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 01:07

"이걸로 주세요."
작업실 근방에 있는 꽃집.
그곳에 조금 별난 단골고객이 생겼다.
퀭한 눈에 지친듯 굽어있는 등, 조소하듯 기분나쁘게 웃고 있는 한 남자.
꽃집의 입구 쪽에 놓여진 꽃을 가리키며 살 때마다 매번 '이걸로 주세요.' 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꽃집 주인은 '알겠습니다.' 라며 그 꽃 몇 송이를 집어들어 바스락거리는 종이에 싼 뒤 예쁘게 리본을 묶어 건넨다.
이유도 없이 그저 눈에 들어온 꽃을 몇 번이나 사갔던가. 꽃다발을 풀고 싶지 않았지만 물병에 꽂지 않으면 시들어버린다는 말을 듣고 풀어서 병에 꽂아놓은 게 큰 항아리를 가득 채울 만큼이 되었다.
몇 송이는 담당 편집자에게 떠넘기고, 몇 송이는 새로운 기획 관련 미팅 때 참석자들에게 떠넘겼는데, 그들은 바보같이 역시 '미넷 선생님은 달라!' 하면서 입에 발린 칭찬을 해댔다.
그러고보니, 늘 사는 이 꽃은 대체 무슨 꽃이지.
문득 남자는 궁금해졌다.
"이 꽃, 이름이 뭐죠?"
"소국이예요. 소국."
소국, 소국이라.
"참고로 꽃말은 밝은 마음과 고상함이라네요. 흰색은 성실함. 빨간색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실연이란 뜻도 있다고 하네요. 노란색은 실망을 뜻한다고 하는데 색이 예쁘니 들여놓고 있어요. 주는 사람이 전하고 싶은 마음이나 보는 사람의 마음에 든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요, 훗."
거 참 말 많은 꽃집 주인일세.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꽃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 정확히는 작업실을 옮겨온 김에 거리를 둘러보고 있던 중 꽃집 옆을 지나쳤을 뿐인데 꽃집 주인이 불쑥 저 꽃을 들이밀었다.
그땐 흰 소국을 받았지.
"어제 건너편 건물로 이사오신 분이죠? 어제 이삿짐은 옮기는 걸 봐서... 저도 여기 꽃집을 연 지 얼마 안 돼서 인사를 겸해 지나가는 분들께 꽃 한 송이씩 건네고 있어요!"
푸른 앞치마에 시원스러운 얼굴.
실내에서 일하는 주제에 짙은 선팅의 선글라스를 쓴 청년이었다.
얼떨결에 꽃을 받아드니 꽃집 주인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펴진 걸 본 탓이었을까.
남자는 그 뒤 외출할 때마다 꽃집에 들러 받은 꽃과 똑같은 꽃을 사고는 했다.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순정만화를 그리면서도 작업실에 박혀 한발짝도 떼지 않는 음울함 가득하던 그가 꽃집에 가기 위해 장을 본다는 핑계를 대며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빨간색 소국도 예쁘게 꽃다발로 만들어주세요."
딱딱한 말투로 남자는 빨간 소국을 가리켰다.
"설마 꽃말 얘기한 거 듣고 혹해서 사는 거 아니죠? 역시 줄 사람이 있는 건가..."
아니야.
그런 사람 없어.
아니야.
사실은.
꽃 이름을 묻거나 그걸 사거나 한 거는 당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야.
불쑥불쑥 내 일상을 침범하는 당신 탓에.
습관처럼 배어든 당신 생각에 내 작품의 히로인도 당신을 닮아가고 있는걸.
남자는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전할 수 없었다. 머뭇머뭇.
늘 그렇듯 그냥요. 라고 대답하고선 남자는 꽃다발을 받고 돌아선다.

사실은, 당신의 이름을 묻고 싶었어.

예전에 트위터에 올렸던 거 같은...?
수정 및 가필하려고 하는 김에 아주 조금 손봐서 올려봐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큼 제대로 연성한 42가 잘 안보여

Posted by 하리H( )Ri
2018. 10. 4. 02:54
앞에서 이어집니다. (http://heartrainon.tistory.com/186)
- 망상가득한 이치카라 소설
- 나의 ~마츠는 이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여러모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
- 글쓴이의 머릿속이 꽃밭
- 제목은 별 거 없습니다.

******

이치마츠와 사귄 지 어언 한 달이 넘었다. 지금도 그 강둑에 산책하러 가는 게 페이버릿 데이트 코스다. 이치마츠에게 고백을 받고, 키스를 하고. 세계가 부서지는 가운데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나눈 입술과 혀의 감촉은 아마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세상이 부서졌다가 기적처럼 다시 붙어서 원래대로 돌아온, 그런 세계를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들인 것이 정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덕에 아직 우리는 이 세계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아직. 분명 세계가 다시 돌아오면서 내 머릿속에 울렸던 목소리가 말하길 다른 세계에서 있었던 일, 내가 세상을 부수는 존재라는 일 같은 건 점점 잊혀질 거라고 했다.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라고. 나를 묶었던 데스티니에서 해방되어, 그렇게 나는 그저 소중한 형제인 이치마츠의 연인이 돼버린 마츠노 카라마츠로서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옅어진 듯 보였던 균열은 한 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의외로 세계가 회복되는 건 느린 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수없이 많은 세계의 내가 세계를 부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내 머릿속에 남아서 날 괴롭힌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나날이 이어졌다. 행복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치마츠는 그런 나를 걱정한다. 하지만, 이젠 그가 나의 걱정을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세계의 기억이 사라졌다. 이치마츠의 말에 따르면 다른 형제들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에게서도 역시 사라진 모양이었다. 강둑에 가서, 이치마츠를 슬쩍 떠본 것도 몇 번이고 한 일이다.
"이 강둑에서 너에게 고백을 받고 거절할 지 받아들일 지 고민했었지."
이렇게 운을 띄우면,
"그때 용기내서 널 안기를 잘했어. 설마 그러고 바로 키스를 하다니 진도가 빨랐네, 우리."
히힛, 하며 이치마츠는 부끄러워 하지만,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라고 생각하며 세상이 부서지는 속에서 끝을 맞이할 때까지 따뜻함을 나누자고 생각했다 말해주었던 그다. 나와의 첫 키스의 여운은 사라져버렸을까.  그 뒤로도 우린 거의 매일같이 키스를 했고 그때마다 이치마츠는 입술을 떼고 나서는 부끄러워하며 멋쩍은듯 웃어버린다. 그것 또한 사랑스럽지만, 가장 소중했던 순간의 기억을 혼자서만 알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것에서, 균열이 사라지지 않은 것에서 나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헤에~ 왠일로 이치마츠랑 같이 있지 않네, 카라마츠."
오소마츠가 어깨를 탁 치고선 옆에 앉는다.
"혹시 싸운 거? 이치마츠가 무리하게 러브호텔 끌고 가려 하진 않았지? 그 녀석 그래뵈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엔 어그레시브한 면 있다고? 분명 너 휘둘리고 살 거 같은데."
"무슨 일로 걱정해주는 건가. 이치마츠는 분명 어그레시브하지만 내가 싫다고 하면 참을 줄 아는 착한 아이다. 만약 오소마츠였다면 돈 생기는 대로 러브호텔 끌려가서 수없이 만져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에, 나 그런 이미지? 아직 동정인데 벌써 그런 이미지?"
"그런 이미지 갖고도 남는다는 걸 잘 알아두라고,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할걸."
"쳇. 모처럼 걱정해줬더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소마츠는 내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평소에는 이치마츠가 붙어있고, 알아서 둘이 해결하겠지 생각해 주었던 걸까.
"형제가 연인이 되는 거 보고, 서로 행복하기만 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쵸로마츠는 밖에 다닐때만큼은 주의해달라고 하는 거 보면 아직 완전히 인정하진 못한 거 같아. 엄마나 아빠한테는 말도 못하고 있고. 그래도 이 형은 완전 괜찮아. 둘이 행복하면 그걸로 괜찮아. 그런데, 행복해야 할 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까 걱정된다고. 이치마츠도 걱정해주고 있기야 하겠지만, 애초에 이치마츠가 고백한 그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닐까 생각해버린다고. 그래도 깨어 있을 때 둘이 지내는 모습 보면 안심한다고. 혹시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 거 아냐? 벌써 미래설계 하는 거 아니지? 둘이 따로 살림을 차리러 사람의 도피행같은 거 계획하는 거 아니지? 그런 것만은 절대 안 돼. 둘이 연인이든 부부가 되서 살림을 차리든 이 집에서 내 손에 닿는 곳에 있다면 상관없으니까."
걱정해주네. 며칠을 참은 말들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적도 없는데 오버하기는. 하지만 내 고민은 오소마츠에게 털어놓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털어놔도 어차피 황당무계한 일로 받아들이겠지. 아니지. 믿어준다고 해도, 그저 믿어줄 뿐.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겠지. 이건 오소마츠만이 아니라 쵸로마츠도, 쥬시마츠도, 토도마츠도, 그리고 이치마츠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계의 일 같은 것, 내가 무엇인가 같은 것.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고, 설령 끌어들인다 해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날 괴롭힌다. 아아, 이치마츠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겠지. 날 안아주고, 키스해주고, 만져주고, 사랑해주고...나의 말도 믿어줄 것이고, 첫 키스를 한 그 때처럼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에도 나와 함께 있어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오소마츠, 아니 형님. 이치마츠는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랑받는 이 몸이 길티 그 자체일 뿐. 연인의 그건 아니지만, 형님에게도 다른 동생들에게도 분명 사랑받는 러브 헌터, 길티 가이!인 나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허세다. 최악의 허세다. 분명 바보인 이 장남 녀석도 알아챌 정도의 허세다.
"여전히 갈비뼈 아프네에! 이치마츠 갈비뼈는 부러뜨리지 말라고."
장난으로 받아들여주는 건가. 그건 그거대로 고마울 따름이지만.
"잠도 잘 자야 착한 아이라고, 카라마츠?"
대답을 피하는 나의 정곡을 찌르며, 바보지만 바보지 않은 하나뿐인 형이 얘기한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다. 그 뒤 쥬시마츠와 외출했던 이치마츠가 돌아왔다. 이치마츠는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벌렸고, 나는 그에게 달려가서 그의 품에 안겼다.

*******

잠들지 못하는 나날은 계속되었다. 꿈은,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은, 깨어있을 때나 잠에 들었을 때나 나를 괴롭혔다. 이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 벌에서 해방됐다며 기뻐해 주던 운명의 여신, 아니 어딘가 다른 세계의 목소리는 이제 와서는 다른 소리를 한다.
'한번 부서진 세계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어.'
'넌 분명 세계를 부수는 존재라는 벌에서는 해방됐지만, 이미 이 세계는 네가 부숴버린 거야.'
'저 균열, 네가 어떻게든 붙들어놓고 있는 거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겠지.'
균열을 붙잡아두고 있다는 의식은 없지만, 그 탓이었나. 균열이 사라지지 않은 건. 오히려 이제 그 틈이 점점 벌어지고, 이 세계는 결국 부서질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거라고. 이치마츠가 나를 살짝 두드렸다. 팔을 뻗어주는 그에게 살짝 애교를 부려 팔베게를 받았다.
그렇게 잠시 꿈을 꾸었다. 세계의 틈새 같은 곳에서 무수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이 있다. 아니, 형제인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곳에서 눈부신 빛이 말한다.
"너희 여섯명은 세계의 운행에 간섭했다. 영영 세계의 틈새에 가둬두는 것도, 무수한 세계에서 벌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너희가 속죄하는 방법이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해낸 너희의 대단함을 높이 사겠다. 이 세계가 열리고, 수없이 긴 시간이 흘러 이른바 평행세계라는 것도 수없이 생겨나고 말았다. 가능성과 가능성이 부딪혀 세계는 실제로는 한 세계가 선택을 받아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만, 평행세계가 증식한 탓에 그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는 평행세계를 부수는 역할을 주겠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그 권능을 온전하게 누릴 수 있게 되면 지금처럼 세계의 운행에 간섭하는 일이 다시 벌어지리란 것은 불보듯 뻔한 일. 너희 여섯이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이 살던 세계를 부수는 고통을 알면서 속죄를 해야만 한다."
"잠깐."
오소마츠가, 아니 분명 오소마츠일 녀석이 눈부신 빛의 말에 끼어들었다. 녀석답다면 녀석다운 행동이다.
"속죄라고는 해도, 우리들 원해서 세계의 운행에 간섭한 것도 아니고, 우연에 우연이 겹쳤던 것 뿐이라고? 세계의 이치에 간섭하는 거, 너무 허술하지 않아?"
"건방진 자로군. 그럼에도 그 자체가 중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자칫 '올바른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랬다간 '올바른 흐름'이 무너져 모든 세계가 사라져버리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헤에, 그런가. 그럼 딱 하나만 부탁하자고. 수많은 평행세계를 우리 손으로 부수며 속죄하는 큰 일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우리들 평행세계들 안에서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지 않겠어? 세계를 부숴버렸다는 무서운 죄책감을 적어도 여섯 등분으로 나눠서 가져갈 수 있도록 말야."
"그런 걸로는 벌이 되지 않을 터. 수많은 평행세계를 돌며, 수많은 죄책감을 가져야 할 너희들이다.그걸 여섯이 서로 나눈다면 그게 무슨 속죄가 될 수 있지?"
"그렇다면..."
이번엔 쵸로마츠인가.
"수많은 평행세계를 돌며 우리가 그 세계들을 부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줘. 세계가 부서지는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좋아. 우리 탓에 세계가 부서지는 걸 깨닫고서, 후회하고 죄를 뉘우치고, 그럼에도 그 역할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게 해줘."
겁에 질려 떨고 있었지만, 오소마츠의 말에 동조하고 싶었던 거겠지. 여섯이 함께 있자는 그 말을 위로삼아 앞으로 있을 속죄의 순례에 조건을 거는 그 모습이 쵸로마츠답다.
"부탁드려요. 열심히 할테니까. 언제 끝나냐고 불평하지 않을 테니까."
쥬시마츠가 고개를 숙였다.
"저도 부탁드려요. 서로가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서로 흩어져서 벌을 받는다면, 그 여정의 한 틈에서 분명 누군가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이런 죄를 저지를 지 모르니까 불안하기도 해요. 서로가 서로를 저지할 수 있도록 같은 세계를 돌게 해주세요."
토도마츠는 살짝 협박하듯 말한다. 이 녀석들, 어느 세계를 가도 대단한 녀석들 뿐이구나.
"우리의 벌은, 그런 소중한 사람들을 계속 잃으며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를 부수는 거니까, 분명  함께 벌을 받는 편이 속죄 난이도가 높아지는 거라고?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도 괴롭겠지만, 수없는 이별을 반복하는 편이 더 괴로울거야."
이치마츠는 조곤조곤 설득한다. 말하는 투는 심하지만.
"나도, 이들의 말에 찬성이다. 물론 죄인인 우리가 이렇게 요구할 처지가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리고 내가 말한다.
"그렇다면 그 조건, 받아들이지. 그러나 너희가 원한 길은 너희 생각대로 갈 수 있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아두도록."
눈부신 빛은 이윽고 커져 우리들을 감쌌다. 그 빛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나를 꿰뚫었다.
"너희 여섯은 어떤 세계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겠지만, 그 끝은 파국일 것이다. 가장 처음으로 이 세계의 틈새에 들어와버린 네가 그 파국의 촉매가 되어줘야겠다. 여섯이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너에게는 세계의 파괴자라는 역할을 주지. 너희들이 함께 모이고, 너희들이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 뒤 언젠가엔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가 부서지는 그 순간 너희들이 부순 평행세계의 마지막을 다들 떠올릴 것이다. 다만 딱 하나,  그 마지막을 떠올리고도 너희가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때 너희의 속죄도 끝날 것이라 약속해주지. 그럴 수 있다면 더는 세계의 운행에 손대고 싶은 마음같은 걸 가지지 않을 테니까."
저 빛은 분명 전지전능한 신 같은 거겠지. 우리가 이렇게 세계의 운행에 손을 댄 이유는 떠오르지 않지만 살고있던 세계에 불만을 품었던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쳤지만 우리는 바벨의 탑을 오르고 만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위험한 영역으로 몰고 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서로가 소중했다는 토도마츠의 말이 마음 속에 남았다. 그 서로가, 여섯 명 전부를 얘기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우리의 속죄의 평행세계 순례가 시작됐다. 그 뒤는 알고 있는 대로다.
서로를 생각해주는 사람으로 남는다라, 그래서 벌이 끝난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남는다한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얼마 없다. 이제 다른 세계의 우리는, 이 굴레에서 해방되고 나서 행복하게 될 테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수많은 평행세계 속에서 내가 왜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알았다.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고 만 자신은 분명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들여도 마지막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을 이야기해야 하는 게 두려웠다. 쭉 사랑하는 채로 있고 싶었다. 세상이 끝날때까지, 라는 흔해빠진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을 탓했다. 세계가 끝나버린다는 절망감이 가득한 차에 그롸 함께 행복한 종말을 맞이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까 도망쳤다. 적어도 혼자서 끝내고 싶었다. 세계를 부수는 그 죄책감을 혼자만 끌어안고 싶었다. 그렇게 지금 세계에 이르렀다. 여섯이 나누었어야 할 죄는 신의 변덕에 자신에게만 향했지만 그걸 알게 된 건 이번뿐이다. 그리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 고통은 끝난다. 이제 다른 세계의 나도 모두도 세계가 부서지는 고통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세계의 이치마츠는 나를 좋아한다고 해줄까. 나는 이런 걸 재지 않고 솔직하게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줄까. 우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

