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2. 02:32

차오르는 달이 검푸르게 펼쳐진 밤하늘을 하얗게 비추는 아무도 없는 어느 시골길. 그림자를 뒤집어쓴 채 조그만 불빛이 듬성듬성 삐져나온 저택의 모습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용케 이런 길을 걸어 올 생각을 했군. 차나 오토바이, 하다못해 자전거라도 있었다면… 그저 가볍게 조사를 하러 왔을 뿐인데 별 다른 단서도 못 건지고 빠르게 지는 해에 길까지 잃어버린 채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기는 글렀고, 길바닥에서 노숙이라도 했다가는 날씨 탓이든 뭐든 목숨을 내놓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저택의 불빛은 구원과도 같았다. 설마 이 마을에 떠도는 늑대인간의 소문이 저 저택과 관련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갔지만, 이내 주린 배와 추위가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늑대인간은 몰라도 이런 곳에선 무슨 일이든 날 것만 같은 두려움과 어디서 우는 지도 모르게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의 울음소리, 이따금 개가 짖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걸음을 재촉해서 저택에 다가갔다. 저택의 형태가 뚜렷이 드러날 정도로 가까워지자 조금 안심하던 그때, 앞에서 새하얀 천 같은 게 느릿느릿 다가왔다. 피가 묻은 건지 붉은 얼룩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새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하얀 천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하얀 천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달려 나왔을 뿐인데, 바로 드러난 검은 머리칼에 그대로 오소마츠는 주저앉았다.

“저어… 괜찮은가?”

새하얀 바스로브 차림에 붉은 장미 다발을 든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소마츠를 쳐다보았다.

“깜짝이야. 유령인 줄 알았네.”

“훗. 내가 유령으로 보였던 건가. 겁이 많은 편이군.”

“그런 거 아니거든! 타이밍 좋게 달빛이 댁의 옷과 그 장미꽃잎만 잘 비춰서 놀랐을 뿐이야.”

달빛때문에 착각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이상한 차림새라고,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오소마츠는 참았다. 이 남자가 저택의 주인인가? 설마하니 고용인이 이런 차림을 하고 있진 않을 테니까.

“병에 꽂아놓을 장미를 꺾으러 정원에 있다가 사람 그림자가 이쪽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 같길래 나와봤을 뿐인데. 나에게 볼 일이 있는가? 아니면 그냥 지나가던 길인가?”

“음… 혹시 저택의 주인인 거야? 어… 그렇다면 오늘 밤 신세 좀… 져도 될까요?”

에헤헤…하며 오소마츠는 머쓱해 하면서도 바로 부탁을 했다. 사람이 좋아 보이니, 거절하진 않을 것 같은데.

“부탁하려고 바로 존대하는 건가. 이렇게 어두워져서야 위험하니, 일단 들어가기로 하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그에게 또다시 달빛이 비춰,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는 어쩌면 정말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의 손에 들린 붉은 장미 다발과 이제 막 가시에 찔린 듯 붉은 방울이 터져 나온 손바닥이 그것을 간신히 부정하고 있었다.



저택은 외관만큼 웅장한 내부를 자랑했다. 그러나 금이 간 벽이나, 저택 분위기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너구리나 복고양이 조형물이 부서졌다 붙인 자국이나, 그 외에 보잘 것 없는 미술품만 몇 점 놓여있다거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홀 등에서 기대했던 저택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널찍한 응접실에 들어서자 남자는 편한 소파로 오소마츠를 안내한 뒤, 비어있는 꽃병에 장미 다발을 꽂았다. 그리고 곧 간단한 먹거리와 따뜻한 차를 내왔다. 다행히도 응접실은 벽난로가 지펴져 있어서 홀만큼 춥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여러 의문을 품었지만 일단 주린 배부터 채웠다. 더 달라는 눈치 없는 부탁도 흔쾌히 응하는 남자가 짓는 미소는 쓸쓸함과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오소마츠가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자 남자는 일인용 소파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

“아직 서로 자기소개도 안 했군. 난 카라마츠다. 이 저택의 주인이지.”

“난 오소마츠. 이 마을에 재밌는 소문이 돌길래 조사하러 왔다가 이렇게 신세를 지네.”

두 사람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늑대인간 같은 흉흉한 소문을 듣고 조사하러 왔다면서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고 온 오소마츠를 카라마츠는 질책하면서도, 자신은 이 저택에 살게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과 별로 교류를 하지 않아 그런 소문은 잘 모르겠다며 넘겼다.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라며 카라마츠는 2층의 손님방으로 안내를 하고 잠자리를 살펴주었다. 오소마츠는 침대에 누워 저택 어딘가에 있을 카라마츠를 생각했다. 둘만이 덩그러니 있는 넓은 저택에서, 오소마츠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오소마츠가 눈을 뜨고 옆에 있는 커튼을 걷으니 이미 해가 가운데에 떠 있었다. 붉은 장미가 듬성듬성 핀 정원도 카라마츠와 마찬가지로 쓸쓸함이 느껴졌다. 겨울이 다 되어가는데, 요새는 장미도 오래 피어 있구나, 하고 정원 너머 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시골 마을도 쓸쓸한 곳이네. 밤과 별 다를 바가 없이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카라마츠가 응접실에서 나와 반겨주었다. 낮이라 그런가 바스로브 차림이 아니구나. 그게 당연한 거겠지만. 그때 솔솔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절로 오소마츠의 배가 울렸다.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응접실로 들어가는 걸 따라가자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이렇게 신세를 져도 괜찮은 건지 잠깐 생각하고선 또다시 주린 배를 채우는 오소마츠 옆에서 카라마츠도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자 그제야 식당이 따로 있지 않냐고 물었지만 카라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넓은 저택을 쓰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쓰는 공간만 쓰게 된다며. 손님이 오는 일도 드물고 거의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니 특히나 식당같이 사람이 많이 와서 채워야 하는 곳은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또 다시,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이 이상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걸까. 오소마츠는 정원을 보고 싶다고 조르며 카라마츠와 밖으로 나왔다. 정원은 꽃이 듬성듬성 피어있는 점 빼고는 나름 잘 가꿔진 곳이었다. 저택 안쪽에 비하면 손길이 많이 닿은… 카라마츠가 훨씬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미를 좋아해?"

"응. 특히 붉은 장미를 좋아한다. 강렬하게 시선을 붙드는 색인데다, 꽃잎이 마르면 마르는 대로 깊은 색깔을 내거든. 오소마츠는 좋아하는 꽃이라든지, 색이라든지 있는가?"

"나도 빨간색을 좋아해. 눈에 띄는 색이라는 점도 카라마츠랑 같은가. 꽃은 그다지 흥미가 없어서. 그 외에 좋아하는 거라면... 호기심이 동하는 것? 아니면 사람들이 날 보고 재밌어해 주는 거라든가."

"그런가. 오소마츠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군."

"에... 어떤 점이?"

"탐정 같은 거 아닐까 싶다가 이렇게 준비 없이 달려오는 것도 그렇고, 재밌어해 주길 바란다는 건 아직 잘 모르겠고..."

오소마츠가 살짝 흔들리는 눈빛으로 침을 삼키는 건 눈치채지 못한 채 카라마츠는 사뿐사뿐 앞으로 걸어갔다. 낮의 카라마츠도 밤과 마찬가지로 유령 같았다. 햇빛 아래서도 여전히 그의 얼굴은 새하얗다. 파릇파릇함을 잃어버린 장미 덩굴 사이로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그를 쫓아서 정원을 돌고 나서는, 고맙게도 며칠 더 머물러도 괜찮다는 권유를 받았다. 원한다면 조사를 위해 마을에도 함께 가주겠다는 그의 과한 호의를 받아들이며, 둘째 날은 그냥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오소마츠는 고민하다 탐정 복으로 갈아입고 카라마츠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때 카라마츠가 당황했다 터트린 웃음은 지금까지 카라마츠의 표정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나름 '안식탐정'이라는 이명이 있다며 사건 현장을 온화하게 만들어준다고 주로 활동하는 지역의 경부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하자, 카라마츠는 무언가 해결된 듯 시원하게 웃어주었다.

"안식탐정이란 말이지. 어울리는군..."

뭐가 어울린다는 건지. 하긴 내가 좀 편안한 사람이긴 하지. 오소마츠는 의기양양하게 한 번 더 안식탐정의 포즈를 취해주었다.



다음날은 함께 마을의 상점가에 갔다. 사람이 없어 보였던 마을에도 상점가만큼은 나름대로 사람이 있었다. 식자재를 사는 카라마츠의 동선을 따라 오소마츠는 사람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카라마츠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사는 것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이나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에 늑대 울음소리가 평소보다 더 자주 들린다는 소문과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왔다.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아버리니 서둘러 장을 봐야 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느릿한 걸음의 카라마츠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질 것만 같이 투명해 보였다. 잠시라도 카라마츠를 잊어버리면 곧 사라져버릴 듯한 투명함. 손을 잡으면 잡히지 않을 것만 같이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카라마츠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약국이었다. 따라 들어오려는 오소마츠를 멋쩍은 듯 쳐다본 뒤, 카라마츠는 말없이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오소마츠도 따라 들어갔지만, 카라마츠는 그저 늘 먹는 그걸 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해가 기우는 인적 없는 시골길을 둘이 걸으며 저택으로 돌아가는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만이 흘렀다. 오소마츠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별 소득 없었다며 휘파람을 불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날 밤은 와인과 간단한 안주가 차려졌다. 와인잔을 돌리다 음미하듯 붉은 와인을 입 안에 흘려 넣는 카라마츠를 보고선 오소마츠도 와인잔을 돌렸으나 답답함에 홀짝 들이켰다.

"카라마츠는, 왜 혼자 있어?"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너무나도 직설적인 말.

"그런 건 묻지 않는 게 배려가 아닐까, 오소마츠."

쏘아붙이듯 답하는 카라마츠.

"궁금하니까. 나도 탐정이라는 나름 비밀스러운 정체를 밝힌 참이고? 그 정도는 물어봐도 되지 않아?"

"멋대로 알려주지 않았나. 궁금했긴 했지만, 소문을 조사하러 왔다는 말을 한 시점에서 대충 그런 거라고 알 수는 있었으니까."

"그럼, 안식탐정이라니 어울린다는 건 뭐야. 어제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말이었다고."

"말 그대로다. 취조하듯이 몰아붙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만."

"지금 혼자 있으면 안되는 상황 아냐? 어딘가 아프다면 간병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거 아니냐고."

"......"

카라마츠는 말없이 와인잔을 비웠다. 입 옆으로 살짝 흘러내린 붉은 와인 방울을 오소마츠가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지만, 카라마츠는 그 손을 쳐냈다. 살짝 닿은 카라마츠의 볼은 역시나 차가웠다.

"먼저 들어가 보겠다. 탁자 위는 그냥 내버려 둬도 되니 더 마시다 가도 된다."

그렇게 말하며 응접실을 나가버리는 카라마츠를 오소마츠는 쉽사리 붙잡지 못했다. 대충 짐작이 가는 그의 사정을 좀 더 신경 써서 얘기할 걸 그랬나. 그래도 사흘을 함께 있었으니 이 정도면 가까워졌다 싶었는데, 카라마츠는 처음부터 줄곧 벽을 세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어색해져서야 더 머무르긴 곤란할지도... 내일이 되면 떠나야 할까.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유령 같았던 카라마츠가, 아픈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그걸 태도에선 드러내지 않은 채 오소마츠를 환대해주었던 그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오소마츠도 응접실을 나서서는 1층부터 닫힌 문을 열었다 닫으며 돌아다녔다. 2층에서 오소마츠가 묵고 있는 손님방과 반대편에 있는 방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찾아낸 오소마츠는 벌컥 문을 열었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인가! 하고 소리쳤지만,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카라마츠의 우는 얼굴을 본 오소마츠는 입을 열지도, 나가지도 않고 문을 닫고서 카라마츠가 누운 침대의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오소마츠를 카라마츠는 밀어냈지만, 침대가 넓은 탓인지 너무 세게 밀었다가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질까 걱정한 탓인지 오소마츠는 그다지 밀려나지 않았다. 다시금 다가와서는 손가락으로 카라마츠의 차가운 볼에 손을 갖다 댄 뒤, 그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그런데도 카라마츠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따뜻... 하다."

"줄곧, 이렇게 해주고 싶었어. 처음 본 그때부터 카라마츠는 차가웠거든."

"차갑게 대하지 않았는데... 아까는 미안했다만..."

"그게 아냐. 이렇게 따뜻하게, 이 세상에 붙들어주고 싶었어."

"무슨..."

"사라지지 마. 함께 있어 줄 테니까. 있을 수 있는 그날까지 있어 줄 테니 벌써 유령같이 살지 마, 카라마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 쪽으로 더 다가와 카라마츠를 안아주었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다가와 안쪽으로 폭 들어갔다. 카라마츠의 눈물이 오소마츠의 몸을 적셨다. 이내 두사람은 입을 맞추고, 서로를 따뜻하게 데워갔다. 그 후 이틀은 두 사람 모두 저택에서 나가지 않았다. 정원을 산책하고,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밤을 함께 보냈다. 새하얀 카라마츠의 얼굴의 붉게 물든 뺨을 바라보며,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카라마츠는 마음을 열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릴 적 이 저택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서 파티를 여는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며,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제 나름의 소박한 소원을 털어놓으며, 오소마츠가 다른 사람을 재밌게 해주고 싶다면 카라마츠도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카라마츠의 건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어딘가의 파티에 놀러 가서 함께 즐겨보자는 약속을 나누었다. 오소마츠가 여기 눌러앉기 위해 내일은 짐을 챙기러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을 꺼낸 밤의 달은 어느새 보름달이 다 되었다.



왜 하필이면 그날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그날 밤이었을까. 늑대인간의 소문을 조사하면서 간과해왔던 보름달과의 연관성. 보름달이 뜬 밤, 저택에 혼자 있는 카라마츠를 늑대인간이 습격해서 죽여버릴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집을 챙기며 잊고 있다 바라본 보름달에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새벽에 어떻게든 저택에 도착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저택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눈물을 삼키고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했다. 적어도 네가 행복한 마음으로 이승을 떠날 수 있도록. 나는 기꺼이 해골이 되어 버린 너와 마지막 춤을 추고, 사람들을 모아서 저택에서 즐거운 파티를 열고, 그 파티를 달아오르게 하는 멋진 공연의 주인공은 네가 되어줄 거고, 네가 마음을 쏟던 정원에 아직도 지지 않은 장미꽃 아래에 널 잠들게 할 거고, 그런 네 앞에선 끝까지 웃어줄 거라고. 널 잃은 슬픔보다도, 네 목숨을 병마보다도 빠르게 앗아가 버린 범인에 대한 분노보다도, 널 재밌게, 행복하게 해주는 게 널 위한 것 아닐까. 그게 '안식탐정'인 나 오소마츠의 역할이니까. 저택을 나서기 전까지 참아왔던 슬픔을 저택을 등지고 쏟아내더라도, 네 앞에서는 웃어줄게. 저택을 뒤로하는 발걸음은 느려지고 눈물범벅이 된 채 저택을 돌아보면, 붉은 장미꽃잎이 흩날리며 아마도 진짜 유령일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바라보고 있다. 손을 뻗어도 이제는 진짜 잡히지 않을 너와 작별하는 데에는, 너와 지냈던 시간의 수십, 수백 배는 걸릴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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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 10화 인랑편 보면 슬프거든요. 나고관주적으로? 다른 시점으로? 웃으며 무덤 만들어주고 해골하고 춤추고 공연하고 살해현장인 저택이 파티장이고... 이건 오카뇌를 너무 돌려서인진 모르지만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과도 같은 그런 인상을 받았던... 거기서 이어져온 아이디어인데 이것도 1년 이상은 묵혀둔 거 같음...
12월 12일 오카의 날❤️💙 기념으로 올해도 너무 많은 걸 놓쳤지만 일단 이건 안 놓쳐야지 하는 마음으로 써봤습니다. 뭔가 그래서 결말이 (늘 그렇지만) 급전개


표지? 낙서는 어제 새벽을 불태우고 글은 밤과 새벽을 불태우고 퀄은 이모냥인데 시간은 많이 걸리고😭

Posted by 하리H( )Ri
2021. 11. 11. 23:11

짧글/주청/1 4개 우겨넣기식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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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1월 11일.

인간들의 시간으로는 이렇다고 하더군. 인간들의 자세한 시간을 알아두는 것도 괴담을, 이야기를 좋아하는 청행등에게 있어선 당연한 일이건만, 오늘도 그런 '시간'과 '이야기'를 어디 사는 누군가가 절묘하게 엮어내어 속고 있다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들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는 게 꽤나 재밌다. 물론 저 인간의 마음은 어떨지, 어떤 심정으로 막대 과자를 주고 받는지, 지나치게 인간의 마음에 몰입하기도 한다. 현대의 괴담이란 옛날과는 또 다른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게 그저 공포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이날의 훈훈함과 씁쓸함이 교차하는 풍경을 청행등은 그 눈에 담고 있었다. 

청행등은 잠시 풍경을 내려다보다 들고 있던 등에서 푸른 도깨비불을 내보내 제 몸을 감쌌다. 인간의 모습으로 사뿐히 땅 위에 내려서고선 익숙하게 사람들 속에 섞여든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옛날처럼 등을 걸어두고 모여앉아 괴담을 나누는 '햐쿠모노가타리'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괴담이든 괴이쩍은 일이든 청행등의 먹잇감이 되는 이야기는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넘쳐난다. 이렇게 인간 속에서 이야기를 얻어가지만, 그렇지만 예전과는 다른 단절된 섞임 속에서 조금 서글퍼지긴 했다. 뭐어, 오늘의 볼일은 막대과자 아닌가. 하나쯤 슬쩍해도 별로 큰 혼란은 안 생기겠지만, 대충 그 의미를 아는 입장에선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디 신사라도 들어가 세전이라도 슬쩍할까 하며 공원 벤치에 앉았더니, 웬 꼬마가 청행등 앞에 와서 멀뚱멀뚱 청행등을 쳐다보았다.

"나비- 빛나는 나비가 있어"

"으응?"

"이런 나비는 처음 봐- 형아 뿔도 나있네- 신기하다-"

"아아. 어린아이라 그런건가. 내 원래 모습이 보이는 건가."

"나비 만져봐도 돼?"

"그럼. 네 손에 옮겨주지."

도깨비불로 만들어진 나비가 꼬마의 손에 옮겨갔다. 꼬마는 따뜻해, 간지러, 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웃었다. 

"고마워, 형. 나비 만져보게 해줬으니까 이거 줄게."

꼬마가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막대과자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건넨 꼬마는 씨익 웃었다. 웃는 꼬마의 이앞니는 하나가 빠져 있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친구가 줬는데 우리 엄마는 이런 과자 못 먹게 하거든. 친구한테 고맙다고 하고 싶은데 버릴 수는 없으니까 형아 줄게! 안녕!"

그리고서는 재빨리 가버리는 조심성없는 꼬마다. 나같이 착한 요괴를 만나서 다행이군, 하고 청행등은 생각했다. 어쨌건 이렇게도 귀여운 사건이 생겨,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 청행등은 즐거워졌다. 

