미에 둘은 까르르 웃어버렸다. 이후 남은 과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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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 땡겨서 쓰는데 쓰려는데도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짬내서 쓰려니까 눈앞이 뱅글뱅글 돌아서 뭔 헛소리를 쓴건지 모르겠단
진짜 글이 오랜만이에요오오


낮에 잠깬다고 몬스터 두 캔 때리고 잘 시간에 잠이 안 오는 김에(다른 할일은 안 하고;;) 펜을 쓰고 싶어서 새벽에 미리 전력한 그것
두 장이라 더블로 240분 걸린듯
그런데 이런 퀄리티라니 실화입니까ㅋㅋㅋㅋㅠ
1812(헤소워 마법학교) -> 교연(헤소워 마법)으로 두장째는 사족... ㅋㅣ스신이 그리고 싶었을 뿐...입니다(퀄망)

뜨이따 링크
https://twitter.com/2afterglow2km/status/1380869333643976710?s=19

언제나 힘껏 사랑하리💙₂ on Twitter

“오소카라/장미꽃 한 송이🌹 1812(마법학교AU)입니다 허접한 펜따기로 보내드립니다 #카라른_전력_120분”

twitter.com

픽*브(pi/xi/v)에 올렸던 거
만화 등 일본어로 된 것도 있고 슬쩍 효과를 다르게 한 것도 있어서 픽*브 먼저 올리고 티스토리에도~
https://www.pixiv.net/artworks/86021002

#おそカラ osokara log - H( )Riのイラスト - pixiv

昨年のおそカラ月間に参加したのと今まで描いたのまとめました。12月はまたおそカラ月間がありますね。楽しみだな... とにかくですね、閲覧有難うございます!3期もガンガン見ましょう!

www.pixiv.net

뭐어... 잘 그리진 않았습니다

2019년 오소카라월간 기념 만화 1812

주제가 뭐더라...

이것도 제우포세로

 금환일식 소재로 반지로 표현

 

페북의 뭔툰인가... 원출처를 못 찾겠는데 그거 트레입니다
번역본이 없었나;;; 19년 9월 21일 일본판 오카 전력 60분

좋아요 12개
@okalove_12
인스타그램 패러디에요~
오늘 점심은 카레라이스! 카라쨩💙이 만들어줬어!
#점심 #카레라이스 #좋아해

트레틀로 도전한 저스니쿠

 

마찬가지로 트레틀로 레스니트
날 뽀뽀마로 만든 슈텐아오(주청)
디*님 그림체로 왕공(왕희)
오늘 그린 따끈따끈한 항공마츠 기장부기장 카라가 두 버젼
일판 오카전력 올해판 아래 gif로 참가
춤춘다! 마살라~ 카라의 아오자이 차림이 매우... 바람직한
캔 테잌 유어 아이즈 옾 미~ 교사(국영) 오카데쓰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걸 올리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오카 지분이 굉장히 높네요 이젠 거의 오카 메인이라고 해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ㅋㅋㅋ
연성하는 건 오카요 많이 보는 건 잋카요 쌓아놓은 건 쵸카요 생각하는 건 토카요 써야하는 건 쥬카인 상황

1812합작 참가작(http://18osokara.tistory.com/21)

 

첫눈이 내리면 첫사랑에게 고백한다.

그런 로망을 항상 품고 있다.

품고만 있을 뿐.

한 걸음 더 나가기에는 용기가 없다.

오소마츠는, 나의 쌍둥이 형은, 어쩌면 나한테는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존재니까.

오소마츠와의 거리감은 고3이 되고 나서 느끼게 되었다.

반이 달라져서일까. 우리 6쌍둥이들이 점점 멀어져서일까.

오소마츠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자들에게 장난치러 다니고,

그러다 고백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설마, 했는데.

벚꽃이 져가는 어느 봄날 오소마츠가 웃으며 낯선 여자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와서 견딜 수 없었다.

혼자 싸매고 있는 게 그나마 나아서, 서로 서먹해진 우리 형제 사이를 좁혀볼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흘러, 싸늘한 공기가 가득해지는 겨울이 왔다.

 

*

 

첫눈이 내리면 첫사랑에게 고백한다.

그런 로망을 항상 품고 있다.

품고만 있을 뿐.

한 걸음 더 나가기에는 용기가 없다.

카라마츠는 소중한 동생이다. 소중한 동생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결코 우애 같은 것이 아니라 연애, 연심이라고 불러야 하는 그런 사랑.

다들 똑같은 얼굴의 6쌍둥이일 텐데, 왜 나는 녀석만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그 사실을 부정해보려 발버둥을 쳤다.

6쌍둥이가 아니었다면. 형제가 아니었다면.

그러면 좀 더 편하게 너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첫사랑과 같이 첫눈을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나봐.

철없이 뛰어놀던 어린 시절, 내리기 시작한 첫눈에 너는 그런 말을 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첫사랑은커녕 사랑이 뭔지조차 모르던 철없는 아이였다. 그저 눈이 길가에 쌓일 만큼 내리지 않고 흩날리는 것에 아쉬워할 뿐이었다. 그런 말을 한 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다. ‘첫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뒤였다. 연애 이야기로 떠들썩한 중고등학교 시절, 1년도 넘게 여자 친구와 사귀는 반 친구에게 슬쩍 물어봤었지. 뭐가 그렇게 좋냐고. ‘뭐든 좋지만 둘이 있으면 행복해라는 짧고도 풋풋한 한 마디는 어째선지 마음을 울렸다. 먼저 떠오른 너의 얼굴을 고개를 흔들며 지웠다. 아니야. 그도 그럴게, 우리는 쌍둥이 형제인걸. 그야 네가 나고 내가 너인 듯 자란 우리 6쌍둥이는 함께 하면 즐겁고 서로를 잘 알아주는 사이기는 하지만... 둘이 있다고 항상 마음이 맞는 건 아니었으니까. 뭐든 좋은 건 아니었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있다고 해도 서로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었다. 특히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일들이 많이 생겼으니까. 그래서 그럴지도 모른다. 다들 이유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고3이 된 우리 6쌍둥이는 서로 멀어져갔다. 나도 반이 달라졌다는 핑계로 카라마츠를 피해 다니며 더욱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녔고, 그런 나에게 한 아이가 고백한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벚꽃이 내리는 봄의 마력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피한 채 그 아이와 사귀었지만, 친구 이상의 마음은 여전히 생기지 않았다. 그런 어중간한 상태로 시간은 흘러흘러 싸늘한 공기가 가득해지는 계절이 왔다.

오소마츠 군. 고마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거 알아? 첫사랑과 같이 첫눈을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어릴 적 카라마츠가 했던 말.

들어본 것 같기도... , 곧 겨울이라 그런가? 하하핫!”

나 말야, 첫사랑은 중학교 막 들어갔을 때 부활동 선배가 정말 많이 도와줬었거든. 그 선배가 첫사랑이야. 고백하기도 전에 그 선배는 다른 선배랑 사귄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없더라고.”

....”

그 상태로 겨울이 되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첫눈이 오는 날을 기다렸어. 자기만족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첫눈이 오는 날 같은 장소에 있으면 같이 눈을 맞으면 상관없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정말 첫눈이 오는 날,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기적처럼 첫눈을 같이 맞은 셈이 됐는데. 그 때 선배는 그저 농구를 하고 있었을 뿐이지 날 알아챈 것도 아니었고, 뭔가 자신이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진 거야. 너무 바보 같았어.”

사귀고 있는 애한테서 첫사랑 이야기를 들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 꽤 오래 사귀었네.”

그러네. 오소마츠 군이 내 고백을 받아줄 지는 생각도 못했어. 어영부영 반년이 지났네. 많은 추억은 없지만. 내가 고백해놓고 막상 진학 준비 때문에 바빴던 탓도 있지만. 오소마츠 군은, 여전히 생각중?”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서 말야~ 잘 모르겠...”

그렇구나.”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반년동안 사귀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들로 가득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솔직히, 나의 행동도 별반 바뀌질 않아 여전히 여자들한테 장난치는 걸 관두지도 못했고, 그녀는 그런 걸 그다지 나무라지 않았다. 하긴, 3학년 때였으니 이런 사람인 걸 대충 알고도 사귀자고 한 걸지도 모르지만. 왜 나를 좋아하게 됐는지 물었을 때 웃는 모습을 좋아해서라고 답했던 그녀다.

오소마츠 군, 사실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지?”

좋아한다고 듣고 싶은 거...”

나 말고 다른 사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보고 있으면 알게 되는 걸? 날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런 거 아니...”

괜찮아. 고마웠어. 내 고백을 받아준 것도. 조금 짓궂다고 생각하지만...그래도 반년동안 즐거웠어.”

“......”

어렴풋이 알고 있어. 누굴 보고 있는지. 분명 그 사람도 너를 보고 있을 거야. 내일에서 모레, 첫눈 예보가 있더라고? 누구나 첫사랑과 이루어지는 건 아닐 테고 첫사랑과 첫눈을 맞는다고 해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건 단순한 미신이겠만, 믿으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해. 아마 네가 보고 있는 사람은 너의 첫사랑이겠지? 그래서, 며칠 생각하다가, 이제 그만 보내주기로 했어. 고마워.”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걸 보고도 마음이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 그래서 눈치 챈 걸까. 아무리 한심한 녀석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나쁜 녀석 같잖아. 그녀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할게.”

소매로 눈물을 슥 훔치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다, 새삼 자신이 차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에 전해진 온기를 꽉 쥐자, 별로 흔들리지 않던 마음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를 붙잡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내서 첫사랑에게, 카라마츠에게 고백을 할 것인가. 다시 그녀가 돌아보며 웃는 표정으로 힘내라는 듯이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힘내라는 포즈를 하고선 돌아섰다. 그녀 나름의 배려 덕에, 일단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

 

편지를 썼다. 첫눈이 오면 첫사랑한테 고백한다는 마음을 벌써 몇 년이나 품어왔던가. 아침에 주워들은 날씨예보에서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첫눈이 온다는 말을 듣자, 닫아두려 애썼던 사랑이 열려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오소마츠는 지금 사귀는 사람도 있겠다, 그리고 애초에 형제끼리 사귄다는 게, 연애감정을 품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제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른이 될 거니까. 오소마츠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 마음을 정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들고 방을 나왔다. 달이 비추는 거실의 탁자 위에서 펜은 허공을 맴돌았다. 차분하게 쓰고 싶었다. 어른스럽게, 담담하게. 하지만, 잘 되지 않아서 눈물이 났다. 결국 몇 마디 쓰지 못하고 편지를 봉투에 넣고선, 마지막 미련으로 오소마츠에게’, ‘카라마츠 라고 봉투에 써 놓고 들어왔다. 아침까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모두가 먼저 나간 틈을 타 봉투를 쓰레기통에 넣고 집을 벗어났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너무도 답답했으니까. 괴로웠으니까. 첫눈이라도 올 듯 잔뜩 흐리고 살이 에이는 듯 추운 날이었다.

 

*

 

날이 잔뜩 흐려 낮에도 온통 회색빛에, 날이 제법 추워져서 이런 날이라면 눈이 올 것만 같았다. 정말, 첫눈이 오려나. 그녀가 남기고 간 말과 카라마츠에게 해야 할 고백의 말은 뒤엉켜서 오늘 하루 내내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늘상 그랬지만 형제 누구하고도 마주쳐도 제 갈 길을 갈 뿐. 오늘은 카라마츠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피해 다니기만 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다지 서로 마주칠 일도 없었던 걸까. 만약에 지금 마주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그 고민은 헛것이 된 채 학교는 끝이 나고, 카라마츠를 옥상에 불러낼까 생각하다 고개를 저으면 관뒀다. 카라마츠는 누구보다도 먼저 하교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것은 늦은 편에 속했다. 아마 집안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서겠지. 어디를 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피해 다니다, 마음을 속이고 도피하기까지 했으니까. 언제 첫눈이 내릴지 몰라 애타는 마음 반, 여전히 고백할 준비 같은 건 되지 않아 피하고 싶은 마음 반. 그렇게 일단 집에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또 나갈 거지만.”

평소 하지 않는 인사를 하며 집에 들어서도 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엄마는 외출하셨나. 일단 가방이라도 두고 카라마츠를 찾으러 가볼까 하며 방에 들어갔다 쓰레기통에 편지 같은 것을 발견했다. 누구 편지지? ...

카라마츠?”

봉투 뒤편에 카라마츠라고 쓰인 편지. 수줍게 붙은 하트 스티커. 뒤집어보면 오소마츠에게.’라고 적혀있었다.

?”

무방비하게 버려진 거 보면 별 거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 쓴 편지고. 열어보니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라기보다는. 문장이 나열된 걸로 봐야할까.

 

오소마츠 좋아해

아니 사랑해

정말 오랫동안 사랑했어

가슴이 답답해

그동안 줄곧 말하지 못해서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

나는 그만하기로 했어

이 마음을 이젠 버릴게

미안해

이제 지울게

안녕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어제는 없었으니 오늘 아침에라도 버린 편지인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그만두는 거야. 왜 지우려는 거야. 이제 와서 그런 마음을 가져버리는 거야. 포기하지 말아줘. 그게 아니야. 포기하지 않을게. 진짜 사랑도, 갑자기 다 떠나버리면 어떡해. 그게 아니야. 거짓 사랑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할게. 진짜 사랑을, 첫사랑을, 외면하지 않을게. 이제는 지우려 하지 않을게. 내가 먼저 말할게. 편지를 들고 뛰쳐나갔다. 정말, 거짓말처럼, 카라마츠가 집으로 오고 있었다. 꽉 차서 답답한 마음과는 달리 어색한 기류가 감싸 절로 정색하는 말투로 카라마츠 앞을 막아서고 말았다.

.”

카라마츠는 나직이 탄식을 내뱉었다.

카라마츠, 잠깐만.”

카라마츠 앞에 편지봉투를 슥 보여주고 만다. 이렇게나 조심성 없이.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 어떻게 그걸...”

그걸 그냥 방의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는 게 누군데. 바보 아냐.

“...읽었어?”

“...읽었어.”

“......”

저기 있잖아...”

그 순간, 카라마츠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하고 말았다.

어이, 카라마츠. 울지 말고...”

카라마츠는 나를 바라본다. 여태껏 피해왔던, 숨겨왔던 감정들을 다 들켜서 그런가. 간만에 그는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으면서. 그 눈길을 견디지 못해 눈을 피했다.

사귀어 줄 테니까...”

?”

좋아한다며... 그 마음 받아줄 테니까.”

카라마츠의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눈이 감기고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미소는, 그 표정은, 치사하잖아. 간만에 봐서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예쁜 미소를 지어버리면. 그렇게 행복한 듯 웃어버리면.

“...잖아.”

?”

오소마츠는...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잖아?”

, 차였어. 어제.”

어제 차이고, 오늘 사랑고백하는 거야? 오소마츠는 역시 쓰레기야.”

그렇게 울먹거리며 예쁘게 웃으면서 독설을 날리는 카라마츠.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벅찬 듯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잠깐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자,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울보구나, 카라마츠.”

태연한 척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으면, 카라마츠는 슬쩍 내 교복의 넥타이만 잡았다.

이런 쓰레기지만, 사랑한다며.”

카라마츠는 어정쩡하게 나의 옷깃을 잡을 뿐 안겨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뭐랄까. 어떻게, 이제 우리 사귀는 거야?”

“......”

편지로 사랑하는 걸 그만두겠다면서 녀석도 덥석 사귀자고 답해버리다니.

우리는 너무나도 바보 같다.

 

*

 

어정쩡한 상태로 집 앞에서 우린 한참을 서 있었다. 날은 춥고, 흐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입을 열었다.

그럼, 연인이 됐으니까 하고 싶은 거 있어? 한동안 서로 말도 안 했으니까 좀 어색한데... 한 번에 거리를 줄여버려? ...”

...”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늘어놓은 장황한 말을 가르고 답이 돌아왔다.

잡아줬으면...하는데...”

...”

카라마츠가 오른손을 내밀면, 나는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집 앞에 있기는 뭐하니 일단 걸었지만, 손만 잡았지 카라마츠는 나와 최대한 떨어져선 나의 시선을 피했다. 뭐냐고. 그렇게 말없이 걷는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자연스레 카라마츠가 가는대로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가, 긴장해서 그런가. 카라마츠의 손은 유독 차가웠다. 공원의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에 다다라서는 그가 멈췄다.

오소마츠. 따뜻하네... 손이...”

슬쩍 나를 보며 카라마츠는 뺨을 붉게 물들이고선 말을 건넸다. 부끄러워서였나. 내 쪽을 보지 않은 건.

손 정도는 어릴 적에는 실컷 잡았잖아? 한 발 앞으로 나가보자고?”

농담따먹듯 말을 던지면 손을 꼭 움켜쥔 채 카라마츠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부끄럽다고...나중에 하자...”

나중에? 뭔가 하고 싶은 건 있구나?”

그만해... 부끄럽다고 했잖아. , 그렇지만...”

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가운 것이 마주잡은 손에 닿았다. , 하고 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도 너를 따라 하늘을 보면 어느새 하얀 눈송이가 내리고 있다.

오소마츠, 기억해?”

첫사랑과 같이 첫눈을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어제 차이면서 들었던 말.”

왜 그런 말을 들으면서 차여. 이상하잖아.”

그러게. 이상하네.”

원래는, 첫눈이 오면 첫사랑과 같이 맞으며 고백할 셈이었는데...고백을 먼저 하고 이루어지고... 그러고 첫눈을 맞는 셈이 됐네...”

어쩌면 이미 고백한 거 아닐까? 나한테 그 말을 했을 때. 몇 살 때였나... 첫눈 올 때 나한테 말했잖아. 그게 고백 같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

새삼 깨달았어. 네가 몇 년을 첫사랑을 쌓아온 건지. 그 첫사랑이 나라서 고마워.”

오소마츠는 어때. 첫사랑이...”

나도, 너였거든.”

잡은 손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나도 오랫동안 첫사랑을, 이 마음을 쌓아 왔나봐. 카라마츠, 사랑해.”

손을 놓고 너를 안고 입을 맞춘다.

너는 놀란 눈을 하지만 저항 없이 나의 박자에 맞추고.

첫눈이 내리고 두 사람의 첫사랑이 이어지는 기적의 순간.

차가운 세계에서 온기가 오가는 속에서.

두 사람의 어깨에 눈이 쌓일 때까지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았다.

 


후기

"원내용 짤 때만 해도 로맨틱했는데 생각하다 미루다보니 뭔가 이상한 이야기가 된 듯한... 1812에 대한 사랑이 전해졌을까? 1812의 사랑이 전해졌을까? 조금 의구심을 가지면서... 결국 마감일에 써서 제출하고 말았습니다. 풋풋한 이야기들을 생각하면서 즐거운 18세 커플링, 오소마츠는 연애경험이 있고 카라마츠는 없는데 둘이 첫사랑이라는 설정을 넣으면서 음흉하게 웃으며 시작했었죠! 그리고 결과물. 합작에 많이 참여해보지 않았던데다 워낙 설정만 짜고 미루기대장이라 완성만 해도 다행이라고 안심해버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음... 다른 분들의 멋진 작품들을 기대하며...합작 열어주신 른른이님과 합작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하며 후기 마칠게요! 앗 후기 너무 길다!"