"미안, 이제 질렸어"
우리에게 특별한 장소인 강둑, 첫 키스를 했던 그 자리에서 카라마츠는 돌연 이렇게 말했다.
"무슨...소리야?"
오늘은 내내 카라마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카라마츠는 웃어주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다니는 그에게 솔직히 화가 났지만,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였다. 갑자기 나와 사귀게 되어서 걱정이 늘었나? 그러고보니 우리 사이를 인정해 준 건 오소마츠 형이나 쥬시마츠 정도. 토도마츠는 한숨을 쉬며 맘대로 하라고 했고, 쵸로마츠는 여섯 명의 썩을 동정 니트들 사이에 호모까지 출연하면 도대체 뭐가 되냐고 당황하며 일단 우리 형제 사이에서만 알고 있자고 했으니까. 미안, 동정은 뗐어. 정확히는 동정도 처녀도 둘 다 잃었지만.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일부러 우리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배려가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돌려보고 싶은 걸로 고민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게 카라마츠라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어젯밤만 해도 팔베개를 해주니 내게 안겨 잠들던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생각해보았다. 우리 관계에 대해서. 너와 사귀고나서부터 난 행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서운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만 것이다. 그래서 질렸다고 말하는 거다."
언젠가처럼, 그는 딱딱하게 말했다. 분명, 고백하던 그날 카라마츠가 내게 이런 느낌으로 말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를 붙잡으려 애썼으니까. 왜 애썼지? 차였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걸까. 그날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 같은 게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왜 조용히 품어왔던 연심을 그때는 고백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쟁취한 자의 여유 같은 거? 아무리 쓰레기인 나라고 해도, 그건 너무한 일이었다.
"이치마츠는 우리의 첫 날, 네가 고백했던 날을 제대로 기억해주지 않는다. 나는 몇 번이나 너를 떠봤지만, 키스했던 그 순간만을 기억하는 너에게 아쉬움을 느꼈다. 그날 나는 사실 너를 밀어내려 했다. 네가 한 번 차였다가 나에게 다시 용기내서 고백한 건 고맙지만, 그렇게 필사적인 고백의 순간을 네가 잊어버린 거 같아서 아쉬웠다. 그러다 생각했다. 너는 그저 나를 얻고 나면 그걸로 끝이 아닌가 하고. 왜 나를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그런 필사적인 고백을 해놓고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웃어버리는 네게 실망한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조차 질린다. 그저 서로 사랑하면 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해버리는 나도 제법 이기적인 녀석이다. 그러다, 너무 고백을 빨리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미쳤다. 생각없이 너의 고백을 받고, 사랑을 나누고 말았다."
무언가 내 머리를 세게 강타하는 느낌이었다. 카라마츠는 의외로 섬세한 편이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고백의 순간을, 첫 키스의 순간을 되새기고 싶어하는 것만으로 생각했다. 물론 자신도 그 순간이 소중해서 몇 번이고 되새기며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키스를 나눴다. 설마 그게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지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줄이야. 은근 속좁은 부분이 있구만. 그 정도 집착은 해주는 게 좋기야 하지만. 문제는 카라마츠의 저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일까. 어째선지 그날의 기억이 모호하다. 나를 피하던 카라마츠를 쫓아갔더니 차이는 듯한 말을 듣고, 거기에 북받힌 감정에 카라마츠에게 고백을 하고, 그가 받아들이고 키스를 했다. 어둑어둑해진 강둑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아니야. 충분하지 않아. 그날 나를 떠민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지. 그냥 단순히, 카라마츠가 나를 피하는 데 상처를 받아서였나.
"거봐. 얼빠진 표정을 보아하니 이렇게 말해도 너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조금만 시간을 줬으면 한다.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권태기가 온 거야? 맨날 붙어사는 형제니까 그런가? 아니지. 한 달을 고민한 카라마츠 나름의 결론이었다. 카라마츠는 주먹을 꽉 쥐기도 하고 눈을 질끈 감기도 하고 입술을 꽉 물기도 했다. 내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걸 어째선지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바보같은 소리에 응해줄 리가 없잖아. 그런 시간 가진다고 해도 우리들 같은 집 안에서 사는 형제니까 만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일단 거부했다. 당연하지. 그렇다고 카라마츠가 마음을 바꿔줄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단 둘이 있는 시간만 피하면 된다. 내가 꺼낸 말이니까,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할테니 너무 신경쓰지 마라."
"아니, 신경쓰이거든.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면서 뭘 혼자서 끌어안으려 하는거야."
무언가 카라마츠에게 숨기는 게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추측한 것, 카라마츠가 한 말 모두 틀렸을 수 있다. 신경쓰지 말라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니. 나를 탓하는 척 했지만 사실 자기의 문제 때문에 나랑 거리를 두려는 거 아니야?
"아무튼! 이치마츠는 이치마츠대로 우리가 사귀기 전의 일들이나 마음들을 생각해냈으면 한다. 내 변덕에 너를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지만, 시작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연인하고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저거에 서운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는 거 보통 이별 플래그니까. 이대로 이별하게 되면 어쩌지. 어떻게 해도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집을 나와서 다른 형제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말 것이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카라마츠가 그런 선택을 해버린다면 아마 살고 싶지 않아질거야. 그 날이 오면 죽자. 아니지, 그 날이 오기 전에 죽는게 나을까.
"...재촉은 하지 않을게. 카라마츠. 기억을 제대로 못하는 건 미안하지만, 나는 너만으로도 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어.  사랑해. 첫 키스의 감촉, 고백하면서 안았을 때 느꼈던 너의 온기 무엇 하나 잊지 않았어. 그건 알아줬음 좋겠어. 기다릴게."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이대로 이별해버릴까봐 불안했지만, 나는 카라마츠가 잠시 샛길을 걷는 걸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카라마츠는 언젠가처럼 혼자 거실에 내려가 잠을 잤다. 팔을 뻗으면 빈 자리가 느껴진다. 조금 따스한 느낌을 받아 눈을 뜨면 토도마츠의 얼굴이었다거나. 갑자기 바뀐 분위기를 다들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겠지만, 다들 우리를 배려해주려 애썼다. 쥬시마츠는 나에게 놀자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토도마츠는 쇼핑에 어울려달라고 하며 나를 끌고간다. 쵸로마츠는 나와 단 둘이 있으면 조금 어색해서인지 집에서 나를 챙겨주려 한다. 오소마츠 형은 내가 혼자 고양이와 노는 듯 하면서 멍때리고 있을 때 다가와 그 녀석을 믿어달라고 말한다. 그런 배려에도 난 외로움을 떨칠 수 없었다. 고백하기 전보다도 더, 카라마츠를 찾고 있는 내가 있었다.

*********

시간을 더 달라며 이치마츠를 멀리하기 시작한 그 날로부터, 내 눈에 띄는 세계의 균열은 점차 심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균열을 붙들어두고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였나. 나의 심란함에 반응해 균열은 커지고 있었다. 아니다. 사실은 이치마츠와 처음 사귀게 된 그날로부터 계속 균열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모른척했다. 언젠간 사라질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잠들면 내게 묶인 운명의 사슬이 나를 조여오고 있다는 걸 신경쓸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 세계의 파괴자. 이 세계의 누군가의 행복을 부수는 존재. 그 누군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치마츠도, 소중한 가족들도, 카라마츠 걸즈와 보이즈도, 세계의 그 모든 것이 들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에 와서 이 죄책감을 짊어진 게 정말로 자기뿐이라는 걸 알아도, 다른 형제들이 그걸 느끼지 않게 되어서 좋았다. 아마 그 신 같은 녀석의 말로 미루어볼 때 그동안 다른 세계에선 세계가 부서지며 다른 형제들은 나를 원망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이번에는 나를 믿어주고 나를 붙잡아주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벌이 끝났다. 이치마츠도 세계를 몇번 돌고 돌았을 때 나를 원망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런건 덮어두기로 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다른 세계를 기약하며 나는 이치마츠를 놓아줄까도 생각했다. 이치마츠와 사귀기 시작했던 그날, 사실은 세계가 끝났어야 했던 그날, 나를 붙잡아서 안아주고 키스해줬던 이치마츠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세계가 부서지는 그 한가운데 이치마츠가 있는 게 싫었다. 이번 세계는 상냥해서 이치마츠가 고백하고 난 뒤에 내가 나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저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상냥했던 세계는, 그래도 부서져야 하는 운명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미안하다. 내 탓에, 세계의 질서에 선택되지 못했던 세계는 무수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희망과 함께 나와 함께 부서져주지 않겠나, 상냥하고 아름다운 나의 세계여. 이치마츠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고마운 세계여.
나는 이치마츠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피하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내게 주어진 운명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적어도 이미 다른 세계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들에게는 행복하게 종말을 맞이하게 하고 싶었다. 사실 지금도 나때문에 그들은 조금 불행해졌을테지만. 마지막 순간에, 꼭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은 모른채로 이 세계가 끝났으면 했다. 균열은 그런 내게 반응해 무수한 조각의 금으로 갈라졌다. 건들면 분명 한번에 무너져버리겠지만, 아직까진 어떻게든 버텨주는 상냥한 세계. 그 수많은 금들을 보며 끝을 향해 착실히 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선 울어버린다. 공원 벤치에 앉아 꼴사납게 울고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슬쩍 보더니 가버릴 뿐. 이 균열은 내게만 보이는 것이라서, 암만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고통을 나눌 순 없어서 외로움을 떨칠 수 없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엔, 나는 너무나도 나쁜 사람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제, 마지막이 와버려.
종막이다. 해피 엔딩을 가장한 새드 엔딩이다. 나는 웃기로 했다. 웃는 표정을 잃지 않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오늘 하루만큼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한다. 나는 신같은 게 아니라서 모두를 축복해 줄 수 없지만. 적어도 부서지는 그 순간은 최대한 짧게, 행복한 감정 그대로 마지막을 맞이하도록 노력할테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이치마츠에게 사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런 심한 말 해서 미안하다고. 지금 나를 소중히 해주는 감정이 중요한데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고. 웃는 얼굴은 무너져내렸다. 이치마츠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어제보다도 심하게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의 연인, 이치마츠는 그런 나를 안고서 키스를 했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는 달콤했다. 그리고 격렬했다. 이치마츠는 정말 열심히 참았구나. 그리고선 모두에게도 사과했다. 내가 바보같아서 이치마츠와 모두를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다들 괜찮다며 웃어주었다.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에 미소를 품었다. 쥬시마츠는 다행이라며 폴짝 뛰었다. 오소마츠 형만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그래, 다행이네. 하고 씨익 웃었다. 미안하다. 그래도 너희가 웃어서 다행이야.
집을 비워준 상냥한 형제들 덕택에 집에서 이치마츠와 육체의 대화를 했다. 이치마츠가 얼마나 참아왔는지 격렬하게 느꼈지만, 그의 품이 따스하다는 걸 다시금 느끼고 말았다. 마지막 쾌락. 사랑하는 이치마츠를 마지막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몸이 뜨거워져서 나도 모르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미안하다고 말이 나올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서 갈 수 있었다. 마무리의 키스가 멈추지 않을 땐 세상이 이대로 끝나버리길 바랐다. 그리고 나서 같이 씻고, 이치마츠가 아끼는 고양이들을 만나는 비밀장소로 향했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내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지만, 강아지풀을 흔드는 내 움직임에는 맞춰 놀아주었다. 그러고 나선 공원에서 캔커피를 마시며 시덥잖은 대화를 하고, 강둑을 걸으며 어둑어둑해지는 거리에서 키스를 나누는 지금까지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데이트를 했다. 이번이 마지막 키스겠지, 하고 눈물이 절로 맺혔다. 얼마나 서운했던 거냐고. 이치마츠는 미안한 듯 말했다. 미안하다. 미안한 건 나인데. 강둑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계속 웃는 가면을 썼다. 가면을 썼다곤 해도 웃으며 울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손을 꽉 잡고 걸어주었다. 걸음이 느려지면 그도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언제나와 반대다. 걸음이 느려지는 건 이치마츠 쪽이었는데, 오늘은 아니네. 아무렇지 않게 하루의 마무리를 하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잠들기 전 이불 안에서 이치마츠는 내 손을 꼭 붙들었다. 그런 그에게 맞춰주면서 그가 깊이 잠들길 기다렸다. 손을 몇번 꼼지락거리니 그의 손이 풀렸다. 손을 놓고서 다들 잘 자는지 확인하고서 조용히 옷을 챙겨 나왔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었다. 마당에서 푸른 파카와 반짝이는 바지를 입고, 밤중에 써봤자 소용없을 선글라스를 썼다. 집도 무엇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균열만큼은 잘 보였다. 톡 건들면 부서질 그런 균열이. 웃는 표정을 잃지 말자고 했지만 오늘 하루 도대체 몇번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결국 마지막에도 나는 울고 있다. 누군가는 잠들어 있고, 누군가는 깨어 있다. 만난 적 없는 월드 에브리씽, 아이 엠 쏘리.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시간을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치마츠.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린다. 적어도 너는 나와의 사랑이 오늘을 계기로 계속 이어질 거라 믿는 달콤한 결말을 주고 싶었다. 미안하다. 그것도 내 이기심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니다. 미안하다. 그 날처럼, 너와 처음으로 사귀었던 그 날처럼, 종말이 한 번 변덕을 부려준 그 날처럼, 사실은 너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다. 그 또한 내 이기심이다. 미안하다. 잘 자라. 안녕이다. 심장이 부서지며 내 몸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들자 금갔던 세계는 한번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파편이 떨어져내리는 속에서 차마 나는 이치마츠의 흔적을 좇을 수 없었다. 이내 어둠이 세계를 순식간에 삼켰다. 이 세계에는 나만이 남고 말았다. 그리고 나도 어둠에 삼켜졌다.