본모습으로 돌아와서도 막대과자를 쉽게 맛보지는 못하는 청행등이었다. 인간의 과자도 몇 번이고 먹어봤고, 사실 이 과자의 맛도 알고 있는 바니까. 하나가 이루어지면 또 하나 욕심이 생기는 건 왜일까. 역시 이런 건, 사랑하는 이와 나누어먹는 그런 이벤트를 꿈꾸고 마는 건... 청행등은 자신이 인간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움츠러들어있었다.

"모처럼 떠들썩한 날인데 왜 우울해 보이지? 내가 너무 오래 놀러갔다왔나? 하하핫!"

맞아. 꿈꾸고 말았던 건. 그런 이가 있으니까. 생각나는 상대가 있으니까. 청행등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 보이고 말았다.

"아니, 잠깐잠깐! 내가 그렇게 잘못한거야? 미안해... 그래도 청행등이랑 마시려고 맛있는 술도 구해왔... 우왓!"

당황하는 주탄동자에게 달겨들어 폭 안기는 청행등의 행동에 주탄동자는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술도 안 마셨는데 이렇게 애교가 넘치는 청행등은 오랜만인걸.

"괜히 인간들의 축제... 같은거에 심취해버린 거 아닌가 싶어서... 조금 우울해졌다만. 주탄동자가 돌아와줬으니, 주탄동자가 거기 어울려줄거라고 믿고... 있다제."

"에에... 우리는 뭐, 인간들의 축제니 놀이니 그런거 좋아하고 잘 끼어 놀고 그렇잖아. 뭘 새삼스레. 오늘은... 막대과자를 코에 끼우는 날이었나?"

퍼억! 하고 주탄동자의 배에 청행등의 주먹이 꽂힌다. 

"농담이라고, 농담. 청행등 쪽에서 먼저 그런 걸 하자고 할 줄이야. 매번 내쪽에서 할 때마다 투정부리면서 받아줬잖아. 엉큼해졌네, 아니 때리지는 말아줘..."

주탄동자는 능글맞게 막대과자상자를 열어 봉지를 연 뒤 막대과자를 하나 꺼낸다. 누가 먼저 입에 물까 재기도 전에 둘 다 격정적으로 달라들어 막대과자가 부서져버렸다. 다음 과자는 주탄동자가 청행등에게 건네주고 청행등은 과자를 살짝 이에 물었다. 주탄동자도 이에 물고 사각, 사각,사각, 사각, 거리를 좁혀갔다. 평소에도 하는 입맞춤이 이렇게 긴장할 일인가... 싶은 순간 청행등이 살짝 힘을 줘 막대과자가 부서졌다. 손톱만큼 남은 막대과자에 주탄동자는 이거면 원래 인간들이 하는 막대과자게임에선 거의 우승급이라며 추켜세워준다. 얼굴을 붉히는 청행등에게 주탄동자는 다시 막대과자를 건네는 척 하더니 제 입에 가져간다. 이번에는, 게임 말고 원하는 걸로 할까. 말없이 전해지는 눈빛으로. 서로의 이에 막대과자를 물고서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긴장감 끝에 맞닿은 감촉과 새로운 재미에 둘은 까르르 웃어버렸다. 이후 남은 과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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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 땡겨서 쓰는데 쓰려는데도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짬내서 쓰려니까 눈앞이 뱅글뱅글 돌아서 뭔 헛소리를 쓴건지 모르겠단
진짜 글이 오랜만이에요오오

Posted by 하리H( )Ri
2021. 1. 8. 23:54

[카라른]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10-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주의>

※카라마츠 중심, 시리즈 전체를 놓고 보면 카라총수지만 각 편은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커플링이 등장하지 않은 편에도 일관성을 위해 카라른이 붙어 있습니다.
※본 작품은 2016년부터 써온 2차 창작 작품입니다. 현재 원작(애니 기준)의 캐릭터 설정과 차이가 있습니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의 오소마츠상(극장판 오소마츠 6쌍둥이)의 학생 시절 설정은 차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캐붕이 심하니 주의해주세요.
※자살, 자해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기 5화 《카라마츠 사변》 기반으로 1기 당시의 동인 설정인 학생 시절 소재, 연극부 소재 등 이것저것 섞다못해 어디로 나아가는 지 모르는 BL향만 풍기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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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진동에 잠을 깬다. 눈을 뜨면 낯선 풍경이 그를 맞이한다. 이런, 깜빡 졸았네. 기지개를 펴도 어쩐지 찌뿌둥했다. 주변에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손잡이와 한적한 마을이 스쳐가는 창문, 텅텅 빈 의자에 자신처럼 졸고 있던 한두명의 사람들뿐. 전철에 실려 생애 첫 가출을 하는 17세 소년은 전철 노선표와 다음역 안내 표시를 번갈아보았다. 대충 이름이 마음에 드는 역에 내리려고 탔던 것인데, 다행히도 지나치지 않고 내릴 수 있었다. 거리를 걸으면 한적한 주택가. 작은 규모의 상점가.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원... 가출이라고는 하지만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것도 아니고, 기껏 마음먹고 혼자서 멀리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은 풍경에 살짝 실망하기도 하면서 역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다 곧 공원 한쪽의 벤치에 자리잡는다. 주머니 속에 있던 대충 구겨둔 종이를 펼쳐서 읽으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였다. 원래대로라면 어제는 냈어야 할 숙제지만 제출하지 못한 채 구겨서 가방에 던져놓았던 걸 오늘 집에서 나오기 전 가지고 온 것이다. <자기소개서>. 진로 희망 조사와는 별개로 진학을 하든 취직을 하든 이런 걸 써야 할 일이 곧 많아질 거라며 우선은 내키는 대로 써 보라고 하는, 자유도가 높지만 그만큼 막연하기도 한 주제였다. 물론 술술 써 내려가는 사람도 있겠지. 이치마츠는 뭐라고 썼을까. 다같이 하는 숙제가 아니라 그의 반만 하는 숙제였으니. 이치마츠라면, 하고 싶은 건 없다고 했지만 의외로 성실하게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까. 백지로 내지는 않았을 거다. 다른 형제들이 이 숙제를 받아들었다면 어땠을까. 한숨을 쉬며 다시 내려다 본 자신의 글에는 소개라기보다는 편지나 고민상담에 어울리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는 지나치게 자신의 인생사를 나열한 것도 같다. 잘 쓰고 못 쓰고보다는 미주알고주알 자신을 드러내는 것 때문에 낼 수가 없었던 걸까. 자신도 알지 못했다. 요새는 알 수 없는 게 늘어났다. 특히나 알 수 없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막이 내리고, 커튼콜마저 끝나고 암전된 무대에 그는 서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관객도 없는 오롯이 그만의 모노드라마. 독백도 몸짓조차도 없는 그저 가만히 서있는 그의 마음 속은 이 곳의 무대장치를 총동원해도 표현해낼 수 없는 격동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5년간 맡아온 역할에서 내려오는 순간이다. 이제는 '연극부원 카라마츠 역'이 아니게 된다. 생각없이 붙들었던 연극부라는 명함은 그의 인생을 빠르게도 바꾸어놓았다. 신입부원에게 파격적으로 주연을 맡게 하고 다른 신입도 연극 무대에 세운다는 당황스러운 첫 연극에서, 누구 선배와 친하다며 자기가 주연이 될 게 당연하다고 으스대는 녀석을 토도마츠의 도움을 받아 골려줬었지. 대본에 새똥이 뭍었다곤 하지만, 남한테 실려서 연습하면 될 걸 연습이라곤 않던 녀석이 오디션날 펼쳐보고 당황하는 모습은 웃음거리라기보다는 영 보기 좋지 않았다. 어설프고 오버스러운 연기에도 생동감있다며 주연 자리를 차지하게 됐을땐 그런 건 금세 잊어버렸지만. 그 뒤에는 조명 담당도 맡았고 엑스트라도 맡으며 첫 연극부터 주연을 맡아 느꼈던 자신감은 좀 꺾였지만 순수하게 연극에 빠져들 수 있었다. 다만, 열정 있는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어렴풋이 연극이 내 인생의 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던 선배가 고등학생이 되고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는 연극 그 자체에 흥미가 크게 있던 건 아니었다. 다른 학교나 소극장에서 하는 연극을 찾아 볼 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나름대로 연극부 생활에 깊이 빠져 있었다. 어쩌면 그건 '연극부원'이라는 역할이 마음에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그 사소한 차이는 연극부 생활이 끝날 때 즈음 그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는 목표만이 자리잡고 있다. 그 목표마저도, 자신을 높인다든가 사람들에게 꿈을 준다든가 세계평화라든가 하는 유치하고 그래서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그런 것일 뿐. 오소마츠가 그를 불러내 진로같은 거 정했냐고 물었을 때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연극이라는 선택지는 자신도 없지만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뭐가 있지? 내게는 뭐가 있지? 갑작스레 떠밀어진 차남이라는 역할을 잘 하고 싶었다. 여섯 쌍둥이에서 '나'라는 존재를 구분해주고 발견해주길 바랐다. 연극부는 거기에 딱 맞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소였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내려오는 역자는 청중이나 함께 해준 사람들의 박수를 받지만, 역자가 다음 역할을 찾을 때까지는 홀로 고독할 뿐이다. 어둠 속에서 그는 이제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무대를 내려왔다.

차남 역할은 어중간했다. 연극부원 역할은 끝나버렸다.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했다. 그는 구깃구깃한 자기소개서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방황하고 고민하던 나약한 자신도 거기에 함께 던져버린 채, 차남 역할을 강하고 단단한 허세로 감싸고서 그는 벤치를 떠났다. 하루도 채 되지 않은 가출이었건만, 그날 가출한 소년은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약한 자기 모습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이 지금까지와 지독하게도 달라서 형제들을 포함한 주변인들은 변해버린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껍데기는 쉽게 갈라지고 뚫려서 겨우겨우 봉합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동안 마주치지 않았던 고교 시절의 동창을 길가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는, 이미 봉합하기 어려운 커다란 틈새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교 시절 부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였다. '연극부원'이라는 역할에 충실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그는, 그가 모르는 그의 연극에의 열정이나 연기력이라는 재능을 가졌다며 그를 추켜세웠다. 
어째서 연극의 길로 가지 않은 거야? 지금은 뭐하고 있어? 아, 난 또 일인극 연습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 그런 차림으로 프리 허그같은 걸 하고 있으니까. 역시 안타깝네. 그 길로 가지 그랬어. 
그는 뜬금없이 자신에게 내려진 고평가가 당황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이건 인사치레겠거니 싶었다. 백수로 지낸다는 말에 자신의 아르바이트를 일주일만 대신 해 주기를 부탁하며 웃는 동창의 모습에 어쩐지 자신이 그동안 뒤집어 쓴 껍데기가 쩍쩍 갈라져 부서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난 지금, 뭘 하고 있지?
그 뒤로도 그는 자신이 해오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기보단 붙들고 있었다 해야 하나. 나약함이 고개를 든다. 결국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역할 같은 건, 역할이라 하긴 그랬다. 그냥 이런 사람일 뿐.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백수로 사는 삶이 즐겁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가 원했던 건 어엿한 '카라마츠'라는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걸 새삼 확인받은 뒤였다. 고민이 늘었다. 억지로 막아왔던 자기에 대한 생각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그렇게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잠시 바깥을 서성이던 그 날, 외상값을 갚지 않아 화가 잔뜩 난 치비타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 그 날은, 그나마 해오고 있던 차남 역할조차, 차남 역할은커녕 6쌍둥이라는 설정조차 부정당하는 듯한 날이기도 했다. 

내가 눈을 뜬 건, 고통이 머리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낀 밤이었다. 머리맡에는 오소마츠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말했다.
"어서 와, 카라마츠."
집...은 아닐텐데. 오소마츠가 손을 내밀어 볼을 쓰다듬으려는 걸 머리를 살짝 흔들며 거절하자, 살짝 어지러워졌다.
"뭐, 그러려나. 카라마츠, 내가 누군지 기억해?"
오소마츠. 라고 입모양만 말할 뿐 신음소리만 새어나왔다. 별 수 없이 어지럽지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이다. 내 당번일 때 깨서. 그냥 눈 뜬 것만으로 좋아. 다른 녀석들은 자고 있으니까 일단 깨우고 너스 콜 할게. 이거 해보고 싶었단 말이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과 어떻게든 웃으려는 입과 목소리톤. 그걸 바라보고 있다 갑작스럽게 퍼지는 몸 여기저기의 통증에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신음만이 새어나왔다. 곧 모두에게 둘러쌓인 채 어딘가로 옮겨졌다. 의식은 잃지 않고 마취제와 진통제를 맞으면서 의사의 말을 듣기로는, 일주일을 의식을 못 차리고 있었다고 한다. 빠르게 회복되는 편이지만, 한 달은 입원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선은 외상이 나아져야 다른 치료도 할 수 있다며, 불편한 점이나 힘든 점이 있으면 자신한테만 조용히 얘기해도 좋다고, 보호자들에게는 원치 않으면 일단은 알리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픔이 좀 가시니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머리가 아파올 뿐이었다. 우선은 절대 안정. 진통제로도 다 가시지 않는 아픔에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쵸로마츠나 이치마츠나 쥬시마츠나 토도마츠나 날 보면 모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오소마츠는 아닌 척 했지만 역시 괴로워보였다. 엄마는 날 보며 울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달래며 나와 엄마를 번갈아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단, 트럭에 치였다는 듯하다. 왼쪽 손목에는 아마 그것과는 상관없을 흉터가 있다. 목이나 뇌쪽에는 큰 이상이 없지만 어쩐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들었다. 정말 목소리가 돌아올 지는 모른다. 어렴풋이 내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됐지만, 쉽사리 트럭에 치이기 전의 기억이나 목소리는 돌아오질 않았다. 머리에 어지럼증이 많이 가시고 외상은 많이 나아졌을 무렵, 휠체어를 타고 보호자 동반으로 바깥을 산책하는 게 허용됐다. 그 역할은 주로 쥬시마츠가 맡았다. 쥬시마츠는 휠체어를 밀고 병원 부지에 조성된 산책로를 돌면서 나에게 불편한 점이 없는지를 물으며 챙겨주곤 했다. 그러나, 본론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 누구도 본론으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차라리 병실에서 억지로 웃는 형제들을 볼 때보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채 바깥을 만끽하며 있는 이 시간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여전히 돌아와야 할 것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좋지 않을 기억이나 그걸 전달할 목소리를 깊숙이 집어넣고서 그저 형제들에게 기대고 싶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이지, 난 차남인데. 차남, 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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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9화를 쓴지 정확히 1424일 째, 1화 기준으로는 2148일, 쉽게 말하면 1화 쓴지 거의 5년, 9화 쓴지 거의 4년이 됐습니다. 외전이 있었지만 그것도 2년 전이네요.
그동안 2기도 나오고 극장판도 나오고 3기도 방송중이고 휴덕도 탈덕도 안하고(?)
그저 죄송하고 앞으로도 죄송할 예정입니다.
티스토리 에디터가 바뀌고 컴작업이 어려워지면서 고치고 싶은 걸 못 고친 채 일단 10화입니다. 9화의 요시다는 나카무라(5화)로 치환해서 읽어주세요. 이번 화에도 나온 동창입니다. 곧 고치겠습니다. 4년간 고민은 꽤 했는데 내용은 그대로 가되 드라마틱함이 좀 없이 건조하네요. 마치 내 방 공기와도 같은 건조함...
기다려주셨던 분, 잊어버렸다가 다시 보시게 된 분, 처음 보신 분,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하리H( )Ri
2020. 6. 26. 01:43

