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9. 14:17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인터미션1―

《장형마츠의 중학교 1학년 여름》

(맏형마츠라고도 함)

-오소카라 요소 조금 있음.

-늘 그렇듯 망상폭주기관차

-단편으로 읽어도 되도록 했습니다.















이번 여름은 유독 길다.



*



올해는 여름이 빨리 찾아왔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빨리 30도를 넘었다던가. 그래서 예년같으면 6월이 되어서야 여름 분위기가 났을텐데 올해는 5월부터 쭉 더워서 지금은 벌써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느낌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며 들뜬 마음으로 맞춘 가쿠란을 채 두 달도 못 입고 반팔 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두고 학생들은 시험에서 해방된 기쁨과 금방이라도 푹 쪄질 거 같은 더위 사이를 오가며 방학이 어서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중학생이 되고 어느새 많이 변해버린 내 '동생'들도 그럴까. 어리광으로 시작했던 맏형 자리는 의외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전에도 이미 난 모두를 주도하는 역할이었으니까 별 달라진 점이 없는데. 형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히 기쁘기만 한데. 엄마가 우리를 찾을 때 나부터 부르는 건 태어날 때부터였으니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닌데. '동생'들이 변해서겠지, 역시. 그 중에서도, '둘째'라는 위치를 해내고 있는 카라마츠가 가장 큰 원인인 거 같다. 그에게 이끌려 맏형이 될 때마다 이 자리가 어쩐지 부담스러워진다. 말 안듣는 쵸로마츠나 토도마츠도 물론 큰 골칫거리지만. 그러고보니, 카라마츠에게서 왜 그렇게 차남 역을 열심히 하는지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차피 물어봤자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며 웃어 넘길 게 뻔하지만.
"하? 폐건물 탐험? 어린애냐고?"
"언제가 되어도 오소마츠 형만큼은 어른이 되지 않을 거 같아."
얼마 전부터 이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재개발이 한창이다. 어릴 때는 그런 곳의 폐건물을 종종 가고는 했다. 나와 쵸로마츠가 앞장서고 나머지도 벌벌 떨면서 건물을 돌아다니다 정말 별 거 아닌 구슬이나 긴 못 같은 걸 주워서 건물을 정복했다며 뻐기곤 했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분명 작년에도 버려진 학원에 가서 책상에 실컷 낙서를 하고 돌아왔을 터다. 그걸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는 먼 옛날 얘기인 양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치마츠와 쥬시마츠 쪽을 바라봤지만 둘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내 눈을 피한다.
"쳇. 형아의 로망을 이해해주지 못하다니."
몸을 홱 돌리며 삐진 척을 해보지만,
"형다운 짓을 하면서 형이라고 좀 해봐라. 덕분에 1학기 내내 전원 교무실 단골이 되었다고? 교내 방송에 '마츠노'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 지 이젠 스피커에서 소리 날 때마다 절로 고개숙이고 일어서는 기분을 알아?"
기다렸다는 듯 쵸로마츠가 쏘아붙인다. 그렇게 불만이었냐. 하긴, 내가 사고를 치고 나선 매번 다른 이름을 대면서 도망쳐 다녔기에 동생들도 제법 고생했을 것이다. 그걸 알아도, 장난은 그만둘 수 없지만.
"바보짓은 그만 좀 해! 금쪽같은 쉬는 시간도 다 뺏기고 말야."
토도마츠도 거들고 나서고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는 여전히 내 눈을 피한 채 끄덕거리고 있다.
"이래서야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4명의 눈이 이쪽을 향한다.
"나쁜 사람 맞잖아!"
그 후, 저녁 먹기 전까지 쵸로마츠에게 설교를 들었다. 교칙으로 위험한 장소는 가지 말라는 게 정해져 있다고. 폐건물 같은 데를 갔다 들키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말과, 갔다가 만약 누구에게 걸리지 않더라도 바보짓에 질린 자신이 직접 선생에게 말할 거라는 협박도 함께. 무거운 분위기의 거실에서 날 구원해준 건 언제나처럼 늦게 귀가한 카라마츠였다. 닭고기 냄새에 혹했는지 어린애처럼 밥을 보채는 그에 동조하듯 모두 밥을 달라며 떼를 썼고,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도 "어쩔 수 없네"라며 밥상을 차려주셨다.