마법교사 오소마츠×인어 카라마츠

검푸르죽죽한 차가운 세계에서 따스한 붉은 빛에 처음 닿았을 때, 용기를 내서 수면 밖으로 고개를 든 인어는 붉은 태양을 사랑하게 되고 말았지.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과 심해보다도 까만 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들을 보며 처음으로 인어는 바다 바깥에 나가고 싶어졌어. 뭍을 오가는 거북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을 키워간 인어는 드디어 뭍에 가까이 다가가기로 했어.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 탓에 뭍의 모습을 눈에 채 담지 못하고 인어는 물 속에 다시 몸을 담궜지. 자맥질을 되풀이하며 눈에 새기는 풍경 속에 새로운 피사체가 나타났어. 언뜻 보기에, 반은 자신을 닮았고 반은 길게 뻗은 두 개의 신체 기관으로 뭍을 돌아다니는 생명체. 태양을 닮아 있는 붉은 것을 걸치고서 바다를 바라보는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 인어는 뭍으로, 뭍으로, 자신의 전부였던 바다가 어느새 끝나버리는 곳까지 헤엄쳐 그의 앞에 고개를 내밀었지.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은 바다에 갑자기 떠오른 생명체를 응시했어. 귀 뒤에 달린 아가미, 목덜미에 있는 비늘. 전설 속에서 들었던 인어일까. 소년은 옷이 젖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 쪽으로 다가갔어. 우호의 표시로 손을 내민 채로. 인어는 갑자기 다가오는 소년이 두려웠지만 저도 모르게 다가갔어. 하체에 드러나는 비늘, 꼬리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파도가 치는 곳에서 인어는 멈췄어. 소년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손을 세워서 내밀었어. 인어가 그 동작을 같은 방향의 손으로 따라하자 소년은 팔을 바꾸고 인어의 손을 잡았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 와중에도 인어는 소년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어. 더 이상 눈부신 풍경은 인어의 눈을 감게 할 수 없었고, 인어는 소년으로 시선을 가득 채웠지. 처음 태양을 봤던 날 느낀 따스함이 소년의 손에 머물러 있어서, 소년의 붉은 옷이 태양을 닮아서, 인어는 소년을 사랑하게 됐어. 
- 또 보자. 
다시 만나기 위해 인어는 소년의 손을 놓고 바다로 돌아갔어. 처음 경험한 뭍에 적응할 수 없어서 인어는 의식을 잃은 채 깊은 바다로, 바다로 가라앉았어. 소년은 잠깐의 만남에 남겨진 인어의 흔적을 주워들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인어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어. 소년은 다른 이들의 손에 이끌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어. 서로가 느낀 상반된 온도와 조그만 흔적으로 남은 그 날은 둘에게 있어 기적을 바라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 
"...라는 낭만적인 일이 있었어. 첫 수업날 첫 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니, 너희들은 아직도 애구나. 뭐? 그래서 인어는 다시 만났냐고? 글쎄. 방금 지어낸 따끈따끈한 거짓말이니까 말이지." 
야유 속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 이었던 오소마츠는 목에 걸린 팬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팬던트 안에는 그날 주웠던 비늘이 마법으로 보호된 채 보관되어 있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한 적성 검사를 수없이 실패하던 그는 무작정 바다로 달려나왔다. 그때 만난 인어를 잊고 싶지 않아서 꼭 쥐며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고, 소원에서 비롯된 마법이 비늘에 깃들어 보호 마법이 걸리며 그의 마법 적성도 개화했다. 지금은 재능이 꽃 피고 열매 맺어 마법 교사까지 되었건만. 이제는 푸른 비늘을 가진 그 인어 씨를 뭍에 데려올 수 있을 마법을 걸어줄 수 있는데. 오랜 시간을 지금 근무하는 학교처럼 느긋하고 편한 느낌으로 배운 게 아니라 바다의 짠 내음은 맡을래야 맡을 수 없는 동굴에 갇혀 스승의 맘에 찰 때까지 수련하느라 바다에 가지 못한 탓일까. 수련이 끝나고 바다에 매일 날아가지만 그 인어 씨는 커녕 다른 인어조차 본 적이 없다. 수속성 마법에는 한계가 있어 깊은 바다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니까 거짓말인 셈 치기로 했다.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몰입하던 청중도 김이 샌 듯 '하긴, 인어가 세상에 어딨겠어.' 라고 말한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거짓말같이,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다. 마법 따위는 별 것 아니게 보일 그런 기적이.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소년의 흔적은 천진난만한 웃음에, 이상하리만치 붉은 옷을 고집하는 것에, 하루가 멀다하고 해가 지지 않은 바다에 찾아가는 것에 남겨졌을 뿐이다. 온통 수수한 검은 천으로 두른 다른 교사들 사이에서 화려하게 꾸민 붉은 옷을 입은 오소마츠는 첫 부임부터 이목을 끌었다. 경건하게 마법이라는 기적을 맞아들이는 장으로서의 학교에 놓인 이물질. 그의 화려한 복장은 빛바랜 낡은 돌로 쌓아올린 학교와는 다르게 마법을 생존 수단으로 삼아 살아온 훈장과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들처럼 기적을 맞아들이기 위해 붉은 옷을 걸쳤으나 그 사정에 대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나름 배짱있게 채용면접을 봤으나 지식의 전당에 군림하는 교장의 위엄 탓에 긴장했는지 바보같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 인어는 존재하나요? 
소년의 기억에 금이 갔다. 그의 입으로 역시 그렇죠? 하며 농담하듯 나온 말에 그 금은 더 벌어지는 듯 했다. 하긴,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 직후 드디어 마법 적성을 깨우쳤다며 스승에 의해 동굴에 끌려갔다 나왔다곤 해도, 겨우 1년. '또 보자'는 간절한 사념의 유통기한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건지. 둘의 만남에 비하면 1년 또한 엄청난 시간이지만, 그 뒤에 지나버린 더 긴 기다림의 시간에 오소마츠는 속상해했다. 
퇴근 후, 딱히 마법을 걸지 않아도 커다란 수정구슬은 그를 바다로 데려간다. 찰나의 순간에 삶이 좌우된 남자는 사실 요즘 들어선 기대를 많이 접었다. 순수함은 점점 바래고 타성이 붙어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같은 생각을 하며 아련한 추억으로 남으려 하고 있었다.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해는 제법 길어져 아직 주변이 밝았다. 그 풍경 안에서 낯선 반짝임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바위산 쪽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오소마츠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처럼 유리 파편이나 물이 튀긴 거겠거니... 톡. 톡. 커다란 꼬리지느러미가 수면을 치고 있었다. 시선은 위로, 위로 향했다. 태양이 내려올 준비를 하는 곳에 눈을 고정한 채, 바다와 같은 빛깔을 가진 비늘에 뒤덮인 하체와 인간을 닮은 상체 그리고 귀 자리에 나 있는 지느러미를 가졌다. 인어의 특징이라고 전해져오는 것. 오소마츠가 가까이 온 것도 모르는지 인어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물을 튕기고만 있었다. 인어가 진짜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그였지만,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과 자신이 만난 인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에 좌절하고 말았다. 오소마츠는 약이 올라 하늘만을 보는 인어의 앞을 막아섰지만, 인어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인어의 까만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오소마츠는커녕 태양조차 비치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멍하니 인어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그제야 인어는 오소마츠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인어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꼬리지느러미로 수면을 더 세차게 두드리며 손으로 바다를 가리키더니, 바위를 차고 공중제비를 돌고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자신이 있던 바위 쪽을 응시하는 인어의 모습에 오소마츠는 의아해하면서도 부츠를 벗고 발을 바다에 담갔다. 
- 들리는가? 
머릿속에서 전해지는 소리. 하지만 그는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 알지 못했다. 
- 눈치챘겠지만 나는 시력을 잃었다. 그 대신인지 뭍에 오래 머무를 수 있게 됐지만. 바다의 존재들은 바다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전하지만, 뭍의 존재와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군. 일단 손을 잡아보지 않겠는가? 서로 맞닿아있으면 생각이 전해질 지 모른다. 소리를 내면 그 쪽으로 내가 가겠다. 
그 말에 오소마츠는 전에 인어에게 내민 적 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수면을 발로 차면 물이 튀는 소리와 번져나가는 물결이 인어를 그에게 데려왔다. 놀랄만큼 잔잔한 바다에는 어느새 태양이 녹아내려 붉은 빛이 섞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인어의 손을 잡았다.
- 진짜... 인어가 있었어!
- 인어? 인어가 뭐지?
- 당신같은 존재를 이야기하는 거야.
- 뭍의 존재는 나를 인어라고 부르는군. 이 바닷가에는 작은 뭍의 존재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 뭍의 존재라고 하면 엄청 많거든? 난 오소마츠! 나 같은 존재는 인간이라고 하고.
- 인간, 오소마츠... 오소마츠... 오소마츠...
인어는 오소마츠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이런 사념까지 생생히 전달되는 걸 그는 알까.
- 너는?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 있지만, 우선은 이름을 알고 싶어.
- 이름... 이름이라고 하면 카... 카... 미안하다. 잊어버렸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게 아니라니. 자기가 누군지를 명확하게 해주는 건데. 중요하지 않다면, 왜 오소마츠의 이름을 되뇌인 건지.
- 알았어. 그럼, 인어 씨. 혹시 한 십 년 전? 조금 오래됐는데 이렇게 뭍에서 뭍의 존재, 그러니까 나 같은 인간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 있어?
너무 대놓고 물어봤나. 기다려온 시간만큼 쌓였던 그리움이 한번에 터져서, 간절하게 이 인어가 그때 그 인어이기를 바라면서 다급한 마음이 그를 떠밀었다. 인어는 손을 잠시 놓더니 자맥질하곤 다시 손을 잡았다.
- 미안하다.
- 응?
- 사실 난 기억을 잃었다. 시력을 잃었을 때 같이 잃어버린 것 같다. 날 구해준 동료들이 나를 위해 원래 내가 어땠는 지를 이야기해줬기에 시력도 기억도 잃었다는 것을 알 뿐. 우리, 그... 인어들은 바다의 존재이므로 뭍에 오래 머무를 수 없지만, 나만은 특이하게 뭍에 오래 있어도 괜찮다고 한다만. 이렇게 뭍에 오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 보름달이 떴을 때부터 왔다고 해야 하나.
- 한 달도 안 됐나... 
- 인어와 만난 적이 있는가?
- 아마도. 어릴 때였어. 정말 잠깐이었지만 또 보자고 했거든.
- 이 바닷가에서?
- 응.
-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물어봐줄까? 뭍에서 인간을 만나 그런 약속을 했는지 말이야.
부탁할게, 라는 말이 쉽사리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소마츠에게는 무척 소중한 추억이니까. 조금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 인어를 찾고 싶은 마음과, 추억으로 아름답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 게다가 눈앞의 인어가 추억 속의 인어라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면 그의 마법으로 되찾아 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아, 아냐. 그보다 내일, 내일 다시 이 곳으로 와 주겠어? 오래 전 약속이라 이미 그쪽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고, 인어 이야기를 더 듣고 싶거든. 그런데 물에 계속 몸을 담그고 있었더니 추워서...
어느새 그의 몸 대부분이 바다에 잠겨 있었다. 발만 담그고 손을 내민 불편한 자세를 벗어나려 그런 것이리라. 내일 이것저것 마법을 부릴 준비를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음... 좋다. 나도 뭍의 존재와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고.
인어는 이제는 붉은 빛이 가시고 검은 빛에 은은한 노란 빛 달이 떠 있는 바다로 사라져 갔다. 오소마츠는 인어가 사라진 곳을 한참 바라보다, 그제서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늘을 떠올렸다. 아까 인어가 앉아 있던 바위에는 비늘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비늘을 주워담은 뒤 오소마츠는 집에 돌아가 탁자에 깨끗한 천을 펼쳐 그것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팬던트 안에 보관한 비늘을 꺼냈다. 분명 같은 색이겠지, 했던 비늘은 색이 달랐다. 가지고 있던 비늘 또한 바다를 닮은 푸른 색이긴 했지만 그 색이 옅고 투명했다. 주워온 비늘은 색이 짙고 덜 투명했으나,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 그는 실망했다. 물론 인어도 시간이 지나면 비늘이 변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묘한 확신이 부정당한 느낌이었으니까.

다음 날, 오소마츠는 강의를 마치고 남은 근무는 핑계를 대며 내팽개친 채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바닷가로 부리나케 날아왔다. 인어는 어제 처음 만난 바위에 그대로 앉아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이 인어의 눈에 더 이상 비치지 않더라도. 그러고보니 어제도 인어는 태양을 보고 있었다. 
"인어 씨!"
인어는 오늘은 그냥 가볍게 튀어올라 바다로 잠겼다. 오소마츠는 마법을 걸어 몸에 보호막을 친 뒤, 손만이 빠져나오게 한 채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인어가 어쩐지 놀란 표정을 지어서, 오소마츠는 쑥쓰러웠다. 어제와 같이 둘은 손을 잡았다.
- 인어 씨, 놀랐어? 사실 난 마법사거든. 보통 인간들은 하지 못하는... 기적을 만든다고 해야 하나.
- 뭔지는 알고 있다. 그 비슷한 거라면 인어들도 쓰고 있거든. 그럼 바닷속으로 더 들어와보면 어떤가? 아마 그 공기방울에 들어가 있으면 굳이 손을 잡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거다. 뭍의 이야기를 듣기 전, 오소마츠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있으니.
인어의 말을 믿기로 하고 오소마츠는 보호막에 수속성 마법을 건 뒤 바다에 푹 잠겼다.
- 혼자 이동할 수 있는가? 
- 응. 전에 몇 번 연습은 해본 적 있어서. 인어 씨와 편하게 이야기도 할 수 있다니 더 좋은걸.
- 다행이군. 아참, 동료에게 물어서 내 이름을 알아왔다. 카라마츠, 라고 하더군. 내가 잊어버린 시간에 이름이 얽혀서인지 동료들은 가능하면 날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니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 그래서였다. 어제 오소마츠가 신경쓰는 듯한 표정을 지어서 진지하게 물어보고 왔지.
뿌듯한 표정으로 인어, 카라마츠가 생각을 전해온다. 카라마츠. 
"카라마츠"
- 응?
- 내가 쓰는 말로 카라마츠를 부르면 이런 소리가 나. 들렸어?
- 잘 안 들렸다. 이따 뭍에 나가면 다시 들려주겠는가?
- 글쎄~
카라마츠는 삐진 듯 더 깊숙이 헤엄쳐갔다. 바다의 색은 제법 짙어져 밤처럼 되었다. 지팡이에 자그마한 빛을 켜자 그 곳에 새하얀 신전 같은 게 눈에 띄었다. 더 가까이 가려 하자 카라마츠가 가로막았다.
- 뭍의 존재가 들어올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오소마츠의 안내역을 자처했기에 여기쯤이라고 내가 알 수 있었던 거지만 오소마츠가 혼자 들어왔으면 위험해졌을거다.
수속성 마법에는 한계가 있다. 그건 그런 의미였나. 깊은 바다까지 들어갈 수 없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결계나 금기가 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 인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인어가 알고 있는 뭍과 바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여기까지 왔다. 저 신전은 바다의 신을 모시는 곳이다. 나와 같은 인어들이 신탁을 받아 다른 바다의 존재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가까이서 바다의 신의 시중을 드는 존재들도 있지만, 나는 기억을 잃고 깨어났을 때 딱 한 번밖에 뵙지 못했지. 
[너는 사랑해선 안 될 것을 사랑하고 말았구나. 가여운 것.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끝내 갈구하게 되는 것이니. 네가 적어도 이 이상의 고통은 느끼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주겠다.]
- 신께서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그 덕인지 지금은 이렇게 밝게 웃으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신을 직접 만나다니 굉장하잖아. 오소마츠는 그런 게 기적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 사랑해선 안 될 것이 무엇인진 잘 모르겠지만, 그후 신탁으로 뭍과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 정확히는 하늘과 바다의 이야기지만. 
- 하늘과 바다의 이야기?
- 그렇다. 하늘과 바다의 신은 형제라는 모양이다. 물론 다른 형제도 있다고 하지만... 둘은 생명이 있는 존재의 세계를 양분하여 다스리는데 그게 하늘, 뭍과 바다인 것이지.
사념이 전해져오는 것일텐데,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이야기를 계속 전했다.
- 서로의 세력권이 늘 맞닿아 있기도 하고, 두 신은 닮은 점이 많아서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는지는 당연히 신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그러던 중 뭍의 존재 중 인간이라는 종족이 하늘의 신의 가호를 받으면서 번성했고, 인간은 뭍의 지배자가 되었지. 그렇게 해서 인간은 신의 능력의 일부를 손에 넣게 되었다는데, 그게 아마 오소마츠가 쓸 수 있다는 마법이라는 것일 거다.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법의 기원을 들었네. 인간이 뭍의 지배자...인가.
- 신의 능력까지 손에 넣은 인간은 이윽고 신의 권위까지 흔들기 시작했어. 이에 분노한 하늘의 신은 인간에게 심판을 내리지. 거기에 바다의 신도 동조해서 뭍은 일부의 존재만 남고 전부 심판의 파도에 휩쓸려 생명을 잃게 돼.
- 응? 그렇다는 건...
- 오소마츠는 심판 이후 새로이 번성한 인간의 후예라는 거지.
- 심판은 순조로이 끝나고, 하늘의 신은 남겨진 존재들이 다시금 뭍에서 번창할 수 있도록 했어. 그러나 심판의 파도로 꺼진 생명들은 바다의 신이 거둬들여야 했지. 바다는 한동안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고, 치우고 분해해도 생명을 잃은 존재의 흔적은 계속 남아 바다의 신을 괴롭게 했어. 신은 죄책감과 함께 하늘의 신을 원망했어. 더러운 일은 자기가 혼자 해야 했다고. 내리쬐는 태양이, 반짝이는 세상이 미워서 바다의 신은 마음을 닫아걸어버렸어. 그 흔적이 이 결계고, 아마 뭍에 너무 다가간 나는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마저도 신께서는 용서하셨지만.
오소마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인어에게서도 마치 마음을 닫아걸어버린듯한 체념이 느껴져서. 기억을 해내려고 해도 이제는 꺼낼 수 없는 과거를 더듬으려고 노력한 카라마츠에게, 자신이 그토록 기다린 인어였다고 말한들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다.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렇게 믿든 믿지 않든. 신의 이야기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카라마츠 나름의 변명일 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애당초 자신이 겪은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과거를 위해서.
- 어떻게 생각해?
- 무얼 말인가?
- 기억을 잃은 거, 시력을 잃은 거 말야.
- 그거야 뭍에 너무 가까이 간 내가 나빴...
- 그게 아니라 카라마츠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에게 이름을 알려줄 땐 기뻐했잖아... 그런데 그거 말고는... 카라마츠는 여전히 태양을 보고 싶어 하잖아! 오늘도 나를 기다리며 태양을 보고 있었잖아... 날 만나기 전에는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미련은 없었던 거야?
오소마츠가 토해낸 사념에 카라마츠는 겁먹은 듯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카라마츠는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 또 보자,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손을 흔들자 바닷물이 용솟음치고 오소마츠는 방어막째 순식간에 해수면으로 떠올랐다. 
"젠장! 왜 자기 생각을 얘기해주지 않는 거야..."
분한 마음에 모래를 실컷 걷어차고서야 오소마츠는 돌아갔다. 그 뒤로 한동안 오소마츠는 바다에 가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지났을까. 오소마츠는 바다가 그리워졌다. 구슬을 타고 날아가지 않고 걸어서 이동하니 어느새 검게 물든 바다에 보름달이 띄워져 있었다. 인어를 찾기 위해서라지만, 꽤나 오랫동안 바다에 매일같이 왔던 탓인지 한 달만의 바다는 그리운 냄새를 풍겨왔다. 그러고보니 오소마츠는 밤바다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인어를 낮에 만났기 때문인지 어두워지면 곧 돌아가곤 했으니까. 보따리에서 술을 꺼내서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한 병을 들이켰다. 집에서도 늘상 마시는 술이건만 바닷바람이 더해져 짠맛이 느껴졌다. 걸어와서 지쳐있는데 술을 들이켰으니 금세 취하고, 취한 눈에 아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를 헛것 치부하며 또 한 병을 꺼내 마시려던 때,
"거기, 누구 있는가?"
차분히 가라앉은, 낮지만 고운 목소리. 들어본 적 없지만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함.
"있거든? 그러는 넌 누군데?"
"카라마츠. 카라마츠라고 한다."
고개를 들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카라마츠가 서 있다. 모래사장 위에 서 있다. 푸른 비닐에 덮이긴 했지만 인간처럼 두 다리로 서서.
"난 오소마츠야. 우리 만난 적 있던가?"
두 다리로 선 모습에 문득 두려워졌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어쩌면 카라마츠는 또 다른 무언가를 제물로 바쳐 뭍에 선 게 아닐까.
"또 보게 돼서 기쁘다, 오소마츠."
카라마츠는 눈물을 흘렸다. 사실, '보게' 됐다고 말하는 카라마츠에 눈엔 여전히 오소마츠는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카라마츠가 흘리는 눈물 방울방울에는 오소마츠가 비쳤다.
"어떻게 된 거야... 잠깐 사이에 너무 많이 변했잖아."
"잠깐이라니. 내게는 긴 시간이었다. 이대로 오소마츠가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며 걱정했다고."
"울지 마... 이야기 들을 테니까."
"으응... 긴 얘기는 아직 인간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니 물가 쪽으로 가지 않겠는가."
카라마츠는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푸르게 덮인 비늘의 다리는 서서히 원래의 인어와 같은 꼬리지느러미의 모습으로 변했다. 
- 오소마츠가 얘기했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오소마츠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의 뜻이 있겠지, 동료들이 있으니 걱정없지... 그렇다고 태양에 대한 동경은 사라지지 않았던 건지 나는 뭍으로 올라가려고 애썼고, 그 결과 오소마츠를 만났던 거다. 오소마츠를 뭍으로 돌려보내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신전에서 기도를 드렸지. 잃어버린 기억을, 기억을 지운 게 신의 자비라는 걸 알지만, 돌려달라고. 바다의 신께서 답해주셨다. 그건 자비가 아니라 벌이라고. 그러나 기억을 찾으면 그 벌보다도 더 큰 고통을 받을 거라고. 두려웠다. 그러나 오소마츠를 떠올리니 용기가 났다. 기억을 돌려달라고 말했지. 신은 다른 제안을 했다. 시력을 돌려주겠다고. 기억을 포기하면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태양도 그러면 볼 수 있다고, 나를 회유하셨지. 오기가 생겼다. 기억을 돌려달라고. 뭍에 가는 건 포기하지 않을 거고, 태양은 볼 수 없어도 괜찮다고. 그 결과 기억을 찾고, 신의 축복으로 뭍을 걸을 수 있는 다리를 받았다. 동료가 얘기해주길, 이 다리의 모습은 신의 그것과 비슷하다더군. 
"잠깐. 태양은? 늘 보고 싶어했..."
- 둘 다 가질 순 없었던 거지. 나에게도 묘한 감이 있었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분명 오소마츠와의 만남이 있었을 거라고. 기억을 찾자, 내 온 몸과 눈은 불타는 듯 했어. 하늘의 신과 바다의 신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진 결과 생긴 서로의 마음의 장벽이 말이지. 나는 하늘의 신의 영역을 넘어서고 말았던 거다. 그 영역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태양을 본 내 눈과 몸이 불타는 걸 바다의 신께서 구해주셨던 거였고. 불타는 와중에 기억 속의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손을 내밀어주었어. 그 손이, 내게는 구원이었지. 오소마츠. 아마 네가 기다리던 인어는 나였던 모양이다. 더 일찍 기억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때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소마츠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카라마츠는 그걸 볼 수 없었다. 
"기억 속의 인어가 아니라도 괜찮았어. 카라마츠가,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완전 바보잖아... 바보 카라마츠..."
더 많은 이야기를 하자. 보이지 않아도 뭍을 느끼게 해줄게. 태양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줄게. 그러니까.
-날 뭍으로 데려가줘.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두 팔로 들어올렸다. 그 상태로 구슬에 타서 바다를 뒤로 한 채 밤을 지났다. 어두운 하늘에 붉은 빛이 물든 그 시간, 하늘과 바다를 가로지르던 결계가 흐려졌다. 바닷물이 용처럼 솟구치더니 잠시 허공을 머무르고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카라마츠의 눈에도 잠시 붉은 빛이 비추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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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전에 썼다 오늘 완성한 거 포타에 이어 또 복붙
맨날 나만 알게 쓰는... 제우포세향도 좀 넣었는데 워낙 존재니 뭐의 신이니 돌려 말해서 글자수만 많아지고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좀 쓰고 쓰고 써야 늘텐데 하하하하하...