마법교사 오소마츠×인어 카라마츠

검푸르죽죽한 차가운 세계에서 따스한 붉은 빛에 처음 닿았을 때, 용기를 내서 수면 밖으로 고개를 든 인어는 붉은 태양을 사랑하게 되고 말았지.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과 심해보다도 까만 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들을 보며 처음으로 인어는 바다 바깥에 나가고 싶어졌어. 뭍을 오가는 거북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을 키워간 인어는 드디어 뭍에 가까이 다가가기로 했어.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 탓에 뭍의 모습을 눈에 채 담지 못하고 인어는 물 속에 다시 몸을 담궜지. 자맥질을 되풀이하며 눈에 새기는 풍경 속에 새로운 피사체가 나타났어. 언뜻 보기에, 반은 자신을 닮았고 반은 길게 뻗은 두 개의 신체 기관으로 뭍을 돌아다니는 생명체. 태양을 닮아 있는 붉은 것을 걸치고서 바다를 바라보는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 인어는 뭍으로, 뭍으로, 자신의 전부였던 바다가 어느새 끝나버리는 곳까지 헤엄쳐 그의 앞에 고개를 내밀었지.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은 바다에 갑자기 떠오른 생명체를 응시했어. 귀 뒤에 달린 아가미, 목덜미에 있는 비늘. 전설 속에서 들었던 인어일까. 소년은 옷이 젖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 쪽으로 다가갔어. 우호의 표시로 손을 내민 채로. 인어는 갑자기 다가오는 소년이 두려웠지만 저도 모르게 다가갔어. 하체에 드러나는 비늘, 꼬리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파도가 치는 곳에서 인어는 멈췄어. 소년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손을 세워서 내밀었어. 인어가 그 동작을 같은 방향의 손으로 따라하자 소년은 팔을 바꾸고 인어의 손을 잡았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 와중에도 인어는 소년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어. 더 이상 눈부신 풍경은 인어의 눈을 감게 할 수 없었고, 인어는 소년으로 시선을 가득 채웠지. 처음 태양을 봤던 날 느낀 따스함이 소년의 손에 머물러 있어서, 소년의 붉은 옷이 태양을 닮아서, 인어는 소년을 사랑하게 됐어. 
- 또 보자. 
다시 만나기 위해 인어는 소년의 손을 놓고 바다로 돌아갔어. 처음 경험한 뭍에 적응할 수 없어서 인어는 의식을 잃은 채 깊은 바다로, 바다로 가라앉았어. 소년은 잠깐의 만남에 남겨진 인어의 흔적을 주워들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인어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어. 소년은 다른 이들의 손에 이끌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어. 서로가 느낀 상반된 온도와 조그만 흔적으로 남은 그 날은 둘에게 있어 기적을 바라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 
"...라는 낭만적인 일이 있었어. 첫 수업날 첫 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니, 너희들은 아직도 애구나. 뭐? 그래서 인어는 다시 만났냐고? 글쎄. 방금 지어낸 따끈따끈한 거짓말이니까 말이지." 
야유 속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 이었던 오소마츠는 목에 걸린 팬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팬던트 안에는 그날 주웠던 비늘이 마법으로 보호된 채 보관되어 있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한 적성 검사를 수없이 실패하던 그는 무작정 바다로 달려나왔다. 그때 만난 인어를 잊고 싶지 않아서 꼭 쥐며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고, 소원에서 비롯된 마법이 비늘에 깃들어 보호 마법이 걸리며 그의 마법 적성도 개화했다. 지금은 재능이 꽃 피고 열매 맺어 마법 교사까지 되었건만. 이제는 푸른 비늘을 가진 그 인어 씨를 뭍에 데려올 수 있을 마법을 걸어줄 수 있는데. 오랜 시간을 지금 근무하는 학교처럼 느긋하고 편한 느낌으로 배운 게 아니라 바다의 짠 내음은 맡을래야 맡을 수 없는 동굴에 갇혀 스승의 맘에 찰 때까지 수련하느라 바다에 가지 못한 탓일까. 수련이 끝나고 바다에 매일 날아가지만 그 인어 씨는 커녕 다른 인어조차 본 적이 없다. 수속성 마법에는 한계가 있어 깊은 바다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니까 거짓말인 셈 치기로 했다.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몰입하던 청중도 김이 샌 듯 '하긴, 인어가 세상에 어딨겠어.' 라고 말한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거짓말같이,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다. 마법 따위는 별 것 아니게 보일 그런 기적이.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소년의 흔적은 천진난만한 웃음에, 이상하리만치 붉은 옷을 고집하는 것에, 하루가 멀다하고 해가 지지 않은 바다에 찾아가는 것에 남겨졌을 뿐이다. 온통 수수한 검은 천으로 두른 다른 교사들 사이에서 화려하게 꾸민 붉은 옷을 입은 오소마츠는 첫 부임부터 이목을 끌었다. 경건하게 마법이라는 기적을 맞아들이는 장으로서의 학교에 놓인 이물질. 그의 화려한 복장은 빛바랜 낡은 돌로 쌓아올린 학교와는 다르게 마법을 생존 수단으로 삼아 살아온 훈장과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들처럼 기적을 맞아들이기 위해 붉은 옷을 걸쳤으나 그 사정에 대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나름 배짱있게 채용면접을 봤으나 지식의 전당에 군림하는 교장의 위엄 탓에 긴장했는지 바보같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 인어는 존재하나요? 
소년의 기억에 금이 갔다. 그의 입으로 역시 그렇죠? 하며 농담하듯 나온 말에 그 금은 더 벌어지는 듯 했다. 하긴,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 직후 드디어 마법 적성을 깨우쳤다며 스승에 의해 동굴에 끌려갔다 나왔다곤 해도, 겨우 1년. '또 보자'는 간절한 사념의 유통기한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건지. 둘의 만남에 비하면 1년 또한 엄청난 시간이지만, 그 뒤에 지나버린 더 긴 기다림의 시간에 오소마츠는 속상해했다. 
퇴근 후, 딱히 마법을 걸지 않아도 커다란 수정구슬은 그를 바다로 데려간다. 찰나의 순간에 삶이 좌우된 남자는 사실 요즘 들어선 기대를 많이 접었다. 순수함은 점점 바래고 타성이 붙어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같은 생각을 하며 아련한 추억으로 남으려 하고 있었다.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해는 제법 길어져 아직 주변이 밝았다. 그 풍경 안에서 낯선 반짝임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바위산 쪽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오소마츠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처럼 유리 파편이나 물이 튀긴 거겠거니... 톡. 톡. 커다란 꼬리지느러미가 수면을 치고 있었다. 시선은 위로, 위로 향했다. 태양이 내려올 준비를 하는 곳에 눈을 고정한 채, 바다와 같은 빛깔을 가진 비늘에 뒤덮인 하체와 인간을 닮은 상체 그리고 귀 자리에 나 있는 지느러미를 가졌다. 인어의 특징이라고 전해져오는 것. 오소마츠가 가까이 온 것도 모르는지 인어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물을 튕기고만 있었다. 인어가 진짜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그였지만,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과 자신이 만난 인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에 좌절하고 말았다. 오소마츠는 약이 올라 하늘만을 보는 인어의 앞을 막아섰지만, 인어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인어의 까만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오소마츠는커녕 태양조차 비치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멍하니 인어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그제야 인어는 오소마츠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인어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꼬리지느러미로 수면을 더 세차게 두드리며 손으로 바다를 가리키더니, 바위를 차고 공중제비를 돌고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자신이 있던 바위 쪽을 응시하는 인어의 모습에 오소마츠는 의아해하면서도 부츠를 벗고 발을 바다에 담갔다. 
- 들리는가? 
머릿속에서 전해지는 소리. 하지만 그는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 알지 못했다. 
- 눈치챘겠지만 나는 시력을 잃었다. 그 대신인지 뭍에 오래 머무를 수 있게 됐지만. 바다의 존재들은 바다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전하지만, 뭍의 존재와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군. 일단 손을 잡아보지 않겠는가? 서로 맞닿아있으면 생각이 전해질 지 모른다. 소리를 내면 그 쪽으로 내가 가겠다. 
그 말에 오소마츠는 전에 인어에게 내민 적 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수면을 발로 차면 물이 튀는 소리와 번져나가는 물결이 인어를 그에게 데려왔다. 놀랄만큼 잔잔한 바다에는 어느새 태양이 녹아내려 붉은 빛이 섞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인어의 손을 잡았다.
- 진짜... 인어가 있었어!
- 인어? 인어가 뭐지?
- 당신같은 존재를 이야기하는 거야.
- 뭍의 존재는 나를 인어라고 부르는군. 이 바닷가에는 작은 뭍의 존재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 뭍의 존재라고 하면 엄청 많거든? 난 오소마츠! 나 같은 존재는 인간이라고 하고.
- 인간, 오소마츠... 오소마츠... 오소마츠...
인어는 오소마츠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이런 사념까지 생생히 전달되는 걸 그는 알까.
- 너는?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 있지만, 우선은 이름을 알고 싶어.
- 이름... 이름이라고 하면 카... 카... 미안하다. 잊어버렸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게 아니라니. 자기가 누군지를 명확하게 해주는 건데. 중요하지 않다면, 왜 오소마츠의 이름을 되뇌인 건지.
- 알았어. 그럼, 인어 씨. 혹시 한 십 년 전? 조금 오래됐는데 이렇게 뭍에서 뭍의 존재, 그러니까 나 같은 인간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 있어?
너무 대놓고 물어봤나. 기다려온 시간만큼 쌓였던 그리움이 한번에 터져서, 간절하게 이 인어가 그때 그 인어이기를 바라면서 다급한 마음이 그를 떠밀었다. 인어는 손을 잠시 놓더니 자맥질하곤 다시 손을 잡았다.
- 미안하다.
- 응?
- 사실 난 기억을 잃었다. 시력을 잃었을 때 같이 잃어버린 것 같다. 날 구해준 동료들이 나를 위해 원래 내가 어땠는 지를 이야기해줬기에 시력도 기억도 잃었다는 것을 알 뿐. 우리, 그... 인어들은 바다의 존재이므로 뭍에 오래 머무를 수 없지만, 나만은 특이하게 뭍에 오래 있어도 괜찮다고 한다만. 이렇게 뭍에 오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 보름달이 떴을 때부터 왔다고 해야 하나.
- 한 달도 안 됐나... 
- 인어와 만난 적이 있는가?
- 아마도. 어릴 때였어. 정말 잠깐이었지만 또 보자고 했거든.
- 이 바닷가에서?
- 응.
-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물어봐줄까? 뭍에서 인간을 만나 그런 약속을 했는지 말이야.
부탁할게, 라는 말이 쉽사리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소마츠에게는 무척 소중한 추억이니까. 조금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 인어를 찾고 싶은 마음과, 추억으로 아름답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 게다가 눈앞의 인어가 추억 속의 인어라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면 그의 마법으로 되찾아 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아, 아냐. 그보다 내일, 내일 다시 이 곳으로 와 주겠어? 오래 전 약속이라 이미 그쪽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고, 인어 이야기를 더 듣고 싶거든. 그런데 물에 계속 몸을 담그고 있었더니 추워서...
어느새 그의 몸 대부분이 바다에 잠겨 있었다. 발만 담그고 손을 내민 불편한 자세를 벗어나려 그런 것이리라. 내일 이것저것 마법을 부릴 준비를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음... 좋다. 나도 뭍의 존재와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고.
인어는 이제는 붉은 빛이 가시고 검은 빛에 은은한 노란 빛 달이 떠 있는 바다로 사라져 갔다. 오소마츠는 인어가 사라진 곳을 한참 바라보다, 그제서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늘을 떠올렸다. 아까 인어가 앉아 있던 바위에는 비늘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비늘을 주워담은 뒤 오소마츠는 집에 돌아가 탁자에 깨끗한 천을 펼쳐 그것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팬던트 안에 보관한 비늘을 꺼냈다. 분명 같은 색이겠지, 했던 비늘은 색이 달랐다. 가지고 있던 비늘 또한 바다를 닮은 푸른 색이긴 했지만 그 색이 옅고 투명했다. 주워온 비늘은 색이 짙고 덜 투명했으나,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 그는 실망했다. 물론 인어도 시간이 지나면 비늘이 변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묘한 확신이 부정당한 느낌이었으니까.

다음 날, 오소마츠는 강의를 마치고 남은 근무는 핑계를 대며 내팽개친 채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바닷가로 부리나케 날아왔다. 인어는 어제 처음 만난 바위에 그대로 앉아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이 인어의 눈에 더 이상 비치지 않더라도. 그러고보니 어제도 인어는 태양을 보고 있었다. 
"인어 씨!"
인어는 오늘은 그냥 가볍게 튀어올라 바다로 잠겼다. 오소마츠는 마법을 걸어 몸에 보호막을 친 뒤, 손만이 빠져나오게 한 채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인어가 어쩐지 놀란 표정을 지어서, 오소마츠는 쑥쓰러웠다. 어제와 같이 둘은 손을 잡았다.
- 인어 씨, 놀랐어? 사실 난 마법사거든. 보통 인간들은 하지 못하는... 기적을 만든다고 해야 하나.
- 뭔지는 알고 있다. 그 비슷한 거라면 인어들도 쓰고 있거든. 그럼 바닷속으로 더 들어와보면 어떤가? 아마 그 공기방울에 들어가 있으면 굳이 손을 잡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거다. 뭍의 이야기를 듣기 전, 오소마츠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있으니.
인어의 말을 믿기로 하고 오소마츠는 보호막에 수속성 마법을 건 뒤 바다에 푹 잠겼다.
- 혼자 이동할 수 있는가? 
- 응. 전에 몇 번 연습은 해본 적 있어서. 인어 씨와 편하게 이야기도 할 수 있다니 더 좋은걸.
- 다행이군. 아참, 동료에게 물어서 내 이름을 알아왔다. 카라마츠, 라고 하더군. 내가 잊어버린 시간에 이름이 얽혀서인지 동료들은 가능하면 날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니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 그래서였다. 어제 오소마츠가 신경쓰는 듯한 표정을 지어서 진지하게 물어보고 왔지.
뿌듯한 표정으로 인어, 카라마츠가 생각을 전해온다. 카라마츠. 
"카라마츠"
- 응?
- 내가 쓰는 말로 카라마츠를 부르면 이런 소리가 나. 들렸어?
- 잘 안 들렸다. 이따 뭍에 나가면 다시 들려주겠는가?
- 글쎄~
카라마츠는 삐진 듯 더 깊숙이 헤엄쳐갔다. 바다의 색은 제법 짙어져 밤처럼 되었다. 지팡이에 자그마한 빛을 켜자 그 곳에 새하얀 신전 같은 게 눈에 띄었다. 더 가까이 가려 하자 카라마츠가 가로막았다.
- 뭍의 존재가 들어올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오소마츠의 안내역을 자처했기에 여기쯤이라고 내가 알 수 있었던 거지만 오소마츠가 혼자 들어왔으면 위험해졌을거다.
수속성 마법에는 한계가 있다. 그건 그런 의미였나. 깊은 바다까지 들어갈 수 없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결계나 금기가 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 인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인어가 알고 있는 뭍과 바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여기까지 왔다. 저 신전은 바다의 신을 모시는 곳이다. 나와 같은 인어들이 신탁을 받아 다른 바다의 존재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가까이서 바다의 신의 시중을 드는 존재들도 있지만, 나는 기억을 잃고 깨어났을 때 딱 한 번밖에 뵙지 못했지. 
[너는 사랑해선 안 될 것을 사랑하고 말았구나. 가여운 것.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끝내 갈구하게 되는 것이니. 네가 적어도 이 이상의 고통은 느끼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주겠다.]
- 신께서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그 덕인지 지금은 이렇게 밝게 웃으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신을 직접 만나다니 굉장하잖아. 오소마츠는 그런 게 기적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 사랑해선 안 될 것이 무엇인진 잘 모르겠지만, 그후 신탁으로 뭍과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 정확히는 하늘과 바다의 이야기지만. 
- 하늘과 바다의 이야기?
- 그렇다. 하늘과 바다의 신은 형제라는 모양이다. 물론 다른 형제도 있다고 하지만... 둘은 생명이 있는 존재의 세계를 양분하여 다스리는데 그게 하늘, 뭍과 바다인 것이지.
사념이 전해져오는 것일텐데,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이야기를 계속 전했다.
- 서로의 세력권이 늘 맞닿아 있기도 하고, 두 신은 닮은 점이 많아서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는지는 당연히 신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그러던 중 뭍의 존재 중 인간이라는 종족이 하늘의 신의 가호를 받으면서 번성했고, 인간은 뭍의 지배자가 되었지. 그렇게 해서 인간은 신의 능력의 일부를 손에 넣게 되었다는데, 그게 아마 오소마츠가 쓸 수 있다는 마법이라는 것일 거다.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법의 기원을 들었네. 인간이 뭍의 지배자...인가.
- 신의 능력까지 손에 넣은 인간은 이윽고 신의 권위까지 흔들기 시작했어. 이에 분노한 하늘의 신은 인간에게 심판을 내리지. 거기에 바다의 신도 동조해서 뭍은 일부의 존재만 남고 전부 심판의 파도에 휩쓸려 생명을 잃게 돼.
- 응? 그렇다는 건...
- 오소마츠는 심판 이후 새로이 번성한 인간의 후예라는 거지.
- 심판은 순조로이 끝나고, 하늘의 신은 남겨진 존재들이 다시금 뭍에서 번창할 수 있도록 했어. 그러나 심판의 파도로 꺼진 생명들은 바다의 신이 거둬들여야 했지. 바다는 한동안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고, 치우고 분해해도 생명을 잃은 존재의 흔적은 계속 남아 바다의 신을 괴롭게 했어. 신은 죄책감과 함께 하늘의 신을 원망했어. 더러운 일은 자기가 혼자 해야 했다고. 내리쬐는 태양이, 반짝이는 세상이 미워서 바다의 신은 마음을 닫아걸어버렸어. 그 흔적이 이 결계고, 아마 뭍에 너무 다가간 나는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마저도 신께서는 용서하셨지만.
오소마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인어에게서도 마치 마음을 닫아걸어버린듯한 체념이 느껴져서. 기억을 해내려고 해도 이제는 꺼낼 수 없는 과거를 더듬으려고 노력한 카라마츠에게, 자신이 그토록 기다린 인어였다고 말한들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다.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렇게 믿든 믿지 않든. 신의 이야기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카라마츠 나름의 변명일 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애당초 자신이 겪은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과거를 위해서.
- 어떻게 생각해?
- 무얼 말인가?
- 기억을 잃은 거, 시력을 잃은 거 말야.
- 그거야 뭍에 너무 가까이 간 내가 나빴...
- 그게 아니라 카라마츠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에게 이름을 알려줄 땐 기뻐했잖아... 그런데 그거 말고는... 카라마츠는 여전히 태양을 보고 싶어 하잖아! 오늘도 나를 기다리며 태양을 보고 있었잖아... 날 만나기 전에는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미련은 없었던 거야?
오소마츠가 토해낸 사념에 카라마츠는 겁먹은 듯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카라마츠는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 또 보자,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손을 흔들자 바닷물이 용솟음치고 오소마츠는 방어막째 순식간에 해수면으로 떠올랐다. 
"젠장! 왜 자기 생각을 얘기해주지 않는 거야..."
분한 마음에 모래를 실컷 걷어차고서야 오소마츠는 돌아갔다. 그 뒤로 한동안 오소마츠는 바다에 가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지났을까. 오소마츠는 바다가 그리워졌다. 구슬을 타고 날아가지 않고 걸어서 이동하니 어느새 검게 물든 바다에 보름달이 띄워져 있었다. 인어를 찾기 위해서라지만, 꽤나 오랫동안 바다에 매일같이 왔던 탓인지 한 달만의 바다는 그리운 냄새를 풍겨왔다. 그러고보니 오소마츠는 밤바다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인어를 낮에 만났기 때문인지 어두워지면 곧 돌아가곤 했으니까. 보따리에서 술을 꺼내서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한 병을 들이켰다. 집에서도 늘상 마시는 술이건만 바닷바람이 더해져 짠맛이 느껴졌다. 걸어와서 지쳐있는데 술을 들이켰으니 금세 취하고, 취한 눈에 아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를 헛것 치부하며 또 한 병을 꺼내 마시려던 때,
"거기, 누구 있는가?"
차분히 가라앉은, 낮지만 고운 목소리. 들어본 적 없지만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함.
"있거든? 그러는 넌 누군데?"
"카라마츠. 카라마츠라고 한다."
고개를 들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카라마츠가 서 있다. 모래사장 위에 서 있다. 푸른 비닐에 덮이긴 했지만 인간처럼 두 다리로 서서.
"난 오소마츠야. 우리 만난 적 있던가?"
두 다리로 선 모습에 문득 두려워졌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어쩌면 카라마츠는 또 다른 무언가를 제물로 바쳐 뭍에 선 게 아닐까.
"또 보게 돼서 기쁘다, 오소마츠."
카라마츠는 눈물을 흘렸다. 사실, '보게' 됐다고 말하는 카라마츠에 눈엔 여전히 오소마츠는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카라마츠가 흘리는 눈물 방울방울에는 오소마츠가 비쳤다.
"어떻게 된 거야... 잠깐 사이에 너무 많이 변했잖아."
"잠깐이라니. 내게는 긴 시간이었다. 이대로 오소마츠가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며 걱정했다고."
"울지 마... 이야기 들을 테니까."
"으응... 긴 얘기는 아직 인간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니 물가 쪽으로 가지 않겠는가."
카라마츠는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푸르게 덮인 비늘의 다리는 서서히 원래의 인어와 같은 꼬리지느러미의 모습으로 변했다. 
- 오소마츠가 얘기했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오소마츠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의 뜻이 있겠지, 동료들이 있으니 걱정없지... 그렇다고 태양에 대한 동경은 사라지지 않았던 건지 나는 뭍으로 올라가려고 애썼고, 그 결과 오소마츠를 만났던 거다. 오소마츠를 뭍으로 돌려보내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신전에서 기도를 드렸지. 잃어버린 기억을, 기억을 지운 게 신의 자비라는 걸 알지만, 돌려달라고. 바다의 신께서 답해주셨다. 그건 자비가 아니라 벌이라고. 그러나 기억을 찾으면 그 벌보다도 더 큰 고통을 받을 거라고. 두려웠다. 그러나 오소마츠를 떠올리니 용기가 났다. 기억을 돌려달라고 말했지. 신은 다른 제안을 했다. 시력을 돌려주겠다고. 기억을 포기하면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태양도 그러면 볼 수 있다고, 나를 회유하셨지. 오기가 생겼다. 기억을 돌려달라고. 뭍에 가는 건 포기하지 않을 거고, 태양은 볼 수 없어도 괜찮다고. 그 결과 기억을 찾고, 신의 축복으로 뭍을 걸을 수 있는 다리를 받았다. 동료가 얘기해주길, 이 다리의 모습은 신의 그것과 비슷하다더군. 
"잠깐. 태양은? 늘 보고 싶어했..."
- 둘 다 가질 순 없었던 거지. 나에게도 묘한 감이 있었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분명 오소마츠와의 만남이 있었을 거라고. 기억을 찾자, 내 온 몸과 눈은 불타는 듯 했어. 하늘의 신과 바다의 신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진 결과 생긴 서로의 마음의 장벽이 말이지. 나는 하늘의 신의 영역을 넘어서고 말았던 거다. 그 영역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태양을 본 내 눈과 몸이 불타는 걸 바다의 신께서 구해주셨던 거였고. 불타는 와중에 기억 속의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손을 내밀어주었어. 그 손이, 내게는 구원이었지. 오소마츠. 아마 네가 기다리던 인어는 나였던 모양이다. 더 일찍 기억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때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소마츠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카라마츠는 그걸 볼 수 없었다. 
"기억 속의 인어가 아니라도 괜찮았어. 카라마츠가,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완전 바보잖아... 바보 카라마츠..."
더 많은 이야기를 하자. 보이지 않아도 뭍을 느끼게 해줄게. 태양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줄게. 그러니까.
-날 뭍으로 데려가줘.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두 팔로 들어올렸다. 그 상태로 구슬에 타서 바다를 뒤로 한 채 밤을 지났다. 어두운 하늘에 붉은 빛이 물든 그 시간, 하늘과 바다를 가로지르던 결계가 흐려졌다. 바닷물이 용처럼 솟구치더니 잠시 허공을 머무르고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카라마츠의 눈에도 잠시 붉은 빛이 비추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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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전에 썼다 오늘 완성한 거 포타에 이어 또 복붙
맨날 나만 알게 쓰는... 제우포세향도 좀 넣었는데 워낙 존재니 뭐의 신이니 돌려 말해서 글자수만 많아지고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좀 쓰고 쓰고 써야 늘텐데 하하하하하...