**********

"브라더, 오늘도 이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켁. 또 그런 밥맛 없는 소릴. 아침부터 그런 말 안 하면 입에 가시라도 돋치냐고."
"참~ 일어나자마자 싸우지 말고, 정말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은 건지 좋은 건지."
"이치마츠가 맨날 화내는 데도 매번 저런 소릴 하는 네 멘탈 정말 어떻게 된 거 아닌지 모르겠다고, 카라마츠."
"멘탈? 멘탈이 뭐야? 먹는거?"
"먹는 거 아니라고, 쥬시마츠. 아침부터 팔팔하잖냐, 너희들."
마츠노 가 6쌍둥이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된다. 20세 넘어서도 백수에 동정. 매일매일이 별다를 바 없는 그들의 삶은 평범하다못해 최저다만, 그다지 다들 벗어날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형제들이 정말 좋다. 운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어 말하면 안쓰럽다며 조롱받기는 하지만. 정말 소중한 형제들이다.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고 있다고? 바보지만 종종 믿음직한 오소마츠 형, 잔소리쟁이에 촌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모두를 신경쓰는 쵸로마츠, 어둠 가득하고 심한 소리를 내뱉지만 사실은 상냥한 이치마츠, 예측불가능하지만 활기가 넘치고 착한 쥬시마츠, 자기 생각이 가득하지만 형들을 의지하는 귀여운 토도마츠. 그리고 나 카라마츠. 영원히 일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만, 언젠간 독립해야겠다는 모순된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런 하루하루에, 어느날 누군가 돌을 던졌다.
"썩...썩을마츠...나 네가 좋다고."
청춘드라마도 아니고, 벚꽃 흩날리는 강둑에서 이치마츠가 갑자기 고백을 한 것이다.
"좋다는 의미는?"
"성적으로 좋다는 거. 만지고 키스하고 잔뜩 안고 박고 싶어."
"하항~ 격렬하군, 브라더의 러브가."
예상도 못했다. 나를 싫어하는줄만 알았던 이치마츠가 날 이렇게 격렬하게 사랑한다니. 아니지, 누군가의 장난 아닌가? 이치마츠에게 이런 말을 시키는 장난을 누가 쳤다거나, 아니면 이치마츠 본인이 장난을 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받아줄거야 말거야?"
"미안하지만 그 사랑은 받아줄 수가 없다. 나는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니까, 이치마츠에게만 사랑을 줄 수는 없다는 거지. 좀 더 멋진 사랑을 찾아가는 건 어떻겠는가."
누가 봐도 어른스러운 대응이지 않은가, 하항?
"쳇, 재수없는 대답하기는. 알았어. 내가 노력할 테니까. 그러고 나서 다시 고백할 테니까 목 씻고 기다려."
이치마츠는 내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뒤돌아서 반대편으로 격렬히 도망쳤다. 으아아아아아하는 소리만을 내지르며. 붙잡을까 하다가 말았다. 진심이었나. 그보다 목씻고 기다리란 말은 보통 죽이겠단 말 아닌가? 으응? 이치마츠가 도망치는 모습 뒤로 벚꽃이 떨어지는 게 어쩐지 아름다웠다. 부끄러움을 타는 브라더인가. 사랑을 받아주려면 나도 노력해야 하나. 입을 맞춘 감촉이 갑자기 떠오르며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아, 아아, 아아아. 이치마츠.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그러다보니 문득 이런 고백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카라마츠 걸일 거라 생각했지만 보이가, 그것도 쌍둥이 친동생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제 곧 그와는 동생이자 연인이 될 지도 모른다. 조금은 애타게 만들어볼까. 쉽게 넘어가주는 건 재미없다고, 브라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편의 마무리가 조금 허술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번 편이라고 허술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앞편의 마지막에서 이치마츠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게 제대로 전해졌을까요. 그게 아니라도 써놓기야 했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요. 세계의 파괴자같은 소재거리를 쓰면서 해피 엔딩으로 갈 지 새드 엔딩으로 갈지 조금 고민했지만 해피 엔딩을 선사해주고 싶다는 게 앞편이었다면, 여지를 일부러 남겨놓고 새드 엔딩을 맞이하는 뒷편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그도 그럴게 세계를 파괴하는 그런 거 보통 악역이 하는 거라고요? 그걸 저지하는 게 주인공. 저지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다른 세계를 맞이하려 노력하는 것도 있죠. 이번 편 또한 아주 조금이지만 라이더 네타(빌드...)를 쓸까말까 엄청 고민했습니다만 마이너카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쪽도 마지막편 보면 토끼용 커플링을 파던 사람들이 비명 지를 급의 반쯤 오피셜 BL엔딩이라고요(아님 절대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하여간, 이번 편에 나름대로 왜 카라마츠가 이렇게 된 건지, 굴레에서 벗어난 6쌍둥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카라마츠가 바란대로 이치카라가 한 걸음 다시 내딛게 되는 결국은 해피엔딩을 썼습니다. 그리하야 진엔딩입니다. 기세로 쓰느라 피곤하네요. 스트레스를 이걸로 풀고 있네요. 이치카라 강화주간에 이어서 곧 빈잔 다음편도 가지고 오겠습니다. 2년만에 말이죠...하...ㅅ...
Posted by 하리H( )Ri
2018. 10. 1. 02:43
- 망상가득한 이치카라 소설
- 나의 ~마츠는 이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여러모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
- 글쓴이의 머릿속이 꽃밭
- 제목은 별 거 없습니다.

*

숨을 들이쉬면 너의 체취가 코로 스며든다. 그 체취만이 나를 안심시켜준다는 말을 차마 너에겐 할 수 없겠지. 몇 번이고 내 곁에서 네가 달아나고 말았던 건 내가 평생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내 곁에 있어달라고 말하고 난 뒤였으니까. 마치 헛소리인 양 하던 말들이 사실이었다는 듯.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데 할 수 없다는 건 이리도 답답한 거였구나. 이 체취를 영영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내 품에서 잠투정하는 널 살짝 쓰다듬으며 차라리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원을 빌어본다.

"아아―선샤인이 나의 안식을 방해하는군. 언제까지라도 잠들어 있을 줄 알았건만, 저 햇살에게마저 사랑받는 게 바로 이, 카라―"
"일어나자마자 잘도 지껄이는군, 쿠소마츠."
기본적으로 나는 카라마츠에게 좋게 말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할 수 없다. 상냥한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 것도 있지만, 그를 놓쳤던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가며 카라마츠를 잃느니 미움받는 사람으로나마 남아야 한다고 말해주기 때문일까. 그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리자 가슴 한 켠이 아파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난 이치마츠에게 미움받는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짓지만 입술 끝의 떨림에서 전해지는 숨길 수 없는 그의 마음은 바늘과도 같이 내 심장을 찌른다. 하지만 그의 서운함을 위로해줬다가 그가 떠나버리는 순간이 올까봐, 더욱 독을 품고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라마츠는 보기에 안쓰러운 패션을 하고선 집을 나선다. 자기 얼굴이 박힌 탱크탑은 대부분의 사람들 눈엔 자의식 과잉의 상징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의 자의식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은 같이 지내는 나라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치마츠! 카라마츠하고 잠자리 정리는 다 했어? 엄마가 집에 있는 거로 알아서 밥 챙겨먹으라 하셨는데 너만 밥 안 먹었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
쵸로마츠의 말에 정신차리고 방을 둘러보았다. 늦게 일어난 사람이 잠자리 당번, 그런 규칙이었는데. 너 이 새끼, 튀었겠다! 소중한 건 소중한 거고, 이따 오면 한 대 치리라. 6명이 누워 자는 커다란 이불을 정리하고, 적당히 남은 밥을 뭉쳐서, 적당히 주먹밥을 만들어 먹으면 쥬시마츠가 다가와 한 입 나눠주고, 설거지를 하고, 마당 쪽으로 나가 고양이들과 노는 시간. 매일매일이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백수 생활. 그런 매일에 변화가 찾아온 건 두세 달 전쯤이었나. 오늘처럼 마당에서 고양이들과 노는 와중에 느닷없이 낯선 기억들이 물밀듯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기억 속에서 나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내가 무엇이었는지 그 기억들 속에서 찾아내는 것조차 어려운 기억도 있었다. 다만, 딱 하나만은 같았다. 카라마츠와 내가 만나고,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면 그가 떠나버린다는 것. '내가 있으면 이 세계는 부서져버린다'는 말도 몇 개의 기억에서 들을 수 있었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뿌리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 후에도 오늘 아침처럼 불쑥 그 기억들이 떠오르고는 해서 혼란스러운 채다. 또다른 당사자인 그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털어놓기엔 믿기에 어려운 이야기라 속앓이하며 화풀이를 겸해 카라마츠에게 거칠게 대할 수밖에. 그도 지금, 자신이 있으면 이 세계가 부서진다는 생각을 끌어안고 사는 걸까. 그 전에, 정말로 그가 있으면 세계는 부서지는 걸까.
"오늘은 밖에 안 나가?"
등뒤에서 토도마츠가 등을 살짝 두드리며 말을 건다.
"그다지...나가든 안 나가든 별 다를 거 없잖아. 나가봐야 골목에서 고양이 찾아다닐걸."
"그래도 상관없어. 나가자, 이치마츠 형!"
수상한 하이텐션. 토도마츠에게는 분명 꿍꿍이가 있어보였다. 어차피 머릿속이 복잡한 거, 그 꿍꿍이에 타주도록 할까.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손목을 붙잡힌 채 토도마츠에게 끌려나간다.