 

https://heartrainon.tistory.com/m/201

이전(?) 글
전에 써둔 거(뜨이따엔 올렸던가) 백업으로 올립니다
다른 컾은 쓰다 만게 대부분인데 오카는 마무리지어진게 있네요
덕분에 오카 지분률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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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모 대륙에 있는 소국, 장미의 나라의 일명 '붉은 왕'.
■카라-지하세계의 공주(왕 후보자). 지상을 알고 싶어서 지상으로 왔다.

"카라마츠 공주, 오늘은 바다를 보러 가지 않겠어?"
오늘도 카라마츠 공주는 선글라스를 쓴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소마츠 왕은 그런 카라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바다? 하지만, 장미의 나라는 바다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동맹국인 산호의 나라에 잠시 갈 일이 생겼거든. 그 참에 카라마츠에게도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서."
"동맹국과의 교류에 나를 데려가도 괜찮은가?"
"주요 업무는 쵸로마츠가 볼 거고, 산호의 나라의 왕은 호탕해서 가끔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을 때 부탁하면 자유롭게 보내주거든."
"그래도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카라마츠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잔뜩 드러나서 오소마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럼 준비가 되면 이야기해줘."

어딘가 나갈 일이 있을 때는 항상 말을 타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한 마차 안에 마주보고 앉았다. 하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낯선 곳에서 둘만 있어서 그런지, 마차가 흔들거려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두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하고 바깥만을 보면서 산호의 나라로 향했다. 바깥 풍경이 변해가는 보습을 보며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반짝이는 카라마츠가 사랑스러워서 오소마츠는 그를 쳐다보다가 카라마츠가 시선을 느껴서 고개를 돌리면 재빨리 다른 쪽 창밖을 보는 척을 하곤 했다. 산호의 나라에 도착하고, 카라마츠가 마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오소마츠는 산호의 나라의 왕인 데카판에게 인사를 하고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뒤 실무를 쵸로마츠에게 떠밀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빠르게 허락받았지. 바다를 보고 오면 카라마츠 공주를 산호의 나라의 왕에게도 소개해도 괜찮을까?"
"물론이지. 하지만 순서가 잘못된 건 아닌가, 오소마츠?"
"괜찮대도. 이 나라의 왕은 내가 왜 여기 오는지를 잘 알거든. 대신에 좋은 모종을 보내고 정원사도 파견해서 왕궁의 조경을 멋있게 만들어주고 있는걸."
"그런 거라면, 알겠다."
말에서 마차를 뗴어내고, 마부에게 마차를 지키도록 명령한 뒤, 오소마츠는 말에 올라타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뒤에 탄 채 자연스럽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소마츠가 자신있게 말을 원하는 방향으로 달리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때. 강하고는 또 다르지, 바다는?"
"아아.."
카라마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오소마츠는 신경이 쓰였지만 꾹 참고 바닷가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모래사장. 부서지는 파도. 말을 멈춘 곳에는 산호의 나라가 자랑하는 푸른 바닷가가 있었다. 카라마츠는 구두를 벗은 채 드레스를 두 손으로 잡고 모래사장을 사뿐사뿐 걸었다. 파도가 치는 곳에 발을 놓으면 파도가 카라마츠의 새하얀 발을 간질였다. 차가워서 놀라 발을 뗐다가 다시 집어넣으면 파도는 카라마츠의 발에 의해 하얗게 부서졌다. 햇빛 아래, 바다 위에서 반사된 빛을 받아 카라마츠의 피부는 더욱 반짝였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구두를 벗은 그 옆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카라마츠는 지금이라도 당장 하늘 속으로, 바다 속으로, 오소마츠가 보는 풍경 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았다. 반짝임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리고 잠시 얼굴을 가리면,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오소마츠! 왜 가만히 있기만 하는건가? 같이 '바다'에 들어가야지! 파도라고 하던가? 발 끝에서 부서지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기분이 좋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갸웃한 채 오소마츠의 얼굴을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린 오소마츠는 못 이기는 척 부츠를 벗고 바지를 걷어올린 채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밟으며 바다 쪽으로 걸었다. 부서지는 파도를 발로 맞으며 연신 까르륵거리는 카라마츠에 푹 빠져, 오소마츠는 자신의 바지가 젖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새 바다에 붉은 빛이 물들고, 오소마츠를 애타게 부르는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오소마츠는 바지가 젖은 걸 눈치채고 난처해했다. 그런 오소마츠를 번쩍 안아들고, 카라마츠는 바다를 벗어나 모래사장에 대기된 마차에 오소마츠를 태웠다. 카라마츠의 드레스도 제법 젖은 채였다.
"왕과 공주라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칠칠치 못하니... 갈아입을 옷을 챙겨왔으니 이따 산호의 나라 왕궁의 빈 방을 빌려서 갈아입어야겠네요."
쵸로마츠는 두 사람이 탄 마차에 잠시 타서 한숨을 푹 쉬고 말한 후 내려서는 왕궁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했다. 아까와는 달리 서로 마주보는 게 어색하지가 않아서,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는 서로의 젖은 다리를 보고 눈을 맞추더니 까르르 웃었다.
두 사람의 새로운 추억이 또 하나 생긴 셈이었다.

SNS든 커뮤니티든 지쳐서 쉬는 요즘입니다. 특히 일적으로... 감정소모도 잘하고 조절도 잘 못하다보니 어쩔 수 없네요. 앞으로의 세상은 늘 그렇듯 겪어보지 못한 일들로 가득차겠죠. 안정적이고 안주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고로 만우절이 아쉬우니 오소카라 짧글 던지고 갑니다. 다른 컾도 쓰려 했는데 눈의 피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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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으응? 하며 돌아보는 카라마츠가 사랑스럽다.
"사랑한다고."
"에이프럴 풀은 그쯤 해두겠는가? 오소마츠. 재미도 없고, 속아봤자 별 생각도 안 든다고?"
"그런가. 재미없네! 그럼 취소다 취소!"
차가운 눈으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쳐다보더니 이내 거울로 시선을 옮겨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오소마츠는 그런 카라마츠 옆으로 다가가 대뜸 입을 맞춘다.
"으읍...으으읍!"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밀어냈다. 당혹감이 깃든 카라마츠의 눈동자에는 이전에는 보지 못한 오소마츠의 따뜻한 미소가 비쳤다.
"사랑한다는 거, 거짓말이야."
카라마츠가 미간을 찌푸리며 매섭게 쳐다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소마츠는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사랑해, 카라마츠. 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카라마츠의 눈초리는 여전히 따가웠다.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달라는 시늉을 했다.
"응? 뭘 주면 돼? 내 사랑?"
"지갑."
의아해하면서도 오소마츠는 지갑을 카라마츠의 손에 쥐어주었다. 카라마츠는 지갑을 열어 탈탈 털었다. 굴러 떨어지는 10엔 동전 몇 개.
"모든 거, 란 말이지..."
"모든 게 그 모든 걸 말하는 게 아니잖..."
"내 지갑에서 슬쩍해간 만 엔은 어디간 건가."
"그건 내 사랑으로 갚으면 안...될까...?"
망했다. 아까부터 괜히 싸한 분위기는 이 때문이었던가! 오소마츠는 빠져나갈 구석을 살폈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후우..."
카라마츠는 한숨을 쉬더니 살짝 웃었다.
"됐다. 오늘 하루는 에이프럴 풀인것으로 하고 웃어넘어갈테니. 사랑한다든가 얼토당토않은 걸로 속이지 말고 다음에 한턱 쏴라. 이 쿨한 퍼펙트 가이, 카라마츠는 사소한 장난엔 신경쓰지 않는다제!"
그 말에 오소마츠는 안심할 뻔했다가 멈칫했다.
잠깐, 내 고백마저 만우절 장난인셈 치는 거야? 안돼... 안된다고!
그러나 오소마츠는 적어도 그 날 다시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 날 내내 쌀쌀한 카라마츠의 반응에 오소마츠는 찔려하면서도 속이 상했다. 살짝 삐져서 베란다에 나가 앉으면 아직은 쌀쌀한 바람에 부르르 몸이 떨리고는 하는 것이다.
"오, 사, 삼, 이, 일."
카라마츠가 베란다로 넘어오는 창문을 열고선 별안간 카운트를 센다. 그러더니 베란다로 넘어왔다.
"만우절 끝났어."
"응."
"나도 오소마츠에게 장난 좀 쳐봤다. 쌀쌀맞게 반응했다고 삐져서는 찬바람이나 맞고 있다니."
"난 장난 안 쳤거든? 만 엔은 다음에 갚아줄테니 걱정말고."
"장난이 아니면, 진심이었던 건가. 그... 키스...도..."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사랑스럽다. 카라마츠. 카라마츠를 붙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입술의 온기가 전해지고, 익숙하지 않은 따뜻하고 촉촉한 것이 서로의 심장만큼이나 요동치며 두 사람의 감각과 신경과 감정을 깨운다. 볼에서 한기가 느껴질 쯤에야 둘은 떨어졌다.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카라마츠."
카라마츠는 입만을 뻐끔거렸다.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그가 감정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걸 오소마츠는 알 수 있었다. 곧 카라마츠의 입이 명확한 형태로 움직였다.

사랑해, 오소마츠.

https://heartrainon.tistory.com/m/185
여기서 이어지는(?) 정확히는 이전의 이야기+ a
전에 연결해둔 타래를 발견한 김에 업로드
이어나갈 힘이 있다면 이것도 장편으로 이어나가고 싶...음...

일단 세계관도 정리해보고 모아놓은 타래라도 같이 달아드리겠습니다.
https://twitter.com/heartrain_on/status/1170665372229324801?s=19

*
(오소마츠)
기억하는 것 몇 가지. 첫 번째는 태어났을 때의 기억. 7개의 두근거림이 하나로 줄어드는 그 때의 불안감. 나의 가족이 엄마, 아빠, 나 그리고 5명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걸 인식한 건 조금 지나고 나서였다. 두 번째는 가족을 잃어버리던 때. 선명한 총성이 두 번 울리고 싸늘하게 식은 부모의 몸. 세 번째. 우릴 맡아준 보육원이 망하고, 여섯 형제가 뿔뿔이 흩어지던 때. 그 세 가지는 모두 내가, 우리가 태어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버려지고, 카라마츠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지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내게 지은 그 미소가, 아마도 날 처음 구원해 준 것이리라.
신부가 나를 데리고 간 교회는 보육원과 다를 바 없었다. 같은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도 몇 있었고, 신부를 제외하면 아이들로 가득했기 때문일까. 신부는 글자나 산수같은 걸 알려주고, 신에 대한 이야기나 동화나 전설을 들려주기도 했다. 말썽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미소를 잊지 않았다. 그 미소가 좋아서일까, 안 좋은 기억에서 구원해준 사람이어서일까 나는 그를 잘 따랐다. 이름 없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떼를 써가며 그와 비슷한 이름을 만들어달라고 했을 정도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소마츠는 어때, 라고 말했을 때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공부하는 건 따분했지만 신부가 웃어주니까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도 그저 살아있을 뿐이던 존재는 이제야 오소마츠라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교회에서도 몇 년을 지내며 신부의 일을 돕거나 마을에 일하러 가는 등 자신의 가치가 느껴지는 나날을 보냈다. 그런 날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많은 걸 원해서는 안되는데, 신께 간만에 진심으로 기도한 탓이었나. 어느날 일상은 깨어졌다.
마을에 연방군이 반란분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거나 민간인을 죄를 씌워 죽인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교회에 맡겨진 나는 상관없는 일이려나, 하고 무시했지만.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소문은 사실이었는지 마을에 연방군이 나타났다. 탐문을 하며 돌아다니는 군인 무리를 일하는 중에 마주했다. 싸늘한 눈길.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그 눈길이 싫어서 재빨리 교회로 돌아와 마을 얘기를 모두에게 전하던 참이었다. 아까 마주친 군인 무리가 교회에 들이닥쳤다. 카라마츠 신부가 막아서서 아이들을 보호하자, 한 군인이 신부의 멱살을 잡으며 반란을 꾸미려 아이들을 모아온 건지 추궁했다. 곧바로 내가 달려들었지만 녀석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다시 달려들려 하자 이번엔 신부가 그만하라고 말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렴. 신께서 보고 있으시니 어떤 사람이든 용서해야 해. 이런 말을 하면서. 군인의 발길질은 신부를 향했고 그는 바닥에 내팽겨진채 군화 짓밟혔다. 이 때도 신부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였지만 눈만큼은 무언가 굳은 의지가 보였던 것 같다. 밤이 되고, 그런 사건이 있었던 뒤에도 교회에선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냈다. 아이들은 신께 아까의 나쁜 군인들을 혼내달라고 빌었지만 신부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며 기도를 이어나갔다. 취침 시간이 지나 다들 잠든 걸 확인하고 나는 신부의 처소에 들어가 따졌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하고 화를 내지 않는 거냐고. 그의 답은 한결같았다. 한참을 혼자서 분통을 터뜨렸을까. 바깥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신부는 나보고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보려 했고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함께 밖으로 향했다. 신부의 처소는 교회 안에 위치해 있었다. 아이들은 교회 바깥에 허름하지만 넓은 건물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신부의 방에 난 창문은 아이들의 숙소가 아니라 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판단하는 게 늦고 말았다. 아이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커지자 교회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 화염에 싸인 건물과 그 곳을 빙 둘러싼 군인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신부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산 쪽으로 가라고 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은 아까 봤던 무언가 결심한 눈이었다.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눈. 교회를 빙 돌아 산쪽으로 달리는 동안 신부는 군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무서워서, 나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총성은 부모님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총성은 계속 울렸다. 진짜 소리인지 환청인지 알 길은 없었다. 산으로, 산으로, 산으로... 총성이 멈추자 뒤돌아 볼 용기가 생겼다. 아니, 그건 용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숙소도, 교회도,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도 불타고 있었다. 태양이 땅에서 솟은 듯 불길은 어둠을 가르고 일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째서. 어째서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군인들은 날 뒤쫓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도망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눈에 띄지 않은 건, 카라마츠 신부가 나섰기 때문일 거다. 내 귀에 울린 총성 중 몇 번째가 신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몇 시간을 주저앉아 있었을까.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기세좋게 내린 비는 하마터면 산불로 번질뻔한 불길을 금세 잠재웠다. 이것이 신의 조화일까. 그렇다면, 신은 왜 신부를 구해주지 않은 것인가. 신의 뜻에 따라 무엇이든 용서할 줄 알았던 그를. 왜. 그제서야 내 감정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절규를 토해낸 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잿더미 앞에서. 신을 원망했다. 상황을 보자마자 날 살리려 한 신부를 원망했다.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군인을 원망했다. 총성을 원망했다. 부모도, 형제도 잃은 내겐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원망은 분노로 바뀌어갔다. 군인이 하고 간 말 중 반란이 떠올랐다. 이딴 세상이다. 연방의 횡포는 분명 다른 곳에도 뻗쳐 있을 터다. 어디엔가는 연방군에 맞서는 데가 있겠지. 그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일어섰다. 여기서 다른 마을로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하니까.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곳을 찾아서.