다음날도 볕이 뜨거웠다. 교복의 등은 벌써 땀으로 젖어 있다. 시험이 끝나서인지 더위를 못 참는 기분을 이해해서인지 책상에 엎드려있어도 용서해주는 자비로운 수업시간. 지루한 톤의 말소리는 살짝 스쳐가고, 오히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더 귓속을 울리는 오후 시간. 그러다 문득, 카라마츠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떠올랐다. 거기에 폐건물. 종합병원이 폐업한 거라 분명 재밌을 텐데. 둘이 그런 곳에서 얘기하면 좀더 솔직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예로부터 귀신의 집이나 담력훈련은 사랑이 싹트는...어라? 갑자기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선생의 눈길이 잠시 나를 향했다 이내 다른 쪽으로 향했다. 뭐, 연인이 되는 이벤트를 형제한테 못 한다는 법은 없지. 생각난 김에, 오늘 해 버리는 게 좋겠다...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수업종이 울리고, 난 교실을 뛰쳐나갔다.

방과 후, 연극부로 향하는 카라마츠를 뒤에서 붙잡았다. 흐엑! 같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놀라는 점이 카라마츠의 숨겨진 볼거리다. 그랬다가 한심하다는 듯 째려보는 눈길이 조금 쓰라렸지만.
"자자, 아우여. 오늘은 이 형님과 갈 곳이 있으니 잔말말고..."
"싫다."
"잠깐!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지 말고~"
"시험은 끝났지만 연극부는 가을공연을 준비해야 하니까 쉬지 않는다. 모처럼 1학기에 잘 심어둔 인상과 여기에 바친 열정을 단 하루의 실수로 놓아버리고 싶진 않아."
"은근히 빡빡하네, 연극부."
"학기마다 적어도 한 번은 공연하니까. 많이 익숙해졌고, 남아있는 1학년들 모두 열심히 하자고 선배들이 응원해준 게 바로 어제인걸. 그런 다음 날 연습을 빼먹으면 누가 신뢰를 주겠어?"
카라마츠가 연극부에 푹 빠져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겨우 하루 빼먹는 걸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이야. 하지만, 이미 손은 써 놨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말없이 빠지는 게 싫은거지?"
"응...하지만 집합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갑자기 안 간다고 하긴 좀..."
"그건 걱정마."
"에?"
"이미 말해뒀음."
카라마츠가 벙찐 얼굴로 날 봤다. 못 믿겠다는 게 얼굴에 쓰여 있었다.
"3학년에...그...아사노였나? 연극부 선배지? 그 사람한테 오늘 볼 일이 있다고 아까 말해뒀어. 귀엽더라, 그 선배~ 혹시 그 선배 때문에 연극부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아...어...그건 아니야...아사노 선배는 어떻게 알고 연극부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저번 공연 때 눈여겨 봤지. 네가 몇번 얘기한 적도 있잖아?"
벙 찐 카라마츠의 얼굴은 살짝 경외가 묻어나 보였다. 내 생각이지만.
"뭐...형제의 주변을 챙기게 되다니 역시 맏형답군."
그냥 그 사람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던 거 뿐이지만, 카라마츠는 이 틈에도 나를 괜스레 맏형이라 추켜세운다.
"처음에는 너인 척하고 가서 꾀병부렸는데 너가 아닌 것도 꾀병인 것도 금방 들키더라? 그래서 사나이 대 사나이로 긴히 할 말이 있어 널 데려간다 했더니 엄청 웃던데? 눈물까지 찔끔이면서. 그러더니 오늘은 카라마츠를 잘 부탁한다며 보내줬어."
카라마츠는 내 말을 유심히 듣더니 의심이 걷힌 듯 끄덕였다.
"...그래서?"
"응?"
"어디 갈 건데, 오소마츠 형."
급격히 진지해졌다. 이런 점은 확실히 예전과 다르다. 녀석이 정색할 줄 알았던가.
"재개발하는 쪽에 종합병원이 폐업하고 남은 폐건물이 있거든. 거기 한 번 가 볼까 해. 다른 녀석들은 애취급하면서 안 간다잖아. 가기 싫으면 그냥 안 가면 되지 거기서 왜 어른이 못 될 거냐느니 하는 말이 나오냐고."
"작년까지만 해도 종종 그런 데 가긴 했지. 그런데 지금은 교칙으로 못 가게 되어있지 않아?"
"내가 교칙을 지키는 쪽이 아닌 건 잘 알잖아?"
"하긴...입학하자마자 덕분에 고생했어. 특히 내 이름 대고 자주 튀었잖아."
"그건 뭐..."
머쓱한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본다. 생각해보면 나 때문에 자주 혼났으니, 장난에 꾀어내는 걸 싫어할 지도 모른다.
"좋아. 오랜만에 한 번 가보지 뭐."
카라마츠는 살짝 웃어보였다. 아마도, 그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본 건 오랜만이라 생각한다.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지 않게 된 것도 벌써 반 년이다.