Posted by 하리H( )Ri
2020. 6. 26. 01:39

짧글/니트/여장 요소

두 가지 색으로 섞인 솜사탕을 좋아한다. 솜사탕하면 파스텔 핑크가 먼저 떠오르지만, 거기에 파스텔 블루가 섞여 들어가 팡팡 부풀려진 솜사탕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좋아한다. 어릴 때 일이다. 좋아해서 먹지 못하고 그저 들고 다녔더니 솜사탕은 쭈글쭈글해지고 솜사탕을 든 손은 녹은 설탕에 끈적끈적해졌다. 망가진 솜사탕에 훌쩍거리면 조용히 다른 손에 사탕을 쥐어주는 이가 있다. 헤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웃으면 그쪽도 웃어주는 것이다. 다음날 그는 솜사탕을 사와선 나만 슬쩍 불러냈다. 끈적해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솜사탕을 움켜쥐어 단단히 뭉쳐 입에 던져넣더니, 또 하나 뭉쳐 내 입속에 넣어주면 그건 그거대로 달콤한 마법에 걸리는 듯 했다. 그게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있어 최고로 달콤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센스가 있고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 내가 여장에 눈뜬 건 키가 작고 귀엽다는 이유로 문화제 여장 선발대회에 떠밀려 무대에 선 이후였다. 물론 매일같이 입고 싶은 생각도 없고 바깥을 돌아다니기엔 용기가 안 나서 가끔가다 옷을 사모아 숨겨둔 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입어보는 정도. 은밀한 놀이에는 달콤한 매력이 있다. 나만 알고 싶은 맛. 나만 갖고 싶은 맛. 어느 시점부터 여장을 위한 쇼핑은 나만이 아니라 내가 입히고 싶은 사람에도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패션감각이 정말 쓰레기같으니까, 차라리 내가 골라준 옷을 입고 여장을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나의 여장을 가끔 장난식으로 형제들에게 선보이고는 한다. 미팅 연습같이 실상 도움은 안 되는 놀이에 불과한 것이건만, 나의 욕망을 해소하는 무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 우리 형제는 그다지 서로의 취미 영역을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뭐든 다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거기에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한다. 그를 여장시키고 싶다.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의외로 잘 어울리는 데 감탄해줬으면도 하다. 그렇지만 그는 남자다움에 집착하는, 이른바 여장하고는 상극인 취향. 어지간해서는 입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카라마츠 형, 심심해."
"으응?"
방에 단둘이 있게 된 어느 날. 나는 말을 걸었다.
"심-심-해-"
"심심하다고! 놀아줘!"
"성인 남성이 떼를 쓰는 건가. 어쩔 수 없는 브라더로군! 이 형이 오늘은 특별히 놀아주도록 하지. 뭘 하고 싶은가."
역시 폼을 잡는다. 어릴 적에는 파트너라 부르며 둘이 어울려 장난을 쳤지만, 그는 나름 형 노릇을 하려 들었다. 내가 울 때, 떼쓸 때, 혼나려 할 때. 위로하는 방법은 형편없었고나 대신에 혼나는 게 일상이었지만, 그는 그럴 때만은 내 형으로 있었다. 지금은 형이라고 부른지 꽤 됐지만, 역할은 그다지 바뀐 게 없어.
"팔씨름 어때?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훗. 이 상남자에게 도전하겠다는 건가? 지고 나서 질질 짜지 말라고."
3판 2선승제. 두 판으로 끝나버렸다. 나 헬스장 다닌다고 이야기 했던 거 같은데. 카라마츠 형, 그다지 운동하진 않잖아. 자기가 한 말 되돌려받지 말라고...
"질질 짜지 말고. 내 소원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거야. 그야말로 남자 중의 남자의 의식인거지!"
그의 눈이 반짝 빛난다.
"여장하고 간식 사오기!"
빛을 잃다못해 생기조차 사라진 그의 눈을 피해 그동안 생각해 온 옷을 꺼내온다. 가발도 제대로 준비하고, 메이크업 준비도 만전. 자신감도 자존감도 꺾인 그는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순조롭게 발랄한 스타일의 트윈테일 여성으로 변장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자인지 눈치채겠지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하고 자신은 시도하지 못한 길거리 여장 데뷔를 뻔뻔하게 시키려 하는 나였다. 폰으로 사진을 몇 장 남긴 뒤, 간식을 사러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진 속에는 내가 상상해온 부끄러운 표정과는 좀 다른, 넋이 나가있는 얼굴들이 가득했다.  그러다 마지막 컷, 찍는 나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카라마츠 형은 부끄러움을 담은 미소로 카메라를 봐 주었다. 우연인 걸까. 이내 쫓아가지 않은 게 아쉬워 달려나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공원에서 솜사탕을 기다리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파스텔 핑크의 솜사탕 하나와 파스텔 블루의 솜사탕 하나. 그리고 일회용 컵에 담긴 핑크와 블루의 마블. 컵에 담긴 솜사탕 둘. 불편한 동작으로 이것들을 안고 오는 그에게 달려가 핑크 솜사탕 하나와 컵 솜사탕 하나를 받아들었다. 벤치에 앉았다 갈까 권유했지만 카라마츠 형은 고개를 숙이고선 얼른 집에 가자고 보챘다. 입으로 베어물면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보드라운 것이 녹아내린다. 다시금 솜사탕을 베어물었다. 이번에는 카라마츠 형의 입에 넣어주고 입술을 맞댔다. 아까보다도 보드라운, 폭신폭신한, 그리고 살면서 가장 달콤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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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타도 쓰고 여기도 쓰니까 헷갈헷갈하는데 두 군데 다 똑같은 걸 올리면 좀 그런가... 싶다가도 그냥 올립니다
덧글후기 옮겨오기
써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연습용. 모바일로 넘어오면 확실히 티스토리보다 포스타입이 쓰기에 편한 거 같아요. 설탕을 들이붓고 뽀쪽을 추가... 저는 순수하므로 뽀쪽을 매우 사랑하고 많이 넣습니다 흐흐 쎅쓰...


Posted by 하리H( )Ri
2017. 2. 15. 19:58

[카라른/이치카라]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9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카라마츠 중심, 결론적으로는 카라총수지만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캐붕,날조,글솜씨없음주의

※5화 카라마츠 사변 기반

 

9화가 데자뷰라고 느끼신 분은 정상입니다. 다만 안에 내용은 많이 바뀌었어요.

또 이렇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음 화 작업중이에요 ㅠㅠㅠㅠ 벌써 이것도 1년 되가는...

뭘 쓴게 있다고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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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바깥을 배회하자면 머리 위에 떠 있던 해는 어느새 기울어 지평선을 향하고 있다. 그다지 기다릴 셈은 아니었지만 쵸로마츠가 생각보다 늦어지자 병원 입구를 자꾸 바라보게 된다. 병원 앞뒤를 둘러싼 작은 산책로에는 링거 거치대를 끄는 노인, 휠체어에 탄 소년과 그걸 미는 남자, 목발을 짚고 느리게 움직이는 여자 등이 보였다. 그리고 의외로 고양이도 몇 마리 돌아다녔다. 병원 직원이 먹이를 주는지 한켠에 빈 그릇과 물통도 놓여 있었다. 고양이들을 놀아주며 산책로 벤치에 앉아있자면, 고양이처럼 굽은 등을 한 쵸로마츠가 느릿느릿 입구로 걸어 들어온다. 빠른 걸음으로 짐을 받아주자 그는 한숨을 쉬면서 카라마츠가 입원한 병실 쪽을 바라보았다.

 

"좀 늦었네. 엄마 병수발이라도 하고 온 거?"

 

고개를 젓고선 쵸로마츠가 입을 떼려다 다물어버렸다.

 

"아니. 그건 아냐. 이따가, 다 같이 있을 때 말할게."

 

그는 능숙하게 숨기질 못한다. 분명 중요한 말이겠지. 그래서 다 같이 있을 때 말한다는 걸까. 그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저 표정을 본다면 누군가는 쵸로마츠에게 말을 해 달라 할 것이다.

 

"일단 올라가자. 어차피 계속 밖에서 있었을 거 아냐. 그 사이에 카라마츠가 일어났을 지도 모르니까."

 

 

쵸로마츠가 병실 문을 열자 모두가 이쪽으로 왔다. 오소마츠 형은 '쵸로마츠, 수고~'라는 말과 함께 쵸로마츠를 가볍게 맞아주며 나를 쳐다봤다. 어쩐지 그 눈길이 거북해서 눈을 피하며 다시금 복도 의자에 주저앉았다. 쵸로마츠는 훌쩍거리는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를 달래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오소마츠 형이 복도로 나왔다.

 

이치마츠, 뭐 하나만 물어도 돼?”

 

“...뭔데.”

 

아까 쵸로마츠랑 얘기 나눈 거 있어?”

 

별건 없어. 이따가 다 같이 있을 때 얘기해준다는 건 있었지만.”

 

내가 숨겨봤자 어차피 곧 쵸로마츠의 표정을 보고 알 테니까 그냥 말해버린다.

 

?”

 

글쎄.”

 

그리고, 왜 카라마츠를 보러 들어오질 않는 거야? 걱정은 엄청 하고 있는 주제에.”

 

하나가 아니잖아! 거기다 당황스런 질문이다.

 

...누가 걱정한다고...”

 

하고 있잖아? 엄청. 너도 힘들어하는 거 있는 거 아냐?”

 

그다지...암만 썩을마츠라 해도 저렇게 다쳐서 못 일어나면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거 말고.”

 

“......”

 

나는 형이니까, 카라마츠의 고민을 알아주지 못한 거라던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거든. 너도 그런 거 있지 않을까 해서.”

 

이럴 때 느낀다. 역시 장남은 장남. 바보 주제에 저런 건 잘 알아챈다.

 

쉽게 얘기하네.”

 

?”

 

그 정도잖아? 단지 형이니까 몰라줘서 미안한 거로 끝. 녀석을 저기까지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않아. 느끼는 죄책감이 있다고 해도, 그저 의무적인 것뿐이니까. 나랑은 다르다고. 나랑은...”

 

형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위험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런 중얼거림조차 끈질기게 물어올 게 분명하니 다시 병원 밖으로 나간다. 카라마츠의 병실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채 멍하니 지내고 있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푸른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릴 적 나비의 생태를 알아보자는 내용이었나, 하여간 교실에서 애벌레를 길렀던 적이 있다. 다들 어서 나비가 되기를 기다렸지만, 애벌레는 몇 번이고 허물만을 벗을 뿐, 나비가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잘난 척 하던 녀석이 이런 게 탈피라면서, 이걸 몇 번 해야지 나비가 된다고 말했던가. 애벌레에게 상추라던가 먹이를 주는 담당이 나였기 때문에, 벗겨진 허물을 보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이윽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어버렸다. 담임이 호들갑을 떨며 겁을 주면, 몇 명인가가 피식거리고 몇몇은 나비 죽었냐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우화해서, 사육장의 뚜껑을 열어주니 날아가는 모습에 그 당시에는 감동했었다. 하지만, 신비롭고 아름답게 남은 그 장면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본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긴 시간, 날 수 있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 채 자라온 녀석의 비참한 최후를 보며 여느 녀석들처럼 죽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비가 되기까지 허물을 벗으며 고통받았을 그 시간들이 아깝고 쓸모없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껍데기를 깨고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한들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하면, 어차피 약할 뿐이라고. 산소라든가, 세상이라든가, 무심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마는 나다. 그런 내게 카라마츠는 예나 지금이나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을 내내 뿌리쳤다. 미움을 샀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나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카라마츠의 마지막 연극을 하기 전, 봄이었다. 그 뒤,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우리의 마지막 학생시절을 소비하는 동안, 카라마츠는 급격히 안쓰러워졌다. 그 전에도 그는 남자다운 것을 좋아하고 종종 연극톤을 내뱉었으며 폼 잡으며 뜬구름 잡는 소리를 내뱉는 사람이었지만 그 시간을 거치며 카라마츠는 안쓰러운 캐릭터에 암묵적으로 무시하는 편이 낫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연극에 대한 어긋난 애정일 거라 생각했다. 5년을 빠져 살았던 연극이다. 그걸 어쨌건 타의로 관두게 되었으니 카라마츠의 변화에 동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졌다. 마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라도 한 양, 이상한 필터로 타인의 말을 걸러듣는가 하면(주로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오자키처럼 남자들이 동경할 법한 패션이나 말투를 과하게 써서 눈총을 받거나 자기애 넘치는 작품들을 양산해내곤 했다. 거기에 질려서 결국 형제들까지 안쓰럽다거나 무시하는 일이 된 게 고작 그 1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너무도 달라진 껍데기에 사람들은 적응하고 바뀌어갔다. 카라마츠의 상담에 제대로 대응해주지 못한 나에게도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전보다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짜증나서, 그리고 나도 만사가 부정적으로만 보여서, 카라마츠를 대하는 방식은 점점 심해졌다. 내가 자기혐오로 무장하고 땅굴을 파는 타입이라면 그는 전형적인 나르시스트였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으면서도 그 발현방식이 정반대라 그런지 이전보다도 그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는 관계. 거기에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갔다. 나도 상처받고 있잖아. 애초에 저런 안쓰런 모습 관두면 안 되나. 그렇게 자신이 단단한 척 애써봤자 남는 건 없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변하지 않았다. 이젠 카라마츠는 원래 저런 녀석이었지라고 여겨질 정도로. ‘이치마츠가 제일 걱정된다고라고 들을 때 그걸 감싸주는 카라마츠의 본질마저 안쓰럽다 여길 정도로. 물론 약한 모습도 자주 보이지만 그가 꾸며낸 껍데기는 단단해져서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화를 기대해본 적은 없다. 그 껍데기로 사는 게, 그 껍데기가 본질이 되는 게,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거 아닐까. 물론 저런 어른이 되는 건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지만. ‘어른은 좋은 의미로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고, 니트 생활을 하며 미루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고. 어릴 적에 생각했던 어른은 되고 싶은 존재였는데 삶이 이어지면서 어른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싶고. 훌륭한 어른이 있는가하면 쓰레기 같은 어른이 있고. 그 쓰레기도 타는 쓰레기와 타지 않는 쓰레기로 나뉘듯 내가 겪은 쓰레기어른과 내가 돼버린 쓰레기어른은 다르고. 더 이상은 자기가 누군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이 어른의 장점이라 멋대로 여긴다. 그 누구보다 고민 없는 남자 카라마츠도 영 쓸모없고 어른답지 않지만 어른은 어른인거다. 그런 판정을 내리며, 우리 여섯 쌍둥이가 모두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것에 조소하곤 했다. 설마, 껍데기가 깨지는 모습을 보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균열은 조그맣게, 예상치 못하게 생기는 법이니까. 카라마츠가 치비타에게 납치를 당했다 돌아온 날. 버릇처럼 그에게 툭툭대면서 엄살떨지 말라고 했지만 병원에 다녀와 붕대를 둘둘 감은 카라마츠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거실에 1인용 요를 깔고 카라마츠가 잘 수 있도록 해둬서, 늘 좁았던 6인용 이불은 넓어보였다. 도대체 납치 당일에는 왜 눈치를 못 챈 건지 의아할 정도로 카라마츠의 빈자리는 컸다. 잠결에 밖으로 나돌아다니다 우리의 먹튀에 열받은 치비타에게 잘못 걸렸던 거겠지 생각한다. 납치극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카라마츠를 위해서인지 스스로를 죄책감에 몰아넣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 뒤로 누구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으니까. 카라마츠의 잠자리를 살펴주자 붕대와 반창고로 뒤덮힌 그의 얼굴에 핀 미소는 여전히 해맑아서, 그날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리에 누우면 옆의 빈자리를 괜히 휘적거리고 요에 파묻혀 카라마츠의 흔적을 더듬기도 하고 원래는 건너였던 토도마츠를 괜히 건드리기도 하고, 그러다 정신이 맑아져 버렸다. 다사다난한 날이었다. 친구인 고양이가 본심을 말하는 약을 맞고, 내 본심이 들켜서 화내버리고, 나 때문에 도망간 고양이를 쥬시마츠가 찾아주고, 모두와 화해하고선 목욕을 끝내고 돌아오자 심한 꼴을 하고 있는 카라마츠가 있고, 카라마츠의 상태 탓인지 모두들 솔직하게 싹싹 빌었는데, 아마 에스퍼 냥이 사건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평소같았으면 그렇게 심하게 다쳐와도 별 신경 안 썼을 거라 생각하니까. 맑아진 정신에서는 끊임없이 그날 하루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때, 1층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인가? 하지만 문이 열리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리는 게 영 이상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지붕이 살짝 울렸다. 몸을 일으켜 조심히 방을 빠져나왔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누가 올라갔나 살피러 가자, 그곳에 익숙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핫...”

 

우는지 웃는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그의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은 분명 카라마츠였다. 왼쪽 손목에 무엇인가 반짝, 하고 빛났다. 으윽하는 소리를 내며 카라마츠가 움츠리고 다시금 아까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슬쩍 카라마츠의 몸이 틀어져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넋이라도 나간 듯이 그저 자신의 손목을 긋고, 긋고, 그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손목을 긋던 것을 떨어뜨렸다. 아까의 웃음소리, 아니 웃음소리라기엔 애처로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소리조차 목구멍에서 막힌 듯 작게 들려왔다. 울음이 섞여 마음껏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소리. 카라마츠는 망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리에 맷돌에 맞아 목이 꺾인 카라마츠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탓이야. 무서워. 서둘러 내 잠자리로 돌아왔다. 잠자리에서마저 비치는 달빛은 나의 가슴을 찌르고 잠 못 이루게 했다. 그 뒤론 카라마츠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카라마츠가 오는 걸 살피고 밖에 나가거나 했다. 병실에 있지 못하는 것도 그 탓이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고 숨이 막히는 것 같으니까.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날이 어둑해졌다.