"저기, 이치마츠 형. 요즘 고민이라도 있어? 안 그래도 어둠 오라가 넘치는 형인데 요즘은 뭐랄까, 어둡긴 어두운데 전보다도 혼자 끙끙대는 느낌이 들어서 말야."
토도마츠가 정곡을 찔러온다. 그런다고, 섞여든 기억에 관한 이야기같은 건 할 수 있을 리 없다.
"내버려 둬."
더 파고들지 못하게 날카로운 말투로 받아친다. 그럼에도 토도마츠는 팔짱을 끼며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오늘의 행선지도 카페일까. 토도마츠와 외출하면 카페에 들어가 신작 음료를 권유받아 토도마츠와 나눠마신다. 토도마츠 마음에 드는 음료라면 똑같은 음료를 한 잔 더 시켜서 마시고 그렇지 않다면 와플이라든가 케이크라든가 디저트 하나를 시켜서 먹는다. 이번에 끌려간 카페의 신작은 사과맛인가. 애플 어쩌고라고 써져 있는 이름도 참 긴 음료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는 그런 카페. 토도마츠는 들어가자마자 메뉴를 가리킨다.
"뭐 마실래? 아니면 디저트 먹을래? 여기 애플파이 맛있다고 SNS에서 소문나있던데, 오늘은 이치마츠 형이 먹고 싶은 걸 고르고 내가 거기 맞춰서 고를게. 언제나 내가 먹고 싶어하는 거 먹고 마셔줬으니까 오늘은 특별히!"
토도마츠는 기본적으로 밝은 편이지만, 방금은 유독 하이텐션이였다. 무슨 이유가 있나. 하여튼 그동안 고를 일이 없었다보니 메뉴를 봐도 핑 돌 뿐이었다.
"그럼 난 저거...애플 시나몬 어쩌고 하는 신작 메뉴로."
"그걸로 괜찮겠어? 날 위해서 신작 음료 골라준 건 아니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보더니 계산대에 가서 메뉴를 유창하게도 얘기하는 토도마츠였다. 나라면 분명 혀가 꼬였을 테지. 토도마츠는 자기가 계산하는 대신 음료가 나오면 받아달라고 하고 먼저 자리를 잡으러 갔다. 평소와는 다른 구석진 자리. 창밖에서 여자들이 지나가는 모습이나 커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짜증을 내던 녀석이었는데. 무언가 고민이 있나. 나보고 고민있냐고 물어보더니 사실은 자기가 비밀스런 일을 털어놓고 싶어하는 것인가. 음료 두 잔과 애플파이를 받아들고 자리로 향하면 토도마츠는 고맙다며 웃음짓는다.
"...이치마츠 형은 전생이라든가 윤회설? 뭐 그런 거 믿어?"
"글쎄... 있을 거 같긴 한데."
"하기야, 형은 내세내세 그러면서 가끔 지금 삶에 미련없는 척하니까 믿으려나."
미련없는 척이라니.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난 그런 거 안 믿었는데, 정확힌 안 믿었다기보단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뜸을 들인다. 신작 음료라던 라떼를 토도마츠가 한 입 마시고 나자 입술에 거품이 묻어났고 그는 자연스레 거품이 묻었을 부분을 혀로 핥아냈다. 어쩐지 목이 타서 집어든 다른 음료는 핫쵸코였나. 달지만 텁텁해서 더 목이 타고 말았다.
"만약에, 우리 6쌍둥이중 누군가가 세상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들으면 어떻게 할 거야?"
에?
"단순한 악몽이겠지만, 그런 꿈을 한 두 달 전부터 계속 꾸고 있어서. 그것도 흘러가는 결말은 똑같은데 꿈에 나오는 세계는 계속 바뀐단 말이지. 그리고 그 세계의 내가 사라질 때마다 얘기하는 거야. 그 녀석을 없애야 했어. 내가 주저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사라져버렸다고."
내가 꾸는 꿈과 같다. 아니, 조금 다른가.
"...요즘 원한이라도 품은 사람이 있는 거 아냐? 누굴 없애야 한다고 후회하는 꿈이라니 무서운데, 드라이 몬스터."
그냥 꿈 얘기일지도 모르니 시덥잖은 투로 얘기했지만, 목소리나 표정에 불안이 묻어날 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형들한테 원한같은 거 품지 않은 건 아니지만."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중에 누군가 세상을 파괴하는 사람이라 그 사람을 없애야 한다면, 형은 어떻게 하고 싶은가야. 꿈에서 내가 하는 절규가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사실은 꿈이라기보단 길을 가던 중에 머릿속으로 멋대로 흘러들어온 기억들이라 농담처럼 넘길 일도 아닌 거라 생각해. 그래도 말이야. 그런 말을 듣는다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무표정은 이내 일그러지며 눈물이 고인다.
"그런 말 하기 전에 그 녀석이 누군지를 얘기해야지. 설마 그게 나라고 얘기하고 싶은거야?"
같은 기억인걸까, 아니면 다른 걸까. 확실히 해둬야 했다. '그 녀석'이 카라마츠였다면 카라마츠를 부르지 않았을까. 왜 나를 불러낸 거지.
"형의 잠꼬대 들은 적 있어. 카라마츠 형한테 사라지지 말라고. 그걸 듣고 확신했어. 나랑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카라마츠 형이 어딘가의 세계에서 '자기가 있으면 이 세계가 부서져버린다'는 말을 해서, 그리고 어딘가의 세계에서 나는 그런 카라마츠 형을 없애지 못해서 후회하며 사라져버리는 거였다고. 꿈하고는 달랐어, 하지만 어딘가 털어놓기도 어렵고 믿고 싶지도 않고, 그럼에도 점점 믿게 되버리는 그런 심정이라 일단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었어..."
평소와는 달리 주위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눈물을 닦으며 우는 토도마츠에게 냅킨을 건네주었다.
"나도 비슷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나는 세계가 부서지는 장면은 못 봤지만 카라마츠가 그 말을 하는 건 몇 번이고 들었어."
최대한 덤덤하게 얘기를 한다. 그도 그럴게, 난 매번 카라마츠에게 고백을 했고 카라마츠가 떠나는 일의 반복이었으니까. 카라마츠가 세계를 부순다, 같은 스케일이 다른 황당무계한 얘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부끄러운 감정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기억들을 믿어야 하는 걸까. 카라마츠가 있으면, 이 세계는 부서지는 걸까..."
한가한 카페에서 갑작스런 세계의 종말론을 이야기한다.
"이치마츠 형은 고를 수 있어? 만약 카라마츠 형을 없애서 세계가 무사하다면, 그 길을 고를 수 있어?"
흐느끼면서 토도마츠는 말을 이어간다.
"애초에 이런 걸 믿고 고민하는 것도 바보같잖아. 그런데, 카라마츠 형이 소중해서, 다른 형들도 엄마 아빠도 소중해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소중해서, 만약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토도마츠는 진지하게 고민해왔던 모양이다. 아니, 나도 나 나름대로 진지했지만 방향성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내가 카라마츠에게 고백하면 카라마츠가 사라져버릴까봐, 그러니까 카라마츠를 사랑하는 일 따위 없게 하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세계가 사라지는 스케일이라. 그건 뒷전이었던 것이다. 그걸 뒷전으로 하는 게 잘못된 것인가? 애초에 어디서 흘러들어온 지도 모르는 기억이지만. 그걸 믿어야 할 지조차 모르는 거지만.
"카라마츠한테 물어보는게 가장 빠르지 않을까..."
나도 물어보질 못하면서. 그리고 그걸 물어보는 자체가 분명 카라마츠에게 상처를 줄 일이란걸 알면서, 편하게 대답해버린다. 토도마츠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또한 생각해 봤던 일일 것이며, 그게 카라마츠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뒤엔 서로 나누는 이야기 없이 나는 애플 어쩌고 하는 라떼를, 토도마츠는 핫쵸코를 홀짝이며 애플파이를 먹었다. 과연 맛있는 애플파이였지만, 미각을 느끼는 순간은 찰나였고 그저 씹어 삼키는 시간만이 길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을 데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치마츠 형도, 조금은 고민이 줄었어?"
토도마츠는 무리하게 밝은 톤으로 말했지만, 카페에 들어왔을 때보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도마츠는 어쩌면 나에게 답을 얻으려 했던 것일지 모른다. 의존하고 싶었던 거다. 카라마츠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아니, 그보다는 자신에게 흘러들어왔던 기억을 부정해주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조차도, 카페에 들어왔을 때보다 고민이 커졌다. 카라마츠가 나를 떠나버리고 나면 그 뒤 세계는 부서져버리는 결말이 오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그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은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길은 우연찮게도 인적이 드물었다. 그 장면이 유독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심란할 대로 심란한 나와 토도마츠는 그저 걸었다. 집에 카라마츠만 있다면 최고로 심란하겠는걸.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행히도 집에는 파칭코에서 털리고 왔는지 널브러진 오소마츠 형과 자격증 수험서를 거꾸로 읽고 있는 쵸로마츠와 야구배트를 코에 올리고 넋나간 듯 누워있는 쥬시마츠가 거실에 있었다. 아니지, 이것 또한 심란한 상황인데.
"헤에, 다들 심한 꼴 하고 있잖아. 무슨 날인가."
시덥잖은 농담을 내뱉었다.
"그쪽 두 사람도 충분히 심한 얼굴 하고 있는데. "
책을 거꾸로 든 쵸로마츠가 태클을 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더더욱 무서운 일이었지만.
"카라마츠 빼곤 다 있는 건가?"
널브러져 있던 오소마츠 형이 몸을 일으키며 얘기한다.
"그 녀석 오늘은 저녁 늦게 들어온다고 얘기했으니까 빼놓고 형제 회의 하자고."
형제 회의라. 그것도 카라마츠 빼놓고. 어쩐지 주제가 예상이 갔다. 2층으로 올라가 모여앉았다. 다시보니 쵸로마츠도 평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다들 심란함이 끼어있었던 탓일까 애써 태연하려 만들어낸 얼굴 표정인지도 모른다.
"까놓고 얘기해도 되지? 다들 이상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지? 카라마츠가 세계를 부순다던가 하는 그런 황당한 기억 말이야."
오소마츠 형이 말을 꺼냈다. 그는 황당하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런 점이 모두를 안심시켰는지 조금 긴장이 풀어진 표정을 했다.
"너희들 일이라면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지만 사실 쵸로쨩 얘기 듣고 떠본 거지만."
떠본거냐.
"쵸로쨩이라 하지마. 기껏 고민하다가 털어놓았더니 그런거 믿냐고 실컷 웃고선 자기도 그런 일 있었다며 말했던 것도 분해 죽겠는데.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더더욱."
불만스럽게 얘기했지만, 쵸로마츠는 오소마츠 형에게  털어놓고 마음이 편했던 걸까.
"그래서, 우리는 뭘 하면 돼?"
쥬시마츠가 사뭇 진지하게 묻는다. 우린 뭘 하면 될까.
"일단 모두의 이야기를 모아보는 게 좋지 않겠어? 다들 어떤 기억들이 들어왔는지 얘기해보자고."
쵸로마츠가 의견을 내서 모두가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다. 다들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이름과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갔지만 어떻게든 여섯이 얽혔던 모양으로, 카라마츠가 자신이 세상을 부수는 존재라고 얘기했던 몇 번의 일이 있었던 것과 그 말마따나 카라마츠에 의해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카라마츠가 어떻게 세계를 부수는 지는 누구도 정확히 보질 못했지만 카라마츠로부터 서서히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딱 한 번이지만 쥬시마츠가 봤다고 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치마츠는 혹시,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지 못한거야?"
오소마츠 형이 물어온다. 그렇지. 사실 나는 카라마츠가 떠나는 장면만 수없이 봤을 뿐 그 뒤에 세계가 부서지는 일은 보지 못했으니까.
"나 알고 있는 게 있는데 이야기해도 될까, 이치맛쨩?"
이렇게 또 그는 집요하게 밀고 들어온다. 알고 있는 거라니...
"이치맛쨩, 엄청난 순애보던데?"
에? 순애보? 아, 설마!
"순애보라니 무슨..."
토도마츠가 물어본다. 다들 내 쪽을 보고 있다. 잠깐!
"그렇게 세계가 부서지는 강렬한 기억 속에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좋아하는 모습이 몇 번 보였단 말이지. 마치 지금처럼 말이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데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방황하는..."
"그런 거 아니야!"
오소마츠 형의 말을 끊었다.
"미안한데 다들 눈치채고 있거든? 아, 카라마츠는 모를지도. 그 녀석 눈치는 너무 왔다갔다 한단 말야."
쵸로마츠도 한 마디 거든다.
"어...그러니까...어..."
말문이 막혔다. 일부러 더 튕겨내고 구박하고 그랬는데. 눈치채고들 있었던 거야? 그리고 다른 세계의 내가 그러고 있는 거조차 다 들킨거야? 죽자. 당장.
"걱정마. 다들 응원할거야, 그쪽 면은. 사람의 감정이란게, 그런 거잖아?"
그런 식으로 위로하지 말라고! 망할 장남 새끼가!!!
"너처럼 그 뭐냐...연인이 되고 싶다던가 그런 감정이 아니더라도 우린 카라마츠가 소중하니까. 카라마츠를 없애야 한다고 듣는다면 그 말대로 정말 없애야 할지 어떨지 고민하게 되잖아? 저울질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없애야 했다는 절규조차도 정말 그걸로 세계가 부서지는 게 막아지는 것인지 알 길도 없고 말야."
냉정한 척 하면서 얘기하지만 쵸로마츠의 말에는 역시 카라마츠를 없앤다거나 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다는 말이 담겨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안심해도 되는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럼...이미 알고 있으니까...내 기억도 얘기할게..."
내가 고백하면 카라마츠가 떠난다는 것을 말했다. 내게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카라마츠가 날 떠나는 이후에 세계가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하는 결론을 조심스래 내리자, 다들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쳐내기만 하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토도마츠는 슬픈 표정으로 얘기했다.
"카라마츠 형이 떠난다는 것이 형의 고백을 받지 못하고 떠나든 자신을 미워한다고 하는 형을 위해 떠나든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떠난다고 했지만 우린 카라마츠 형이 세계를 부수는 걸 봤으니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린다는 의미랑은 좀 다른 거 아닐까? 어떻게 해서 세계가 부서지는지, 그 원인을 모르는 이상..."
"하긴. 다른 세계에서는 지금처럼 서로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을테니 단순히 없애면 된다는 결론을 내려도 이상할 것 없었지만,  이치마츠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다면 얘기가 좀 다른가."
음? 얘기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러면 아예 이러면 어떨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주고 둘이 사이좋은 연인 사이가 되면 해결되는 거 아냐? 다른 세계에서 그런 모습 못 봤고, 시도해 볼 만한 거 같은데."
황당한 소리하지 말라고 장남!!!
"카라마츠를 때려 죽이는 것보다는 나은 거 아닐까. 애초에 카라마츠를 없애면 이 세계도 같이 빠이빠이 해버리는 걸지도 모르고. 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동조하지 말라고 딸딸마츠!
"그것 참 뭔가 세계를 구하는 아름다운 작전 같아서 어쩐지 마음에 들어. 열심히 도와줄게, 이치마츠 형!"
아까 울면서 카페에서 얘기한 건 뭐가 되는 거냐고!
"아하하, 카라마츠 형이 웃으면 분명 해결되는 걸거야, 힘내 이치마츠 형아."
그런 문제였던 거냐, 쥬시마츠!
"잠깐...나 이 상황을 따라갈 수 없는데?"
얼떨떨한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대응하자는 것인지.
"당연하지.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이 상황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으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에 걸어보는 거야."
오소마츠 형이 씨익 웃으면, 어쩐지 그 말대로 하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모두에게 해피 엔딩을. 그 해피 엔딩을 자기가 억제해왔던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 것이다. 다만, 수많은 세계에서 나는 카라마츠에게 거절당했다. 허튼 고백은 수많은 세계에서와도 같이 절망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말 것이다. 도와줘,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나를 보고서 웃어주었다. 세계를 구하는 고백 작전의 막이 올랐다.

**

언제나의 다리에서 헌팅, 산책, 그리고 치비타네 가게에서 오뎅을 먹으며 수다떨기. 우연히 마주친 오소마츠에게는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간다고 말을 해 뒀지만, 사실 별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일찍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이치마츠에게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잠결에 그가 따뜻하게 자신을 안아줬던 걸 느꼈다.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솔직하게 얘기해주질 않았다. 최근의 이치마츠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가시돋친 말들에 애정이 담겨있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데에선 나를 아껴주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이지.
기분나쁘다고.

***

고백이라고는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도 그럴게 우리 모두 동정이고. 고백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성공해본 적이라곤 없었고. 그리고, 그동안 미워하는 모습만 보였던 상대에게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카라마츠도 우리처럼 다른 세계의 기억을 가졌다면 경우의 수는 더 복잡해진다. 그가 자신이 세계를 부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다른 세계에서처럼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런 사람이니까. 상냥하니까. 어느 세계에선가, 그 세계의 카라마츠는 그 세계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세계를 부숴버리는 천하의 악당이라, 누군가 곁에 있어달라고 바란다고 해도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 가장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 나같은 건 나쁜 녀석으로 남겨두고 더욱 사랑하는 것을 찾기를 바란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푸른 불꽃이 세상을 뒤덮었던 기억이 난다. 그 불꽃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지만, 아마 그 불꽃에 그 세계가 삼켜졌던 것이겠지.
다른 형제들은 박아뒀던 연애지침서나 스마트폰, 잡지 같은 걸 뒤적이고 있다. 보기만 해도 촌스러운 고백하는 방법 찾기에 열을 올린다. 자기가 할 고백이 아닌데도 진지하게 임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솔직히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좋은 방법을 찾는다 한들, 내가 그걸 해낼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치마츠 형도 생각하고 있는거지?"
토도마츠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물어본다. 아마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보다 이치마츠 형아는 카라마츠 형한테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 아냐? 분명 카라마츠 형아는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
이런데서 예리하네. 쥬시마츠 말도 맞다만. 어느날 맨날 괴롭히던 녀석이 미안하다고 하면 상대방은 어떤 기분일지 모른다. 용서하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전에 에스퍼 냥이 써보면 어때? 진심을 전해줄 거 아냐?"
"가볍게 말하지 마, 바보 장남. 자기 입으로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사과가, 사랑 고백이, 그렇게 쉽게 상대방의 마음을 열 것 같아?"
"하아? 어느 입이 그런 소리를 할까? 맨날 사과할 일 있으면 눈치보다 미안하다고 작게 중얼거리고 뻔뻔하게 아무일 없는 양 구는 딸딸마츠가 할 말일까나?"
"조금만 틈이 나면 놀리지! 그러는 넌 사과 제대로 하기는 하냐? 놀림받고 난 뒤에 제대로 사과받은 적 거의 없거든?"
차라리 저런 관계였다면 고백이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차에 카라마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달려나갔지만 나는 방 안에 주저앉고 말았다. 카라마츠가 돌아오자 조금 무거운 공기가 되고 말았다. 황급하게 고백 관련한 것들을 숨기고 이 방 저 방에 흩어져서 태연한 척을 하느라. 카라마츠는 어떻지? 다른 세계의 기억을 갖고 있는 걸까? 그래서 그 무거운 마음에 이제야 들어온 것일까. 저녁밥을 혼자 밖에서 때우고 온다는 건 드문 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만 카라마츠는 나 혼자 있는 방에 잠시 들렀다 나가버렸다. 곧이어 TV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모두가 잠들 때까지 카라마츠는 거실에 머물렀다. 아니, 아예 거실에서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오늘의 옆자리는 허전했다.