*



한때는 종합병원이었던 건물은 철로 된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덩그러니 놓여있다. 울타리들엔 락카로 수놓은 욕망의 잔재들, 각양각색의 광고지, 으레 새겨진 사랑의 화살표 등이 수놓아져 있다. 울타리를 따라 빙 돌다보면 발로 찼는지 삽 같은 것으로 쳤는지는 모르지만 철판이 안으로 휘어진 개구멍이 만들어져있다. 낑낑대며 들어가면 바닥에 씨처럼 흩뿌려진 담배 꽁초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그런 건 나나 카라마츠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한때는 정문이었을 유리문은 돌이라도 맞았는지 깨져있고, 그 곳에 너덜너덜하게 폐업일 안내와 철거일 안내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내일 철거하나 보네."
카라마츠는 답이 없다.
"운이 좋았네, 우리. 그렇지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움찔하며 내 쪽을 본다. 맞아, 이 녀석 겁쟁이였지. 암만 철 든 척 형인 척 해도 겁이 많던 그가 갑자기 대담해지지는 않았을 터다.
"본방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안에 들어가서 재밌는 게 있나 살펴봐야지!"
손을 덥썩 잡았다. 카라마츠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름날이라 그런지 겁이 나서 그런지 그의 손은 촉촉했다.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꼭 붙든다. 이거야 원... 형에게 의지해 주다니 기쁜데.
"...귀신이라던가...원혼 같은 건 없겠지?"
"그런 게 세상에 어딨냐? 있으면 이 '형'이 혼내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그렇게 떠는 와중에도 불신의 눈으로 그가 나를 쳐다본다. 그게 하늘같은 형님 보는 눈빛이냐. 뭐, 어떠랴. 그의 손을 붙잡은 채 깨지지 않은 쪽 문을 열었다. 떨면서 멈칫서리는 카라마츠를 끌어당겨 안으로 들어왔다.
"자, 손전등 가져왔어. 하나 받아."
"오...오우..."
"이젠 좀 떨어져도 되지 않냐? 괜히 붙잡고 있다가 넘어져서 다칠 수도 있다고?"
"그럴지도..."
카라마츠는 손을 놓고 그 자리서 우뚝 섰다. 희미하게 비치는 햇빛에 의지해 그의 눈은 공포와 호기심이 뒤섞인 채 이 공간을 파악해가고 있다. 나도 그를 시야에서 놓지 않도록 주의하며 주위를 살폈다. 맥주 캔이나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지만, 대체로 휑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게, 이 건물은 내일이면 사라질 곳이니까. 카라마츠는 이번엔 옷깃을 붙잡은 채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계단..."
"올라가볼까? 여섯이 왔을 때보다 너무 떠는 거 아님?"
"그땐 사람이 많았잖아. 오늘은 단 둘이니까."
"두고 도망가면 볼 만 하겠는 걸~"
"그랬다간 형이고 자시고 패버릴테니까 알아서 해. 아마 다들 기회 잡으면 좋다고 널 패러 달려들걸."
부들부들 떨면서 강한 어조로 그가 말해온다. 나한테 쌓인 거라도 있었나. 사람은 몰리면 본심이 튀어나온다고 하던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자, 올라가자!"
2층, 3층, 4층...6층 하고 옥상. 옥상 문을 열고 나갔지만 높이 솟아오른 철조망과 한때는 이것저것 빨래가 널려 있었을 줄들이 수거되지 않은 채 곳곳의 기둥에 묶여 있었다.
"내일이면 사라질 건물이니까 망정이지, 누군가 여길 진작 알았다면 분명 안 좋은 일이 있었을 거야..."
카라마츠는 걱정스럽게 옥상을 둘러보았다. 폐건물의 탐험 놀이도 시간이 지나면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걸까. 고작 반 년밖에 안 됐는데. 녀석이 '둘째 형'이 된 지도, '중학교 1학년생'이 된 지도, '성실한 연극부원'이 된 지도. 억지로 '첫째 형'이 된 나와는 다르게 그 변화가 자연스럽다. 여전히 겁쟁이고 바보인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푹푹 찌는 더위에도 살짝 바람이 부는 이곳은 어째선지 선선했다. 흔들리는 빨랫줄과 철조망에 부서진 주위 풍경과, 계단을 오르느라 땀에 젖은 카라마츠와, 나와. 그곳에 계속 있다가는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릴 거 같아 땀이 식자마자 6층으로 내려왔다.