 

이치마츠, 들어가자.”

 

쵸로마츠가 저녁밥은 먹어야 한다며, 병실에서 마중을 나왔다. 고개를 흔들자, 그는 머리를 감싸며 얘기한다.

 

밥은 먹어야지. 이런 상황에 한 명 더 쓰러지면 정말 곤란하다고? 밥 먹으면서, 모두에게 얘기 좀 할 거니까.”

 

...”

 

쵸로마츠의 손에 이끌려 병실로 들어왔다. 쥬시마츠가 애써 밝은 얼굴로 뭐하고 있었냐고 물으면, 그냥이라 작게 중얼거릴 뿐. 카라마츠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연스레 밥상에 둘러앉듯 작은 탁자에 모여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밥을 삼켰다.

 

슬슬 괜찮을까나. 모두에게 할 말이 있는데.”

 

좋다고, 답하는 사람은 오소마츠 형밖에 없었지만, 쵸로마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집에 간 김에, 카라마츠가 학창 시절에 무슨 일을 겪지는 않았을지 조금 알아보고 왔어. 내가 알아본 것만으로는 카라마츠가 이 지경에 이른 것까지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추측까지 더해서 정리하느라 바로 말하진 않았어. 이거 말고도 아마 각자가 알고 있는 일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 다 얘기하라고는 하지 않을게. 다만, 카라마츠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줘.”

 

쵸로마츠는 카라마츠의 중고등학교 시절 연극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봤자 제3자의 이야기로, 카라마츠가 겪었던 일이나 감정을 다 대변해주지는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상냥하고 의지되는 형으로 남고 싶었던 집에서의 카라마츠와는 다르게 학교에서의 그는 평범했다. 바보여서 수업에 따라가기 힘들어했다거나, 늘 즐겁게만 보였던 연극부 활동도 부원들간의 트러블이라든가에 말려서 곤란했다거나. 생각없어서 좋겠다느니,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느니, 그건 그가 한껏 꾸며낸 허세에 말려든 것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다만, 힘들 때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털어놓거나 하지 않은 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들 똑같았는데, 나도 그랬는데, 녀석만 강한 척 하다가 괜히 힘들어지게 된 거 아니냐고. 그런데, 학창 시절의 일들이 이제 와서 카라마츠를 조이는 이유가 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졸업하고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잖아. 나름대로 극복한 거 아니였냐고. 안쓰럽게 변해가면서.

 

“...그러다 요시다 군이라고, 이치마츠 기억나? 1때 같은 반이었던 녀석.”

 

1때라. 좋은 기억이 없어서 쵸로마츠 외의 동급생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녀석도 연극부였는데, 얼마 전에 카라마츠를 만났다고 하더라고. 그냥 예삿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연기 쪽으로 안 나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호들갑이더라. 카라마츠를 만났을 때도 그런 말을 했다고 했어. 확실치는 않지만 그때쯤부터 카라마츠가 우울해하기 시작했던 거 같아.”

 

그거였나.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마츠가 납치당했지. 시기를 더듬어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

 

납치극을 얘기하자, 표정들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럼, 카라마츠 형에게 있어서는 불행이 연달아 겹친 거...였을까...”

 

토도마츠가 힘없이 말했다.

 

그랬을지도...”

 

쵸로마츠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마무리를 지어버렸다.

 

 

 

병실을 나가서 복도에서 잠드려 하자, 쥬시마츠와 토도마츠가 붙들고선 카라마츠가 보이지 않을 법한 커튼 너머 자리로 데려왔다. 하필 잠버릇이 고약한 오소마츠 형과 함께 써야 했지만, 다시 나가기엔 두 사람에게 미안해져서 그대로 누웠다. 카라마츠가 자해하던 이야기, 했어야 했나. 데카판 박사에게 다시 고양이에게 기분 약을 주사해 달라고 부탁할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커튼 너머에서는 심장박동을 측정하는 비프음과 다른 녀석들의 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카라마츠, 내일은 깨어날까. 하지만, 그때의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원망할까봐 두려웠다. 쵸로마츠는 알고 있는 얘기들을 말해달라고 했지만, 다른 녀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조차 마음을 굳혀야 하는 일이었다. 쉽게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으면 불안한 생각들만 스쳐갔다. 이렇게 병원에서의 둘째 날이 지났다.

 

...”

 

창가 근처라 떠오르는 해의 빛이 눈을 자극하고, 거기에 조금씩 정신이 깨어났다. 거기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하악, 하악, 하아악...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한 숨소리는 카라마츠의 것이었다. 재빨리 일어나 그를 흔들어보아도 대답 없이 눈물과 식은땀,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거친 숨소리만이 나온다. 옆에 있는 응급 버튼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제발 누군가 와주기를 빌어본다.

 

카라마츠...카라마츠...!”

 

내 소리에 다들 잠이 깨어서 누군가는 복도로 달려나가고 누군가는 떨리는 내 몸을 잡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와 담당의가 카라마츠를 데려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녀석이 이마를 감싸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느끼는 고통이 저거다. 사고로 치인 곳보다 저번에 우리가 던졌던 집기들이 맞았던 이마가 더 아프다는 건가. 그 모습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 다시금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카라마츠에게 거리낌 없이 대했던 주제에, 이런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이렇게 소중한데,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그걸 표현하지 못해서, 그는 나를 의지해주지 않은 채 스스로 깊은 고통으로 빠져들었다. 참을 수 없어서 의사를 따라 중환자실 쪽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의 숨은 끊어질 듯 아슬아슬해서, 이대로 있다간 그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았다. 어느새 모두 카라마츠 옆으로 붙어서 중환자실 앞까지 왔지만, 의사는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보호자 분들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며. 닫힌 문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듯,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될 것처럼 느끼게 했다.

 

 

 

아직 카라마츠랑 헤어질 수 없는데.

 

카라마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카라마츠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잔뜩 있는데.

 

카라마츠가 왜 고통스러워 하는지조차 모른 채로, 그를 보낼 수 없는데.

 

옆에 있는 게 당연해서, 그동안 왜 잘해주지 않았는지, 저 문을 보면서 후회한다.

 

다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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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양심없다...그쵸?

저에게 돌을 던져주...뭐 읽는 사람도 없겠구나.

이렇게 쓸쓸히 잊혀지고(※그 전에도 남은 적 없음)

어느새 이거 쓴 지도 1년 되어가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22일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장편감도 아닌데 ㅋㅋㅋㅋㅋㅋ 9화짼뎈ㅋㅋㅋㅋㅋㅋ

 

 

 

죽어야겠다.

그보다 카라마츠 잠자는 숲속의 미녀같다. 몇 달째 잠에서 못 깨네...미안...

Posted by 하리H( )Ri
2016. 9. 19. 09:03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카라마츠 중심, 결론적으로는 카라총수지만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캐붕,글솜씨없음주의

※5화 카라마츠 사변 기반

 

 

※제가 까만 배경이 무서워서 더욱더 허접하게 타이틀 바꿔 달았습니다. 안쓰러운 그림 실력 양해를...

아무도 몹싸 오프닝의 패러딘지 모를거야 개차판으로 그려놔서

타이틀 그려주실 분 구합니다

아무도 안해줘 그런거

 

※이번 편은 토도마츠 시점 +a입니다. 그동안 누구 시점인지 쓰지 않은 +a가 있었지만 정황상 아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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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는 나와 카라마츠 형만 남아있다.

조용히 카라마츠 형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는다.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심장은 계속 뛰고 있구나.

두근거리는 느낌과 따스한 체온에 기대듯 엎드린다.

형을 부르다 지쳤던 걸까.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내 형의 환자복과 내 뺨은 축축해진다.

그때 오소마츠 형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불렀다.

토도마츠, 잠깐 바람 좀 쐬고 와.”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았다.

어째서...”

기분전환 좀 하고 오라고.”

오소마츠 형은 애써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얼굴에 진 그늘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힘들게 몸을 일으켜 병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오소마츠 형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게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토도마츠.”

마치 자기에게 얘기하듯, 나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 말을 들으니 닦았던 눈물이 다시금 나오려 했다.

카라마츠가 이렇게 된 건 모두의...나의 탓이니까...너만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고? 그리고 카라마츠라면 너까지 힘들어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을 거야.”

이래도 되는 걸까. 카라마츠 형을 막지 못한 걸 탓하기는커녕 모두의 탓이라고 하다니. 그런 것까지 감싸 안으려 하지 말라고. 이럴 때만, 치사하게 장남으로 나서는 거야?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병실을 나왔다. 쥬시마츠 형이 앉아 있다가 반겨준다. 형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지만, 날 위해서인지 억지로 웃으려 하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쥬시마츠 형은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단팥죽 두 캔을 뽑아왔다. 단팥죽이라니, 쥬시마츠 형다워서 살짝이 미소가 지어진다. 형이 건네는 따뜻한 단팥죽 캔을 건네받아 마시며, 쥬시마츠 형도 과연 오소마츠 형처럼 우리 책임이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쥬시마츠 형도 같은 생각을 하겠지. 하지만, 카라마츠 형에게 내가 했던 일은, 분명 모두가 함께 책임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여섯 쌍둥이라곤 해도 매 순간을 여섯이 함께 하는 건 아니었다. 여섯은 그만큼 많은 수인걸?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짝지어 노는 일이 많아졌다. 악동 중의 악동 콤비인 오소마츠 형과 쵸로마츠 형, 그나마 얌전한 이치마츠 형과 쥬시마츠 형이 주로 어울려 놀았고 장난끼 많은 나와 카라마츠 형이 짝올 이뤄서 놀았다. 악동 콤비에 댈 건 아니지만 나와 카라마츠 형도 장난질을 제법 했는데, 우리 둘은 역할 분배가 철저했다. 계획은 내가 세우고 실행은 카라마츠 형이 맡아 다른 형제나 치비타, 이야미 등을 골려주곤 했다. 철없는 시절이었다. 장난이 성공하는 쾌감, 실패하거나 들켜서 쫓길 때의 짜릿함, 대판 치고받고 싸우고 나서 터진 웃음, 즐거움이나 슬픔, 화나거나 짜증나거나 하는 감정들을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던 시절이었다. 거짓말은 했을지언정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했다.

중학생이 된 우리들의 첫 화젯거리는 카라마츠 형이 연극부에 들어간 거였다. 연극부라니, 그것도 멋있어서 들어갔다니 카라마츠 형답게 단순한 이유여서 다들 놀리면서 한편으로 카라마츠 형이 언제쯤 연극부를 박차고 나올지 내기를 걸었다.

"한 달은 있다 나오려나, 카라마츠 형."

쵸로마츠 형이 먼저 말했다.

"의외로 견디는 거 아닐까? 1학기 공연 정도는 끝낸다거나..."

자신없는 목소리로 이치마츠 형은 다른 의견을 냈다.

"...난 이치마츠...형 말에 한 표."

쥬시마츠 형도 아직 형 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 그럼 난 일주일! 일주일에 이번 주 용돈을 겁니다!"

오소마츠 형이 자신 있게 100엔 동전을 굴려대며 외쳤다.

"연극 한 번은 하고 나오겠지, 카라마츠."

"형 붙여."

내 답에 오소마츠 형이 즉각 반응. 형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으면 자기만 들을 것이지 이 참에 서열 정리를 해버리는 걸까. 이즈음엔 막내로 서열 밑바닥이 된 내 작은 불만이 생기고 있었다.

"자자, 그러면 다 이번 주 용돈이나 걸까? 누구 말이 맞을지?"

쵸로마츠 형이 다급히 정리를 한다. 저런 것도 형의 역할이라면 역할이겠지.

 

며칠 뒤, 카라마츠 형으로부터 1학년을 연극의 주역으로 뽑는 오디션올 한다고 들었다. 슬쩍 형이 1학년 말에나 연극부에서 나오려 하지 않을까라며 내기 내용을 바꿨다. 형이 그렇게 의욕 가득한 눈을 하고 있는데, 쉽게 연극부를 뛰쳐나오진 않을 듯 했다. 결과만 말하면, 형은 첫 연극에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내가 살짝 도와준 건 있지만, 그것만으로 카라마츠 형이 주역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형이 무대에 서서 조금 어정쩡하지만 잔뜩 폼 잡으며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뭔가 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커튼 콜. 출연자들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치며 무대를 보다 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은 미소지었다. 어쩐지 고맙다고 말하는 듯 했다. 나도 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얼굴 근육이 어쩐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날 이후, 형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중학교에서 사귄 친구들과 어울린다거나 여자애들과 친해지려 놀러 다닌다거나, 형들과 비슷해지지 않기 위해 꾸미는 데에 신경쓴다거나... 같잖은 질투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Copy&Paste의 여섯 쌍둥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순서로 마지막에 설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위에 서는 수밖에 없었다. 카라마츠 형의 주역 데뷔는 그런 마음을 자극했고, 오소마츠 형은 장남이라는 포지션을 굳히려 무던히 애썼고, 쵸로마츠 형은 학생회에 들어가거나 하는 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치마츠 형과 쥬시마츠 형은 꾸준하고 성실했다. 그런 형들에 대한 반감으로, 형들과 멀어지던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금의 드라이몬스터 토도마츠를 만든 거겠지. 그 중에도 카라마츠 형은 질투의 시발점이었다는 이유로 일부러 싫은 티를 더 냈지만 카라마츠 형은 형이라는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는지 그럴 때마다 더 다정하게 대했고 고민을 들어준답시고 참견해왔다. 다정한 형이라. 한때는 함께 장난질하던 파트너였을텐데.

어느새 이렇게나 달라져버려서,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 같아서,

곧 있으면 따라잡을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런 형이 좋아서,

하지만 싫어서,

반발심은 커져만 갔다.

모순된 감정을 안고서 중학교 시절은 흘러갔다. 우리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다른 형제들에 대한 좋은 소리나 안 좋은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형들에 대한 악담에 귀를 기울이고 맞장구쳐주는 것으로 형들과의 거리를 점차 넓혀갔다. 내 입에서 형들의 험담을 하는 일도 늘어갔다.

? 카라마츠? 그 안쓰러운 녀석이 형 행세하는 거 진심 기분 나쁜데. 물론 애초에 오소마츠도 쵸로마츠도 형이라며 으스대는 거 기분 나쁘지만, 카라마츠는 형 놀이에 취해있달까 짜증 제대로 유발하거든.”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던가. 3학년 때인가 뒷담화를 하는 모습을 오소마츠 형에게 들켰다.

할 말 있으면 직접 앞에서 말하라고, 토도마츠.”

정색하며 오소마츠 형이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형을 째려보면 멱살을 잡아들고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해보라며 나를 부추겼다. 형은 화난 얼굴로 계속 때렸다. 그때만큼 오소마츠 형에게 많이 맞았던 날은 없을 정도로 쳐맞았다. 아마도 형은 계속 내가 형들을 나쁘게 대했던 걸 알고 있었고, 내 입으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던 거겠지. 맞고 있으면서도 오소마츠는 그래도 형이구나 생각해버리는 자신이 싫었다. 그 때 창문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창문 너머를 보니 카라마츠 형이 창문을 슬쩍 보고선 모른 척했다.

카라마츠, 뭐 하고 있어. 너도 들어와서 한 마디 해. 너한테 뭐라 하는 지 다 들었잖아?”

오소마츠 형과 함께 왔던 건가. 하지만 카라마츠 형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듯 했다. 카라마츠 형은 내 편을 들지도, 오소마츠 형의 편을 들지도 않았다. 오소마츠 형은 다시 나를 보고 멱살을 잡아챘다.

재작년부터 형제들한테 하는 태도가 짜증난다 싶었는데 그 이유 들어보자고? 우리가 너한테 뭘 그리 잘못했길래 그러는 건데?”

한숨을 푹 쉬고선, 오소마츠 형이 날 내려놓았다.

됐다. 집에서 더 얘기하자.”

오소마츠 형은 교실을 나갔다. 복도의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갔다. 나는 그저 교실에 넘어진 채 어안이 벙벙해하는 친구와 함께 남겨졌다.

집에 돌아와서 오소마츠 형은 2층에 집합시키려 했지만 나는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땐 다 싫은 시절이었다. 6쌍둥이가 모두 같은 얼굴인 것도, 그럼에도 형이나 동생이 있어 밑바닥 서열인 막내가 돼버린 것도. 소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카라마츠 형이, 쭉 파트너로 남아있자고 약속했던 그가 점점 형이 되어버리는 것도. 현관으로 따라나와 나를 붙잡으려던 카라마츠 형의 손을 뿌리치며 내뱉고야 말았다.

어차피 들켰으니까 확실히 말할게? 나한테 형 행세 하지마. 그리고 쓸데없이 내 일에 참견하는 것도 그만 둬.”

토도...”

뒷말을 무시한 채 집을 나섰다.

형 같은 건 없어지면 좋을 텐데.”

나는 선을 넘어섰다. 사소한 것까지 걱정해주고 신경써주는 카라마츠 형의 관심이 기분 나빴다 해도, 그런 말까진 해선 안됐다.

그 후 오소마츠 형과의 갈등은 적당히 해결되었다. 한번 대판 싸우고 나니 차라리 나아졌다. 그러나 카라마츠 형과는 미묘해졌다. 카라마츠 형은 그 후에도 날 책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말이 심했다고 생각한 뒤에도 사과는 하지 않았다. 아니지, 사과는커녕 한동안 서로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데 더 신경 썼던 터라 흐지부지 넘어갔다. 사과는 타이밍, 시기를 놓쳐버리면 그 당시의 감정들은 응어리로 남아버린다는 걸 모른 채, 나는 카라마츠 형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고 형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었다. 이후 내 반항기가 끝을 맞이한 고2 이후에도 이 건은 사과하지 않았다. 다만, 첫 연극 이후로 보지 않았던 형의 연극을 그래도 마지막 무대라는 핑계로 보러 가는 것 정도로 작은 사과를 했다. 분명 모두한테 향한 분노였을텐데, 내 반항기의 직격탄은 카라마츠 형만이 맞았다. 형이 진짜로 싫었던 건 아닌데 질투가 만들어간 감정의 뒤틀림이 형을 힘들게 만들었다. 내가 형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그 순간에 형의 텅 비어버린 듯한 얼굴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어제, 다시금 그 얼굴을 마주했다. 그를 거기까지 떠민 건 누구겠어.

단팥죽을 쥐고서 눈물을 흘린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형에게 잘못된 감정을 품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텐데.

그런 질투가, 그러면서도 형이라고 기대버리며 사과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 하나하나가 형을 힘들게 만들었지?

조용한 복도에 내가 훌쩍이는 소리만이 울려퍼진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모두가 병실로 들어가 바닥에 누워 잘 준비를 했다. 나는 형들의 배려로 침대 옆 간이침대에 누웠다. 카라마츠 형의 손을 잡으며 일어나면 꼭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기로 하면서.