****

불행 하나. 카라마츠는 고백을 결심한 그날부터 날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엄마 앞에서 능숙하게 기침을 하며 감기 걸렸다는 핑계를 대며 거실에서 혼자 잠을 잔 지 벌써 일주일 째. 나와 단 둘이 남는 일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집에도 잘 남아있질 않았다. 공원에서 자주 시간을 때운다는 쥬시마츠의 보고가 있었다. 거기서 기타를 치기도 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고도 했다. 다른 세계의 일을 알고 있는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조차 물어볼 수 없었다.
불행 둘. 썩을 동정놈들답게 고백을 어떻게 할지조차 난항을 겪고 있다. 그냥 심플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리라는 말을 들어도, 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고백 얘기를 하기 전에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 사과를 할 타이밍을 찾기도 어려운 게 현재 상태.
불행 셋. 다른 세계의 기억들은 점점 더 우리 형제를 잡아먹어만 갔다. 모두 악몽을 꾸고 일어난다. 나에게도 이젠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에 카라마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마다 거절당하는 내가 있다. 반쯤 연인이었을 때에도, 종속관계로 얽혀 날 거부할 수 없을 때에도, 나는 수많은 세계의 카라마츠에게 끌렸고 그때마다 지금 세계의 형제인 카라마츠에게도 강하게 끌렸지만 그 마음이 전달되지 못하고 좌절하는 순간을 반복했다. 아니지, 마음은 전달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때로 웃으며, 때로는 날 힐난하며, 때로는 무표정으로 내 마음을 쳐냈다. 그 결말이 모두 세계를 부수는 카라마츠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싫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나를 좋아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제각각의 나의 고백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실패의 암시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나의 고백이 성공할 가능성 같은 건 0에 수렴해가고 있었다. 고백방법을 의논해주던 모두도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더이상 누군가에게 맡겨둘 수는 없었다. 깊게 생각한 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고백하자. 그런데 만약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땐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거절당한다면 그걸로 괜찮지만, 고백에 실패한다면 세계가 부서질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기세좋게 달려나갔다가도 멈추고 만다. 일단 공원으로 향한다. 아, 정말로 카라마츠가 있어. 카라마츠는 기타를 치고 있었다. 노래까지 부르면 안쓰러웠을텐데 그저 기타만을 튕긴다. 입고 있는 복장의 안쓰러운이 주변 사람들이 다가오는 걸 물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멀찍이 기타 선율을 듣고 있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나도 멀찍이서 그 선율을 듣고 있었다. 아쉽게도 무슨 노래인지 모르지만. 자작곡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타 소리가 멈추고 정신을 차려보니 카라마츠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기타를 챙겨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셈인지 공원 밖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뒤를 쫓았다. 둘 다 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걸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지 않도록. 신호등에 걸려 카라마츠를 놓칠까 싶으면 카라마츠는 그 자리에 멈춰서 나를 보았다. 초록불로 바뀌면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그렇게 강둑에 도착해서 또 걸었다.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으려 했고, 그는 속도를 올리지 않은채 그저 걸었다. 어느새 나는 카라마츠 옆에 와있었다. 그 상태로 계속 걸어나갔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말 한마디 없이 걷다 카라마츠가 멈춰섰다.
"이치마츠. 나는 잘 모르겠다."
며칠만에 나에게 한 첫 말이다.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날 좋아해주는 네가 보인다. 그런 게 언젠가 기분나쁘게 느껴져서 며칠은 널 피해보려 했다. 그러면 네가 날 찾으려 한다. 네 마음을 모르겠다. 싫어한다면 싫어하는대로 좋아한다면 좋아하는대로 표현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걸 기다리기는 게 지친다. 이런 게 보통의 형제의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투닥거리는 오소마츠와 쵸로마츠와는 달라. 서로 다정하게 아껴주는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와도 달라. 깨어있을 땐 독을 품고서 심한 소리를 해대는 네가 내가 잠든 사이에 다정하게 대하는 걸 느껴버리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의 감정이 한 가지로 수렴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이제는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을 하든 싫어한다고 말하든 네 감정을 생각하는 일을 포기하고 말 것만 같다. 더는 상처받기 싫고, 널 생각하느라 고민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며칠 이렇게 너에게서 도망쳐서 다니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마 이전처럼 널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
고백도 전에 차였다. 그것도 엄청 딱딱한 말투로.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카라마츠는 나를 이해하려다 포기하려 한다. 안돼. 그러지마. 포기하지 마. 그것보다. 내 말을 들어줘. 사과하게 해줘. 내 마음을 전하게 해줘.
"그건 안돼."
작지만 분명하게 말을 꺼냈다.
"너무 늦었지만, 얘기하게 해줘."
카라마츠는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놀랐던 모양인지 눈이 평소보다 커진 느낌을 받았다. 물론 카라마츠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미워하지 않아...그보다 좋아하고 있다고. 안쓰러운 말투나 행동에 심술을 부렸던 게 어느샌가 평범하지 않은 감정이 커지면서 카라마츠를 밀쳐내는 걸로 바뀌어가고 말았어. 상처를 줘서 미안해. 늘 상냥하니까, 이해해준다고 멋대로 착각해서 미안해. 잠들었을 때같이 직접 대면하지 않을 때에야 상냥하게 대해서 미안해. 이렇게 카라마츠가 배려해줘서 시간을 만들어 줄 때에야 비겁하게 사과하는 나라서 미안해."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꽉 쥐었다. 용서받지 못해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이렇게 사과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기회를 만들어준 덕이니까. 카라마츠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깜깜해지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쌀쌀한 바람이 스친다.
"진작 이렇게 얘기해줬으면 좋았을 걸. 나도 빨리 용서할 수 있었을텐데. 서로가 더 상처받기 전에 끝났을 텐데."
과거형으로 말하는 그로부터, 어쩐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용서할 수 있어. 이해했으니까. 하지만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겠네."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어? 어째서?
"평범하지 않은 감정이 커져서 날 밀쳐냈다고 하니까. 형제애 이상의 감정인거지?"
아.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개를 끄덕일 때가 아니지.
"그래. 언젠가부터, 카라마츠가 좋아졌어. 늘 같이 있고 싶고, 손 잡고 싶고, 더한 것도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졌어. 평범하게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그런데..."
그러고보니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흘러들어오기 전에도 나는 그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형제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그 감정을 묻어두기만 했다. 묻어두는 반발로 카라마츠에게 심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흘러들어온 기억 속에서 카라마츠가 떠나기보단 차라리 내 감정을 숨기고서라도 옆에 남아있어줬으면 하는 게 우선시되어 더 밀쳐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말하고 붙잡아야 한다. 수 십번을, 수 백번을, 셀 수 없는 삶을 돌고 돌아 여기서 그를 붙잡아야 한다.
"카라마츠, 사랑해."
그렇게 말하고 끌어안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저 고백하는 걸로 끝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세계가 부서진다니, 황당무계한 사랑 이야기라면 당연히 행복한 결말이어야 한다고. 카라마츠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 상태에서 입을 맞췄다. 입을 꾹 다물고 버티던 카라마츠는 이내 저항을 멈추고 혀를 내 입술로 밀어넣었다. 혀를 섞으며, 눈을 감으며,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으...으으..."
갑자기 카라마츠가 혀를 빼더니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고선 비명을 질렀다.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과 터져나오는 절규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이치...마츠..."
이름을 겨우 불러주었다.
"미안...하다...역시...혼자 있게..."
"무슨 일이야? 많이 아픈 거야?"
"내가...내 탓에...이 세계가 부서진대..."
이 시점에서 다른 세계의 기억이 흘러들어와버린 것인가?
"어느 세계에서의 내게 내려진 벌이라나봐...그런가...이치마츠..."
카라마츠는 한 손으로 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미안하다...넌 수없이 많은 세계에서...지금처럼 날 좋아해 줬구나...그리고 난 그걸 다 거절했지...여기서 나는 널 받아들여야 할지...거절해야 할지...그걸로 무언가 바뀌는지..."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이 고통과 불안감은 가슴팍을 타고 내게 전해졌다.
"밑을...보지 마...그리고 여기서...전력을 다해 도망쳐..."
카라마츠는 나를 밀쳤다. 어느새 카라마츠의 심장 부근으로부터 바닥을 향해 균열이 이어지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발바닥에는 검은 균열이 점차 퍼져 내 발밑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 균열이 뻗어가 세상이 부서지는 것일까. 순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형제들이, 부모님이, 친구인 고양이들이, 알고 있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달린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할 수야 없겠지만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카라마츠를 다시 끌어안았다.
"무슨 짓이야, 이치마츠..."
"널 두고 갈 수 있을리가 없잖아. 마지막을 함께 하자고. 대신 딱 한 마디만 해줘."
"무슨..."
"이번엔 거절하지 말아줘."
"그런가. 나도 사랑한다고, 이치마츠."
조금 무서웠다. 조금이 아닌가. 바지에 오줌을 지려도 넘칠 정도로 무서웠다. 그래도 카라마츠가 함께 있다. 세계가 카라마츠 탓에 부서져버린대도, 거기에 내가 끼어드는 운명이 계속 된대도, 그 결과 이런 결말을 맞는대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서로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진다면, 그건 분명 해피 엔딩이겠지. 메리 배드 엔딩이라고 하던가. 이런거.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며 다시금 키스했다. 이 감촉을 잊지 말고 다른 세계로 전하자. 카라마츠가 날 끌어당겼다. 나도 카라마츠를 끌어당기고서 세계의 종말을 맛봤다.

*****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다. 니트 여섯 쌍둥이는 늘어져 있다가 한낮이 되서야 몸을 일으킨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은 카라마츠. 커다란 이불을 개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한다. 쌀쌀해진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다같이 산책을 하러 나섰다. 왁자지껄 떠들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제각각 자신의 놀거리를 찾아 나선다. 카라마츠와 나는 단둘이 남겨졌다. 공원에 들러 벤치에 앉아 고양이와 놀았다. 고양이와 논 것은 나 혼자로 카라마츠의 주변에는 고양이가 다가오지 않아 카라마츠는 울먹거렸다. 공원을 나와 걸었다. 내가 뒤쳐지면 카라마츠는 멈춰서서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강둑에 도착해 계속 걸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어둑해졌다. 오늘 하루동안 낙엽이 제법 떨어졌는지 사각사각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쌀쌀한 바람이 스쳤다. 그럼에도 우리는 걸어나갔다.
"시간 참 빠르네."
"벌써 가을이라니 빠르긴 하지. 벌써 올해가 다 가버리는군."
그 말도 맞네. 벌써 올해가 다 간다니. 니트라 실감은 못 하지만.
"오늘 하루가 빨리 간다는 얘기였어. 해가 빨리 져서 그런가."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딱 밤이 되기 전 이 시간이 참 로맨틱하지 않은가."
"로맨틱은 무슨. 추워서 얼어죽게 생겼어. 바보 아냐?"
"이런 날에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따뜻해지라고 불을 질러줄 수 있을 것 같다만."
"로맨틱은 무슨 음흉하잖아. 최고야."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강둑 어느 지점을 돌아 다시 집 방향으로 걸었다.
"불이라도 지필까."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브라더?"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길을 걸을 예정이거든. 1초 뒤에."
그러고선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
"훗, 과연. 혀의 마찰열로 불을 지펴볼까."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갖다대는 그를 맞이하여 입술을 부딪히고 혀를 섞었다. 시간 참 빠르다.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며칠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의 종말을 맞이했을 터였다. 어둠에 삼켜져,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며, 그럼에도 서로를 끌어안고 세계가 부서질 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아득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계가 무너지기 전 강둑에서 카라마츠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카라마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런 카라마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이치마츠."
"뭐가 정답인데."
"너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길 잘했다는 거다.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왔어."
그런 게 어딨어. 편의주의 전개인가? 겨우 고백 받아준 걸로 세계를 구한 거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네.
"다른 세계인거 아냐? 우리들 기억만 가지고 있는 거라든가."
"그렇지 않다. 아직 이 세계는 다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서 균열이 보이거든."
주변을 둘러봤지만 균열이 있지는 않았다. 이것만큼은 카라마츠에게만 보이는 건가.
"벌이라면 이제 충분하다고, 나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라는군."
카라마츠는 세계를 부수는 존재라는 벌에서 해방된 모양이다. 애초에 왜 그런 벌을 받게 되었는지, 그런 일이 왜 필요했는지 궁금증은 산더미같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마도 곧,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은 잊혀진다고 하네. 다른 세계의 기억 같은 거, 갖고 있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원래라면 그렇지만, 조금 서운했다. 카라마츠가 고백을 받아준 이유 중에는 수많은 세계에서 이치마츠가 고백했던 것과 그걸 거절한 그의 기억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테니까.
"중요한 건, 감정이겠지. 그런 기억 없이도 난 널 좋아했다고."
조금 삐진 듯 얘기해버렸다.
"아, 알고 있다. 그런 기억 없어도 나도 널 좋아할 테니까."
그렇게 돌아와서 모두에게 보고를 하고, 커플이 된 기념으로 모두에게 쳐맞고, 간만에 같은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슬슬 기억이 옅어지는 거 같네." 
"훗, 세계의 균열도 제법 옅어졌다."
"나도 보고 싶은데, 그 균열. 발밑에 시커먼 균열만 봐서 세계가 어떻게 갈라졌는지 궁금하거든."
"별로 좋은 것도 아니다. 마음 한 켠에 죄책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세계가 나를 트리거 삼아 사라진 것도 사실이니까."
"이젠 괜찮으니까. 그렇게 떨지 마. 끌어안고 있기보다 뛰어서 집에 가는 편이 훨씬 따뜻하겠어."
"그러지. 가서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강렬한 아픔을 희석시켜 보자고, 허니."
"허니라는 말은 집어치워, 썩을마츠."
"슬슬 애칭으로 부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치마츠."
"이치마츠로 됐어."
"논논. 허니, 베이비, 마이 리틀 이치~"
"어디서든 그런 식으로 부르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을거야...제발 평범하게 불러."
발걸음이 빨라졌다. 카라마츠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내 속도가 느려지자 카라마츠가 손을 잡아주었다. 손을 잡고 함께 달렸다. 달리다 보면, 겨우 고백해서 그와 연인이 되었다는 실감이 난다. 무엇이 날 고백하도록 떠밀어주었던가. 아. 카라마츠가 삐져서 며칠을 날 피해다녔었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고백하려 했었지. 왜 다른 형제들이 나를 위해 고백 방법을 찾아주었지. 아무렴 어때. 이렇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다. 그걸로 분명, 충분하다.