"폐건물 탐험의 룰은 알고 있겠지?"
"호...혼자 다니게 할 셈이야? 더 좋은 거 주워오기 경쟁이잖아?"
혼자 다녀본 적은 없었다. 예전엔 짝지어서 다녔으니까. 생각해보니 카라마츠와는 짝을 지어서 폐건물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쳇. 어차피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니까 같이 다니면서 경쟁하는 걸로 하지 뭐. 여기는 병실만 있어서 별 거 없을 거 같으니까 다른 데 찾으러 가자."
가지고 온 손전등을 켜고, 본격적으로 병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검사실, 진료실, 약품 보관실...종합병원이라곤 해도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아보였는데, 크고 작은 방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마 가져가기에 골칫거리인 침대나 소파나 책상같은 큰 물건들을 제외하곤 주사기 바늘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요소들은 안전하게 치워놓고 비워주는 게 당연하지만, 이런건 너무 정 없잖냐. 로망을 모른단 말이지. 이래서야 그냥 죽음을 앞둔 건물일 뿐이잖아. 생각만큼 수확이 없었던 데다 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닌 탓에 지친 우린 3층의 휴게실에서 우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아~ 간만에 하는 탐험이 이다지도 무의미할 줄이야."
"그러게, 별 거 없었네 정말."
하아. 동시에 한숨을 쉬고선 눈이 마주쳤다. 뭐, 마침 잘 됐어. 둘이서 진득하게 이야기나 하지 뭐.
"카라마츠, 있잖아."
"왜?"
"있잖아...음..."
큰일이다. 막상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니 입이 안 떨어져.
"중학생이 되니까 어때?"
"중학생? 아...글쎄."
그리고 어색한 침묵.
"사실 교복을 늘 입고 다녀도 항상 한 다스로 사서 세트로 입고 다니던 우리 여섯 쌍둥이에겐 별 새로운 느낌은 없었지. 중학생이 되서보다는, 중학생이 되기 전 오소마츠 형이 형으로 불러달라고 했던 그 날, 그렇게 형동생이 생겨버린 그 때가 더 영향이 컸다 해야 할까? 뭐냐고, 갑자기. 그런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 조금씩 달라지고 싶었던 거 같다. 나도 그렇게 찌면 둘째 가는 형이니까. 그리고 연극부가 재밌다! 연기력따위 늘지 않고 처음에 주연을 해서 그런가 살짝 열정이 시들해진 감도 있지만, 그래도 재밌어. 수업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등교하자마자 방과후가 됐으면 하면서."
카라마츠가 의외로 떠들어준다.
"오소마츠 형이야말로, 어떤가. 누가 보면 행복하다못해 폭발하는 청춘을 보내고 있지?"
"음...글쎄다."
다른 녀석들하고 어울리기도 하고, 치고받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매일 즐겁긴 하지만.
하지만.
혼자인걸.
괜한 짓으로 나는 너희들과, 너와, 멀어져버린 거 같아.
"너무 미움사지는 말라고? 쵸로마츠는 저렇게 직접 얘기하는데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 같아. 성실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하지. 다른 녀석들도 내가 속마음까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형에게 휘둘려서 조금은 힘들어하고 있다. 다들 조금씩, 그렇게 자기를 찾아가는 거 아닐까."
뭐냐고.
혼자 훌쩍 커버린 소리 하지 말라고.
어쩌다 그런 소리를 하게 된거야, 바보 주제에.
"난 그런게 아니라, 너에 대해..."
다시 분위기를 잡아보려 했는데, 카라마츠가 갑자기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시선은 휴게실의 창문 너머였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고 다시 카라마츠 쪽을 보는데, 카라마츠가 손을 덥썩 잡았다.
"여...역시...얼른 나가자..."
무섭다라는 말은 자존심 때문인지 하지 않는다. 녀석은 뭘 본 걸까. 더 이상 여기 있기도 그러고, 분명 둘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도 많겠지. 손을 잡고 넘어지지 않게 계단을, 계단을 달려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개구멍을 지나서 폐건물이 멀어질 때까지 달리는 동안 제법 해가 내려앉은 것이 보였다. 하늘엔 어느새 붉은 빛이 한 방울 떨어뜨려졌다. 집에 들어가기 전 공터에서 서로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 카라마츠가 가지고 있던 용돈으로 아이스바를 7개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둘이 같이 오다니 별일이네."
집에 먼저 와 있던 이치마츠가 마루에서 부채질을 하며 인사한다. 옆에 있던 쥬시마츠가 봉지를 눈치채고 다가와서 아이스바를 두 개 빼갔다. 카라마츠도 아이스바를 두 개 꺼내서 내 손에 쥐어주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이치마츠 옆으로 가서 앉아 아이스바의 껍질을 깠다. 파란 색의 소다맛. 혀로 핥으면 여름이 묻어나오는 그런 맛. 냉장고에 남은 아이스바를 넣고 온 카라마츠도 내 옆에 앉아서 어느새 살짝 녹은 아이스바를 입에 문다.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며 잠시의 일탈을 씻어냈다.