 

 

 

 

 

*

 

 

 

 

 

눈을 뜨면 낯선 천장이다. 커튼 틈 사이로 해가 막 뜨기 전의 하늘이 보인다. 살짝 닿은 손의 촉감에 눈을 돌리자 토도마츠가 부은 눈을 하고선 쪼그려 자고 있다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그만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형제들도 바닥에 널부러져 자고 있다. 다들 춥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왼쪽은 아마, 이번에 사고당한 곳일 거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마 쪽과 정수리 쪽이 아파왔다. 나를 쪼갤 것 같은 통증에 괴로워하면서도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그저 눈물만이 흐르고 만다. 이어서 가슴이 아파온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다시금 누워버린다. 서서히 이런저런 기억들이 뒤죽박죽 수면 위로 올라온다. 당장 떠오르는 건, 불타는 나와 창문에서 날아오는 각종 집기들. 그리고 서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들이 가슴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살려줘. 누가 나 좀 도와줘.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헐떡이는 숨소리와 눈물만이 나의 고통을 드러내주었지만, 아무도 그 소리에는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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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의 쵸로마츠쟝)

 
 
 

 

분명 완결을 8월 초까지 낸다는 약속이었는데 벌써 9월이네요. (절망)

쉬는 동안에 쓸 수 있겠지^^는 게으름이 가속화되어서 장렬히 실패! 다시 일하고 나니까 의욕이 생기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네요 ㅋㅋㅋ 합작도 참여한다고 질러놓았고(???) 소비 생활을 충분히 즐겼고, 무엇보다 스스로 완결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 마음을 못 잡다가 다급히 씁니다.

사실 이번 편은 7월 초부터 반 써놓고 묵혀놨습니다.  그런고로 최대한 급히, 늘 그렇듯 완성도는 없는데 더 없이 열심히 써내려가야겠습니다.

그런고로 이번 주부터 해서 주간연재를 시작합니다(두둥)

일요일 22시까지는 올릴 예정...은 오늘도 좀 늦었네요;;;헤헤

.........

 

ㅠㅠㅠ 아직도 한참...남았다고 생각하기 싫은데...한참 남았네요.

대강 12~13편으로 완결을 낼 예정입니다. 외전도 기획했지만 음...일단 완결이나 하시는게 좋겠네요;;;

이번 화는 기승전결로 치면 승 막바지입니다.

다음부터는 전...전...하아...그러네요. 제 특기 발휘 대기중입니다.

 

저번 편에 덧글을 주신 분들이 그동안 쓴 글 중에 가장 많아서...특히 더 감사드리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혹시나 기다리신 분이 있다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그리고 완결을 내야 할 말이지만 배포용으로 책을 만들까말까 매우 고민중입니다. 혹시 필요하신 분은 물어보셔요(없음

 

 

 

 

 

 

Posted by 하리H( )Ri
2016. 9. 11. 23:21

-카라른 전력 60분 주제: 감기 (https://twitter.com/karareun60/status/774954422229082113)

-파카카라(오소카라/이치카라)입니당

-캐붕은 패시브

-오소마츠상 OST 넘나 좋은것...★(응?)




<L*NE 육둥이 단체채팅방>

[오소] 집에 누구 있냐

[카라] 지금은 나뿐이다만

[오소] 그러면

[오소] ㄱㅏㅁ겨얏좀

[오소] 감기약좀

[카라] 뭐라고?

[오소] 찾아봐

[카라] 알았다

[카라] 감기 걸렸어?

[오소] 그런듯

[오소] 목이 간질간질한게

[오소] 이건 감기갈ㄷㄱ더님

[오소] 자꾸 기침하니까 오타가

[카라] 얼른 들어와라

[토도] 카라마츠 형

[토도] 감기약 집에 많이 있어?

[카라] 많이 있다

[카라] 알약도 있고

[카라] 베이뷔들을 위한 달콤한 액체 약도 있다구~

[토도] 하하하...

[토도] 그럼

[카라] 토도마츠도 감기인가? 별일이군

[토도] 어제 오소마츠 형이 기침하던데

[오소] 그럼 나한테 옮은거?

[토도] 아마도

[쵸로]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더니

[쵸로] 오소마츠 형도 감기에 걸리는군

[오소] 바보라고 까지 마라 휴지마츠

[쵸로] 여기서 휴지가 왜 나오냐!!!

[쵸로] 나도 감기약 좀 준비해주면 안될까?

[카라] 에? 쵸로마츠도?

[쵸로] 간만에 사람 많은데 갔다가 옮은 거 같아

[쵸로] 요새 독감이 유행한단 말은 들었지만

[쵸로] 내가 걸릴 줄이야

[카라] 독감이면 큰일이잖아

[카라] 얼른 집으로 돌아와라

[쵸로] 안그래도 가는 중이야

[이치] 저기

[카라] 왜 그러는가 이치마츠

[카라] 무슨 일 있나

[카라] 답이 없어! 브라더! 쓰러진거 아냐???

[이치] 그런 거 아니니까

[이치] 개똥마츠가 설레발 치긴

[토도] 이치마츠 형이 좀 느리긴 하지

[이치] 그런 거 아냐

[이치] ...감기약 내 몫도 준비해줄 수 있을까

[이치] 카라마츠 형

[오소] ?!!!!!

[쵸로] ?!!!!!!!!!!

[토도] !!!!!!!!!!!!!!!!!!!!!!!!!

[카라] 알았다! 성심성의껏 준비하지!

[오소] 카라마츠 들뜬 거 봐 ㅋㅋㅋㅋㅋㅋㅋㅋ

[쥬시] 카라마츠 형! 죄송함다!
[쥬시] 제 것도 준비해주시지 않겠슴까!!!!!!!!!!!!!!!!!

[카라] 이 무슨!

[카라] 잔혹한 운명의 데스티니란 말인가!

[카라] 나만 빼놓고 모두 감기에 걸린 것인가!!!!!!!!!!


카라마츠의 마지막 메시지가 전송되고 10분이 지나도록 5읽음만 떠 있을뿐 답은 오지 않았다. 다행히 카라마츠는 스마트폰은 보지 못한 채 형제들이 누울 이부자리를 펴고 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끓이고 감기약을 있는대로 꺼내 식탁위에 늘어다놓고선 복용법을 꼼꼼히 읽고 있었다. 바쁜 부엌의 풍경과는 달리 바깥에는 나른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 왔음~켈록켈록"

현관에서 오소마츠의 소리가 들리자 카라마츠는 재빨리 뛰어나가 오소마츠를 부축해주었다. 됐다는 듯 오소마츠는 손을 내저었지만 카라마츠에게 기대는 그는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이 형~ 카라마츠가 끓인 뜨끈한 죽을 먹고 싶은데~ 해 줄거지......"

평소와 달리 오소마츠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슬쩍 지은 미소는 그의 상태를 더 나빠보이게 했다. 열이 오르는 가운데 카라마츠의 부축을 받으며 2층으로 옮기는 걸음은 흐느적거렸다. 이부자리의 가운데에 오소마츠를 눕히고 카라마츠는 체온계를 가져다 그의 귀에 꽂았다. 38도라. 제법 열이 있군. 카라마츠는 힘없이 늘어진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선 수건을 적셔서 가져다 줄게. 죽도 끓여서 먹여줄테니까 형은 누워있어."

카라마츠가 급히 내려가버리자 오소마츠는 아쉬운 듯 손을 뻗었다 내렸다. 카라마츠라면 분명, 나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에게도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겠지. 그런 카라마츠의 상냥함은 좋지만, 가끔 카라마츠의 상냥함이 자신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몸에 오르는 열기와 갓 햇볕에 마른 이불의 냄새, 사내놈들이 뒤섞여 자는 방의 체취가 그런 감정과 뒤엉켜서 살짝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 왔어."

현관에서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찬가지로 카라마츠는 잽싸게 나가서 이치마츠를 부축했다. 평소 카라마츠를 쳐내는 일이 많은 이치마츠지만, 오늘은 카라마츠가 빌려주는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치마츠? 많이 아픈가?"

카라마츠의 말이 저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오늘 새끼를 낳을 듯한 고양이를 지켜본다고 새벽부터 나갔던 터라 갑작스런 기온 변화와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게 화근이었나. 카라마츠의 품에서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치마츠는 약해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업고서 2층으로 올라갔다. 늘 그렇듯 이불의 끄뜨머리에 이치마츠를 눕히고서 카라마츠가 체온계를 귀에 꽂았다. 38도. 뭐야, 이런 점도 쌍둥이인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어깨를 토닥여주곤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이치마츠는 토닥임이 멈춘 걸 아쉬워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오소마츠가 토라진 듯한 얼굴을 한 채 누워있었다. 저 형은 어리광이 많았지. 카라마츠 형이 간호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오소마츠의 얼굴에서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고선 이치마츠는 반대쪽으로 홱 돌아누웠다. 조용한 집 안에서 보글보글 죽이 끓는 소리, 쪼르륵 물이 컵에 들어가는 소리, 카라마츠가 연신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쥬시마츠, 쵸로마츠, 토도마츠가 귀가했다. 쥬시마츠는 감기에 걸려도 멀쩡한 듯 토도마츠를 들고서, 쵸로마츠는 카라마츠의 부축을 받으며 2층으로 올라왔다. 카라마츠는 마찬가지로 체온을 재고, 이불을 덮어주고 토닥여주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주는 구나, 카라마츠. 조금 분한 마음을 삭이며 누워있다보니 카라마츠가 따뜻한 물과 죽을 들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자. 이치마츠는 자는 모양이고...다들 죽 먹을래? 내가 떠먹여줄까?"

"괜찮아. 고마워, 카라마츠."

쵸로마츠가 죽을 받아들고서 후후 불어가며 죽을 먹는다. 토도마츠도 카라마츠가 건네주는 죽을 들고선 뜨거운 듯 조심히 이불 위에 접시를 올려 놓고 귀여운 척을 하며 후후 불어댄다. 쥬시마츠는 이불을 빠져나와 차를 가지고 온다며 급히 내려간다. 지금이 오소마츠에겐 좋은 기회일까.

"카라마츠, 이 형아 숟가락 들 힘도 없는데 떠먹여주면 안될까아?"

없는 아양을 떨어가며 오소마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카라마츠를 바라봤다. 카라마츠는 흡족한 표정으로 알았다며 끄덕이곤 숟가락에 죽을 떠서 호호 불어주었다. 평소 휘파람을 불던 탓인지 호 하고 부는 와중에 살짝 휘파람 소리가 섞여나왔다. 침이라도 튀었을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오소마츠가 행복한 듯 입을 벌리면 카라마츠는 눈을 맞춰주며 오소마츠의 입에 죽을 넣었다. 알맞게 식은 죽임에도 오소마츠는 뜨거운 척을 하며 카라마츠를 힐끔 보고 카라마츠는 당황해하며 다음 숟갈은 몇 번이고 식혔다. 오소마츠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 나밖에 없겠지. 죽을 받아먹으며, 오소마츠는 이렇게 카라마츠가 나만을 챙겨주는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카라마츠가 여러 번 얼음 띄운 물에 수건을 적셔 형제들에게 번갈아 올려주고 있는 동안, 오소마츠는 잠들지 않고 카라마츠의 상냥함을 즐기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깬 건 제법 늦은 밤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자는 듯 숨소리만 들리고 카라마츠가 체온계와 수건을 번갈아들며 형제들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저번에도 저렇게 해주었다면 다들 무시하지 않았을 거 아냐. 역시 바보야. 이치마츠는 그런 카라마츠를 바라보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말 대신에 기침이 먼저 새어나왔다.

"이치마츠, 깼는가? 배 고프지? 죽 해줄까?"

다급히 와서 말을 거는 카라마츠 때문에 놀라면서도, 어쩐지 이치마츠는 기분이 좋았다.

"응...조금이면 되니까..."

카라마츠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남은 죽이었는지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일어나 체온계를 귀에 꽂았다. 아까보다는 조금 열이 내려간 듯 했다. 이치마츠는 안심하며 잠에서 깨기 위해 눈을 비비적거렸다.

"이치마츠, 직접 먹여줄까?"

카라마츠가 죽을 들고와서는 물었다. 이치마츠는 싫지 않았지만, 좋다고 말하기 민망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카라마츠가 앞에서 죽을 떠서는 식혀준다. 후후 부는 카라마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는 상상을 하며 카라마츠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숟가락이 이치마츠의 입 앞으로 다가왔다. 이치마츠는 입을 살짝 벌려 받아먹고는 오물거렸다. 기분이 좋아져서 몇 번이고 받아먹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다만, 내일도 카라마츠가 죽을 먹여주면 좋을텐데 하며 생각할 뿐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카라마츠는 조금 지친 듯 벽에 기댔다. 쵸로마츠의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쵸로마츠의 수건만 집중적으로 갈아주고 있었지만, 다른 형제들에 비해 뒤척거리는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카라마츠는 쵸로마츠를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별로 아프지 않은 듯 태평스레 굴러다니다 어느새 이치마츠의 발 밑에 있었고, 토도마츠는 킥킥거리며 밭은 기침을 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이불에서 나와 카라마츠 옆에 붙어앉았다. 카라마츠가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자 이치마츠는 됐다는 듯 손을 올리고선 카라마츠의 어깨에 기댔다.

"이럴 땐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싶다. 다들 아픈 모습을 보니 괴롭군...쥬시마츠는 괜찮아 보이지만."

키스를 하면 감기가 옮는다는 말이 있던데. 카라마츠가 중얼거렸다. 별 희한한 것을 다 믿는구나. 역시 바보야.

"그러면,"

"응?"

"키스해줄래? 나하고."

이치마츠가 대담하게 제안했다. 설마, 진짜로 받아들여 주겠어? 카라마츠는 모두를 아껴주고 있을 뿐. 그뿐인데.

"이치마츠가 원한다면."

카라마츠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해? 개똥마츠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흘깃 보았지만 카라마츠는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은 듯 했다.

"대신 이치마츠가 리드해줘. 내게 감기를 옮겨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너 대신 아플 수 있다면 난 괜찮다."

카라마츠가 몸을 틀어 이치마츠 쪽을 향했다. 이치마츠는 당황하면서도 바라왔던 일이기에 재빨리 가장 황홀한 방법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럼...간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확 끌어안은 채 입술을 갖다댔다. 살짝 혀를 밀어넣으면 카라마츠는 입술을 열듯 말듯 하다가 열어주었다. 이어 카라마츠의 혀도 이치마츠의 입 속에 들어왔다 서로의 혀가 뒤섞이며, 서로 끌어안은 체온이 뒤섞이며, 한참을 입술도 혀도 떼지 않은 채 있었다.

"자, 다 나았다. 카라마츠 형에게 전부 옮겼어."

이치마츠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 나름대로 행복함을 표현한 웃음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게 잘 전해지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그런 동생을 잘 알기에 싱긋 웃어줬다. 방금 키스를 한 거라고? 남자끼리, 그것도 형제끼리. 너는 어떤 기분이었던거야. 이치마츠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키스를 마치자 밀려오는 잠에 다시금 이부자리로 기어들어갔다. 카라마츠는 다가가서 이치마츠가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었다.


아직은 해가 일찍 떠서 살짝 싸늘하지만 밝은 새벽이 찾아왔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다독여 준 후 다시 쵸로마츠 앞 쪽에 앉아있다 잠이 들었는지 벽에 기대고 졸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기대서 자는 바보같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아까 선잠을 자며 들었던 소리가 맴돌았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키스했다. 시간으로 보면 제법 오랫동안 입을 맞댔던 것 같았다. 나쁜 동생이네. 형 말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다니. 벌을 줘야겠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 쪽으로 기어갔다.

"자, 내 감기도 옮겨줄게? 그리고 형한테 간호를 받는 거야, 카라마츠."

그러고선 오소마츠는 키스를 했다. 카라마츠는 혀가 들어오는 느낌에 잠에서 깬 듯 눈을 뜨고선 오소마츠를 쳐다보았지만 오소마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이내 혀를 오소마츠의 입에 집어넣었다. 쉬운 남자네, 카라마츠. 누구나 원하면 키스를 해주는 거야? 오소마츠는 작은 불만과, 그럼에노 갖고 싶은 동생과 하는 키스의 달콤함을 느끼며 카라마츠에게 딱 달라붙어서는 오랜 시간 혀를 섞었다. 혀를 빼고 오소마츠가 미소를 지어보이면 카라마츠도 미소를 지어주었다. 카라마츠에게 키스는 어떤 의미일까. 그냥 감기를 옮겨받고픈 자기 희생의 마인드?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거? 그럼 이치마츠하고도, 나하고도 한 이유는 뭐야? 형제니까 좋아한다는 건가? 형제끼리 보통 그런 걸 해?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는건가? 오소마츠의 마음은 키스를 하기 전보다 더 복잡해졌지만, 카라마츠가 다시 벽에 기대서 자는 모습을 보며 일단은 생각을 거둬들이기로 했다.


해가 중천에 뜨자, 6쌍둥이들은 한 명 한 명 일어났다. 다들 개운한 표정인 가운데, 정말 독감에 걸린 듯한 쵸로마츠와, 어제까진 멀쩡하던 카라마츠만이 몽롱한 채로 1층으로 내려왔다.

"어제는 일요일이었지만, 오늘은 월요일이니 병원이 열겠지?"

"카라마츠도 감기 걸린 거야? 역시 따로 잤으면 좋았을 걸... 어제 다른 형제들 간호해주느라 잠 설친 거 맞지?"

쵸로마츠가 걱정스러운 듯 카라마츠에게 말을 걸자 카라마츠는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키스 이후에 지어준 미소와 비슷해서 이치마츠와 오소마츠는 흠칫 놀랐지만 모른 척 했다.

"카라마츠! 뭐 먹고 싶어?"

이치마츠와 오소마츠가 동시에 말했다. 토도마츠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고, 카라마츠는 뒤를 돌아보며 죽이 먹고 싶다고 한 후 쵸로마츠와 집을 나섰다.


+1


<L*NE 이치마츠, 카라마츠 채팅방>

[이치] 있지

[카라] 응?

[이치] 어제 못 한 거 마저 하고 싶은데

[카라] 무슨 소린가

[이치] 그...저...키...키...

[카라] 뭐야

[카라] 모처럼 감기 나았는데 나하고 다시 하면 다시 감기 걸린다고?

[카라] 그럼 어제 한 일이 헛수고가 되잖아


이치마츠는 감기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그냥 그게 하고 싶을 뿐이라고 바보멍충아라고 썼다가 지웠다. 일단 바보같은 형이 감기가 나아야 다시 말을 꺼내볼 수 있는 건가. 이치마츠는 한숨을 쉬며 죽을 저었다.


+2


<L*INE 오소마츠, 카라마츠 채팅방>

[오소] 카라마츠

[오소] 넌 내꺼야

[오소] 얼른 나아서

[오소] 그땐 제대로 달콤한 츄를 선사해줄게

[카라]

[카라] 간호나 잘 해줘


카라마츠의 단호한 멘트에 오소마츠는 풀이 죽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면 쵸로마츠랑 카라마츠 둘 다 알밤 한 대씩 먹여주고 빨리 나으라고 달달 볶아야지. 수건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오소마츠는 분을 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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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풀기 겸 오랜만에 쓰는 겁니다 헤헤...

장편도 합작도 모두모두 밀려있는데! 일벌리기를 워낙 좋아하는 건가...