*
(카라마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길바닥에서 살았다. 그 어렸을 때가 언제인진 모른다. 첫 기억이 길바닥이니까. 나보다 큰 형이나 누나가 있어 그들이 구걸해서 얻은 걸 같이 버려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나날이었다. 그런 나날도 어느새 끝나버렸지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들은 우릴 떠나버렸다. 하필, 그들이 떠나고 나선 내가 연장자 취급을 받았다. 내가 구걸하고 대여섯 명이 나눠먹는 삶. 얍삽이라고 불리는 나와 닮았고 아마도 나와 나이가 비슷할 아이가 있었지만 그도 내게 의존했다. 모두가 가난한 곳에서 구걸은 점점 어려워졌고, 어떻게든 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나는 힘이 센 편이었다. 힘쓰는 일을 어른만큼은 못하지만, 어떻게든 일할만한 것을 찾아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축복이었다. 그렇게 함께 있는 아이들을 먹여살렸다. 내게 모지리라며 바보취급을 하다가도 품삯을 받아오거나 먹을걸 가져오면 녀석들은 기뻐했다. 다른 녀석들도 구걸이나 일거리 찾기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걔 중에 꾸준히 생을 이어갈 만큼을 벌어오는 게 나뿐이었던 것이다. 적당한 잠자리를 찾아서 옮겨다니거나 장작 모아오기 같은 다른 잡일은 다른 아이들이 나눠서 했으니까. 이렇게 살다보면 절로 남의 것에 손대게 될법한데, 들키면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걸 아는 우리 무리는 도둑질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한 번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산속 동네 유지의 창고를 턴 적이 있는데 창고지기에게 들켜서 죽을만큼 두들겨맞았다. 그러고보니 그때 얍삽이는 이미 도망갔던가. 나를 개패듯 팬 창고지기는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일자리를 하나 알선해주었다. 부자들의 유흥거리인 사냥에 함께 나서는 것이었다. 그때 라이플을 처음 들고 쏘는 방법이나 장전하는 법, 빠른 사냥감이나 멀리있는 사냥감을 저격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내가 라이플을 들고 끙끙대는 꼴이 유흥의 일부였는지 사냥에 나선 사람들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의 사냥터에 나섰다. 비웃음을 견디며 돈을 벌었다. 걔중에는 나를 창고나 자기 방으로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날 깨끗이 씻기고 알몸으로 벗겨 찬찬히 감상하거나 더듬거나 했다. 수치스러움을 느낀 건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뒤였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던 거였다. 반항하기 시작하자 얻어맞고는 했다. 벌어오는 돈은 많았지만 수치심을 느끼고 얼마 안 가 이 일을 관뒀다. 얼마 안 가라고 해도 모지리였던만큼 저 일을 당한 기간은 꽤 길었다. 그 이후 육체노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수입이 되니까. 모두를 먹여살리는 일에 불만없이 바보처럼 살았다만, 지나고 나면 조금 후회가 되기는 한다. 하여간, 길바닥 인생이어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굶어 죽는 아이들도 제법 되는 시대니까.
지나다니는 가게의 라디오에서 듣기로 부랑자들을 일거 소탕한다는 말이 있었다. 슬프게도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매일 듣는 말들만 알고 있으니까. 알아들었다면 조금 더 조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거에 대비하기도 전에 살고 있던 동네의 부랑자 소탕 작전이 시작됐다. 우리도 당연히 그 표적이 되어 근처에서 구걸하던 다른 부랑자들과 같이 도망쳤다. 군인들은 인적이 드문 산으로 우리를 몰아갔다. 죽이려는 건지 도회지에서 쫓아내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총과 칼을 든 그들에게서 도망가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다른 무리의 아이가 넘어지고 그 아이가 짓밟히는 꼴을 보고서 정신이 들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살아온 나날들이다. 쫓겨온 부랑자들 중 어린 아이들은 얼마 안 가 붙잡혀 맞고 있었다. 그 중엔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도망치던 와중에 그게 눈에 띄고 말았다. 그리고 근방에 내게 수치스러운 기억을 남긴 그 창고가 있었다. 창고지기의 알선 탓에 그 창고를 얼마나 드나들었던가. 한때 쓰던 라이플을 꺼내와 군인들의 머리에 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살짝 미쳐있었던 걸까. 맨정신에는 맞지 않던 탄환이 이상하게도 그들의 두개골을 뚫고 붉은 분수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그 자리의 군인들을 다 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앞에 펼쳐진 모습은 끔찍해서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뒤로 하고 달아났다. 사람을 죽였다. 암만 거리에서 못 배운 채 살아온 사람이라도 알고 있다.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붉은 흔적은 잔상이 되어 눈앞을 흐리게 했다. 기묘한 의존에 의한 책임감같은 건 알 바가 아니었다. 순간에 저지른 죄는 그것을 넘어섰다. 다른 아이들을 구하려는 거였잖아라고 변명하지만 방아쇠를 당겨 표적을 맞췄을 때의 쾌감이 그걸 부정했다. 사냥에 따라다닐 때는 알지 못한 감정을 긴박한 그 순간 알아버린 것이다. 잠시 멈춰 토하고는 다시 내달렸다. 가련하게도, 난 그 죄를 더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손이 더럽다고 느껴져서 눈앞에 보이는 물에 손을 박박 씻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실감하면서. 제5지구에서 4지구로 넘어가는 셔틀을 탔다. 화물 속에 낑겨들어갔다. 4지구에 내리자 묘한 안심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안심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레지스탕스의 소문을 들었다. 이미 연방군을 죽인 전과가 있는 그였다. 차라리 대의 속에 숨기로 했다. 죄책감이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 속의 선택지가 많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는 혼자서도 멋대로 성장했다. 그날로 그는 합리화를 할 줄 아는 어른의 길로 들어섰다.

*
"헤에..."
제6지구, 고철 더미 옆에 임시로 건물을 세워 만든 어느 바. 간판은커녕 이름조차 없는 이런 곳에는 온갖 사람이 모인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연방정부에 찍힌 지명수배자,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신분세탁을 하며 사는 사람, 동네 불량배에서부터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어둠의 세력까지. 그렇기에 이곳에는 암묵의 룰이 존재한다. 이 바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면 안된다는 것.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도 이름을 불러선 안되며 모른다고 물어봐서도 안된다는 것. 접선이 필요하다면 은밀한 암호를 통해서 해야만 한다. 그런 곳이다보니, 지명수배자 신세인 오소마츠도 이곳만큼은 편안히 드나든다. 뭐, 다른 곳도 변장을 하거나 하면서 잘도 드나들지만. 지명수배라고는 해도, 그는 평범하고 흔한 얼굴인 뿐더러 정부 측의 인물이 아니라면 그다지 탐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수십명의 현상금 사냥꾼을 골탕먹이고 당한 것은 갚아준다는 주의 아래 괴멸시킨 뒷골목의 조직도 많고,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알려져있어 눈에 띄지 않는 지지자가 많고, 연방정부가 첩보를 받고 실행한 소통 작전마다 번번이 정부를 엿먹이고는 하는 사람이었다. 생명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가며 살아가는 그는 나름대로 삶의 목적이 있다고 했지만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이곳의 분위기도 제법 편안해졌군, 하고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위스키, 온 더 락으로."
커다란 얼음덩어리에 위스키가 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나 식혀볼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 소문 들었어? 얼마 전에 울프가 또 한 건 했다는데."
"그 가면 쓰고 활동한다는 현상금 사냥꾼 말이지?"
"그러니까. 누가 움직이고 있는 녀석인지, 아니면 정말 혼자 내키는대로 활동하는지 감이 안 온단 말이지. 언제 누구의 등을 노릴지도 모르고, 얼굴을 까고 다니지 않는 게 영 맘에 안 들어."
"대비를 제대로 해두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 녀석만 위협인 건 아니니까. 세상 천지에 다 적이지."
울프라고 이름을 숨기고 얼굴을 가린 채 활동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라. 만나면 한 번 놀아볼까? 오소마츠의 흥미가 동하던 때 새로운 인물이 바에 걸어들어왔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묘하게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 바의 마스터는 살짝 한심한 듯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주문대로 쉐이커에 보드카와 베르무트를 담아 흔든다. 오소마츠는 슬쩍 그 남자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오소마츠가 앉은 방향쪽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얼굴을 묘하게 가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목소리에 넘치는 여유와는 달리 그는 생각할 것이 많은 듯 오소마츠의 반대 방향, 그러니까 사람이 없는 쪽을 보면서 연신 한숨을 쉬었다. 지쳐 보였다. 마스터가 그 앞에 마티니를 내자 오소마츠는 그의 옆에 다가갔다.
"어이, 형씨. 심심하면 나랑 수다나 떨지 않을래? 한숨만 쉬지 말고."
그는 오소마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동시에, 두 사람은 소리를 지르려던 걸 입을 틀어막아 저지했다. 매우 닮은 얼굴의 두 사람.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 남자가 먼저 마티니를 음미할 새도 없이 들이키자 오소마츠도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켰다. 남자는 오소마츠의 몫까지 빠르게 계산한다. 둘은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채 바를 나와 고철 더미 뒷편으로 갔다.
"너, 카라..."
"오랜만이다, 오소마츠. 잘 지냈어?"
잘 지냈냐고.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 뒤로 이런저런 일 있었지. 잘 지냈냐면, 그건 아닐걸?"
"그런가."
뭐야, 그 덤덤한 반응은.
"그 날, 왜 사라진 거야? 누가 끌고가기라도 한 거야?"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아니. 내가 도망간거다. 너에게서 말이지."
"무슨 소리야. 나한테서 왜 도망치는데."
"너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유약한 소년 둘이서 살아남을 순 없어. 사지를 거쳐왔다고 해도."
"혼자서도 살아남았잖아. 너도, 나도."
"그러니까."
"둘이면 서로 더 의지해서..."
"오소마츠,"
그가, 아니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부른다.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무척이나 건조한 목소리. 어릴 때와는 달리 깊은 저음의 목소리로.
"각오해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라마츠는 오소마츠 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오소마츠는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그 무언가가 팔에 스치는 건 막지 못했다. 찢긴 옷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아파! 이게 뭐야, 나이프? 하? 뭐하는 짓..."
오소마츠가 팔에 난 상처에 정신이 팔린 동안 카라마츠는 빠르게 달려와서 명치 쪽에 주먹을 날렸다. 깊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급소에 맞은 충격에 오소마츠는 기침을 해댔다.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오자 오소마츠는 일단 허리를 꺾어 피하고는 땅을 짚고 카라마츠를 힘껏 걷어찼다. 겨우 나이프에 스쳤을 팔이 아파온다. 카라마츠는 살짝 비틀거리며 섰다. 정강이에 제대로 직격했나.
"만나자마자 이렇게 과격하게 대화해야해?"
오소마츠는 다시금 카라마츠에게 말을 건다.
"내란죄 및 연방정부를 능욕한 혐의."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본다. 설마.
"지명수배범 오소마츠. 얌전히 잡혀주실까."
여전히 건조하기만 한 카라마츠의 목소리.
"너...정부의 개가 된 거야?"
오소마츠의 목소리엔 이제 분노가 묻어난다.
"잊어버린거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난 건데! 목숨을 걸고 우릴 탈출시켜준 아저씨들을 잊어버렸어? 너도! 복수하고 싶다며! 약속했잖아! 미래를 같이 만들자고..."
격해지던 감정은 급격히 가라앉는다. 힘이 쭉 빠져나가더니 오소마츠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아, 나이프인가. 아까 명치 쪽에도. 뭔가 약이나 독을 쓴 건가. 어째서.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카라마츠는 어느새 가면을 썼다. 그의 눈동자, 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보는 거지? 몽롱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마음을 알고 싶어 손을 뻗었다.

*
삑삑삑삐익, 삑삑삑삐익.
기묘한 새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소마츠는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켜고선 그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방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나무들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팔 다쳤었지, 하고 보면 깨끗하게 처치가 되어있다. 아프지도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보았다. 한 청년이 나뭇가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아, 카라마츠인가. 아까 본 카라마츠와는 달리 좀더 생기있는 표정이었다. 어릴 때의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쳤다. 카라마츠는 민망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원예용 가위를 내려놓고 오소마츠 쪽으로 왔다. 오소마츠는 뒷걸음질을 쳤으나 도망가기 어려운 상황인 걸 깨닫고 주먹에 힘을 잔뜩 넣고 있었다.
"깼는가, 오소마츠."
깊고 낮은, 그러나 상냥한 목소리. 거기에 오소마츠는 주먹에 넣었던 힘을 풀고 말았다.
"상황을 설명하게 해 주겠나. 용서받기 어렵다는 건 알지만. 우선은 식사를 하자. 사흘을 꼬박 누워있었으니 배가 엄청 고플거야."
그 말을 들으니 배가 고픈 듯도 했다. 그러나 경계를 쉽게 풀 수는 없었다. 카라마츠는 어딘가로 연락을 했고, 곧 정원 쪽으로 누군가 음식을 가져왔다.  그도 오소마츠나 카라마츠와 닮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토도마츠입니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오소마츠 씨."
토도마츠라는 청년은 나무 그늘에 천을 깔더니 가지고 온 음식을 늘어놓았다. 여기로 오라는 듯 손짓하면 카라마츠는 거기에 응해 가서 앉는다. 오소마츠는 멍하게 그 모습을 보다 토도마츠의 채근에 와서 앉았다. 샌드위치를 집어 크게 베어먹는 카라마츠를 보자, 오소마츠도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하여간, 카라마츠 형도 무리한다니까. 사람을 독으로 꼼짝못하게 하면 당한 사람은 경계하지! 거기다 6지구에서 여기 5지구까지 자력으로 이동해오다니, 안 들켜서 망정이지 원."
토도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카라마츠는 날 잡아가려 그런 건 아니었구나, 하고 오소마츠는 조금 안심했다.
"그래서, 상황을 설명해주겠단건 뭔데."
토라진 목소리로 오소마츠가 얘기를 꺼낸다.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채로.
"난 지금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고 있어. 여기 토도마츠는 탐정을 하고 있고. 혹시 기억나? 얍삽이라 부르던..."
"헤에, 넌 기억나냐고 편하게 얘기하는구나."
카라마츠의 말에 그는 정색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카라마츠가 나타나자마자 그에게 한 일은 냅다 공격해서 약에 취해 재운 것이었으니까.
"난 반가웠어. 거기서, 다시 만나서 놀랐어. 보고싶었단말은 커녕 넌 나보고 각오하라면서 상처나 줬어. 뭐하자는 거야? 그래놓고 지금은? 왜 갑자기 상냥한 건데! 우리가 잠깐 함께 있던 그 시간 나눈 대화를 내가 행복한 기억으로 둘 거 같아? 괴로워도 널 찾고 싶어서 나 열심히 돌아다녔어! 아저씨들이 맡긴 미래만큼이나 너도 소중했으니까! 거창한 신념이 있어서 레지스탕스로 복귀한 게 아냐. 너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어서였으니까. 그런데, 10년만의 재회가 그런 식이었어. 좋았던 기억으로 두고 싶었던 그 시간이 순식간에 잊어버리고픈 기억이 된 거야. 그거 알아? 나도 사선을 넘나들었어. 몇 번이고 배신도 당해보고, 함정에 빠졌지.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이번이 처음이야. 짧은 시간 동안, 너가 나를 차지해버린걸까."
오소마츠의 말을 카라마츠는 그저 듣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
토도마츠가 조용히 오소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오소마츠 씨는 카라마츠 형을 굉장히 좋아하는군요. 열렬한 고백 잘 들었네."
푸풉, 하고 웃는 소리에 오소마츠는 터뜨렸던 분통과 감정이 부끄러워지며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찔끔 나는것도 같았다.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나직이 오소마츠를 부른다.
"난 말야, 그때 난 말야, 지금도 난 말야,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오소마츠는 가렸던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너에게 구원받았어. 카라마츠라는 이름도 너에게 받았고, 너가 있어서 난 내가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럼, 어째서..."
"동시에 난 불안했어. 나와 같이 있다가는 너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어. 오소마츠와 미래를 만들어가고 싶었지만 두 번이나 소중한 걸 잃은 나는 불안했어. 그리고..."
카라마츠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스스로의 몸을 감싸고서 떨고 있었다.
"역시 말 못하겠어. 그건 봐주지 않을래?"
어느새 카라마츠는 10년 전 전장에서 처음 만났던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소마츠에게도 전해졌다. 이것만큼은 말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게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떠났던 이유라고.
"알았어. 안 물어볼게. 용기가 나면 말해줘. 평생 말 안해도 괜찮으니까. 화난 거 아니야? 화가 난 건 사흘 전 6지구에서 있었던 그거뿐이니까? 그건 말해줄 수 있지?"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건 아니겠지. 오소마츠는 두 개 째의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서 이번에는 두 입에 해치웠다. 볼 가득히 넣고 우물거리는 버릇은 어릴 때부터 고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든 우겨넣어야 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그때 토도마츠가 일어섰다.
"잠시 일 좀 보고 올테니 오소마츠 씨는 카라마츠 형과 같이 있어줘요. 이거 하나만 말할게요. 카라마츠 형은 오소마츠 씨를 보호하고 싶었던 거야. 오소마츠 씨가 노려진다는 말을 듣고선 쏜살같이 날아갔어. 형은 지금 울프라는 이름으로 현상금 사냥꾼을 하고 있는데, 그 이름값이면 자기가 노리는 척 하면서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 오소마츠 씨를 데려오자마자, 형은 그쪽을 치료하고선 한참을 죄책감에 울며 보냈어.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두렵다면서. 솔직히 부러웠어. 나는 형에게 몇 번 목숨을 구해졌지만 이렇게까지 혼신을 다하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 그러니까. 제대로 들어줘요. 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도 있을 테니까."
토도마츠는 살짝 삐진 듯한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오소마츠는 대충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6지구의 그 바에 종종 간다는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간 거였을 지도 모른다. 암살자나 현상금 사냥꾼을 고용해서 그를 덮치거나 죽일 계획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거봐."
카라마츠가 다시 입을 뗐다.
"넌 나를 보자마자 긴장을 다 풀어버렸어. 심지어 내가 던진 나이프에 다쳐서도. 네가 말했지. 신부를, 친구들을 두고, 아저씨들을 두고 도망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너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그래서...넌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어째서...
"내가 만약 진심이었다면, 진심으로 널 잡으려들고 죽이려 했다면, 넌 어땠을 거 같아? 지금까지 그래왔듯 넌 무리하게 뛰어들어 죽음도 개의치않는 미친 개처럼, 나를 막았을까? 꽉 쥔 주먹과 분노와 결의에 찬 눈빛을 난 잊을 수 없었어. 오소마츠 혼자선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나랑 있다가는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카라마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다가가 손을 떼고 대신 입술을 댔다. 두 손은 카라마츠의 양 볼을 감싼 채, 카라마츠의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카라마츠는 가만히 있다 오소마츠의 혀를 받아들였다. 오소마츠는 왼팔로 카라마츠의 허리를 감싸고 오른팔로는 목과 머리를 받친 채 바닥에 깔린 천 위로 카라마츠를 넘어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포개져서 몸이 닿은 채, 입술이 닿은 채 한동안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입술이 마침내 떨어지고 카라마츠는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거야. 그것도 아까 말할 수 없다던 그것 때문이야? 싫어. 네가 밀처내도 난 널 다시 놓고 싶지 않아. 오소마츠는 말없이 그의 감정을 카라마츠의 안에 들이밀었다. 소년시절의 높은 신음소리가 간만에 들려온다. 처음이지만 둘은 능숙하게 서로를 받아들였다. 말로 할 수는 없는 그 이유가,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가, 이런 걸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나도 왕공이라는 시대의 웨이브에 타고 싶었던 이야기
두근두근하지 않나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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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의 세계와 땅 아래의 세계는 이어져 있었단다.]
그런 거 믿을 리가 없잖아.
유모 말 같은 건 다 거짓말이야.
[지금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길이 끊어져있지만 가끔 땅 아래의 세계의 흔적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돌고는 했지.]
나와 늘 함께 있어주겠다면서.
날 감싸고선 눈앞에서 죽어버렸잖아.
거짓말쟁이 말은 믿지 않아.
아니, 난 이제부터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을 거야.