 

----------------------------------------------------------------------------------------------------------------------------------------
제목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라이더 네타를 썼다 해야하나.
전부터 가면라이더 디케이드의 설정은 한 번 쯤 써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별 생각 없이 깊게 이야기를 안 짜고 써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파괴자라니 이 무슨 중2중2한 설정인가. 거기서도 왜 주인공이 파괴자인지 목적은 무엇이고 그런 거 안 나왔으니 여기서도 대충입니다. 고백이 성공하면 세계가 구원받는다는 건 데이트 어 라이브도 생각나고 하여튼 그렇군요. 평행세계를 좀더 자세히 쓸까 하다가 살짝이 힌트만 넣었습니다. 평행세계의 기억들이 들어왔을때 반응도 좀더 쓰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집중하기 위해 뺐습니다. *만큼만 썼을 땐 카라마츠를 없애자는 1356과 그럴 수 없어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는 4의 이야기였는제 1356의 태세전환을 시켜줬습니다. 사실 오소마츠는 그렇게 해서라도 다른 형제들을 지키려면 카라마츠를 없애자는 쪽으로 내볼까 하다가 관뒀습니다. 모두의 해피 엔딩을 꿈꿨습니다. 간만에 단편치고 좀 길게 썼는데 반으로 나눌 계획이었을 때와 플롯이 또 틀어져서 그렇네요. 단편 쓸때도 이럴진데 장편 쓸때는 엄청 흔들리죠...늘 죄송합니다...
이치마츠가 무척 이치마츠답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기세로 이해해주세요.
오소마츠상이나 2차창작에 대한 열의가 많이 식었지만 망상이 멈추지 않으니 가끔 이렇게 쓰는 것도 좋네요. 극장판 영화도 나오고 하니 3기가 또 기대되는 건 저만은 아니겠죠.대충 뭐, 늘 이치카라 행쇼입니다. 카라른 행쇼고, 그 외에도 다 행쇼에요ㅠㅠ 올해 안엔 장편 저거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편 준비했습니다. 이어지지만 이 편 하나로도 자체완결이니 꼭 읽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만 조금 더 설정설명이 된 부분이 있어서 읽어주시면 진자 떙큐합니다. 진엔딩...같은 거?
Circle of Life (true end)
http://heartrainon.tistory.com/188
Posted by 하리H( )Ri
2017. 2. 15. 19:58

[카라른/이치카라]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9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카라마츠 중심, 결론적으로는 카라총수지만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캐붕,날조,글솜씨없음주의

※5화 카라마츠 사변 기반

 

9화가 데자뷰라고 느끼신 분은 정상입니다. 다만 안에 내용은 많이 바뀌었어요.

또 이렇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음 화 작업중이에요 ㅠㅠㅠㅠ 벌써 이것도 1년 되가는...

뭘 쓴게 있다고 ㅠㅠㅠㅠㅠ

 

---------------------------------------- 

병원 바깥을 배회하자면 머리 위에 떠 있던 해는 어느새 기울어 지평선을 향하고 있다. 그다지 기다릴 셈은 아니었지만 쵸로마츠가 생각보다 늦어지자 병원 입구를 자꾸 바라보게 된다. 병원 앞뒤를 둘러싼 작은 산책로에는 링거 거치대를 끄는 노인, 휠체어에 탄 소년과 그걸 미는 남자, 목발을 짚고 느리게 움직이는 여자 등이 보였다. 그리고 의외로 고양이도 몇 마리 돌아다녔다. 병원 직원이 먹이를 주는지 한켠에 빈 그릇과 물통도 놓여 있었다. 고양이들을 놀아주며 산책로 벤치에 앉아있자면, 고양이처럼 굽은 등을 한 쵸로마츠가 느릿느릿 입구로 걸어 들어온다. 빠른 걸음으로 짐을 받아주자 그는 한숨을 쉬면서 카라마츠가 입원한 병실 쪽을 바라보았다.

 

"좀 늦었네. 엄마 병수발이라도 하고 온 거?"

 

고개를 젓고선 쵸로마츠가 입을 떼려다 다물어버렸다.

 

"아니. 그건 아냐. 이따가, 다 같이 있을 때 말할게."

 

그는 능숙하게 숨기질 못한다. 분명 중요한 말이겠지. 그래서 다 같이 있을 때 말한다는 걸까. 그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저 표정을 본다면 누군가는 쵸로마츠에게 말을 해 달라 할 것이다.

 

"일단 올라가자. 어차피 계속 밖에서 있었을 거 아냐. 그 사이에 카라마츠가 일어났을 지도 모르니까."

 

 

쵸로마츠가 병실 문을 열자 모두가 이쪽으로 왔다. 오소마츠 형은 '쵸로마츠, 수고~'라는 말과 함께 쵸로마츠를 가볍게 맞아주며 나를 쳐다봤다. 어쩐지 그 눈길이 거북해서 눈을 피하며 다시금 복도 의자에 주저앉았다. 쵸로마츠는 훌쩍거리는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를 달래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오소마츠 형이 복도로 나왔다.

 

이치마츠, 뭐 하나만 물어도 돼?”

 

“...뭔데.”

 

아까 쵸로마츠랑 얘기 나눈 거 있어?”

 

별건 없어. 이따가 다 같이 있을 때 얘기해준다는 건 있었지만.”

 

내가 숨겨봤자 어차피 곧 쵸로마츠의 표정을 보고 알 테니까 그냥 말해버린다.

 

?”

 

글쎄.”

 

그리고, 왜 카라마츠를 보러 들어오질 않는 거야? 걱정은 엄청 하고 있는 주제에.”

 

하나가 아니잖아! 거기다 당황스런 질문이다.

 

...누가 걱정한다고...”

 

하고 있잖아? 엄청. 너도 힘들어하는 거 있는 거 아냐?”

 

그다지...암만 썩을마츠라 해도 저렇게 다쳐서 못 일어나면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거 말고.”

 

“......”

 

나는 형이니까, 카라마츠의 고민을 알아주지 못한 거라던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거든. 너도 그런 거 있지 않을까 해서.”

 

이럴 때 느낀다. 역시 장남은 장남. 바보 주제에 저런 건 잘 알아챈다.

 

쉽게 얘기하네.”

 

?”

 

그 정도잖아? 단지 형이니까 몰라줘서 미안한 거로 끝. 녀석을 저기까지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않아. 느끼는 죄책감이 있다고 해도, 그저 의무적인 것뿐이니까. 나랑은 다르다고. 나랑은...”

 

형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위험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런 중얼거림조차 끈질기게 물어올 게 분명하니 다시 병원 밖으로 나간다. 카라마츠의 병실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채 멍하니 지내고 있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푸른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릴 적 나비의 생태를 알아보자는 내용이었나, 하여간 교실에서 애벌레를 길렀던 적이 있다. 다들 어서 나비가 되기를 기다렸지만, 애벌레는 몇 번이고 허물만을 벗을 뿐, 나비가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잘난 척 하던 녀석이 이런 게 탈피라면서, 이걸 몇 번 해야지 나비가 된다고 말했던가. 애벌레에게 상추라던가 먹이를 주는 담당이 나였기 때문에, 벗겨진 허물을 보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이윽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어버렸다. 담임이 호들갑을 떨며 겁을 주면, 몇 명인가가 피식거리고 몇몇은 나비 죽었냐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우화해서, 사육장의 뚜껑을 열어주니 날아가는 모습에 그 당시에는 감동했었다. 하지만, 신비롭고 아름답게 남은 그 장면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본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긴 시간, 날 수 있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 채 자라온 녀석의 비참한 최후를 보며 여느 녀석들처럼 죽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비가 되기까지 허물을 벗으며 고통받았을 그 시간들이 아깝고 쓸모없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껍데기를 깨고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한들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하면, 어차피 약할 뿐이라고. 산소라든가, 세상이라든가, 무심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마는 나다. 그런 내게 카라마츠는 예나 지금이나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을 내내 뿌리쳤다. 미움을 샀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나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카라마츠의 마지막 연극을 하기 전, 봄이었다. 그 뒤,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우리의 마지막 학생시절을 소비하는 동안, 카라마츠는 급격히 안쓰러워졌다. 그 전에도 그는 남자다운 것을 좋아하고 종종 연극톤을 내뱉었으며 폼 잡으며 뜬구름 잡는 소리를 내뱉는 사람이었지만 그 시간을 거치며 카라마츠는 안쓰러운 캐릭터에 암묵적으로 무시하는 편이 낫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연극에 대한 어긋난 애정일 거라 생각했다. 5년을 빠져 살았던 연극이다. 그걸 어쨌건 타의로 관두게 되었으니 카라마츠의 변화에 동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졌다. 마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라도 한 양, 이상한 필터로 타인의 말을 걸러듣는가 하면(주로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오자키처럼 남자들이 동경할 법한 패션이나 말투를 과하게 써서 눈총을 받거나 자기애 넘치는 작품들을 양산해내곤 했다. 거기에 질려서 결국 형제들까지 안쓰럽다거나 무시하는 일이 된 게 고작 그 1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너무도 달라진 껍데기에 사람들은 적응하고 바뀌어갔다. 카라마츠의 상담에 제대로 대응해주지 못한 나에게도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전보다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짜증나서, 그리고 나도 만사가 부정적으로만 보여서, 카라마츠를 대하는 방식은 점점 심해졌다. 내가 자기혐오로 무장하고 땅굴을 파는 타입이라면 그는 전형적인 나르시스트였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으면서도 그 발현방식이 정반대라 그런지 이전보다도 그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는 관계. 거기에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갔다. 나도 상처받고 있잖아. 애초에 저런 안쓰런 모습 관두면 안 되나. 그렇게 자신이 단단한 척 애써봤자 남는 건 없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변하지 않았다. 이젠 카라마츠는 원래 저런 녀석이었지라고 여겨질 정도로. ‘이치마츠가 제일 걱정된다고라고 들을 때 그걸 감싸주는 카라마츠의 본질마저 안쓰럽다 여길 정도로. 물론 약한 모습도 자주 보이지만 그가 꾸며낸 껍데기는 단단해져서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화를 기대해본 적은 없다. 그 껍데기로 사는 게, 그 껍데기가 본질이 되는 게,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거 아닐까. 물론 저런 어른이 되는 건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지만. ‘어른은 좋은 의미로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고, 니트 생활을 하며 미루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고. 어릴 적에 생각했던 어른은 되고 싶은 존재였는데 삶이 이어지면서 어른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싶고. 훌륭한 어른이 있는가하면 쓰레기 같은 어른이 있고. 그 쓰레기도 타는 쓰레기와 타지 않는 쓰레기로 나뉘듯 내가 겪은 쓰레기어른과 내가 돼버린 쓰레기어른은 다르고. 더 이상은 자기가 누군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이 어른의 장점이라 멋대로 여긴다. 그 누구보다 고민 없는 남자 카라마츠도 영 쓸모없고 어른답지 않지만 어른은 어른인거다. 그런 판정을 내리며, 우리 여섯 쌍둥이가 모두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것에 조소하곤 했다. 설마, 껍데기가 깨지는 모습을 보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균열은 조그맣게, 예상치 못하게 생기는 법이니까. 카라마츠가 치비타에게 납치를 당했다 돌아온 날. 버릇처럼 그에게 툭툭대면서 엄살떨지 말라고 했지만 병원에 다녀와 붕대를 둘둘 감은 카라마츠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거실에 1인용 요를 깔고 카라마츠가 잘 수 있도록 해둬서, 늘 좁았던 6인용 이불은 넓어보였다. 도대체 납치 당일에는 왜 눈치를 못 챈 건지 의아할 정도로 카라마츠의 빈자리는 컸다. 잠결에 밖으로 나돌아다니다 우리의 먹튀에 열받은 치비타에게 잘못 걸렸던 거겠지 생각한다. 납치극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카라마츠를 위해서인지 스스로를 죄책감에 몰아넣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 뒤로 누구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으니까. 카라마츠의 잠자리를 살펴주자 붕대와 반창고로 뒤덮힌 그의 얼굴에 핀 미소는 여전히 해맑아서, 그날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리에 누우면 옆의 빈자리를 괜히 휘적거리고 요에 파묻혀 카라마츠의 흔적을 더듬기도 하고 원래는 건너였던 토도마츠를 괜히 건드리기도 하고, 그러다 정신이 맑아져 버렸다. 다사다난한 날이었다. 친구인 고양이가 본심을 말하는 약을 맞고, 내 본심이 들켜서 화내버리고, 나 때문에 도망간 고양이를 쥬시마츠가 찾아주고, 모두와 화해하고선 목욕을 끝내고 돌아오자 심한 꼴을 하고 있는 카라마츠가 있고, 카라마츠의 상태 탓인지 모두들 솔직하게 싹싹 빌었는데, 아마 에스퍼 냥이 사건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평소같았으면 그렇게 심하게 다쳐와도 별 신경 안 썼을 거라 생각하니까. 맑아진 정신에서는 끊임없이 그날 하루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때, 1층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인가? 하지만 문이 열리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리는 게 영 이상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지붕이 살짝 울렸다. 몸을 일으켜 조심히 방을 빠져나왔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누가 올라갔나 살피러 가자, 그곳에 익숙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핫...”

 

우는지 웃는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그의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은 분명 카라마츠였다. 왼쪽 손목에 무엇인가 반짝, 하고 빛났다. 으윽하는 소리를 내며 카라마츠가 움츠리고 다시금 아까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슬쩍 카라마츠의 몸이 틀어져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넋이라도 나간 듯이 그저 자신의 손목을 긋고, 긋고, 그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손목을 긋던 것을 떨어뜨렸다. 아까의 웃음소리, 아니 웃음소리라기엔 애처로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소리조차 목구멍에서 막힌 듯 작게 들려왔다. 울음이 섞여 마음껏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소리. 카라마츠는 망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리에 맷돌에 맞아 목이 꺾인 카라마츠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탓이야. 무서워. 서둘러 내 잠자리로 돌아왔다. 잠자리에서마저 비치는 달빛은 나의 가슴을 찌르고 잠 못 이루게 했다. 그 뒤론 카라마츠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카라마츠가 오는 걸 살피고 밖에 나가거나 했다. 병실에 있지 못하는 것도 그 탓이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고 숨이 막히는 것 같으니까.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날이 어둑해졌다.