Posted by 하리H( )Ri
2016. 6. 27. 04:09

[카라른/쵸로카라]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7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카라마츠 중심, 결론적으로는 카라총수지만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커플링을 써놓았지만 테이스트는 지극히 약한 것입니다...ㄷㄷ
※캐붕,글솜씨없음주의

※세 달 만에 써서 죄송합니다. 내용 구상이 잘 안되었사옵니다(굽신굽신) 어차피 아무도 안 보니까 몬다이나이

※5화 카라마츠 사변을 기반, 고통받는 카라마츠,,,등등

 

※변변찮은 타이틀 이미지 추가합니다~

 

 


 

 

 
 
 

(쵸로마츠 시점)

 

 

 

나이가 들수록 익숙하지 않은 것을 대할 땐 방어 자세부터 취하고 본다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은 어린 시절엔 그런 것일수록 호기심을 가지고 한 발짝이고 두 발짝이고 나아갔다. 그 결과 사고를 엄청 치고 다녔지만 무구했던 그 시절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은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 썩을 동정에 백수지만 나이는 입으로든 뒷구멍으로든 먹었는지 익숙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면 당황하거나 짜증을 내는 등 방어적인 자세부터 취하고 봤다. 다가가더라도 소극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한이라는 말로 포장한 내가 피해를 받지 않을 선까지만 다가간다. 그러면서 '이걸로 됐어' 라며 안일해진다. '별 일 아니겠지'라며 거만해진다 

그래서 카라마츠가 위험한 상태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도 어른이니까 언젠가는 얘기해주겠지 하며 기다리기만 했다 

그 결과가, 수없이 손목을 그은 끝에 차도로 뛰어든 카라마츠가 누워있는 꼴이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사고지만 

 

* 

 

토도마츠로부터 카라마츠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엄마는 기절하듯 쓰러져버리셨다. 이 나이껏 부모님에게 빌붙어 사는 백수들이지만 건강만큼은 자신 있어서 적어도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큰일은 없었으니까. 카라마츠가 잘못 맞으면 죽을 지도 모르는 이것저것을 얻어맞는 일을 당하고도 튼튼해서 그런지 병원에서 치료만 받고 돌아왔을 정도였고. 그런데 교통사고를, 그리고 울먹거리며 겨우 말을 이어가는 토도마츠의 목소리를 듣고 쇼크를 받으신 모양이다. 오소마츠 형은 우리들을 병원으로 먼저 보내고 엄마를 돌보고 왔다. 엄마는 금세 정신을 차리셨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바로 병원으로 오는 건 무리라 오소마츠 형을 병원으로 보내고 당신은 집에서 기운을 차리면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오겠다고 했다. 아마 그 상태에서 카라마츠가 자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엄마도 병원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일단 카라마츠의 자해 사실은 아빠에게만 털어놓기로 했다 

 

수술을 마치고 카라마츠는 1인실로 옮겨졌다. 의사가 보여주는 손목의 상처와 내 말에 아빠도 다른 형제들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이제껏 말을 하지 않았어? 형제가 그런 일이 있으면 부모님과 의논하는 게 먼저 아니냐." 

아빠의 꾸짖음에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마도 말을 하지 않은 건 내 탓, 아니 우리들 탓이기에 우리들이 알아서 해 보려고 하는 책임감도 있었겠지만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으리라. 

"어쨌건, 엄마를 돌봐줄 사람이 누군가는 있어야 할 테니, 너희는 카라마츠를 잘 지켜봐 주거라." 

"..." 

힘없이 답하는 목소리들. 아무도 아빠를 따라가려는 기색은 없었다. 아빠가 나가자 토도마츠가 카라마츠 옆에 앉아서 카라마츠를 부르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병실 어딘가에 앉아서 그저 그 둘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야 병원에서 있으려면 필요한 게 뭔지 엄마 상태는 좀 어떤지 그런 걸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다른 형제들은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한 거 같아서, 기분도 전환할 겸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칫솔이나 팬티 같은 것들을 부탁받고 그 외에도 나름 필요할 듯 한 것들을 생각하다보니 집은 금방이었다. 어제 집에서 병원까지 향하는 길은 그렇게 멀었는데. 카라마츠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아직까지 의식이 돌아온 건 아니지만... 

 

집에는 엄마 혼자 있었다. 엄마는 여전히 누워계셨지만 안색은 좋아보였다. 아마도 당신은 괜찮다며 아빠를 회사로 보내신 모양이다. 엄마는 이렇게 무리를 하신다. 철없는 여섯 아들을 상대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걸까 

"아빠는 회사에 가셨어요?" 

"카라마츠가 입원했으니까 입원비 벌어야지." 

"그래도 엄마도..." 

"엄마는 괜찮으니까. 카라마츠가 걱정이지. 토도마츠도. 어제 전화할 때 많이 힘들어보였는데..." 

엄마는 억세다.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엄마에게 카라마츠에 대한 얘기를 하기 어려웠을 거다. 

"괜찮을 거에요." 

괜찮지 않아요 

"병원에서 좀 지내야 할 거 같으니까 우리들 짐을 먼저 가지러 왔는데, 혹시 엄마 뭐 해드릴 거 있나요?" 

애써 웃어 보이며 말을 한다 

"그럼, 빨래를 걷어주렴." 

지붕 위에 있는 빨래를 걷는 김에 위층 청소를 하고 가기로 했다. 아래층은 엄마가, 위층은 우리들 중 누군가가 하기로 해서 위층은 내가 손대지 않으면 아무도 청소까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기 물건을 치워놓을 뿐 

그래서겠지, 카라마츠의 커터칼들이 눈에 띄지 않았던 건 

누군가 그걸 발견했지만 나처럼 카라마츠를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건지는 몰라도 커터칼들은 책장 뒤 야한 잡지들 너머에 널려있는 채였다. 몇 개가 있었는지 세어놓지 않아서 그 사이 더 늘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커터칼들을 꺼내서 파카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이게 사라지면 카라마츠가 분명 더 불안해하겠지. 

하지만, 남아있다고 해서 카라마츠에게 좋을 것도 없다. 그만둬주길 바라고 있으니까. 

그러다 생각한다 

여기에 커터칼을 숨기면 누구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 그는 생각한 걸까? 

손닿기 쉬운 곳이잖아. 빨간 책들이 여기 있다는 것도 언젠가 까발려버렸고. 

그런 일들도 상관없이 여기에 둬도 괜찮은 건가? 

설마. 

그는 이걸로 도움을 청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납치극 이후로 형제들에게 의존하지 못하게 된 그가 보내는 신호로써.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변에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그 신호들을 눈치 채고 있었으면서 너무도 늦게, 그것도 빙 돌아서 다가가느라 카라마츠의 상처를 막아주지 못한 나를 파카 주머니 속 커터칼들이 찌르는 듯 했다 

 

* 

 

카라마츠로 말할 거 같으면, 의외로 꼼꼼한 사람이다. 지금도 자기 얼굴이 프린트된 탱크톱이나 브리프 같은 걸 직접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있고, 메모만큼은 열심히 해서 학창 시절에 시험 공부할 때 형제들이 돌아가며 카라마츠의 노트를 빌려갔다. 그렇게 필기를 열심히 한 본인의 성적은 정작 바닥을 기어서 역시나 그가 바보라는 걸 증명해줬지만. 수업 노트나 연극 대본의 메모를 보면 무척 사소한 것까지 적어놓아서 가끔 보다가 웃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선생님이 이걸 세 번이나 짜증내듯 외침

유독 강조한 말들↑」

, 이건 시험에 안 나오니까↘」 

「←여기선 힘을 빼고 속삭이듯이

자꾸 오버했다간 다음번엔 지나가는 행인 역을 맡길 거야!(아사노 선배)

... 

"자꾸 오버한대, 집에서 하는 짓 그대로 연극부에서도 하고 있는 거야?" 

오소마츠 형이 낙서들을 넘기며 핀잔주듯 말했다. 

"그보다 카라마츠, 이 정도면 꼼꼼한 거라 말 안 하고 집착이라 하지 않냐?" 

"그래도 이런 걸 적어두지 않으면 나중에 필기를 들여다봐도 전혀 감이 오지 않는걸." 

조금 주눅 든 듯이 말하는 카라마츠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도 우리 중에 중학 데뷔가 가장 화려하잖아, 이런 노력을 해서 얻어낸 거라고?" 

내가 카라마츠를 두둔하고 나섰다. 확실히, 그 시절에는 그를 조금 동경했으려나. 

"?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건 나 아녔어? 우리 중에서 말야." 

오소마츠 형이 태클을 건다. 

"형은 그냥 사고 친 게 많을 뿐이고! 우리가 얼마나 선생님들한테 시달리는 지 알기나 해?" 

짜증을 확 내자 옆에서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마츠 형은 치하며 입을 비죽댔다. 

 

우리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큰일을 꼽자면 두 개였다. 먼저, 우리들에게 서열이 강조된 것. 중학생이 되기 전 오소마츠 형이 느낀 바가 있었는지 형제들을 모아놓고 형이라 불러 달라며 떼를 썼다. 귀염성 없는 떼지만 안 그러면 한 대 얻어맞을까봐 그러자 했던 게 어느새 서열 정리로 이어졌다. 입에 잘 붙지 않던 형 소리를 내면서, 쵸로마츠 형이라고 말하는 어색한 동생들의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집의 분위기를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영향을 가장 받은 건 차남이란 딱지를 받은 카라마츠였다. 그저 형이라고 불리고 싶었던 오소마츠 형과는 다르게 카라마츠는 얼떨결에 두 번째로 큰 형이 되었다. 카라마츠는 그날부터 마음을 달리 잡은 듯 했다. 오소마츠 형을 장남으로 치켜세워주는 것도 동생들을 챙겨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아무도 그를 떠밀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며, 이제부턴 멋있는 차남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에 들어간 우리 중에 부활동을 먼저 시작한 것도 카라마츠였다. 역시나 그답게 '연극부 선배에게 권유받아 보러 간 무대가 멋있어서 덜컥 입부 신청을 해버렸다'며 생각 없이 들어갔고, 나머지는 카라마츠가 얼마나 버티다 연극부를 나올까 내기를 걸 정도로 그가 부활동을 계속해나갈지 기대하지 않았다. 어느 학교라 해도, 연극부는 제법 공을 들여야 하는 귀찮고 힘든 부라는 인식이다. 무대에 서서 빛나기까지 노력하는 시간들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거기다 초반에는 가만히 서 있는 나무나 지나가는 행인 같은 거나 하면서 보낼 게 뻔한데 그런 시간들을 눈에 띄고 싶어 하는 타입인 그가 기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설마, 신입인 1학년에게 주연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 자리에 카라마츠가 들어갈 줄은 몰랐다. 

잽싸게 내기할 때 '빨라도 1학년 이후'로 바꾼 토도마츠가 수를 써 준건지, 아니면 소음공해라며 욕을 들어가며 연습한 카라마츠의 노력이 인정받은 건지 카라마츠가 주연 자리를 따 낸 것이다 

"다른 녀석들보다 안 떨고 오버라도 생동감있게 한다며 칭찬받았어." 

쑥스러워하며 카라마츠는 주연을 따낸 얘기를 했다. 뭔가 한 듯 한 토도마츠도 그렇고 다들 경악했다. 아무리 학교에서 열리는 작은 공연이지만, 사고 쳤다고 주목받는 게 아니라 연극이란 멋진 무대에 서서 주목을 받는다는 건 처음이었다. 카라마츠도 그런 흥분을 애써 눌러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했고 제법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그 모습이 무척 멋있었다. 차남이란 역할도, 연극의 주연이란 역할도. 그 모습이 내 등을 떠밀었다 

 

사실 너도 되고 싶은 모습이 있을 거야. 

, 이렇게 변할 수 있는걸. 이렇게 될 수 있는 걸.

 

오소마츠 형이나 다른 형제들과 해오던 장난들은 짜릿한 맛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도 중학생이 되고 나자 유치하게 보였고, 혼나거나 놀림 받는 게 되어버렸다. 또래들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경기 같은 것들로 떠들썩했고, 축구나 캐치볼을 하며 노는 녀석들, 공부한다며 열심인 녀석들, 부활동에 푹 빠진 녀석들을 보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 고민하고는 했다. 그런데 나랑 다를 바 없던 카라마츠가 형이 되고, 무대의 주역이 되었다 

그래, 나는...인정받고 싶었어. 마츠노 여섯 쌍둥이 중 하나가 아니라, 마츠노 쵸로마츠라고. 

그 뒤로 날 떠민 카라마츠의 모습은 어느새 잊고 살았다 

노력했지만 발버둥 쳐도 올라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 

실연을 알고 

현실을 알고, 

체념을 알고, 

평범함을 원하고, 

그러나 그마저도 얻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수없이 기어오른 벽에서 굴러 떨어지며, 난 점차 익숙하고 쉬운 길들을 고르게 됐다. 

 

* 

 

피 뭍은 커터칼 같은걸 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카라마츠를 동경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커터칼을 만지작거린다. 지금도 가끔은 동경하는 형이지만, 그 형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마음을 쑤셔온다. 

그의 신호는 커터칼을 널부러놓은 것뿐일까. 카라마츠니까, 알기 쉬운 표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오히려 커터칼은 손목을 긋다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던져놓은 인상이었고. 그 표지를 찾아서 방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한다. 방 청소 같은 건 진작 잊어버렸다. 서랍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일일이 꺼내 훑거나 카라마츠가 이전에 가져온 투명한 잔을 햇빛에 비춰보며 살펴보거나 하는 부질없는 짓들을 해가며 애를 썼지만 찾을 수가 없다 

나라면 어디에 숨길까. 

죽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숨겨놨지만 누군가 눈치채주길 바라는 장소나 물건은 쉽게 떠올릴 수 없다. 꽁꽁 숨겨놓고 싶은 거라면 잔뜩 있지만. 나만 손대는 취직 잡지 같은 거라면 또 모를까... 

책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맨 윗칸에 내가 사다 놓은 구직 잡지들 옆으로 카라마츠의 기타 악보집들이 몇 개 꽂혀있다. 아빠한테 받거나, 폐지에서 주워오거나, 가끔은 자기 돈으로 사오는 악보집들. 폼 잡는다며 핀잔을 줄 때나 카라마츠가 펼쳐놓고 기타 연주를 하고 있을 때 빼곤 그 악보집들을 볼 일이 있기나 했을까 

손을 가져가 악보집들을 꺼내려는데 유독 불룩하게 나온 책이 있다. 그 책을 끄집어내니 조그만 수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첩을 펼쳐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XXX 

///

   

 

XXXO 

///// //\  

 

카라마츠의 글씨체를 기억하고 있다. 급하게 갈겨 쓴 필기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오히려 멋을 조금 부려가며 썼던 그다. 형제들 그 누구도 이런 글씨를 쓰는 사람이 없었고, 한두 장에 적어진 메모를 보니 카라마츠의 것이 맞았다. 휘갈겨댄 날짜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시들을 보며 오싹하기까지 했지만, 날짜를 더듬어간다. 그 전에도 간간히 날짜가 적혀 있고 빗금이 쳐져 있었지만 납치극이 있었던 날을 기점으로 매일매일 기록된 날짜와 빽빽해져가는 빗금은 빽빽해졌다. 납치극 이후에는 이전에 없던 O표시까지 생겨나 당혹감을 준다 

카라마츠는 무언가를 병적으로 표시해놓고 있었다. 그게 뭔지를 사실은 눈치 채고 있지만, O표시와 주머니 속의 커터칼 개수를 세어보며 비교까지 하고 있지만, 굳이 이게 뭔지를 명확히 하고 싶지 않다. 넘어가는 수첩이 점차 흐릿해지고 동그라미고 빗금이고 구분이 가지 않는다. 실감해버린다. 카라마츠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물을 셔츠 자락으로 훔치며 수첩을 넘기고 넘긴다. 그 와중에는 종종 밑줄이 쳐진 날짜가 있었다. 저 날은 분명, 쥬시마츠가 창가에 학알이 담긴 병을 놔둔 날. 그리고 저 날은 지붕에서 나와 카라마츠가 단 둘이 술을 마신 날 

"정말...어디까지 상냥한 거냐고...멍청이가..." 

자살 기록이나 해대는 와중에도 형제들이 잘 해줬던 날들을 따로 표시해놓는 바보다. 우리들에게, 나에게 실망한 거 아니였냐고. 실망해서, 자기가 힘들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한 거 아니였냐고. 그런 주제에 위로받았다며 엷은 미소를 지었을 그를 상상한다. 그런 점만큼은 상냥한 형이다. 형제들을 사랑하고, 걱정 끼치고 싶지 않고, 있는 폼 없는 폼을 잡아가면서까지 의지할 수 있는 형을 어필하고 싶었던 카라마츠. 그에게 건넸던 위로는 아주 작지만 분명히 전해졌다. 

 

조금 대담해져볼까. 

병원에서는 나머지 형제들이 카라마츠를 지켜주고고 있다. 조금 더 느긋이 돌아가도 될 거야 

가방에 병원에서 지낼 때 쓸 옷가지나 칫솔이 같은 걸 쑤셔 넣은 뒤, 고등학교 졸업앨범과 중학교 졸업앨범을 펼쳐 몇 개의 연락처를 옮겨 적는다 

집에서 전화하면 엄마가 걱정하실 테니까 공중전화로 해야겠지. 

카라마츠를 알고 있는 반 친구나 연극부 동기들 전화번호를 주머니에 넣고, 커터칼들은 검은 봉지에 넣어 다락 한 구석에 숨겨둔다. 이따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향하겠다는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카라마츠는 분명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다. 바보니까 눈치 채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넘긴 일일수도 있고, 자기가 꼴사나워보일까봐 말하지 않은 거일수도 있고...그게 최근 어떤 일을 계기로 카라마츠를 조여오기 시작했고, 우리들이 카라마츠의 도움을 무시하고 험한 짓을 해버린 것으로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리라 

내 뇌 속에선 그동안 알고만 있고 신경 쓰지 않았던 일들을 연결해가며 대강의 시나리오를 펼쳐내고 있다. 거기에 운이 좋으면 이 연락처들이 그가 잠 못 이루게 된 사건을 안내해 줄 것이다. 진작 알아주었다면, 그리고 시답잖은 납치극이나 벌린다고 비난하지 않았더라면, 일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카라마츠 형을 괴롭혀왔던 일들을 찾아서 카라마츠 형은 나쁘지 않다고 말해줘야 해. 멋대로 짊어진 형의 자리지만, 형은 그 자리를 지키려 노력해왔으니까. 동경하는 형일 때도 있었고, 형은 커녕 멀찍이 떨어져 남 취급을 하고 싶을 정도로 안쓰러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눈을 뜨면 이렇게 말할게.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공중전화부스에 들어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동전을 집어넣어 버튼을 누른다 

수신음이 가더니 알듯 말듯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나의 용건을 얘기해나간다 

자기는 잘 모르겠다며 시답잖은 안부나 묻는 말이 되돌아왔다. 

몇 번 동전을 집어넣고, 수신음만 울리거나 잘못된 전화번호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꿋꿋이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했다. 

이윽고, 연결된 전화에서 원하는 답을 수화기 너머에서 들을 수 있었다.

  

 

 

 

 

 

 

 

* 

 

 

 

  

 

 

 

 

 

 

새하얀 풍경 속에 내가 있다  

아니, 거기에 내가 있다는 건 인식뿐으로 몸이 있다는 감각은 전혀 없지만. 