불타는 성에서 아바마마의 충신이었던 자에게 안겨 도망쳐나오면서 오소마츠는 다짐했다.
간신히 도망친 곳에서 세력을 길러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죽이고 왕좌에 오른 숙부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왔다.
정통성이나 내분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그를 제거하지 못한 반란 세력들은 몇 년이 지나고 이쪽에서 먼저 숙청했다.
타오르는 불꽃과 끈적한 피를 딛고서 오소마츠는 <붉은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하아..."
살아남기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왕의 자리를 되돌려받기 위해서, 수많은 공부와 훈련의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바쳐온 날들의 반동일까.
오소마츠에겐 때때로 왕좌에 앉아있는 게 따분했고,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가곤 했다.
[어느 날, 근처 숲속에 땅굴이 생겨났는데 그 땅굴에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나는 그 땅굴을 보러 집을 조용히 빠져나와 숲으로 향했지.]
"왕이시어, 무엇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잠행 또한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혼자서 백성들을 살피러 잠시 다녀올 것이니 그 누구도 따라오지 말도록 하라."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채비와 칼 한 자루에 사냥용으로 기르는 말 한 마리를 탄 채 그는 왕궁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미친 거 아냐? 왕이라는 자각 있는 거냐고? 이럴때만 위엄있는 말투로? 사람 붙여! 얼른!"
오소마츠를 지지해준 친구이자 재상인 쵸로마츠의 당황하는 목소리.
"형님을, 아니지. 폐하를 잘 알고 있잖아. 사람 괜히 붙였다 그 사람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걱정마, 친구인 고양이 몇 마리를 붙여 뒀어..."
오소마츠의 동생이자 생물들, 특히 고양이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치마츠의 목소리.
그런 목소리들이 제멋대로인 오소마츠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오소마츠가 모는 말은 자신이 숨어살던 마을 방향으로 내달렸다.
[깊고 깊은 숲속을 헤쳐나가자 팔다리에는 수많은 상처가 나고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너덜너덜해졌지.]
달빛을 받아 어두운 길 위에 무언가 반짝 빛났다.
오소마츠는 말을 잠시 멈추고 말 위에서 내렸다.
[그렇게 헤매다 지쳐 울고 있을 때,]
"눈앞에 땅굴이 나타났단다."
날카로운 은빛의 무언가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두더지인가. 두더지 발톱이 아무렴 저렇게 빛날까.
은색 손톱은 점점 모습을 드러내더니, 거기서 푸른 옷자락과, 머리 같은 것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굴에서...사람이...튀어나왔...어?"
오소마츠의 유모가 들려준 옛이야기처럼, 방금 막 만들어진 땅굴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프리~~~~~덤!"
우렁차게 외치며 땅굴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두더지같은 강철 손톱에, 흙이 묻기는 했지만 한눈에 봐도 우아하고 반짝거리는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튀어나온 사람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일어서서는 갑자기 치마를 걷어올렸다.
이게 뭔 횡재냐! 오소마츠는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건강해보이는 실루엣의 다리에는 드릴같아 보이는 것이나 작은 가방 등 이것저것 매달려있었다.
거기서 그는 강철 손톱같은 걸 빼서는 가방같은 데 집어넣더니 왕관을 꺼내 썼다.
그리고서는 드레스를 털고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했다.
[마치 온기라곤 없다는 듯 새하얀 피부의 사람이 말이야.]
달빛 아래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하기엔 새하얀 피부, 푸른 보석이 달린 화려한 은색 왕관에 푸른 드레스를 입고 그는 서 있었다.
그 모든 것에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나...나오자마자 지...지상인과 마주칠 줄이야...그보다 다...당황했구나, 지상인!"
그리고 예상치 못한 굵고 낮은 목소리.
"하? 당황한 건 그쪽인 거 같은데? 갑자기 자기 치마를 들추다니, 무슨 포상인가 했지."
오소마츠는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받아친다.
불편했던 왕으로서의 위엄은 잠시 내려놓은 편한 마음으로.
"그보다 지상인? 여기는 장미의 나라야. 지상이라는 나라가 있던가?"
"장미? 나라? 여기는 지상이 아닌건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지상이 땅 위라는 의미라면 여기도 지상이 맞겠지."
"그런가. 다행이다. 몇 번 올라오긴 했지만 지상인과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안도하는 그를 보며 오소마츠는 유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설마.
"그러는 너는 어디서 온 거지? 설마 땅 밑에서 온 거?"
"그래. 나는 지하에서 왔다. 지하 세계의 공주로서 말이지."
지하 세계면 보통 저승을 얘기하지 않나? 그보다 공주? 차림새만 보면 공주같기는 한데...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지하 세계에서도 지상 세계의 존재는 전설로만 전해져왔고,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은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지상 세계도 비슷한 상황이지 않을까 생각했지."
"아...응...지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생명이 다하면 가는 곳이라고 하고 있어서 말이지.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뺴면 거의 전설조차도 안 남아 있다고 할까."
죽음이라는 말에 그는 드레스를 주먹으로 꼭 부여잡았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지상에도 있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건 비슷한 모양이다. 참고로 나는 저승에서 온 사람은 아니야. 죽은 사람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오소마츠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는 다정하게 말을 한다.
나쁜 녀석은 아닌가. 오소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던 긴장을 살짝 풀었다.
"이렇게 말도 통하는데 너는 누구야? 지하 세계의 공주님?"
공주님이라는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힌다.
"카라마츠. 카라마츠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오소마츠. 오소마츠야."
"오소마츠인가. 어...잘 부탁합니다."
뭘 잘 부탁한다는 거야.
지금껏 살짝 고압적인 말투로 말하다가 갑자기 높임말을 쓴다고 해도 말이지.
"나도 잘 부탁해, 카라마츠 공주."
"잘 부탁합니다. 처음으로 지상인을 만나면 쓰려고 수없이 연습했던 말이다. 생각보다 편하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
첫인상과는 달리 카라마츠는 어딘가 바보같고 허술해보였다. 그리고 상냥해보였다.
"지상에 겨우 왔으니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내가 먼저 물어봐도 돼?"
"상관없다. 뭔가?"
"카라마츠 공주는 남자지? 어째서 공주인 거야?"
"남자인 게 상관있는가?"
"에?"
오소마츠는 당황했다. 지상과 지하는 공주의 개념이 다른가?
"공주는 세대교체 시기에 그 세대에서 선발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5명 정도를 선발하여 그 중에 왕이나 여왕으로 지명되는 것이지. 예컨대 나는 우리 세대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공주로 선발되었다만."
"아...그렇군. 에? 가장 강하다고?"
"그렇다. 뭐, 여왕님께는 미치지 못하지만."
힘으로 선발된 건가? 혹시 지상을 침략하거나 하기 위한 첨병같은 건가?
"그런가...공주라고 하면 보통 여성이거든. 개념이 좀 다른가보네."
"뭐, 지하도 공주에 선발된 자들은 여자가 많은 편이다. 왕보다도 여왕이 많고 말이지."
"지상에 온 이유는 뭐야?"
"그야 뭐, 지상의 이것저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지."
이것저것이라...
"문헌으로만 읽었던 다양한 생물들을 만나보고 싶다! 예를 들면 늑대라든가 호랑이라든가! 하늘이라든가, 바다라든가,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이내 눈을 반짝인다. 너무 지나친 생각이었나. 연기라면 참 소름돋을 만큼 순수함이 눈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보다 오소마츠, 어쩐지 주변에 생물이 늘어난 거 같다만...저건 음...고양이라고 하던가?"
"고양이? 어느새 이렇게 늘었...아! 이치마츠!"
수많은 고양이의 존재를 눈치챘을 즈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말에 탄 쵸로마츠였다.
"에...쵸로마츠?"
쵸로마츠는 오소마츠를 노려보다 앞에 있는 카라마츠를 눈치채곤 살짝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누구...신지...?"
아마 오소마츠를 막 부를지 왕으로서 높여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네. 카라마츠 공주, 이 쪽은 쵸로마츠. 내 신하야. 나는 아까 말했던 이 곳 장미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고."
"카라마츠...공주...?"
"아. 오소마츠는 왕이었군...에에! 지상의 임금이었던 건가! 제대로 예의를 갖추질 못했는데..."
"됐어됐어. 안 들키면 왕이라고 밝힐 생각 없었고. 아까 말했지만 나는 장미의 나라의 왕이야. 지상의 극히 일부만을 다스리고 있으니까, 너 쪽에서 낮출 필요는 없어. 편하게 하자고~"
"왕으로서의 위엄이라곤 없어! 카라마츠 공주? 어느 나라에서 오신 공주님이신지..."
"들어보라고, 쵸로마츠! 카라마츠 공주 엄청 반짝거리지? 지하 세계에서 왔대! 그 전설 속의 지하세계..."
"물러나시죠, 왕이시여."
쵸로마츠는 정색을 하더니 오소마츠 앞을 가로막고 칼을 꺼내든다.
"어디서 온 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이 나라의 지존을 속이려 들다니. 제대로 정체를 밝히거나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라!"
단호한 쵸로마츠에 오소마츠는 당황했다. 오소마츠를 막 대하면서 한편으로 아끼고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지키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무작정 말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등장의 임팩트 탓인가 카라마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렸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쵸로마츠의 호통에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아까 받았던 바보같으면서도 상냥한 느낌을 따라가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만. 행여나 아까 다리에 매달려있던 무기를 꺼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카라마츠는 당황했던 얼굴을 거두고 다시금 왕관과 드레스를 매만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레스를 살짝 잡고서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온화하면서도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 달빛을 받아 빛나는 새하얀 피부. 아까 땅굴에서 나와 막 섰을 때보다도 더 그는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살짝 지은 미소가 전하는 위엄까지.
"저는 지하 세계의 공주, 카라마츠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카라마츠의 눈빛에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밤에 특별한 빛도 없건만 눈앞이 눈부셔서 견딜 수 없었다.
"지하 세계라니 그런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쵸로마츠는 대단해. 저렇게 흘러나오는 기품조차 의심하고 있다니. 오소마츠는 생각한다. 그는 그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했었다. 그는 카라마츠를 믿고 싶은 것일까. 아, 닮았다. 그는 오소마츠의 숙부와 닮았다. 생긴 게 닮았다는 건 아니고. 숙부는 상냥하고 살짝 허술한 사람이었다. 정사에 바쁜 아바마마와 성을 돌봐야 하는 어마마마를 대신해 오소마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숙부였다. 오소마츠는 숙부를 잘 따랐다. 뭐든 척척 해내고 뭐든 척척 대답해주는 숙부를 그는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숙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은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유모는 오소마츠와 숙부가 가는 곳마다 따라와 오소마츠를 지켜보고 있었다. 늘 함께 있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숙부의 야망이 실천에 옮겨진 날, 유모의 희생으로 불타는 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오소마츠는 그의 순진무구함을 버렸다. 뭐든 쉽게 믿던 그 시절을 버렸다. 냉혹해질 수는 없었지만 복수심을 누르며 살아왔다. 자신과 피가 이어진 동생, 자신의 안목으로 우정을 이어나간 친구, 그 외에 그가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기반으로 서서히 세력을 늘려 몇 년 뒤 숙부에게 복수하러 갔다. 오소마츠는 선봉에 서서 그를 막아서는 신하들을 짓밟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망치지 않고 어전에 남아있던 숙부의 목을 직접 베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칼과 손이 피로 물들었다. 숙부의 목을 벤 칼을 떨어뜨리고 피묻은 손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과 지금까지의 인생이 스쳐지나가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성이 불타던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듯, 불타버리는 듯, 마음이 아파왔다. 사태를 수습하고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이 고통은 종종 밀려왔다. 그 고통을 숨긴 채, 따분하다며 장난으로 넘기곤 했다.
"괜찮다."
머리 쪽이 시원해졌다. 동시에, 뜨겁게 불태우던 고통은 따스함으로 바뀌어갔다.
"괜찮다."
오소마츠는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는 카라마츠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카라마츠는 한 손을 오소마츠의 머리에 짚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쪽을 토닥여주었다. 쵸로마츠는 칼을 거두고 무릎을 꿇은 채 그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손에서는 물 같은 게 느껴졌다.
"이게...어떻게 된..."
"정신이 들어? 괜찮아? 여기 카라마츠 공주님이 널 구해주셨어. 물의 마법으로 네 고열을 가라앉혀주셔서... 종종 있었잖아, 갑자기 열이 올라서 쓰러지는 일이... 기운차게 나가길래 약 같은 건 생각도 못했는데...정말...다행...훌쩍..."
쵸로마츠는 걱정했다는 듯 눈물을 쏟았다. 오소마츠는 이마를 짚고 있던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 살짝 내렸다. 카라마츠의 손에서는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흘러내리지 않고 그 손 안에서만 작은 분수처럼 솟아나는 물에 손가락을 슬쩍 대니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쓰러져서 걱정했다. 종종 열이 올라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 미약하게나마 힘을 써봤다. 그저 물을 조금 다룰 수 있는 것뿐이지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다."
오소마츠가 갑자기 쓰러지자 쵸로마츠는 카라마츠를 경계하던 걸 포기하고 오소마츠 쪽으로 갔다. 평소라면 은밀히 약을 챙겨와 먹이거나 찬물을 적신 수건을 얹기만 하면 됐을텐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의식이라도 차리게 하려고 어깨 쪽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머리에 손을 짚었다. 일단은 이걸로 응급조치를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네며 카라마츠는 손에서 물이 솟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쵸로마츠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자칭 공주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기적처럼 물이 솟아나오는 것을 보고선 경계심을 풀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오소마츠를 구할 수 있는 게 카라마츠밖에 없었으니까.
"여전히 믿기 어렵지만, 임금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지하 세계와 마찬가지로 거의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으니까요. 물론 아는 사람중에 마법 비슷한 것을 쓰는 사람이 있기에 마법에 대해서는 믿고 있습니다만."
"그런가. 지하 세계는 그래도 이런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꽤 된다. 땅의 기운을 근원으로 삼아서라고 들은 적은 있지만. 마법이라기보단 잔재주에 가깝다. 목이 말라서 곤란한 일은 없을 정도의 작은 힘이지만..."
"그 덕에 내가 살았잖아. 고마워, 카라마츠 공주."
"그럼, 오소마츠도 깼으니. 쵸로마츠여. 당신의 충성심, 그리고 그 이상의 우정은 잘 알았다. 솔직히 나도 당신과 같은 신하가, 아니 친구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소마츠가 부럽다. 하지만 그와는 정말 방금 막 만난 거 뿐이다. 지하 세게에서 지상으로 막 나온 나와 우연히 마주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절대로 오소마츠를 속이거나 할 생각은 없다. 오소마츠, 아니 장미의 나라의 왕이시여. 친구도 걱정하고 있고, 이제 성으로 돌아가 쉬지 않겠나. 잠시나마 만나서 즐거웠다. 지상에서의 첫 만남이 오소마츠여서 정말 다행이다."
이별의 말을 건넨다. 쵸로마츠의 진심과 오소마츠의 몸 상태. 카라마츠가 앞으로 어디서 뭘 할지는 모르지만, 처음 마주한 오소마츠와는 여기서 헤어져야 할 거라는 판단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오소마츠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제부턴...어떻게 할 거야? 지상의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싶다며?"
"여기저기 다녀보면서 배우면 되겠지. 지상에 대한 책도 들고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
여기서 놓치면 영영 카라마츠를 못 보게 될 것 같았다.
"장미의 나라에서 정식으로 지하 세계의 공주 카라마츠를 초대하겠다!"
오소마츠는 간절하게 외쳤다. 믿고 싶으니까 믿는다고. 믿음에 배신을 당한 적도 있지만 운명같은 끌림에 그는 마음을 열고 카라마츠를 믿어보기로 했다.
"공주라고는 해도 호위 하나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혼자서 헤쳐나가는 건 힘드니까, 외로우니까, 그러니까, 당분간은 나의 성에 머물며 찬찬히 지상을 알아가는 건 어떤가?"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와 쵸로마츠를 바라보았다. 쵸로마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이지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미의 나라의 왕이시여."
오소마츠는 안도한 듯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 고로, 성에 귀하신 손님을 초대하게 되었으니 임금님께서도 성으로 돌아가시죠. 말은 탈 수 있겠어? 공주님은 어디에 태워야 하지?"
"에에...쵸로마츠, 조금 더 쉬면 안 돼?"
"안 돼. 이치마츠도 걱정하고 있고, 네 성격에 다른 사람을 보내면 가만두지 않을 거 같아서 급하게 찾으러 온 거니까. 하여간 위기감도 뭣도 없다니까."
"헤헤..."
"내가 오소마츠를 데리고 거기 탈 테니 쵸로마츠가 성까지 안내해주면 어떤가? 다루는 법을 알려주면 비슷한 것은 타 봤으니 금방 탈 수 있을 거다."
카라마츠는 쵸로마츠에게 말을 다루는 법을 듣고 잠깐 타 보더니 내려서 오소마츠를 번쩍 들어올렸다.
"잠깐? 내가 공주한테 공주님 안기를 당하는 거야? 에? 그보다 카라마츠, 정말 힘이 세네."
"말했잖아. 우리 세대에서 가장 강하다고, 훗."
"의기양양하다못해 자기애로 가득한 표정! 아프네! 하하하..."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말에 먼저 태운 후 올라탔다.
쵸로마츠를 따라 성으로 향하는 길, 어느새 살짝 주변이 밝아지고 있었다.
"카라마츠, 깜깜해졌다가 살짝 밝아지는 이 풍경, 이걸 하늘이라 그래."
"이게 하늘? 하늘은 푸른색이라고 들었다만."
"꼭 그렇진 않아. 하늘은 다양한 색으로 물들고 구름도 있고 해도 있고 아까처럼 달도 뜨고 별도 뜨고... 하늘 하나만 봐도 정말 다양해. 그런 세계를, 카라마츠 공주가 알아갔으면 좋겠어."
"그냥 카라마츠라고 불러줘, 오소마츠. 처음 만날 때부터 호칭도 말투도 다 꼬였지만, 이름을 부르는 게 더 친해진 거 같아서 좋아. 물론 공적으로는 제대로 격식을 갖춰야 겠지만."
"그럼, 카라마츠. 잘 부탁해."
"잘 부탁합니다, 오소마츠."
그건 여전히 높임말인거냐. 그렇게 핀잔을 줄까 하다가 슬쩍 바라본 카라마츠의 새하얀 목덜미를 보고선 얼굴을 붉힌 채 카라마츠의 등에 기대어갔다.
그렇게 카라마츠 공주는 장미의 나라의 성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지상에 온 그가 겪을 수많은 이야기에 이제 막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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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이 머릿속에 구축되었지만 최대한 친절하게 크게 떡밥을 던지지 않고 썼습니다. 떡밥 던지면 또 나만 알아보는 글이 되니까...단편인데 장편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하여간 단편으로 썼습니다. 뒤에 똥냥꽁냥 복닥복닥은 이미 많은 왕공이 있으니까...둘이 결혼하겠지!
스팀펑크AU로 설정을 짜다 몇 가닥이 나왔습니다. 간만에 쓰네요. 뒷얘기를 써야 하는데, 이것 말고도 써야할 뒷얘기가 너무 많아서 일단은 단편인 것으로. 세계관이 넓어져서 솔직히 괴롭군요.
지구가 환경이나 자원 문제 등으로 파괴되고 우주 개척시대로 제 7지구까지 거주지구를 만들고 지구는 모성이라 부르며 복원하고 있는 세계 연방정부가 부패하며 민중을 핍박하게 되고 그 횡포에 못 견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데 헤소쿠리에 있던 스팀펑크를 2차 혁명전쟁 즈음으로 대강 짜고 얘는 뭐, 얘는 뭐 짜는데 아무래도 오소마츠는 무법자, 카라마츠는 현상금 사냥꾼(정확히는 모르겠음) 이게 그림이 딱 나와서리... 망상전개 풀파워! 로 그 프리퀄 느낌으로 썼지만 솔직히 짜놓은 설정 내에서 쓴 거라 저 말고는 뭔 내용인지 잘 모를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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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점을 잃은 눈에 비치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 그를 봤을 때 든 생각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자신과 닮아있다는 점이나 내 또래가 이런 곳에 또 있다는 점은 그 후에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곳의 어른들보다도 더 깊고, 흐려진 그 눈에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내가 다가가서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쪽으로 날 데려온 아저씨에게 눈짓하자, 아저씨는 녀석 옆에 있던 사람을 불렀다.
“이쪽에 쓸 만한 꼬맹이가 있다고 들어서, 우리 쪽 꼬맹이를 데려왔는데…”
“오! 꼭 닮았구만. 하긴, 집 잃은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 게 요즘 세상인데, 헤어진 형제가 이런 데서 만나도 이상할 건 없겠지.“
녀석은 이쪽을 바라봤다. 여전히 깊고도 흐린 그 눈에 정말 내가 비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녀석은 무표정인 채였다.
“자, 자기소개라도 해두라고. 너도 그동안 또래가 없어서 외로웠을 테니 저 애를 너와 같은 조로 편성해줄까 하거든.”
아저씨가 등을 세게 두드리며 격려해줬다.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안녕? 난 오소마츠! 우리 둘 얼굴도 상당히 닮았고 해서…하여간 무언가 인연이 있는 거 같은데 친하게 지내보자고~”
대답 대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그 눈에는 내가 비치는 건가. 손을 내밀자 그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고 내가 다시 입을 열려 하자 그가 답을 했다.
“난…이름은 없고…그동안 같이 지내던 애들은 날 모지리라 불렀어. 잘…부탁해…오소마츠.”
말투는 건조할지언정 성실하기 그지없는 대답이다. 무심코 피식, 하고 웃자 그도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아저씨들은 우리를 배려해선지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기.”
모지리…라고 초면에 참 실례되는 말을 하긴 그래서 그냥 불렀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옆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한…2주 정도.”
“그렇구나. 난 1달 반 쯤 있었나?”
그는 나를 슥 쳐다보더니 들고있던 라이플을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 뭘 했어?”
여기서 뭘 했냐라. 이런 데서 보기 드문 또래에게 물을 만한 건 이런 거 정도려나.
“너한텐 내 얘기를 아무도 안 해준 모양이네. 나도 너처럼 총 들고 전선에 있었지 뭐. 여기 모인 사람들이 뭐 별 거 있냐, 다 연방의 횡포에 들고 일어난 사람들인데.”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녀석은 날 봤지만 이내 아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너도 비슷한 거야?”
“비슷할 지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총을 들고 맞서는 것밖에 없으니까…”
운좋게도 교전이 없던 날이었다. 나는 그와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잃어버린 쌍둥이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그 얘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가 있던 곳에도 얍삽이라 불리던 얼굴이 똑같은 아이가 있었다는 말엔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이 곳에 오기 전 그 아이를 포함해 함깨 있던 아이들과 헤어져버린 처지에 놓인 그에게 차마 먼 기억 속의 흐릿한 이야기 같은 걸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도 어떤 신부에게 거두어져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교회에서 이것저것 배우며 자라왔던 얘기를 했다. 글자라든가 산수라든가, 아것저것 배운 것들을 자랑스레 떠들면 반짝이는 눈으로 그가 바라보았다. 이곳저곳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버려진 아이들의 가장 노릇을 허며 살아온 그는 무언가 배우는 걸 동경했던 것일까. 변변찮은 이름 하나 없을 정도로 고단했던 삶이었지만, 그마저도 부서져버린 채 사지에 몰린 것에 동정심이 생겼다. 뭐, 그렇게 치자면 눈앞에서 자신을 받아들여준 것들이 모두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도 만만찮게 불쌍한데. 불쌍한 사람끼리 뭐 어때. 선물이라도 하나 주자고.
“저기, 괜찮다면 내가 이름를 지어줘도 될까?”
“에?”
“뭐 지어준다고는 해도… 아는 사람 이름이긴 한데.”
이름이 입속에서 맴돌았지만 바로 얘기할 순 없었다.
“아까 한 얘기에서 나왔던 사람이야?”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가 묻는다.
“응. 나한테 오소마츠라는 이름 지어주고 돌봐줬다는 신부님.”
“소중한 사람 아니야? 나한테 같은 이름을 줘버리면…”
오늘 처음으로, 그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기 얘기를 할 때도 그다지 무표정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터였다. 나를 위해, 다신 만날 수 없는 신부를 위해 슬퍼해주는 구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다고 확신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 신부님하고 너하고 어쩐지 비슷한 느낌도 들고. 무척 소중한 사람이지만, 이렇게 해서 이름만이라도 계속 누군가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 이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까.”
그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락이라도 구하려는 걸까. 눈물이 살짝 맺히는 것을 난 놓치지 않았다.
“카라마츠, 라고 해. 자기 이름이랑 비슷하게 내 이름도 오소마츠라고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신부님도, 너도, 카라마츠야.”
“카라...마츠.”
“어떻게 쓰는지는 알겠어?”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고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다 흙바닥에 카라마츠라고 적었다. 그리운 이름이다. 카라마츠 신부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그의 상냥한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 했다. 돌을 건네주자 그는 글씨를 지렁이 기어가듯 따라쓰며 카라마츠, 카라마츠하고 중얼거렸다. 울컥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선 날 보고 생긋 웃었다. 눈에 맺힌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아. 역시나. 그의 미소는 신부의 상냥한 웃음과 닮아있어.
“고마워, 오소마츠. 이 이름 소중히 할게.”
“카...카라마쯔…흐아아…”
결국 눈물이 나왔다. 한번 흐르는 눈물은 깊이 묻기로 했던 슬픔을 데리고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날 이후 복수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혁명군에 뛰어들은 뒤 잊고 있던 그리움도 같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신부에게도, 그 작은 교회에서 함께 지내던 녀석들도, 구박하다가도 점점 마음을 열어준 마을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구나. 그날 미친듯이 달려 등진 불타는 풍경을 복수심으로만 바꿔 살아왔는데. 소중한 시간들이었다는 걸,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실감하고 말았다. 녀석은, 카라마츠는,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상하지. 아까 녀석한테 내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한참 눈물을 흘리고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게 울 정도면, 이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카라마츠의 미소가 사라지고 다시금 슬픈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냐. 미소, 아까처럼 미소를 징어주면 좋겠어.
“슬픈 기억이지만, 네 이름을 부른다고 항상 슬프거나 하지는 않을거야. 그러니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웃었음 좋겠어. “
멋쩍게 머리를 긁으면 카라마츠가 돌을 건넨다. 오소마츠 이름도 적어줄래? 하듯이. 오소마츠,라고 땅바닥에 적으면 카라마츠가 다른 돌을 주워다 오소마츠, 오소마츠, 카라마츠, 카라마츠, 중얼거리며 흙 위에 써내려간다.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며 다시 웃는다.
“기억했어.”