*



멍하니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쿵, 쿵, 하고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 어제 갔던 그 폐건물이 철거된다고 했던가. 창문은 열려 있고, 바람이 불어서 그런가 간만에 선선했지만 여기까지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잖아. 마치 어제 오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일매일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다. 옆동네에선 폐건물을 철거하는 소리가 한동안 소란스럽겠지만 어느새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또 그 건물이 항상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조금씩 달라져버린 카라마츠도, 다른 녀석들도, 언젠가는 늘 그랬다는 듯이 받아들여지겠지. 그런건 싫지만, 그땐 그랬지 하며 어제 일을 별 거 아닌 양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러는 동안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며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복도를 바라보면 평소와 같이 카라마츠가 들뜬 표정을 하고서 지나간다.

여름방학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번 여름은 유독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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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가 도대체 몇 번 째인지) 쉬어가는 겸 단편 먼저 갑니다. 흐에에...
원래는 끝나고 외전 몰아쓰고 마치는 게 작년까지의 계획이었는데...재작년...재작년...하...
쉬는 동안 덕질은 안 쉬었습니다. 단타로 굵직굵직하게 즐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삶이 여러모로 글러먹은데다 지리멸렬해서 힘들군요(진행중)
작년이 재작년이 되고 또 한 해 지나고...아...미치겠...
어느새 2기도 끝나고 극장판이 학생마츠 코피팡! 그리고 설정 다 붕괴하면서 극장찬 보고 오면 쳐울며 지울 거 같아서 그 전에 어떻게든 쥐어짰습니다 흑흑

겨울에 하는 여름 이야기입니다! 아 넘모넘모 추운거시에요
폐건물에 로망은 없나요? 아지트라든가.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지금도 그런 로망이 있습니다. 저기서 보통 진한 ■■■■■■■■■를 상상하지만 건전하게 가봤습니다. 자신이 없어...
Posted by 하리H( )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