그저 텅 비어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있다는 걸 느낀다. 

그 뿐으로 다른 게 있진 않은 것 같다. 

새하얀 풍경은 갑작스레 검게 물든다 

새하얀 공간보다도 내가 옅어져가는 기분이다. 

느껴지지 않는 감각을 붙잡아서 내가 여기 있는 걸 확인받고 싶다. 

한편으론 그냥 내가 있다는 인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어 혼란스럽다. 

이런 텅 빈 공간 속에서 명확한 것은 딱 하나,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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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후반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란!......

4화까지 쓰고 한 달 지나 6화까지 쓰고 세 달이 지나버렸습니다.

의도치 않은 휴재로 조금 실력이 나아지기는개뿔 방치했더니 더 의미불명의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거 말이 이어지는 작품이지 각각 얘기에서 거의 따로 놀고 있는 거 아닌가 싶고 ㅋㅋㅋㅋ

카라른인 주제에 쵸로카라인 주제에 그런 느낌 하나도 안 나고ㅋㅋㅋㅋㅋㅋ 뭐냐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더욱 의미불명인 타이틀을 직접 그려서 걸었더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 느낌으로 반쯤 미친듯이 썼습니다. 의미만 통하면 퇴고는 안 할 거 같네요.(어이)

요컨대 분위기입니다. 분위기만 느끼고 가시면 됩니다...(도망)


쉬는 동안 놀랍게도 덧글 달아주시며 잘 보셨다 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진짜 감동먹었는데 어째서...?라는 의문도 들고 했습니다만 덕분에 쓸데없이 의욕과 책임감과 중압감이 늘었습니다.

방치하려 했던 건 아니지만 자기결말을 위해서, 그리고 다음 화를 기다려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대강 짜여진 틀을 가지고 8월 초까지 결말을 향해 달려갈 예정입니다! 

빈 잔은 12화+외전으로 갈 거 같구요...분량은 매 화마다 들쭉날쭉 할 거 같습니다. 퀄은 늘 그렇듯 망퀄...

쓰는 와중에 통온에서 금손님들 소설도 데려와 읽어서 더 성장할 수 있을런지...ㅋㅋㅋㅋ

봐주시는 분이 없어도 상관 없어요. 자기만족입니다 늘...후후후...

그럼 이번 주 내에 8화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아무도 안 봤다고 한다)

 

 

Posted by 하리H( )Ri
2016. 3. 26. 01:02

[카라른/이치카라]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6-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카라마츠 중심, 결론적으로는 카라총수지만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캐붕,글솜씨없음주의

※5화 카라마츠 사변+원작 기반

※멋대로 쓰는 학생 시절 이야기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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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츠가 있는 병실 밖 복도에는 나와 오소마츠 형, 쥬시마츠가 있다. 배치로 보면 오소마츠 형과 쥬시마츠가 병실 쪽 벽에, 나는 병실 반대 쪽 벽에 붙어선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무거운 표정을 한 오소마츠 형은 쥬시마츠의 마음 속 짐을 덜어주려고 애쓰고 있다. 언제나 오소마츠 형은, 우리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그 고민들을 들어주고 함께 끌어안아주곤 했다. 저 무거운 표정의 의미는, 카라마츠의 고민을 같이 안아주지 못했다는 것일까. 

닮았어.

나와 닮았어.

오소마츠 형의 표정에 지나는 것은 죄책감.

카라마츠를 쳐다볼 수 없게 된 나를 옥죄는 것도 죄책감. 

마스크를 쓴 채 숨죽이고 주변의 풍경을 마치 CCTV라도 된 양 눈에 담는다. 심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1인실에 카라마츠가 들어가선지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종종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사람들도 내 눈초리를 보고 피해가는 듯 했다. 이걸로...된 거야.

오소마츠 형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병실로 들어갔다. 쥬시마츠가 내가 있는 쪽 벽으로 옮겨와서 조용히 기댄다.

"이치마츠 형."

쥬시마츠는 평소와는 다른 낮은 텐션으로 나를 부른다. 당연하겠지. 지금 분위기를 생각하면. 

"형은 알고 있었어? 카라마츠 형의 상태."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다. 쥬시마츠의 의도가 어쨌든간에 그 말들이 나를 짓누른다. 평소와는 다른 쥬시마츠의 처진 목소리도 거기에 한 몫 한다.

"알고 있었을 리, 없잖아."

아니지, 아니야.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치마츠.

그딴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카라마츠가 망가지고 있는 것 따위 몰랐으면 좋았을텐데.




카라마츠는 예전부터 텅 빈 녀석이었다. 텅 빈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생각이 없고 멍청한데다, 폼 잡는 와중에 실속있는 건 하나도 없다고 해야할까. 카라(空)마츠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상냥하고 남 도와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연극부에도 들어가서, 우리 중에는 부활동에 가장 매달리는 쪽이 되었다. 형제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물으니,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지 않냐며 웃어보이던 녀석이 인상깊었다. 그런건 분명 자기만족이겠지만, 사춘기를 겪어가며 조금씩 흔들리는 형제들 가운데서 카라마츠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변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만큼 악동으로 사는 오소마츠 형, 격변기의 쵸로마츠와 토도마츠, 그저 회색 청춘을 보내던 나와 쥬시마츠 사이에서 카라마츠는 홀로 장밋빛 청춘을 보내는 듯 했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나와 쥬시마츠에게 변화가 찾아왔는데, 나의 경우는 변화보단 악화란 말이 어울렸다. 회색 청춘은 검은색 청춘으로, 청춘이라고 부를 것 조차 없는 어둠으로 빠져들어갔다. 같은 반의 녀석들이나, 알지도 못하는 선배들이나, 글러먹은 선생들에게 치이면서 학교가, 사람이 싫어졌다. 그나마 형제들이 붙잡아주고 끌어줘서 어떻게든 학교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지만 도서관에 박혀있거나, 학교 주변을 배회하는 고양이들을 보러 교사 뒷편에 있거나 하는 일이 늘어났다. 1학년 땐 같은 반이었던 쵸로마츠가 몇 번이고 나를 찾아서 데려왔다. 사람 없는 곳을 찾아서는 잔소리를 퍼붓는 데 질려서 수업시간에 가버리는 것만은 그만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비거나 사람과 부딫힐 일이 많은 체육 수업 같은 때는 빠져나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게 그나마의 낙이었다.

형제들은 방과 후 시간도 제각각 보냈기에 매일같이 집에 같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주로 쥬시마츠와 같이 귀가했지만, 가끔은 방과후에 혼자 학교에 남아 교내를 돌아다니곤 했다. 사람들은 동아리방에 있거나, 운동장에 있거나 해서 의외로 조용한 공간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재밌었다. 그런 공간들 대부분엔 바닥에 담뱃재가 떨어져 있는게 눈에 띄긴 하지만. 2학기가 시작되고 어느 가을, 그런 공간들 중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을 발견했다. 버려진 옛 소각로. 고양이들이 종종 보금자리로 쓰곤 하던 모양인데 내 몸도 쪼그리면 쏙 들어가는데다 미묘한 경사 덕분에 남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담장 주변이라 담배를 피기는 좀 그럴지 몰라도 그저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이라면 거기서 학교를 관찰하며 시간을 죽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눈에 잘 띄는 교실은 연극부가 사용하는 교실. 

아, 저 교실에는 카라마츠가 있겠지. 하필이면 질리는 얼굴이 있는 교실이 잘 보이냐.

그래도 내 입장에선 몸짓으로 무언가 하는 게 흥미가 있어서 방과 후 혼자가 될 때마다 그 교실을 관찰했다. 중학생 시절 토도마츠의 도움으로 첫 주연을 따낸 카라마츠의 연극을 본 이후, 카라마츠의 연극을 굳이 보러가지는 않았다. 집에서도 엄청 대본 연습을 해대서 질릴 정도였고, 애초에 연극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카라마츠가 연기를 특출나게 잘해서 빠져들게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연극부에 몸 담은지 4년이 넘어가는 사이, 카라마츠의 연기가 많이 늘은 거 같았다. 카라마츠의 과장된 몸짓 하나하나는 궁금증을 자아냈고, 상대역이 압도당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저건 무슨 상황일까, 카라마츠는 무슨 대사를 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와서는 집에서 대본 연습을 거의 하지 않는데. 대신 늦게 들어오니까. 카라마츠의 몸짓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다만 고등학생이 되고 방황하는 사이, 손을 내밀어주는 카라마츠를 밀쳐내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카라마츠는 분명 그런 거 신경쓰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손을 내밀어주는 카라마츠의 손을 이제와서 잡기에는 불편했다. 멀리서 쳐다보는 풍경일 뿐이지만, 카라마츠는 빛나고 있었다. 검게 물들어가는 내가 그 반짝임을 좇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요즘은 대본 연습 안 하는거?"

오소마츠 형이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연극부에서 매일같이 연습하고 오니까. 거기다 집에서 연습하면 다들 시끄럽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그 안쓰런 말투도 관둬주면 안될까, 카라마츠 형?"

"논논. 이건 역할에 몰입하기 위한 내 나름의 노력이니까."
"있지, 카라마츠 형. 이번에는 무슨 연극을 하는데?"

"햄릿이라고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다."

"설마 주인공은 아니겠지?"

"주인공은 아니지만 레어티즈라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햄릿. 어떤 내용이었더라. 복수극이었던건 기억나는데, 레어티즈가 어떤 인물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이번 연극은 언제 하는데?"

궁금증에 내가 입을 열었다.

"오! 이치마츠, 연극을 보러 와 줄 생각인가?"

카라마츠의 눈이 반짝였다. 아마 자기가 나한테 미움이라도 받고 있을거라 생각했겠지. 그래서 저렇게 기쁜 표정을 짓는 걸까 혼자 생각했다.

"시간 나면."

애매한 답을 내뱉는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난 카라마츠의 몸짓이 완성되는 그 연극을 보러 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 해 겨울, 바쁘다는 토도마츠를 제외하고 모두들 카라마츠의 연극을 보러 갔다. 내가 몰래 관찰하던 카라마츠의 몸짓들은 무대 위에서 대사와, 분위기와, 상대역과 합쳐지며 더 강한 의미를 자아냈다. 주인공은 햄릿일 텐데, 카라마츠가 연기하는 레어티즈의 분노와 복수심이 안에 밀려들어오면서 햄릿을 압도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카라마츠가 이렇게 연기를 잘 했던가. 무대 위에 서 있는 인물은 레어티즈 그 자체였고, 카라마츠가 검에 찔려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파지기까지 했다. 이게 과몰입인가. 

그렇게 카라마츠의 연기에 나는 빠져들었다. 2학년 때는 카라마츠와 같은 반이 되어서 이런저런 핑계로 카라마츠의 연습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고, 카라마츠가 서는 연극 무대는 빠짐없이 보러 갔다. 방과후에는 나만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땐 카라마츠도 연극부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 나만의 시간마저도 이전처럼 카라마츠의 연기를 관찰하곤 했다. 대신 그 외에 1학년 때 정립시켜놓은 나의 일상들은 삐걱거렸다. 카라마츠는 멍청하니까, 일과시간에 밖으로 나돌면 나를 찾으러 헤매고 다닐까봐 시야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쉬는 시간에는 다른 녀석들과 잡담을 떨거나 하는 시간들을 쪼개어 말을 걸어와서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을 방해받기도 했다. 썩을마츠라고 부르며 쫓아내기도 했지만 녀석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극 연습이 힘들었던 다음 날이면 쉬는 시간에 잠들어버려서 한숨 돌리기도 했다. 


2학년 말에는 꽤나 큰 사건이 있었다. 오소마츠 형이 진지하게 우리들을 불러모아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렇다곤 해도, 오소마츠 형은 이미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라 둘의 대화 후 나온 결론을 들어보는 거 뿐이지만. 형제들의 대답은 대부분 똑같았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 없음. 진학도 취업도 노 플랜. 앞일따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들다워서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카라마츠는 혼자 우두커니 있었다.

"아직 고민하고 있는거야, 카라마츠?"

오소마츠 형과 이미 얘기했을 텐데, 카라마츠만은 결론을 내지 못했었나보다. 

"아...아니 뭐, 나도 진학이라든가 일을 배운다던가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아."

그 얘기를 하는 카라마츠는 조금 주눅들어 보였다.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카라마츠.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굳이 형제들 장단에 맞추지 않아도 되니까."

"자신을 높이고 싶고, 사람들에게 꿈을 배달하고,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게 지금은 연극밖에 안 떠오르는데. 딱히 대학까지 간다거나 연극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진 않지만,"

뭐야, 의외로 현실적이잖아.

"그래도 역시, 하고 있으면 즐겁거든."

카라마츠는 힘들게 본심을 꺼냈다. 그래도 그와 동시에 형제들과 같이 진학은 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조금 아쉬움이 남아 있어 보였지만, 아마 자신도 확신을 가지지 못해서겠지. 이렇게 형제들의 의견을 모아 오소마츠 형은 3학년이 되기 전, 잘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우리들이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느냐며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분명 피해갈 수 없는 진로 이야기가 공론화되어서 닦달당하기 전에 선수를 칠 생각을 한 오소마츠 형도 대단했고, 그렇게 당당하게 나와버리니 오히려 부모님이 이해해줘서 적어도 한동안은 집안이 소란스러울 일이 줄었다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새해가 되고, 카라마츠는 졸업 전 마지막 연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진학을 포기했으니 상관없지만 3학년은 수험생이 많아서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은 유급되지 않는다면 1년이나 남았지만, 3학년이 되면 카라마츠도 자동적으로 연극부에서 나오는 걸로 되어버린 것이다. 연극에 미련이 남았던 카라마츠는 어쩌면 자기가 서게 될 마지막 무대를 위해 온 힘과 정신을 쏟아냈다. 

카라마츠는 정말로 연극에 빠졌구나.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는 카라마츠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연극을 준비하던 3월, 카라마츠는 캔커피를 건네며 드물게도 내게 상담을 해왔다. 

"같은 반이니까 너에게만 얘기할게, 이치마츠."

2학년 때 카라마츠와 의외로 많은 시간을 보내서였을까. 그의 연습을 많이 구경하러 가서였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하고 싶은 게 있어?"

"없다고 했잖아. 기억 못하냐, 썩을마츠."

한번 끝난 이야기를 캔커피나 건네주며 끄집어내는 녀석의 의도는 뭘까. 

"그런가..."

"그러는 너는, 역시 연극이 계속 하고 싶은거야?"

카라마츠의 답을 기다리며 캔커피를 따서 마셨다. 3월이지만 아직 추워서 따뜻한 캔커피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게 기분이 좋았다.

"...이번 무대가 끝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어."

카라마츠는 슬쩍 웃어보이며 답했다. 안심시키고 싶다는 의도였을까. 그렇게 웃어보여도 눈은 하나도 웃고있지 않은걸. 

그때 수업 종소리가 울리고 이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다. 

카라마츠는 마지막 무대이니만큼 간만에 연기 연습을 집에서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할 정도로 카라마츠는 열심이였고, 내가 몰래 지켜보던 시절보다 한층 빛나 보였다. 

아, 이쯤 되면 별처럼 빛나고 있다고 해야되나. 

카라마츠의 연기는 형제들 누구나가 감탄할 정도로 발전해있었다.

"우와...진짜 다른 사람같아, 카라마츠 형."

토도마츠는 그간 카라마츠의 연극을 보지 않았으니 그 놀라움이 더 큰 모양이었다.

"대본 완벽소화? 대단한데."

전에 집에서 연습할 땐 시끄럽다고 핀잔주던 쵸로마츠도 감탄했다.

카라마츠가 읊는 대사와 표정, 그 몸짓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으며 반짝임을 만끽했다. 지금 집에서 잠옷 입고서 하는 연기도 저정도인데, 무대에 가면 도대체 어떤 광경을 보게 될런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윽고 카라마츠의 마지막 무대의 막이 올랐다. 이번만큼은 형제들이 모두 연극을 보러 갔다. 이번에는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카라마츠에게 공연장은 휘둘렸다. 카라마츠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그의 손짓은 아쉬움을 내뱉던 그의 한숨도 담겨있는 듯 했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안에 담아두고 있던 본심을 전하는 듯 했으며, 그의 눈빛은 어딘가 초월해버린 것같아 보였다. 이건 나만의 생각이라, 카라마츠의 연기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느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 형제들은 좀처럼 빛나는 일이 없다. 

마지막 무대에 선 카라마츠가 마치 초신성처럼 빛났던 그날 이후.

우리 형제 중 그 누구도 빛을 내는 일은 없었다.

다만, 녀석의 반짝임에 반해버렸는지 난 그 반짝임을 잊을 수가 없다.

초신성은 별이 죽어가면서 짜내는 최후의 빛을 내는 거라고 하던가.

그래서 마지막 무대에서 녀석은 그렇게 아름답게 빛났던 걸까.

카라마츠가 떨어지는 모습을 본 그 때를 떠올린다.

녀석은 어느새 어둠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어버린 걸까.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니트로서 폼이나 잡으며 다니는 안쓰러운 녀석이 된 지금,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녀석은 어둠을 집어삼키게 된걸까.

혹시,

나 때문인걸까.

그 이후, 나는 카라마츠와 그다지 어울려다니지도 않았고, 녀석의 안쓰러운 면모가 더해갈수록 심한 말을 하는 일이 잦아졌었지.

그 전에도 나는 녀석에게 심하게 대한 걸 후회해왔다. 거기에 카라마츠의 자살 시도를 목격한 이후, 카라마츠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목을 조여와 카라마츠를 피하기 시작했다. 지금 병실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것도 죄책감이 나를 덮칠까봐 두려워서다. 

머리만 텅 비었던 녀석은 마음 속도 텅 비어버렸다. 

그걸 메워주지 못한 초봄의 그날부터 나의 죄가 쌓이기 시작한 거다. 

카라마츠가 눈을 떠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카라마츠의 마음을 메우지 않으면 아마 카라마츠는 스스로 텅 빈 자신을 버리려 들 것이다.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이젠 복도에서마저 내 죄책감은 나를 옥죈다.

같은 공간에 있다간 집어삼켜져버릴 거 같아. 

병원 바깥을 향한다.


나는 카라마츠에게서 도망치는 거 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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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여기가 1/2 지점이네요. 아, 4월에나 끝나버리는 거 아닌가 이거
중요한 건 정말 자기만족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소마츠상 볼때마다 제 안에서의 캐해석이 막 뒤바뀌고 뒤집어지고 하니까 그게 여기에도 고대로 반영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죄송해요. 그래도 전 편 읽으면서 혼란주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구상하다보니 청춘물을 쓰고 싶어졌는데 그냥 이 시리즈가 아니라 단편으로 낼걸...하다가도 어차피 아무도 안보는데 여기 넣어버리자, 차피 카라마츠 과거썰은 풀어야겠지 해서 좋아하는 이치카라에 넣었습니다. 앞에서부터 봐주셨다면, 카라마츠가 왜 자기를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팠는데 잘 전해졌을까요.  
그리고 이거, 아무래도 커플링이 아니라 조합으로 써야 할 거 같은데, 일단은 최대한 브로맨스 테이스트를 느낄 수 있게 쓰고 있으니까 뭐, 취향껏 즐겨주세요. 죄송합니다. 변변찮네요 ㅠㅠㅠ 


Posted by 하리H( )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