  연방에 대항해 일어난 레지스탕스의 이른바 ’혁명’은 처음부터 먹구름 일색이었다. 가족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물론 나름의 구심점이나 연방군 장교였던 사람 등에 의해 군사작전 같은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했고 일반 시민들이 연방의 보복이 두려워 도움을 주거나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것도 한몫했다. 대의, 또는 기폭제, 또는 희생이라는 게 부족했던 탓일까. 일반 시민을 움직이지 못한 혁명은 반란에 불과했다. 연방을 거스르는 자들의 본보기로 토벌될 운명이었다.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이들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싸운다는 선택지 외엔 남아있지 않았다. 항복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전처럼 핍박받는 삶으로라도 돌아갈 수 없다.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며 옥살이를 하거나 죽는다. 그런 막다른 길목에 놓인 채 몇 달이 흘렀다. 소규모 교전이 이어지다 연방이 대대적 소탕작전을 선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제 3지구에 있는 레지스탕스군의 최후 방어선, 그러니까 오소마츠와 카라마츠가 있는 전선에는 제 1,2지구의 비보가 연달아 전해졌다. 죽음은 파도처럼 서서히, 그러나 성내듯 밀려오고 있었다. 어른들은 결정했다. 두 소년을 여기서 쫓아내기로. 좋게 타일렀다가 총구를 들이댔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항의한 들 들어주지 않았다. 무작정 뛰어, 제 4지구로 가는 셔틀에 어떻게든 타라고. 아마 그렇게 하면 연벙군이 쫓지는 않을 거라고. 날 챙겨주던 아저씨가 나와 카라마츠를 끌어안고선 미래를 맡긴다며 얘기할 때서야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카라마츠 손을 붙잡고, 이 세상에서 다신 만날 수 없을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그 곳을 벗어났다. 새벽을 가로질러 잠의 신이 붙잡지 않도록, 한 맺힌 영혼들이 붙잡지 않도록, 끝내 이루지 못한 복수심이 붙잡지 않도록 달렸다. 여기 올 땐 분명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 비겁한 내가 걸음을 재촉했다. 카라마츠는? 내 손을 잡고 달리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같이 달렸다. 충격적인 건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이었다는 점이다.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여간 달렸다. 감시가 없는 곳을 찾아서, 셔틀이 있는 곳까지 달리느라 숨이 차 죽을 지경이었다.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화물 속에 들어가서야 긴장이 풀렸다.
“난 여기 죽으러 왔어. 죽으러 왔을 텐데……”
무표정한 카라마츠의 입에선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 나왔다.
“나도야. 죽을 각오로 녀석들에게 복수할 참이었어. 그런데 미래라니…… 너무하잖아. 그런 걸 맡기면, 거기 남아 있을 수 없잖아……”
분하기 짝이 없었다만, 카라마츠의 말에도 반발심이 생간건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다시금 복수하자고.

  빛이 새어들자 잠에서 깼다. 화물을 열어본 남자는 눈을 찌뿌리더니 우리 둘을 내쫓았다. 거리의 풍경을 보아하니 제4지구인 모양이다. 이번엔 카라마츠가 내 손을 붙잡고 골목으로 들어가 여기저기로 움직였다. 라디오가 틀어진 가게 옆 골목에서 그는 멈췄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높으신 분의 더럽게 긴 연설이 끝나고, 제3지구에 남아았던 반란군 잔당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에도 연방은 시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라는 있으나마나 한 말과 함께. 운이 좋았다고 할까. 그날 새벽 도망치지 않았다면 우린 죽은 목숨이었다. 카라마츠는 자기 손을 쳐다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카라마츠은 왜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건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만, 지금 묻기엔 그가 괴로워보였다. 한동안 그 골목에서 쭈그려 앉아았었다. 눈물이 흘렀다가도 닦고 또 닦아 아닌 척 하려 애썼다. 옆의 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제4지구에는 ‘바다’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바다를 보면서 옛날 모성母星에 살던 사람들은 눈물을 삭혔다던가 하던 신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몸을 일으키면 그도 몸을 일으켜, 셔틀 정거장 쪽으로 되돌아갔다. 셔틀 정거장 옆에 조성된 바다는 푸른 물로 덮여있었지만, 별다른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 바다에, 카라마츠는 입고 있던 거적때기같은 옷을 벗어던지고서 뛰어든다. 아. 처음 만난 날 그의 깊은 눈은 분명 이걸 닮아 있었다. 마치 자기에게 있던 모든 걸 씻어내듯 카라마츠는 헤엄쳤다. 처음 만난 날 그가 보여준 미소를 마음껏 지어주었다. 거기에, 나는 빨려들어갔다. 후련해보이는 미소 뒤엔 무표정한 그가 여전히 숨어있다. 무표정 속에 그가 죄책감을 억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카라마츠는 자기와 함께 하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연방군을 몇 명 죽인 것이다. 살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이 그에겐 있었다. 제대로 된 도덕 관념을 배우진 않았지만 해서는 안 될 것을 카라마츠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피가 흐르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과 총을 든 자신의 손을 번갈아보면서,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 길로 카라마츠는 소문을 좇아 레지스탕스애 들어왔던 것이다. 이미 사람을 죽여 더럽혀진 손으로, 그나마 가치있는 일을 하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그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바다에서 헤엄치고 나온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런 거구나. 상관없다고. 그런 건. 이미 나는 너의 미소 속에 들어가버렸어. 그게, 미래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복수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단순한 동정심이나, 불확실한 형제애 같은 게 아니라 저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는 마음. 뭐냐고 신부님이여. 바다가 눈물을 삭히긴커녕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이상한 데잖아. 거짓말쟁이였잖아. 카라마츠는 웃으며 마무리지었다. 고마워. 이 이름을 네가 줘버린 이상, 난 살아야겠어. 오늘로 죄책감을 다 덜 수야 없겠지만. 살아서 잘못되지 않은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그런 말을 하는 카라마츠는 불안에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만큼은 어떻게든 지으려고 애쓰고 있어서, 끌어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도 거짓말쟁이네. 역시 닮았잖아. 허세부리지 말라고.
“그래, 살자. 살아서, 미래를 만들자고.”
미래가 무어냐. 수많은 목숨이 던져진 미래를 당장에는 뭐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알게 될까. 한 달 뒤면, 1년 뒤면 알 게 될까. 무슨 미래를 맡긴 건지. 평화로운 시대에 일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미래? 다시금 혁명을 일으켜 이번에야말로 연방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미래? 글쎄. 어떤 미래라도 카라마츠는 웃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그를 안고서 한참을 있었다.
  아침이 되었다. 바다 옆에 적당히 만든 잠자리에 카라마츠는 없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먹을 것이 머리맡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니 모래사장에 카라마츠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새 카라마츠는 많은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미래. 오늘 그의 발 밑에 적힌 글자다. 이쪽을 보고선 그가 미소지었다. 우선은 살아간다. 그거밖에 없나. 멋쩍은 듯 그에게 간다. 분명 그가 그리는 미래는 나와 같을 것이라 믿으며. 카라마츠는 어느 날 내 앞에서 사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의로 사라진 건지, 누군가에게 끌려가거나 해서 사라진 건지. 그를 찾아헤매다 나도 날 받아들여주는 곳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유야무야 흘러가버렸다. 그를 다시 만난 건 10여년 후였다. 분명 최악의 재회였다.

-카라른 전력 60분 주제: 감기 (https://twitter.com/karareun60/status/774954422229082113)

-파카카라(오소카라/이치카라)입니당

-캐붕은 패시브

-오소마츠상 OST 넘나 좋은것...★(응?)




<L*NE 육둥이 단체채팅방>

[오소] 집에 누구 있냐

[카라] 지금은 나뿐이다만

[오소] 그러면

[오소] ㄱㅏㅁ겨얏좀

[오소] 감기약좀

[카라] 뭐라고?

[오소] 찾아봐

[카라] 알았다

[카라] 감기 걸렸어?

[오소] 그런듯

[오소] 목이 간질간질한게

[오소] 이건 감기갈ㄷㄱ더님

[오소] 자꾸 기침하니까 오타가

[카라] 얼른 들어와라

[토도] 카라마츠 형

[토도] 감기약 집에 많이 있어?

[카라] 많이 있다

[카라] 알약도 있고

[카라] 베이뷔들을 위한 달콤한 액체 약도 있다구~

[토도] 하하하...

[토도] 그럼

[카라] 토도마츠도 감기인가? 별일이군

[토도] 어제 오소마츠 형이 기침하던데

[오소] 그럼 나한테 옮은거?

[토도] 아마도

[쵸로]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더니

[쵸로] 오소마츠 형도 감기에 걸리는군

[오소] 바보라고 까지 마라 휴지마츠

[쵸로] 여기서 휴지가 왜 나오냐!!!

[쵸로] 나도 감기약 좀 준비해주면 안될까?

[카라] 에? 쵸로마츠도?

[쵸로] 간만에 사람 많은데 갔다가 옮은 거 같아

[쵸로] 요새 독감이 유행한단 말은 들었지만

[쵸로] 내가 걸릴 줄이야

[카라] 독감이면 큰일이잖아

[카라] 얼른 집으로 돌아와라

[쵸로] 안그래도 가는 중이야

[이치] 저기

[카라] 왜 그러는가 이치마츠

[카라] 무슨 일 있나

[카라] 답이 없어! 브라더! 쓰러진거 아냐???

[이치] 그런 거 아니니까

[이치] 개똥마츠가 설레발 치긴

[토도] 이치마츠 형이 좀 느리긴 하지

[이치] 그런 거 아냐

[이치] ...감기약 내 몫도 준비해줄 수 있을까

[이치] 카라마츠 형

[오소] ?!!!!!

[쵸로] ?!!!!!!!!!!

[토도] !!!!!!!!!!!!!!!!!!!!!!!!!

[카라] 알았다! 성심성의껏 준비하지!

[오소] 카라마츠 들뜬 거 봐 ㅋㅋㅋㅋㅋㅋㅋㅋ

[쥬시] 카라마츠 형! 죄송함다!
[쥬시] 제 것도 준비해주시지 않겠슴까!!!!!!!!!!!!!!!!!

[카라] 이 무슨!

[카라] 잔혹한 운명의 데스티니란 말인가!

[카라] 나만 빼놓고 모두 감기에 걸린 것인가!!!!!!!!!!


카라마츠의 마지막 메시지가 전송되고 10분이 지나도록 5읽음만 떠 있을뿐 답은 오지 않았다. 다행히 카라마츠는 스마트폰은 보지 못한 채 형제들이 누울 이부자리를 펴고 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끓이고 감기약을 있는대로 꺼내 식탁위에 늘어다놓고선 복용법을 꼼꼼히 읽고 있었다. 바쁜 부엌의 풍경과는 달리 바깥에는 나른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 왔음~켈록켈록"

현관에서 오소마츠의 소리가 들리자 카라마츠는 재빨리 뛰어나가 오소마츠를 부축해주었다. 됐다는 듯 오소마츠는 손을 내저었지만 카라마츠에게 기대는 그는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이 형~ 카라마츠가 끓인 뜨끈한 죽을 먹고 싶은데~ 해 줄거지......"

평소와 달리 오소마츠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슬쩍 지은 미소는 그의 상태를 더 나빠보이게 했다. 열이 오르는 가운데 카라마츠의 부축을 받으며 2층으로 옮기는 걸음은 흐느적거렸다. 이부자리의 가운데에 오소마츠를 눕히고 카라마츠는 체온계를 가져다 그의 귀에 꽂았다. 38도라. 제법 열이 있군. 카라마츠는 힘없이 늘어진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선 수건을 적셔서 가져다 줄게. 죽도 끓여서 먹여줄테니까 형은 누워있어."

카라마츠가 급히 내려가버리자 오소마츠는 아쉬운 듯 손을 뻗었다 내렸다. 카라마츠라면 분명, 나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에게도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겠지. 그런 카라마츠의 상냥함은 좋지만, 가끔 카라마츠의 상냥함이 자신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몸에 오르는 열기와 갓 햇볕에 마른 이불의 냄새, 사내놈들이 뒤섞여 자는 방의 체취가 그런 감정과 뒤엉켜서 살짝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 왔어."

현관에서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찬가지로 카라마츠는 잽싸게 나가서 이치마츠를 부축했다. 평소 카라마츠를 쳐내는 일이 많은 이치마츠지만, 오늘은 카라마츠가 빌려주는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치마츠? 많이 아픈가?"

카라마츠의 말이 저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오늘 새끼를 낳을 듯한 고양이를 지켜본다고 새벽부터 나갔던 터라 갑작스런 기온 변화와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게 화근이었나. 카라마츠의 품에서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치마츠는 약해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업고서 2층으로 올라갔다. 늘 그렇듯 이불의 끄뜨머리에 이치마츠를 눕히고서 카라마츠가 체온계를 귀에 꽂았다. 38도. 뭐야, 이런 점도 쌍둥이인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어깨를 토닥여주곤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이치마츠는 토닥임이 멈춘 걸 아쉬워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오소마츠가 토라진 듯한 얼굴을 한 채 누워있었다. 저 형은 어리광이 많았지. 카라마츠 형이 간호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오소마츠의 얼굴에서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고선 이치마츠는 반대쪽으로 홱 돌아누웠다. 조용한 집 안에서 보글보글 죽이 끓는 소리, 쪼르륵 물이 컵에 들어가는 소리, 카라마츠가 연신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쥬시마츠, 쵸로마츠, 토도마츠가 귀가했다. 쥬시마츠는 감기에 걸려도 멀쩡한 듯 토도마츠를 들고서, 쵸로마츠는 카라마츠의 부축을 받으며 2층으로 올라왔다. 카라마츠는 마찬가지로 체온을 재고, 이불을 덮어주고 토닥여주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주는 구나, 카라마츠. 조금 분한 마음을 삭이며 누워있다보니 카라마츠가 따뜻한 물과 죽을 들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자. 이치마츠는 자는 모양이고...다들 죽 먹을래? 내가 떠먹여줄까?"

"괜찮아. 고마워, 카라마츠."

쵸로마츠가 죽을 받아들고서 후후 불어가며 죽을 먹는다. 토도마츠도 카라마츠가 건네주는 죽을 들고선 뜨거운 듯 조심히 이불 위에 접시를 올려 놓고 귀여운 척을 하며 후후 불어댄다. 쥬시마츠는 이불을 빠져나와 차를 가지고 온다며 급히 내려간다. 지금이 오소마츠에겐 좋은 기회일까.

"카라마츠, 이 형아 숟가락 들 힘도 없는데 떠먹여주면 안될까아?"