 

이치마츠, 들어가자.”

 

쵸로마츠가 저녁밥은 먹어야 한다며, 병실에서 마중을 나왔다. 고개를 흔들자, 그는 머리를 감싸며 얘기한다.

 

밥은 먹어야지. 이런 상황에 한 명 더 쓰러지면 정말 곤란하다고? 밥 먹으면서, 모두에게 얘기 좀 할 거니까.”

 

...”

 

쵸로마츠의 손에 이끌려 병실로 들어왔다. 쥬시마츠가 애써 밝은 얼굴로 뭐하고 있었냐고 물으면, 그냥이라 작게 중얼거릴 뿐. 카라마츠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연스레 밥상에 둘러앉듯 작은 탁자에 모여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밥을 삼켰다.

 

슬슬 괜찮을까나. 모두에게 할 말이 있는데.”

 

좋다고, 답하는 사람은 오소마츠 형밖에 없었지만, 쵸로마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집에 간 김에, 카라마츠가 학창 시절에 무슨 일을 겪지는 않았을지 조금 알아보고 왔어. 내가 알아본 것만으로는 카라마츠가 이 지경에 이른 것까지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추측까지 더해서 정리하느라 바로 말하진 않았어. 이거 말고도 아마 각자가 알고 있는 일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 다 얘기하라고는 하지 않을게. 다만, 카라마츠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줘.”

 

쵸로마츠는 카라마츠의 중고등학교 시절 연극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봤자 제3자의 이야기로, 카라마츠가 겪었던 일이나 감정을 다 대변해주지는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상냥하고 의지되는 형으로 남고 싶었던 집에서의 카라마츠와는 다르게 학교에서의 그는 평범했다. 바보여서 수업에 따라가기 힘들어했다거나, 늘 즐겁게만 보였던 연극부 활동도 부원들간의 트러블이라든가에 말려서 곤란했다거나. 생각없어서 좋겠다느니,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느니, 그건 그가 한껏 꾸며낸 허세에 말려든 것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다만, 힘들 때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털어놓거나 하지 않은 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들 똑같았는데, 나도 그랬는데, 녀석만 강한 척 하다가 괜히 힘들어지게 된 거 아니냐고. 그런데, 학창 시절의 일들이 이제 와서 카라마츠를 조이는 이유가 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졸업하고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잖아. 나름대로 극복한 거 아니였냐고. 안쓰럽게 변해가면서.

 

“...그러다 요시다 군이라고, 이치마츠 기억나? 1때 같은 반이었던 녀석.”

 

1때라. 좋은 기억이 없어서 쵸로마츠 외의 동급생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녀석도 연극부였는데, 얼마 전에 카라마츠를 만났다고 하더라고. 그냥 예삿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연기 쪽으로 안 나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호들갑이더라. 카라마츠를 만났을 때도 그런 말을 했다고 했어. 확실치는 않지만 그때쯤부터 카라마츠가 우울해하기 시작했던 거 같아.”

 

그거였나.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마츠가 납치당했지. 시기를 더듬어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

 

납치극을 얘기하자, 표정들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럼, 카라마츠 형에게 있어서는 불행이 연달아 겹친 거...였을까...”

 

토도마츠가 힘없이 말했다.

 

그랬을지도...”

 

쵸로마츠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마무리를 지어버렸다.

 

 

 

병실을 나가서 복도에서 잠드려 하자, 쥬시마츠와 토도마츠가 붙들고선 카라마츠가 보이지 않을 법한 커튼 너머 자리로 데려왔다. 하필 잠버릇이 고약한 오소마츠 형과 함께 써야 했지만, 다시 나가기엔 두 사람에게 미안해져서 그대로 누웠다. 카라마츠가 자해하던 이야기, 했어야 했나. 데카판 박사에게 다시 고양이에게 기분 약을 주사해 달라고 부탁할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커튼 너머에서는 심장박동을 측정하는 비프음과 다른 녀석들의 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카라마츠, 내일은 깨어날까. 하지만, 그때의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원망할까봐 두려웠다. 쵸로마츠는 알고 있는 얘기들을 말해달라고 했지만, 다른 녀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조차 마음을 굳혀야 하는 일이었다. 쉽게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으면 불안한 생각들만 스쳐갔다. 이렇게 병원에서의 둘째 날이 지났다.

 

...”

 

창가 근처라 떠오르는 해의 빛이 눈을 자극하고, 거기에 조금씩 정신이 깨어났다. 거기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하악, 하악, 하아악...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한 숨소리는 카라마츠의 것이었다. 재빨리 일어나 그를 흔들어보아도 대답 없이 눈물과 식은땀,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거친 숨소리만이 나온다. 옆에 있는 응급 버튼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제발 누군가 와주기를 빌어본다.

 

카라마츠...카라마츠...!”

 

내 소리에 다들 잠이 깨어서 누군가는 복도로 달려나가고 누군가는 떨리는 내 몸을 잡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와 담당의가 카라마츠를 데려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녀석이 이마를 감싸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느끼는 고통이 저거다. 사고로 치인 곳보다 저번에 우리가 던졌던 집기들이 맞았던 이마가 더 아프다는 건가. 그 모습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 다시금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카라마츠에게 거리낌 없이 대했던 주제에, 이런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이렇게 소중한데,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그걸 표현하지 못해서, 그는 나를 의지해주지 않은 채 스스로 깊은 고통으로 빠져들었다. 참을 수 없어서 의사를 따라 중환자실 쪽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의 숨은 끊어질 듯 아슬아슬해서, 이대로 있다간 그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았다. 어느새 모두 카라마츠 옆으로 붙어서 중환자실 앞까지 왔지만, 의사는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보호자 분들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며. 닫힌 문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듯,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될 것처럼 느끼게 했다.

 

 

 

아직 카라마츠랑 헤어질 수 없는데.

 

카라마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카라마츠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잔뜩 있는데.

 

카라마츠가 왜 고통스러워 하는지조차 모른 채로, 그를 보낼 수 없는데.

 

옆에 있는 게 당연해서, 그동안 왜 잘해주지 않았는지, 저 문을 보면서 후회한다.

 

다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땐...

 

 

 

-------------------------------------------------------------------

 

 

 

 

 

 

 

 

 

와 진짜 양심없다...그쵸?

저에게 돌을 던져주...뭐 읽는 사람도 없겠구나.

이렇게 쓸쓸히 잊혀지고(※그 전에도 남은 적 없음)

어느새 이거 쓴 지도 1년 되어가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22일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장편감도 아닌데 ㅋㅋㅋㅋㅋㅋ 9화짼뎈ㅋㅋㅋㅋㅋㅋ

 

 

 

죽어야겠다.

그보다 카라마츠 잠자는 숲속의 미녀같다. 몇 달째 잠에서 못 깨네...미안...

Posted by 하리H( )Ri
2016. 9. 11. 23:21

-카라른 전력 60분 주제: 감기 (https://twitter.com/karareun60/status/774954422229082113)

-파카카라(오소카라/이치카라)입니당

-캐붕은 패시브

-오소마츠상 OST 넘나 좋은것...★(응?)




<L*NE 육둥이 단체채팅방>

[오소] 집에 누구 있냐

[카라] 지금은 나뿐이다만

[오소] 그러면

[오소] ㄱㅏㅁ겨얏좀

[오소] 감기약좀

[카라] 뭐라고?

[오소] 찾아봐

[카라] 알았다

[카라] 감기 걸렸어?

[오소] 그런듯

[오소] 목이 간질간질한게

[오소] 이건 감기갈ㄷㄱ더님

[오소] 자꾸 기침하니까 오타가

[카라] 얼른 들어와라

[토도] 카라마츠 형

[토도] 감기약 집에 많이 있어?

[카라] 많이 있다

[카라] 알약도 있고

[카라] 베이뷔들을 위한 달콤한 액체 약도 있다구~

[토도] 하하하...

[토도] 그럼

[카라] 토도마츠도 감기인가? 별일이군

[토도] 어제 오소마츠 형이 기침하던데

[오소] 그럼 나한테 옮은거?

[토도] 아마도

[쵸로]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더니

[쵸로] 오소마츠 형도 감기에 걸리는군

[오소] 바보라고 까지 마라 휴지마츠

[쵸로] 여기서 휴지가 왜 나오냐!!!

[쵸로] 나도 감기약 좀 준비해주면 안될까?

[카라] 에? 쵸로마츠도?

[쵸로] 간만에 사람 많은데 갔다가 옮은 거 같아

[쵸로] 요새 독감이 유행한단 말은 들었지만

[쵸로] 내가 걸릴 줄이야

[카라] 독감이면 큰일이잖아

[카라] 얼른 집으로 돌아와라

[쵸로] 안그래도 가는 중이야

[이치] 저기

[카라] 왜 그러는가 이치마츠

[카라] 무슨 일 있나

[카라] 답이 없어! 브라더! 쓰러진거 아냐???

[이치] 그런 거 아니니까

[이치] 개똥마츠가 설레발 치긴

[토도] 이치마츠 형이 좀 느리긴 하지

[이치] 그런 거 아냐

[이치] ...감기약 내 몫도 준비해줄 수 있을까

[이치] 카라마츠 형

[오소] ?!!!!!

[쵸로] ?!!!!!!!!!!

[토도] !!!!!!!!!!!!!!!!!!!!!!!!!

[카라] 알았다! 성심성의껏 준비하지!

[오소] 카라마츠 들뜬 거 봐 ㅋㅋㅋㅋㅋㅋㅋㅋ

[쥬시] 카라마츠 형! 죄송함다!
[쥬시] 제 것도 준비해주시지 않겠슴까!!!!!!!!!!!!!!!!!

[카라] 이 무슨!

[카라] 잔혹한 운명의 데스티니란 말인가!

[카라] 나만 빼놓고 모두 감기에 걸린 것인가!!!!!!!!!!


카라마츠의 마지막 메시지가 전송되고 10분이 지나도록 5읽음만 떠 있을뿐 답은 오지 않았다. 다행히 카라마츠는 스마트폰은 보지 못한 채 형제들이 누울 이부자리를 펴고 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끓이고 감기약을 있는대로 꺼내 식탁위에 늘어다놓고선 복용법을 꼼꼼히 읽고 있었다. 바쁜 부엌의 풍경과는 달리 바깥에는 나른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 왔음~켈록켈록"

현관에서 오소마츠의 소리가 들리자 카라마츠는 재빨리 뛰어나가 오소마츠를 부축해주었다. 됐다는 듯 오소마츠는 손을 내저었지만 카라마츠에게 기대는 그는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이 형~ 카라마츠가 끓인 뜨끈한 죽을 먹고 싶은데~ 해 줄거지......"

평소와 달리 오소마츠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슬쩍 지은 미소는 그의 상태를 더 나빠보이게 했다. 열이 오르는 가운데 카라마츠의 부축을 받으며 2층으로 옮기는 걸음은 흐느적거렸다. 이부자리의 가운데에 오소마츠를 눕히고 카라마츠는 체온계를 가져다 그의 귀에 꽂았다. 38도라. 제법 열이 있군. 카라마츠는 힘없이 늘어진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선 수건을 적셔서 가져다 줄게. 죽도 끓여서 먹여줄테니까 형은 누워있어."

카라마츠가 급히 내려가버리자 오소마츠는 아쉬운 듯 손을 뻗었다 내렸다. 카라마츠라면 분명, 나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에게도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겠지. 그런 카라마츠의 상냥함은 좋지만, 가끔 카라마츠의 상냥함이 자신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몸에 오르는 열기와 갓 햇볕에 마른 이불의 냄새, 사내놈들이 뒤섞여 자는 방의 체취가 그런 감정과 뒤엉켜서 살짝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 왔어."

현관에서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찬가지로 카라마츠는 잽싸게 나가서 이치마츠를 부축했다. 평소 카라마츠를 쳐내는 일이 많은 이치마츠지만, 오늘은 카라마츠가 빌려주는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치마츠? 많이 아픈가?"

카라마츠의 말이 저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오늘 새끼를 낳을 듯한 고양이를 지켜본다고 새벽부터 나갔던 터라 갑작스런 기온 변화와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게 화근이었나. 카라마츠의 품에서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치마츠는 약해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업고서 2층으로 올라갔다. 늘 그렇듯 이불의 끄뜨머리에 이치마츠를 눕히고서 카라마츠가 체온계를 귀에 꽂았다. 38도. 뭐야, 이런 점도 쌍둥이인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어깨를 토닥여주곤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이치마츠는 토닥임이 멈춘 걸 아쉬워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오소마츠가 토라진 듯한 얼굴을 한 채 누워있었다. 저 형은 어리광이 많았지. 카라마츠 형이 간호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오소마츠의 얼굴에서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고선 이치마츠는 반대쪽으로 홱 돌아누웠다. 조용한 집 안에서 보글보글 죽이 끓는 소리, 쪼르륵 물이 컵에 들어가는 소리, 카라마츠가 연신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쥬시마츠, 쵸로마츠, 토도마츠가 귀가했다. 쥬시마츠는 감기에 걸려도 멀쩡한 듯 토도마츠를 들고서, 쵸로마츠는 카라마츠의 부축을 받으며 2층으로 올라왔다. 카라마츠는 마찬가지로 체온을 재고, 이불을 덮어주고 토닥여주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주는 구나, 카라마츠. 조금 분한 마음을 삭이며 누워있다보니 카라마츠가 따뜻한 물과 죽을 들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자. 이치마츠는 자는 모양이고...다들 죽 먹을래? 내가 떠먹여줄까?"

"괜찮아. 고마워, 카라마츠."

쵸로마츠가 죽을 받아들고서 후후 불어가며 죽을 먹는다. 토도마츠도 카라마츠가 건네주는 죽을 들고선 뜨거운 듯 조심히 이불 위에 접시를 올려 놓고 귀여운 척을 하며 후후 불어댄다. 쥬시마츠는 이불을 빠져나와 차를 가지고 온다며 급히 내려간다. 지금이 오소마츠에겐 좋은 기회일까.

"카라마츠, 이 형아 숟가락 들 힘도 없는데 떠먹여주면 안될까아?"