없는 아양을 떨어가며 오소마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카라마츠를 바라봤다. 카라마츠는 흡족한 표정으로 알았다며 끄덕이곤 숟가락에 죽을 떠서 호호 불어주었다. 평소 휘파람을 불던 탓인지 호 하고 부는 와중에 살짝 휘파람 소리가 섞여나왔다. 침이라도 튀었을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오소마츠가 행복한 듯 입을 벌리면 카라마츠는 눈을 맞춰주며 오소마츠의 입에 죽을 넣었다. 알맞게 식은 죽임에도 오소마츠는 뜨거운 척을 하며 카라마츠를 힐끔 보고 카라마츠는 당황해하며 다음 숟갈은 몇 번이고 식혔다. 오소마츠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 나밖에 없겠지. 죽을 받아먹으며, 오소마츠는 이렇게 카라마츠가 나만을 챙겨주는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카라마츠가 여러 번 얼음 띄운 물에 수건을 적셔 형제들에게 번갈아 올려주고 있는 동안, 오소마츠는 잠들지 않고 카라마츠의 상냥함을 즐기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깬 건 제법 늦은 밤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자는 듯 숨소리만 들리고 카라마츠가 체온계와 수건을 번갈아들며 형제들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저번에도 저렇게 해주었다면 다들 무시하지 않았을 거 아냐. 역시 바보야. 이치마츠는 그런 카라마츠를 바라보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말 대신에 기침이 먼저 새어나왔다.

"이치마츠, 깼는가? 배 고프지? 죽 해줄까?"

다급히 와서 말을 거는 카라마츠 때문에 놀라면서도, 어쩐지 이치마츠는 기분이 좋았다.

"응...조금이면 되니까..."

카라마츠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남은 죽이었는지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일어나 체온계를 귀에 꽂았다. 아까보다는 조금 열이 내려간 듯 했다. 이치마츠는 안심하며 잠에서 깨기 위해 눈을 비비적거렸다.

"이치마츠, 직접 먹여줄까?"

카라마츠가 죽을 들고와서는 물었다. 이치마츠는 싫지 않았지만, 좋다고 말하기 민망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카라마츠가 앞에서 죽을 떠서는 식혀준다. 후후 부는 카라마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는 상상을 하며 카라마츠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숟가락이 이치마츠의 입 앞으로 다가왔다. 이치마츠는 입을 살짝 벌려 받아먹고는 오물거렸다. 기분이 좋아져서 몇 번이고 받아먹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다만, 내일도 카라마츠가 죽을 먹여주면 좋을텐데 하며 생각할 뿐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카라마츠는 조금 지친 듯 벽에 기댔다. 쵸로마츠의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쵸로마츠의 수건만 집중적으로 갈아주고 있었지만, 다른 형제들에 비해 뒤척거리는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카라마츠는 쵸로마츠를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별로 아프지 않은 듯 태평스레 굴러다니다 어느새 이치마츠의 발 밑에 있었고, 토도마츠는 킥킥거리며 밭은 기침을 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이불에서 나와 카라마츠 옆에 붙어앉았다. 카라마츠가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자 이치마츠는 됐다는 듯 손을 올리고선 카라마츠의 어깨에 기댔다.

"이럴 땐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싶다. 다들 아픈 모습을 보니 괴롭군...쥬시마츠는 괜찮아 보이지만."

키스를 하면 감기가 옮는다는 말이 있던데. 카라마츠가 중얼거렸다. 별 희한한 것을 다 믿는구나. 역시 바보야.

"그러면,"

"응?"

"키스해줄래? 나하고."

이치마츠가 대담하게 제안했다. 설마, 진짜로 받아들여 주겠어? 카라마츠는 모두를 아껴주고 있을 뿐. 그뿐인데.

"이치마츠가 원한다면."

카라마츠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해? 개똥마츠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흘깃 보았지만 카라마츠는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은 듯 했다.

"대신 이치마츠가 리드해줘. 내게 감기를 옮겨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너 대신 아플 수 있다면 난 괜찮다."

카라마츠가 몸을 틀어 이치마츠 쪽을 향했다. 이치마츠는 당황하면서도 바라왔던 일이기에 재빨리 가장 황홀한 방법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럼...간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확 끌어안은 채 입술을 갖다댔다. 살짝 혀를 밀어넣으면 카라마츠는 입술을 열듯 말듯 하다가 열어주었다. 이어 카라마츠의 혀도 이치마츠의 입 속에 들어왔다 서로의 혀가 뒤섞이며, 서로 끌어안은 체온이 뒤섞이며, 한참을 입술도 혀도 떼지 않은 채 있었다.

"자, 다 나았다. 카라마츠 형에게 전부 옮겼어."

이치마츠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 나름대로 행복함을 표현한 웃음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게 잘 전해지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그런 동생을 잘 알기에 싱긋 웃어줬다. 방금 키스를 한 거라고? 남자끼리, 그것도 형제끼리. 너는 어떤 기분이었던거야. 이치마츠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키스를 마치자 밀려오는 잠에 다시금 이부자리로 기어들어갔다. 카라마츠는 다가가서 이치마츠가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었다.


아직은 해가 일찍 떠서 살짝 싸늘하지만 밝은 새벽이 찾아왔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다독여 준 후 다시 쵸로마츠 앞 쪽에 앉아있다 잠이 들었는지 벽에 기대고 졸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기대서 자는 바보같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아까 선잠을 자며 들었던 소리가 맴돌았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키스했다. 시간으로 보면 제법 오랫동안 입을 맞댔던 것 같았다. 나쁜 동생이네. 형 말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다니. 벌을 줘야겠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 쪽으로 기어갔다.

"자, 내 감기도 옮겨줄게? 그리고 형한테 간호를 받는 거야, 카라마츠."

그러고선 오소마츠는 키스를 했다. 카라마츠는 혀가 들어오는 느낌에 잠에서 깬 듯 눈을 뜨고선 오소마츠를 쳐다보았지만 오소마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이내 혀를 오소마츠의 입에 집어넣었다. 쉬운 남자네, 카라마츠. 누구나 원하면 키스를 해주는 거야? 오소마츠는 작은 불만과, 그럼에노 갖고 싶은 동생과 하는 키스의 달콤함을 느끼며 카라마츠에게 딱 달라붙어서는 오랜 시간 혀를 섞었다. 혀를 빼고 오소마츠가 미소를 지어보이면 카라마츠도 미소를 지어주었다. 카라마츠에게 키스는 어떤 의미일까. 그냥 감기를 옮겨받고픈 자기 희생의 마인드?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거? 그럼 이치마츠하고도, 나하고도 한 이유는 뭐야? 형제니까 좋아한다는 건가? 형제끼리 보통 그런 걸 해?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는건가? 오소마츠의 마음은 키스를 하기 전보다 더 복잡해졌지만, 카라마츠가 다시 벽에 기대서 자는 모습을 보며 일단은 생각을 거둬들이기로 했다.


해가 중천에 뜨자, 6쌍둥이들은 한 명 한 명 일어났다. 다들 개운한 표정인 가운데, 정말 독감에 걸린 듯한 쵸로마츠와, 어제까진 멀쩡하던 카라마츠만이 몽롱한 채로 1층으로 내려왔다.

"어제는 일요일이었지만, 오늘은 월요일이니 병원이 열겠지?"

"카라마츠도 감기 걸린 거야? 역시 따로 잤으면 좋았을 걸... 어제 다른 형제들 간호해주느라 잠 설친 거 맞지?"

쵸로마츠가 걱정스러운 듯 카라마츠에게 말을 걸자 카라마츠는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키스 이후에 지어준 미소와 비슷해서 이치마츠와 오소마츠는 흠칫 놀랐지만 모른 척 했다.

"카라마츠! 뭐 먹고 싶어?"

이치마츠와 오소마츠가 동시에 말했다. 토도마츠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고, 카라마츠는 뒤를 돌아보며 죽이 먹고 싶다고 한 후 쵸로마츠와 집을 나섰다.


+1


<L*NE 이치마츠, 카라마츠 채팅방>

[이치] 있지

[카라] 응?

[이치] 어제 못 한 거 마저 하고 싶은데

[카라] 무슨 소린가

[이치] 그...저...키...키...

[카라] 뭐야

[카라] 모처럼 감기 나았는데 나하고 다시 하면 다시 감기 걸린다고?

[카라] 그럼 어제 한 일이 헛수고가 되잖아


이치마츠는 감기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그냥 그게 하고 싶을 뿐이라고 바보멍충아라고 썼다가 지웠다. 일단 바보같은 형이 감기가 나아야 다시 말을 꺼내볼 수 있는 건가. 이치마츠는 한숨을 쉬며 죽을 저었다.


+2


<L*INE 오소마츠, 카라마츠 채팅방>

[오소] 카라마츠

[오소] 넌 내꺼야

[오소] 얼른 나아서

[오소] 그땐 제대로 달콤한 츄를 선사해줄게

[카라]

[카라] 간호나 잘 해줘


카라마츠의 단호한 멘트에 오소마츠는 풀이 죽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면 쵸로마츠랑 카라마츠 둘 다 알밤 한 대씩 먹여주고 빨리 나으라고 달달 볶아야지. 수건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오소마츠는 분을 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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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풀기 겸 오랜만에 쓰는 겁니다 헤헤...

장편도 합작도 모두모두 밀려있는데! 일벌리기를 워낙 좋아하는 건가...


*오소마츠상 24화 기반
*오소마츠 시점의 오소카라?





넌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
내가 등지고 외면한 상황들을 차례차례 정리하고선 너도 떠나버렸다.
물론 등 뒤로 「잘 있어」란 말을 던지고서 갔지만,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가지 않았다.
저기, 아직도 화난거야?
내가 홧김에 쥬시마츠를 때려서?
쵸로마츠의 배웅에 나서지 않아서?
나보고 정신 차리라는 토도마츠에게 멍을 남겨서?
이유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정신차리라며 형을 때린 네가,
맏형이라면 동생들을 잘 챙겨줘야하는 거 아니냐던 네가,
나 대신 형 노릇을 한 네가,
말없이 가버린 네가,
날 봐주지 않은 네가,
지금은 너무 미워.

사내 놈들 여섯이 북적대던 집에 혼자만 남게 되자 그간 한 녀석 한 녀석 떠나갈 때 이상으로 쓸쓸하다.
우리가 쓰던 방은 분명 크지 않은 방인데도 혼자 쓰려니 너무 크다.
이불도, 쓸데없이 많아진 베개도, 곳곳에 남은 여섯의 흔적도 나의 쓸쓸함을 더해준다.
동생들이 없는 나란, 여섯에서 하나뿐인 마츠노 오소마츠란, 이렇게 보잘 것 없었나 싶었다.
매실장아찌같이 쪼글쪼글하고 작은 내 자의식은 오늘따라 더 보잘 것 없어보인다.
주머니에서 데굴데굴 그것을 굴리다 바닥에서 구슬치기를 하듯 탁 튕긴다.
벽에 부딪혀 제멋대로 통통튀던 자의식은 책장 위에 덩그러니 놓인 기타 케이스에 부딪히곤 내 품으로 돌아온다.
그러고보니, 카라마츠가 얼굴을 주먹으로 갈겼었지.
맞았을 때는 제법 아팠는데 아픔이나 멍은 금방 사라졌다.
애초에 그 녀석이 있는 힘껏 날 때리긴 했을까.
그러나 저러나 망할 자식인건 변치 않지만.

쵸로마츠의 취직 축하 파티가 있던 그날.
어떤 마음이었는지 하나만 고를 수 없을 정도로 내 맘 속은 복잡했다.
그래도 가장 크게 느꼈던 건 배신감이었을까.
이 집을, 형제들을 떠나간다니.
그게,
축하받을 일이야?
나의 짜증은 눈치없는 쥬시마츠를 향했고 그 결과 난 카라마츠에게 얻어맞고서 바깥으로 끌려갔다.
"형이잖아? 쵸로마츠를 제대로 축하해주진 못하더라도 화풀이하는 건 좀 아니잖아?"
화도 나 있고, 걱정도 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설득했다.
"시꺼! 니가 뭘 안다고 지껄여대!"
아까의 복수로 날린 주먹이 카라마츠의 배에 꽂혔다.
카라마츠의 콜록거리는 소리에 앗차 싶었지만 사과는 할 수 없었다.
"오소마츠, 오늘은 먼저 자러 가."
카라마츠는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진지하게 대응했다.
아프면 화 내라고.
한 번 대판 싸우자고.
먼저 어른이라도 됐다는 거야?
기분 나빠.
그런 동생한테 애취급 받았다 생각해버리는 나도 기분 나빠.
먼저 방으로 올라간 뒤부터 난 동생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 남겨진 후론 지붕에 자주 올라간다.
지붕에 주로 가던 멤버는 카라마츠, 이치마츠, 쥬시마츠였지.
특히 카라마츠는 혼자서 기타를 들고 올라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나도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까.
진작 기타 좀 배워둘걸.
방으로 가서 책장 위의 기타를 꺼낸다.
기타를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 그런다고 달라진 것 없는 걸 알면서도 내가 달라진 기분이 든다.
기타 케이스를 열고 카라마츠의 기타를 꺼낸다.
녀석이 선글라스를 안쓰러울 정도로 반짝반짝 닦듯이 기타도 잘 손질되어 있다.
줄을 튕기면, 뎅-뎅-거리는 진동이 조금 묘하다.
여러 줄을 튕겨 소리를 낸다.
디리리링-
무언가 노래가 만들어진 거 같은데?
혹시 나 천재인가?
하지만 그 뿐으로, 다른 음을 내거나 할 수가 없다.
아는 노래는 기타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엔카나 유행가 뿐이라 분위기만 내는 거에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녀석이 불렀던 노래가―
"여섯 쌍둥이로 태어났다~"
쥬시마츠와 함께 부른 그 노래가 있었지.
하지만,
가사가 잘 떠오르질 않는다.
한참 폼만 잡다가 기타를 정리하고 평소와 같이 마을을 응시할 뿐이다.

"젠장, 망할! 오랜만이다 짜샤!"
격하게 반겨주는 치비타의 인사가 어쩐지 오랜만에 듣는 듯 하다.
"잘 지냈냐, 오소마츠? 카라마츠한테 듣자니 다들 독립했다고 하던데, 넌 어떻게 됐어?"
난 대답하지 않고 그저 오뎅을 입에 집어넣는다.
"다들 연락은 하고 사냐? 카라마츠가 집에 연락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치비타가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뭐 저 질문도 답하긴 뭐하다.
엄마하고는 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난 녀석들과 연락을 안 했으니까.
"카라마츠 녀석, 계속 취직한다고 이력서 쓰고 면접 보러 다니는데 잘 안 되더라고."
그걸 왜 얘기하는거야.
위로라도 해 주라 뭐 이런 거냐고.
나간건 그 녀석이야.
날 버리고 갔다고.
"맥주나 줘."
한숨을 쉬며 맥주를 주문한다.
치비타는 왠일로 군말없이 맥주병을 내놓는다.
한 병, 두 병…
취기가 오르고, 그간 쳤던 벽이 흐물흐물해진다.
"역시 외동인게 좋았어."
"데자뷰도 아니고, 왜 또 외동이 좋다는 거야 쨔샤."
"이렇게 다 떨어지고 헤어지고 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인게 낫잖아."
"그래도 형제랑 같이 커 온 건 좋잖냐."
"그래도..."
외롭단 말야.
술기운에 취해 졸음이 쏟아진다.
거봐, 이런 때마저도 옆에 늘 있던 녀석들이 없어서 춥다고.
따뜻한 기운에 잠을 깬다.
어느새 누군가에 등에 업혀 밤길을 가고 있다.
"으음..."
"깼는가, 오소마츠."
낯익은 목소리...아, 카라마츠인가.
"네가 어째서..."
"밤에는 치비타 일을 도와주고 있어. 치비타에게 신세지고 있는 처지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그보다, 많이 마신 모양이네."
간만에 만난 녀석은 여전히 어른 같아서,
기분 나쁘다.
"내버려둬도 될걸, 뭣하러 와서 업어주고 있는 거야."
"형 핑계로 집에 다녀간다...일까? 계속 면접에서 낙방하니까 사나이 카라마츠도 역시 지치는군."
또, 또...되도 않는 폼을 잡는다.
"원망하는 거...아니였어?"
"응?"
"나한테 인사도 않고 집 나갔잖아."
"그건 돌아봐주지 않은 게 나빴지."
카라마츠가 아쉬운 투로 답한다.
"쵸로마츠가, 토도마츠가 떠날 땐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자세를 고쳐잡는다.
내 몸은 축 늘어진 채 그저 카라마츠가 움직이는대로 들썩거릴 뿐이다.
"내가 나갈 땐 돌아봐줄 줄 알았어."
"어째서?"
"다른 녀석들은 내가 형 노릇을 해 줄 수 있지만 난 오소마츠밖에 형이 없잖아?"
또 형 타령이다.
"난 니들 형인거밖에 없는거야?!"
업혀있는 주제에 업어주는 카라마츠에게 짜증을 확 낸다.
"형, 형, 지겨워 죽겠어! 평소에는 형 대접도 안 하는 주제에 지들 필요할 때만 형 노릇 하라고 하고, 필요없음 버리고 가면서!"
"버리고 가다니?"
"버리고 간 거잖아...쵸로마츠가 드디어 노래부르던 취직하고 나니까 다들 집에서 나가버리려는 생각만 잔뜩이었다고...너만해도 그렇잖아? 집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면서...쉽게 집을 떠났잖아. 토도마츠 녀석이 한 말 들렸다고. 우린 함께 있지 않는게 좋다며? 다들 그렇게 생각해온 거잖아...너도 마찬가지고..."
꼴사납게 넋두리를 쏟아내는 형이다.
이런 형이니까, 싫었던 걸까.
의지하기 어려웠겠지.
카라마츠는 한참 묵묵히 길을 걷는다.
집 방향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저 강을 따라 쭉 간다.
"들어봐, 오소마츠."
그가 입을 연다.
"역시 오소마츠는 우리가 없으면 안 되는 거지?"
내내 한 소릴 한 줄로 요약해버린다.
"모두가 돌아와줬음 좋겠어?"
"......응."
"그럼 형이 말해줘. 돌아와달라고."
"하지만, 다들 함께 있으면 한 사람 몫을 못 한다고 그랬잖아."
괜히 돌아오란 소리를 못 하는 거 아니란 걸 모르는 걸까, 이 녀석은.
"그래도 자기 기분을 전하지 않으면 몰라줄 거 아냐."
정론을 얘기한다.
마치 남 얘기를 하듯이, 객관적이면서도 자기는 거기에 없는 듯 하다.
"그럼, 넌 내가 돌아오라면 돌아올거야?"
"음...결과를 내면 돌아갈게."
뭐야.
결과를 낸다니.
"집에서도 이력서는 쓸 수 있잖아! 면접도 보러 다닐 수 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결심했어."
차디찬 강바람을 맞으며, 그는 답한다.
"형을 때린 그날, 형에게 말했던 게 자신에게 돌아와서 나도 한 사람 몫을 해야만 형을 볼 면목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났던 걸지도 몰라. 취직해서 당당히 어른이 되면 집에 돌아갈게."
좋은 말이다.
어느새 녀석은 철이 들었다.
그렇기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안 그래도 녀석의 등에 업혀 초라해뵈는 꼴이 더더욱 초라해보였다.
"너는...형이 다 됐네?"
"그렇지도 않ㅇ..."
카라마츠의 목을 조른다.
카라마츠가 휘청이며 넘어진다.
"먼저 어른이 돼 버리고...치사하잖아 새꺄..."
취기와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카라마츠를 짓누르고 얼굴을 때리기 시작한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서 앞은 흐릿하다.
찍소리 없이, 반항없이 카라마츠는 그저 맞고 있다.
"기분 나빠...기분 나쁘다고..."
울음 섞인 꼴사나운 소리로 중얼거리자니 녀석이 날 끌어안았다.
분명 따뜻한데,
따뜻하고 좋은데,
카라마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의 진심을 알 수가 없다.
"넌 변하지 않아도 된다고..."
언젠가 그에게 했던 말을 되뇌이며 카라마츠의 품에서 잠든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옷이 걸려있다.
아, 여긴 치비타네 집인가.
옆에는 카라마츠가 정장 셔츠를 풀어헤친 채 잠들어있다.
셔츠가 더러워진 걸 보니 아까 날 업었을 때도 저 차림이었으려나.
정장 차림인건 오늘도 어딘가 면접을 보러 간 거였을까.
얼굴에는 멍이 들어있고 피곤한 듯 전에 없던 다크서클이 져있다.
그를 안았다.
이제 알았지.
어른이 된다는건 이렇게나 힘든 일인데.
무리해서 될 건 뭐야.
미움이 녹아내리고 동정심이 찬다.
아니지, 그를 동정하기보다는 미안한 마음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 때문일거다.
못 미더운 형이라, 날 대신에 형이 되려고 그러는 거다.
조용히 카라마츠에게 입맞춤을 한다.
풀어헤쳐진 그의 셔츠를 벗기고 심장소리를 듣는다.
네게 돌아와달라 한다면.
나와 같이 어른이 되는건 미뤄두고 집에 있자고 한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그는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돌아오지 않을거다.
이대로 집으로 끌고 가 억지로 돌아오게 할까.
묶어놓고 감금해버릴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혹을 누르고 삼킨 채 그저 녀석의 몸을 어루만진다.
현실에 굴복하자.
그냥 포기하자.
언젠간 돌아와줄거야.
약속했잖아.
어른이 되면 돌아온다고.
물론 어른이 되면 내가 알던 카라마츠가 아니게 될 거 같지만.
카라마츠의 몸에 눈물이 타고 흐른다.
그 눈물에 반응하듯 카라마츠는 아까처럼 날 안아준다.
슬쩍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도 눈물이 어려 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뭐야?
너도 외로워?
나와 같은 마음이야?
아니면 동정하는 거야?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그는 지금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뿐.

날 안았던 손을 풀고서 그가 돌아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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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단편으로 왔습니다.
쓰던 거나 마저 써야 하는데 또 엉켜서;;;
뜬금없이 떠오른 거 썼네요.
24화 기반으로 쓰다 만 게 있었는데 것도 버려두고(취미가 쓰다 내팽개치기입니다) 또 번뜩 떠오른 거네요.
24화의 충격이 꽤 커서 뒤에가 개그인걸 알았는데도 오소마츠 마음은 어떨까 어떨까 생각했는데 그 생각 중 단편의 이야기입니다.
카라른이긴 한데 음...그냥 오소의 집착 얘기네요.
의식의 흐름이라 늘 그렇듯 허술하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라른/오소카라]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5-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카라마츠 중심, 결론적으로는 카라총수지만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캐붕,글솜씨없음주의

※5화 카라마츠 사변 기반+기타 에피소드들 소재

※오늘은 조금 힘을 뺀 이야기와 힘을 넣은 이야기가 공존. 뭔 소린지 원.

※그 외 뭐 여러 가지 주의(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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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이름 모를 거리의 인도. 거기에 나는 서 있다. 밤손님은 이제는 낮에도 찾아와 날 유혹한다.

- 자, 이딴 세상에서 사는거 그만 두자고? 편해지는 거야, 카라마츠.

텅 빈 나를 잡아끄는 그 손길에는 언제든 끌려갈 것만 같다. 그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보낸 시간과 그 손길을 외면하며 보내는 시간이 교차하다, 이제는 조금 더 편해지는 쪽을 택하고는 한다. 

도로에는 빠르게 지나가는 트럭이 몇 대 있을 뿐.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은 거리다. 어디지, 라는 생각은 그만둔 지 오래다. 내가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어차피 가벼운 존재. 어디서 굴러다닌 들 상관없는 존재. 기왕 이렇게 된 거, 더욱 더 가벼워진 채 어디 먼 곳으로, 먼 차원으로, 여기가 아닌 곳으로 날려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형제들은 나를 붙들어서 이 세상에 묶여있게 하지만, 그건 진심인걸까. 아니, 나를 위해서인걸까. 그들이 여섯이서 하나인 20년을 부술 수 없어서 날 붙들고 있는 건 아닐까. 사고는 한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면 멈추질 않는다. 나의 사고도, 그런 것일테지. 날아가고 싶다. 어디론가, 여기가 아닌 곳으로. 그 소망이 나를 채운다. 붉은 신호등도 푸른 신호등도 상관없이, 나의 세계는 어느새 하얗게 물들어간다. 

 

텅.

 

묵직한 감이 나를 강타한다. 소원이 이루어진 듯, 나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길 건너엔 또 하나의 나가 미소짓고 있다.

이제 곧 편하게 될 수 있어, 그치?

 

 

 

*

 

 

 

토도마츠는 하루를 꼬박 카라마츠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퉁퉁 불어버린 눈에 눈동자에 생기마저 사라진 토도마츠는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옮겨진 카라마츠의 손을 잡은 채 카라마츠 형, 카라마츠 형 하며 기도하듯 읊조리고 있을 뿐이었다. 카라마츠가 차에 치였다는 소식을 듣고선 모두들 놀라며 병실로 달려와서는 교대로 토도마츠와 카라마츠의 곁을 지켰다. 아, 거기에는 이치마츠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치마츠는 병실에 와서 카라마츠를 그저 응시하다 나가더니 병실 밖 복도에서만 계속 있었다. 병실의 분위기에 지친 형제들을 위로해주는 건지도 모르지만, 내가 밖에서 있을 때 이치마츠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듯 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나도 입을 다문 채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병실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쵸로마츠가 집에 다녀오겠다며 사왔으면 하는 것, 가지고 왔으면 하는 것을 적어가서 병간호에서 잠시 제외. 토도마츠를 카라마츠하고만 있게 하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 쥬시마츠를와 함께 병실 밖으로 나왔다. 

"오소마츠 형아, 카라마츠 형 손목에 상처가 많았대...난 손목보호대를 빌려간 게 정말 손목이 아픈 걸로만 생각했는데..."

"응..."

"카라마츠 형, 마음에 상처가 역시 많았던 거겠지? 우리 때문일까?"

"......"

카라마츠는 형제 탓을 잘 하지 않는다. 사소하게 당황스러워 하거나 짜증을 내는 일은 있어도, 정말 심각한 일에 말려들었을때 다른 형제가 연관되어서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도 괜찮다며 넘기곤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싸움이나 하고 다니면서 다른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고 다닌 나와는 다르게. 나 때문에 가장 곤란해 했던 것도 카라마츠였다. 어느 날 부턴가 남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면서 쌈질에서 빠져나왔다가 내게 당한 복수를 한답시고 덤벼든 불량배에게 당하고 오는 일이 잦았다. 카라마츠도 카라마츠라, 당하고만 오진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힘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대신에 남을 즐겁게 해주겠다며 연극부에 들어가서는 이상한 연기들만 잔뜩 하고는 했던가.

"카라마츠는,"

좀 더 남을 의지할 필요가 있어.

라는 말이 입에서 맴돈다. 늘 생각하는 바지만, 그게 카라마츠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해결하리란 보장이 없다. 아니, 애초에 카라마츠의 기대를 저버린 건 우리들이니까. 특히, 내가 저버렸으니까.

"걱정마. 쥬시마츠. 카라마츠의 의식이 회복되면, 카라마츠를 웃게 해주면 되는거야."
가볍게 말한다. 웃게 해준다고? 그 웃음이 진짜 웃음일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걸로 되는걸까?"

"당연하지."

그럼에도 나는 가볍게 답을 내린다. 그도 그럴게, 나는 카라마츠만이 아니라 쵸로마츠, 이치마츠, 쥬시마츠, 토도마츠의 형이기도 하니까. 장남이니까.

 

 

 

최근에 카라마츠와 제대로 대화했던 게 언제였지.

아, 카라마츠가 찻집 알바를 할 때. 그 때였나.

그 이후로, 카라마츠와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아니, 나눌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의 자해를 보고 말았으니까.

어딘가 어두워져 가는 카라마츠를 눈치채고 있었지만, 찻집 알바를 한답시고 놀려주던 때에는 상황이 거기까지 치닫았다는 것을 어째서 알지 못했던걸까.

「좋은게 좋다」, 나의 모토가 흔들린 순간이었다.

 

카라마츠의 납치극이 적어도 겉보기엔 조용히 지나간 뒤, 새로운 머신이 들어왔다는 전단지에 평소 가던 파칭코와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신 머신에 한 번도 안 가본 곳, 딱 운이 터지기 좋은 곳이니까. 그 결과, 따긴 땄다. 하지만 대박도 아니라서 애매했다. 운세로 치면 소길. 한두 판 더 하면 대박이 터지거나 쪽박을 차거나 할 거 같아 오늘은 여기서 손을 놨다. 일단 따냈다는 데 만족하자는 생각이었다. 기왕 낯선 거리로 왔으니까 넘쳐나는 시간을 조금 보내볼까하고 어슬렁거렸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오전 열한 시, 할 일 없는 니트와 대조되는 분주한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따낸 돈으로 무얼 할지 궁리하던 차에, 어딘가 익숙한 사내를 한 찻집에서 발견했다. 우와, 우리같은 최하층 밑바닥 카스트는 들어가지도 못할 분위기의 찻집. 스타버와는 다른 느낌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만 오갈 거 같은 찻집에 나랑 같은 얼굴이 앉아 있었다. 저런 데라면 톳티, 가 아니라 저 열심히 뭔가 적어내려가는 모습은 카라마츠!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찻집을 바라봤다. 카라마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받아적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우리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카라마츠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설마.

그 카라마츠가 취직을 하려 드는건가? 자립은 하지 않을 거라구~, 날 먹여살리지 않겠나? 같은 말을 내뱉는 안쓰런 카라마츠가 취직을 스스로 하려 든다고? 

그대로 주변 벤치를 찾아 앉아서 찻집을 감시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초조해졌다. 본격적인 느낌이라서. 그것보다는 카라마츠의 표정이 더 신경쓰였지만. 우리들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쑥쓰러운 미소라거나 진지한 끄덕임이나, 니트 탈출보다도 그런 게 날 더 초조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윽고, 카라마츠가 찻집 문을 열고 나왔다. 카라마츠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의 등 뒤로 돌아 어깨를 확 잡았다.

"어흐어어에에에엑!"

"뭐야 그 반응은, 푸하하."

 카라마츠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형님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혹시, 날 따라온..."

"그런 거 아니니까. 이 근처 파칭코 가게 갔다온 참."
"아,"

설마 이 녀석, 날 한심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 표정, 대박 터뜨린 것도, 쪽박 찬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뭐, 그렇지. 따긴 땄는데 정말 조금이라서 말야. 그보다, 잠깐 앉아봐."

"왜 그리 진지한 표정인가?"

"카라마츠...아까 봤는데 혹시 취직하는 거야?"

"취직?"

"응, 방금 나온 찻집에서 뭐 받아적고 있는 거나 분위기가 그래보였는데."

"아, 이건 잠깐 부탁받은 거다."

"그래?"
"아까 얘기하던 사람, 고등학교 때 같이 부활동을 했던 나카무라 군인데 일주일 정도 볼일이 있어서 자기 대신에 잠깐 일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지. 거리에서 우연히 만주쳤다가 권유받아서 오늘 찻집 주인 아저씨와 인사하고 일에 대해 설명을 듣고 한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고 서빙이나 계산, 잡일을 해 주는 거라며. 카라마츠는 내가 걱정한다고 생각했는지 제법 상세하게 얘기를 해줬다. 뭐야, 취직은 아니었나...다행이네, 다행.  그래도 잘 상상이 가진 않았다. 워낙 우리 앞에선 폼잡고 있거나 하는 게 익숙한 녀석이니까 사람을 접대하는 일을 하는 게 가능은 한건가 싶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면 다를 거 같지만. 의외로 쭈뼛쭈뼛하게 손님 눈도 못 마주치고 차만 딱 갖다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했더니 우리 집 차남, 귀여워서 죽어버릴지도.

"형님, 듣고 있나?"

망상을 펼치는 동안 카라마츠가 이것저것 얘기한 모양이다. 어차피 아까의 일을 더 구체적으로 얘기했을 거 같지만. 

"그래. 어쨌든 힘내라."

"오우."

 

나 외에는 잠깐 알바를 한다는 것 정도만 형제들에게 전해서, 카라마츠가 찻집 알바를 한다는 건 나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형제의 레어한 모습을 보는 걸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으려나. 아침 열 시에나 일어나는 니트가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선 평소에 입던 안쓰런 패션이 아닌 깔끔한 옷을 입고 눈을 비비며 나가는 광경을 쳐다보며 조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간 우리 형제들도 저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제각각의 일을 찾아 흩어졌다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을 하게 될까,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간만에 하는 일에 지쳐 돌아온 알바 첫 날, 저녁을 먹고 일찍 들어간 카라마츠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일주일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 중 하루가 평소와 다른 낯선 하루라면 그게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카라마츠는, 그런 기분일까.

다음 날, 카라마츠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카라마츠가 늘상 하듯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하고, 말끔한 옷을 차려입고, 전신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쳐다봤다. 물론 멋있지, 이 몸은. 그 채로 집을 벗어나 거리를 배회하다 찻집이 연다는 열 시 즈음에 맞춰 갔다. 여전히 우리같은 밑바닥은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다시금 보니 어쩐지 평화롭고 잔잔해 보이는 찻집. 얇은 커튼이 쳐진 창문 너머에는 카라마츠가 성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가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찻집 문을 열어젖혔다.

"카라마츠~ 이 형이 와줬다고!"

유독 큰 소리로 카라마츠를 불러봤다. 가게 안에는 손님은 없고, 주인 아저씨와 카라마츠만이 일하다 말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당황한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럴 법도 하지. 가게 문을 떡하니 열어젖히고선 한 손으로 기대고 나름대로 폼을 잡고 있으니까.

"가끔은 이런 상류층의 문화도 누리면 좋잖아! 그래, 지명은 카라마츠! 오늘 나와 시간을 보내줘야겠어!"

"그거 상류층 아니니까...여기 어딘가의 가게도 아니고..."

"지금은 손님도 없으니까 괜찮은 거 아냐? 어때요, 아저씨?"

아저씨가 나와 카라마츠를 번갈아보더니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지금은 한가한 시간이니 마츠노 군, 형과 상대를 해줘도 좋네."

"에, 그렇지만..."

"물론 음료는 공짜가 아니니까, 마츠노 군."

"알겠습니다."

나는 볕이 잘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카라마츠는 나와 마주보고선 앉았다. 주인 아저씨가 주문을 받지도 않고 내 쪽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카라마츠 쪽에는 진해보이는 커피를 놓았다. 이름이 에스프레소 도...도피소였나.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카라마츠가 먼저 운을 띄웠다.

"그냥 우리 카라마츠가 어떻게 일하고 있나 보고싶어서 온거야. 딱히 할 일도 없고 말이지."

"그건 그렇네. 다른 애들은?"

"둘만의 비밀, 이란 걸로 하고 싶어서 말 안했어."

"나는 몰라도 이렇게 말끔하게 차려입은 걸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고?"

"그럴까봐 눈에 띄기 전에 나왔지."

"얼마나 일찍 나온거야..."

카라마츠는 내 말을 들으면서 살짝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모처럼 둘만의 시간인데,"

그 멋쩍은 미소를 짓는 입술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

"이 형에게 고민거리가 있다면 털어보지 않을래?" 

입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집어들고선 한 모금 들이켰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가게 문 바깥쪽에 달린 종소리, 원두 내리는 소리, 그 소리들 사이에서 카라마츠의 목소리는 섞여나오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커피잔을 잡고 커피를 들여다볼 뿐,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기미를 보이진 않았다. 저 모습은 뭘까. 망설이고 있는 걸까. 내겐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인걸까. 그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녀석을 재촉했다간 뭣도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고민이 없는게 고민이란 말이지."

일단 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대화를 이어가는 건 일단 한 마디의 말이다.

"너희들을 걱정하긴 하는데, 그게 또 고민까지 이어지진 않는달까. 의외로 다들 제각각의 개성대로 살고 있으니까. 아, 이치마츠는 그래도 좀 걱정이 되려나. 그 녀석은 사회성 제로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뒷골목에서 잘만하면 폭군으로 군림하고 살 거 같기도 한데, 냐하하."

멋쩍은 웃음과 함께 농담을 던졌다. 이치마츠가 들으면 기분 나빠하려나 같은 생각은 일단 제쳐두고.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카라마츠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이치마츠한테 말하지 마. 아, 너라면 말할 거 같진 않지만."

"그게 아니라..."

이치마츠 뒷담 쪽이 아니었나.

"제각각의 개성대로 살고 있다고 말했지, 우리들이."

"그쪽이었나? 그렇지. 최근에야 너네들이 평소에 어떻게 사는 지 알게 됐고 말이지."

카라마츠는 컵을 들고선 커피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한다.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걸 보니 역시 쓴 건 잘 먹는 거 같진 않지만.

"내게도 개성이 있어, 오소마츠?"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개성 만만하다 못해 마이 웨이잖냐, 네 녀석은.

"당연하지! 어설픈 오자키 흉내나 안쓰러운 취향이라든가..."

카라마츠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조금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아, 그리고, 그리고, 기타 연주 같은거도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고 그러잖냐. 나머지는 그런 녀석 없으니까."

간신히 좋은 의미 쪽으로 얘기를 한 거 같다. 아까 말은 하고 보니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소마츠가 보는 나는 그렇다는 거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는데, 역시 말로 설명하기엔 어려운 거 아닐까?"

화제를 돌리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카라마츠는 내가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표정이 안 좋아졌다. 물론, 마시고 있는 커피도 써서 그러겠지만.

"카라마츠, 그 커피 한번 마셔봐도 돼?"

카라마츠는 대답없이 잔을 내밀었다. 나도 아메리카노를 내밀어 서로의 음료를 바꿔 마셨다.

"켁, 쓰네 이거...이게 뭐랬지? 에스프레소 도피...도피소?"

"도피오. 샷을 두 번 추가했다는 거야."

카라마츠는 얼음을 입에서 굴리며 답한다. 물론 그 표정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그런가...도피오...용케 이런 걸 마시네."

"어쩌다보니 커피를 마신다면 이걸 마시게 됐어."

분명 이것도 폼 잡는다고 마시게 된 걸거야.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카라마츠의 표정을 봐서는, 그런 소리를 했다간 더 상처를 받을 거 같았다.

다시금 두 사람의 음료를 바꿔서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시덥잖은 대화를 하며 마시는 동안,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간은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 때인가, 손님이 많이 오네."

"아, 이제..."

"가봐야겠네. 동생의 알바를 방해하는 나쁜 형이 되고 싶진 않다구."
"응."

카라마츠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한 번 펴더니 나를 쳐다봤다.

"오소마츠."

"왜?"

카라마츠는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무 것도 아냐. 이따가 집에서 보게."
"그래, 일 힘내라."

 

내가 가게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는 카라마츠는 어쩐지 손을 내밀고 있는 거 같았다. 사실은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듯이. 그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못하는 차남.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받지 못하는 장남. 이 때를 놓쳐버린 것에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 그날 밤 옥상의 카라마츠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 카라마츠는 자해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원에 누워있다. 심한 부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렇게나 거하게 한 건 해버린 카라마츠가 눈을 뜨고 입을 연다고 한들, 나를 의지해주는 날로 돌아올 수 있을까. 카페로 찾아갔던 날, 난 그곳에서 무엇을 말해야 했을까. 동생들에겐 가볍게 답을 얘기해주는 나지만, 나 자신에게만큼은 답을 이야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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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쓰는데 시간이 많이 들었습니다.

구상은 오래 전부터 하던 편인데도 막상 만들어지고보니 재밌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도 ㅇ낳네요.

문제는 오늘, 24화가....으어.....

스포는 못하겠는데 으어.....그거 보고 무조건 오늘 오소카라 편을 써야겠다 생각해서 이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써내고 보니 으어...망했어요.

그래도 오늘 일단 이치카라 편도 써서 한 사이클이라도 완성할 수 있음 하는 바람입니다. 두 사이클+@니까요. 지금 내가 후기로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는 하츠모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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