없는 아양을 떨어가며 오소마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카라마츠를 바라봤다. 카라마츠는 흡족한 표정으로 알았다며 끄덕이곤 숟가락에 죽을 떠서 호호 불어주었다. 평소 휘파람을 불던 탓인지 호 하고 부는 와중에 살짝 휘파람 소리가 섞여나왔다. 침이라도 튀었을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오소마츠가 행복한 듯 입을 벌리면 카라마츠는 눈을 맞춰주며 오소마츠의 입에 죽을 넣었다. 알맞게 식은 죽임에도 오소마츠는 뜨거운 척을 하며 카라마츠를 힐끔 보고 카라마츠는 당황해하며 다음 숟갈은 몇 번이고 식혔다. 오소마츠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 나밖에 없겠지. 죽을 받아먹으며, 오소마츠는 이렇게 카라마츠가 나만을 챙겨주는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카라마츠가 여러 번 얼음 띄운 물에 수건을 적셔 형제들에게 번갈아 올려주고 있는 동안, 오소마츠는 잠들지 않고 카라마츠의 상냥함을 즐기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깬 건 제법 늦은 밤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자는 듯 숨소리만 들리고 카라마츠가 체온계와 수건을 번갈아들며 형제들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저번에도 저렇게 해주었다면 다들 무시하지 않았을 거 아냐. 역시 바보야. 이치마츠는 그런 카라마츠를 바라보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말 대신에 기침이 먼저 새어나왔다.

"이치마츠, 깼는가? 배 고프지? 죽 해줄까?"

다급히 와서 말을 거는 카라마츠 때문에 놀라면서도, 어쩐지 이치마츠는 기분이 좋았다.

"응...조금이면 되니까..."

카라마츠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남은 죽이었는지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일어나 체온계를 귀에 꽂았다. 아까보다는 조금 열이 내려간 듯 했다. 이치마츠는 안심하며 잠에서 깨기 위해 눈을 비비적거렸다.

"이치마츠, 직접 먹여줄까?"

카라마츠가 죽을 들고와서는 물었다. 이치마츠는 싫지 않았지만, 좋다고 말하기 민망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카라마츠가 앞에서 죽을 떠서는 식혀준다. 후후 부는 카라마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는 상상을 하며 카라마츠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숟가락이 이치마츠의 입 앞으로 다가왔다. 이치마츠는 입을 살짝 벌려 받아먹고는 오물거렸다. 기분이 좋아져서 몇 번이고 받아먹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다만, 내일도 카라마츠가 죽을 먹여주면 좋을텐데 하며 생각할 뿐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카라마츠는 조금 지친 듯 벽에 기댔다. 쵸로마츠의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쵸로마츠의 수건만 집중적으로 갈아주고 있었지만, 다른 형제들에 비해 뒤척거리는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카라마츠는 쵸로마츠를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별로 아프지 않은 듯 태평스레 굴러다니다 어느새 이치마츠의 발 밑에 있었고, 토도마츠는 킥킥거리며 밭은 기침을 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이불에서 나와 카라마츠 옆에 붙어앉았다. 카라마츠가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자 이치마츠는 됐다는 듯 손을 올리고선 카라마츠의 어깨에 기댔다.

"이럴 땐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싶다. 다들 아픈 모습을 보니 괴롭군...쥬시마츠는 괜찮아 보이지만."

키스를 하면 감기가 옮는다는 말이 있던데. 카라마츠가 중얼거렸다. 별 희한한 것을 다 믿는구나. 역시 바보야.

"그러면,"

"응?"

"키스해줄래? 나하고."

이치마츠가 대담하게 제안했다. 설마, 진짜로 받아들여 주겠어? 카라마츠는 모두를 아껴주고 있을 뿐. 그뿐인데.

"이치마츠가 원한다면."

카라마츠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해? 개똥마츠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흘깃 보았지만 카라마츠는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은 듯 했다.

"대신 이치마츠가 리드해줘. 내게 감기를 옮겨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너 대신 아플 수 있다면 난 괜찮다."

카라마츠가 몸을 틀어 이치마츠 쪽을 향했다. 이치마츠는 당황하면서도 바라왔던 일이기에 재빨리 가장 황홀한 방법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럼...간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확 끌어안은 채 입술을 갖다댔다. 살짝 혀를 밀어넣으면 카라마츠는 입술을 열듯 말듯 하다가 열어주었다. 이어 카라마츠의 혀도 이치마츠의 입 속에 들어왔다 서로의 혀가 뒤섞이며, 서로 끌어안은 체온이 뒤섞이며, 한참을 입술도 혀도 떼지 않은 채 있었다.

"자, 다 나았다. 카라마츠 형에게 전부 옮겼어."

이치마츠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 나름대로 행복함을 표현한 웃음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게 잘 전해지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그런 동생을 잘 알기에 싱긋 웃어줬다. 방금 키스를 한 거라고? 남자끼리, 그것도 형제끼리. 너는 어떤 기분이었던거야. 이치마츠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키스를 마치자 밀려오는 잠에 다시금 이부자리로 기어들어갔다. 카라마츠는 다가가서 이치마츠가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었다.


아직은 해가 일찍 떠서 살짝 싸늘하지만 밝은 새벽이 찾아왔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다독여 준 후 다시 쵸로마츠 앞 쪽에 앉아있다 잠이 들었는지 벽에 기대고 졸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기대서 자는 바보같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아까 선잠을 자며 들었던 소리가 맴돌았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키스했다. 시간으로 보면 제법 오랫동안 입을 맞댔던 것 같았다. 나쁜 동생이네. 형 말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다니. 벌을 줘야겠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 쪽으로 기어갔다.

"자, 내 감기도 옮겨줄게? 그리고 형한테 간호를 받는 거야, 카라마츠."

그러고선 오소마츠는 키스를 했다. 카라마츠는 혀가 들어오는 느낌에 잠에서 깬 듯 눈을 뜨고선 오소마츠를 쳐다보았지만 오소마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이내 혀를 오소마츠의 입에 집어넣었다. 쉬운 남자네, 카라마츠. 누구나 원하면 키스를 해주는 거야? 오소마츠는 작은 불만과, 그럼에노 갖고 싶은 동생과 하는 키스의 달콤함을 느끼며 카라마츠에게 딱 달라붙어서는 오랜 시간 혀를 섞었다. 혀를 빼고 오소마츠가 미소를 지어보이면 카라마츠도 미소를 지어주었다. 카라마츠에게 키스는 어떤 의미일까. 그냥 감기를 옮겨받고픈 자기 희생의 마인드?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거? 그럼 이치마츠하고도, 나하고도 한 이유는 뭐야? 형제니까 좋아한다는 건가? 형제끼리 보통 그런 걸 해?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는건가? 오소마츠의 마음은 키스를 하기 전보다 더 복잡해졌지만, 카라마츠가 다시 벽에 기대서 자는 모습을 보며 일단은 생각을 거둬들이기로 했다.


해가 중천에 뜨자, 6쌍둥이들은 한 명 한 명 일어났다. 다들 개운한 표정인 가운데, 정말 독감에 걸린 듯한 쵸로마츠와, 어제까진 멀쩡하던 카라마츠만이 몽롱한 채로 1층으로 내려왔다.

"어제는 일요일이었지만, 오늘은 월요일이니 병원이 열겠지?"

"카라마츠도 감기 걸린 거야? 역시 따로 잤으면 좋았을 걸... 어제 다른 형제들 간호해주느라 잠 설친 거 맞지?"

쵸로마츠가 걱정스러운 듯 카라마츠에게 말을 걸자 카라마츠는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키스 이후에 지어준 미소와 비슷해서 이치마츠와 오소마츠는 흠칫 놀랐지만 모른 척 했다.

"카라마츠! 뭐 먹고 싶어?"

이치마츠와 오소마츠가 동시에 말했다. 토도마츠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고, 카라마츠는 뒤를 돌아보며 죽이 먹고 싶다고 한 후 쵸로마츠와 집을 나섰다.


+1


<L*NE 이치마츠, 카라마츠 채팅방>

[이치] 있지

[카라] 응?

[이치] 어제 못 한 거 마저 하고 싶은데

[카라] 무슨 소린가

[이치] 그...저...키...키...

[카라] 뭐야

[카라] 모처럼 감기 나았는데 나하고 다시 하면 다시 감기 걸린다고?

[카라] 그럼 어제 한 일이 헛수고가 되잖아


이치마츠는 감기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그냥 그게 하고 싶을 뿐이라고 바보멍충아라고 썼다가 지웠다. 일단 바보같은 형이 감기가 나아야 다시 말을 꺼내볼 수 있는 건가. 이치마츠는 한숨을 쉬며 죽을 저었다.


+2


<L*INE 오소마츠, 카라마츠 채팅방>

[오소] 카라마츠

[오소] 넌 내꺼야

[오소] 얼른 나아서

[오소] 그땐 제대로 달콤한 츄를 선사해줄게

[카라]

[카라] 간호나 잘 해줘


카라마츠의 단호한 멘트에 오소마츠는 풀이 죽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면 쵸로마츠랑 카라마츠 둘 다 알밤 한 대씩 먹여주고 빨리 나으라고 달달 볶아야지. 수건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오소마츠는 분을 삭였다.

 


---------------------------------------------------------------------------------------------------------

손풀기 겸 오랜만에 쓰는 겁니다 헤헤...

장편도 합작도 모두모두 밀려있는데! 일벌리기를 워낙 좋아하는 건가...


Posted by 하리H( )Ri
2016. 3. 26. 01:02

[카라른/이치카라] 누군가 빈 잔을 채워주오 -6- 

誰かカラッポの盃を満たしてくれ

※카라마츠 중심, 결론적으로는 카라총수지만 커플링별 조명 예정이라 카라른을 기본표기 후 커플링 별도 표기합니다.
※캐붕,글솜씨없음주의

※5화 카라마츠 사변+원작 기반

※멋대로 쓰는 학생 시절 이야기 포함

 

---------------------------------------------------------------------







카라마츠가 있는 병실 밖 복도에는 나와 오소마츠 형, 쥬시마츠가 있다. 배치로 보면 오소마츠 형과 쥬시마츠가 병실 쪽 벽에, 나는 병실 반대 쪽 벽에 붙어선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무거운 표정을 한 오소마츠 형은 쥬시마츠의 마음 속 짐을 덜어주려고 애쓰고 있다. 언제나 오소마츠 형은, 우리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그 고민들을 들어주고 함께 끌어안아주곤 했다. 저 무거운 표정의 의미는, 카라마츠의 고민을 같이 안아주지 못했다는 것일까. 

닮았어.

나와 닮았어.

오소마츠 형의 표정에 지나는 것은 죄책감.

카라마츠를 쳐다볼 수 없게 된 나를 옥죄는 것도 죄책감. 

마스크를 쓴 채 숨죽이고 주변의 풍경을 마치 CCTV라도 된 양 눈에 담는다. 심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1인실에 카라마츠가 들어가선지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종종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사람들도 내 눈초리를 보고 피해가는 듯 했다. 이걸로...된 거야.

오소마츠 형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병실로 들어갔다. 쥬시마츠가 내가 있는 쪽 벽으로 옮겨와서 조용히 기댄다.

"이치마츠 형."

쥬시마츠는 평소와는 다른 낮은 텐션으로 나를 부른다. 당연하겠지. 지금 분위기를 생각하면. 

"형은 알고 있었어? 카라마츠 형의 상태."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다. 쥬시마츠의 의도가 어쨌든간에 그 말들이 나를 짓누른다. 평소와는 다른 쥬시마츠의 처진 목소리도 거기에 한 몫 한다.

"알고 있었을 리, 없잖아."

아니지, 아니야.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치마츠.

그딴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카라마츠가 망가지고 있는 것 따위 몰랐으면 좋았을텐데.




카라마츠는 예전부터 텅 빈 녀석이었다. 텅 빈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생각이 없고 멍청한데다, 폼 잡는 와중에 실속있는 건 하나도 없다고 해야할까. 카라(空)마츠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상냥하고 남 도와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연극부에도 들어가서, 우리 중에는 부활동에 가장 매달리는 쪽이 되었다. 형제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물으니,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지 않냐며 웃어보이던 녀석이 인상깊었다. 그런건 분명 자기만족이겠지만, 사춘기를 겪어가며 조금씩 흔들리는 형제들 가운데서 카라마츠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변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만큼 악동으로 사는 오소마츠 형, 격변기의 쵸로마츠와 토도마츠, 그저 회색 청춘을 보내던 나와 쥬시마츠 사이에서 카라마츠는 홀로 장밋빛 청춘을 보내는 듯 했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나와 쥬시마츠에게 변화가 찾아왔는데, 나의 경우는 변화보단 악화란 말이 어울렸다. 회색 청춘은 검은색 청춘으로, 청춘이라고 부를 것 조차 없는 어둠으로 빠져들어갔다. 같은 반의 녀석들이나, 알지도 못하는 선배들이나, 글러먹은 선생들에게 치이면서 학교가, 사람이 싫어졌다. 그나마 형제들이 붙잡아주고 끌어줘서 어떻게든 학교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지만 도서관에 박혀있거나, 학교 주변을 배회하는 고양이들을 보러 교사 뒷편에 있거나 하는 일이 늘어났다. 1학년 땐 같은 반이었던 쵸로마츠가 몇 번이고 나를 찾아서 데려왔다. 사람 없는 곳을 찾아서는 잔소리를 퍼붓는 데 질려서 수업시간에 가버리는 것만은 그만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비거나 사람과 부딫힐 일이 많은 체육 수업 같은 때는 빠져나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게 그나마의 낙이었다.

형제들은 방과 후 시간도 제각각 보냈기에 매일같이 집에 같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주로 쥬시마츠와 같이 귀가했지만, 가끔은 방과후에 혼자 학교에 남아 교내를 돌아다니곤 했다. 사람들은 동아리방에 있거나, 운동장에 있거나 해서 의외로 조용한 공간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재밌었다. 그런 공간들 대부분엔 바닥에 담뱃재가 떨어져 있는게 눈에 띄긴 하지만. 2학기가 시작되고 어느 가을, 그런 공간들 중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을 발견했다. 버려진 옛 소각로. 고양이들이 종종 보금자리로 쓰곤 하던 모양인데 내 몸도 쪼그리면 쏙 들어가는데다 미묘한 경사 덕분에 남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담장 주변이라 담배를 피기는 좀 그럴지 몰라도 그저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이라면 거기서 학교를 관찰하며 시간을 죽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눈에 잘 띄는 교실은 연극부가 사용하는 교실. 

아, 저 교실에는 카라마츠가 있겠지. 하필이면 질리는 얼굴이 있는 교실이 잘 보이냐.

그래도 내 입장에선 몸짓으로 무언가 하는 게 흥미가 있어서 방과 후 혼자가 될 때마다 그 교실을 관찰했다. 중학생 시절 토도마츠의 도움으로 첫 주연을 따낸 카라마츠의 연극을 본 이후, 카라마츠의 연극을 굳이 보러가지는 않았다. 집에서도 엄청 대본 연습을 해대서 질릴 정도였고, 애초에 연극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카라마츠가 연기를 특출나게 잘해서 빠져들게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연극부에 몸 담은지 4년이 넘어가는 사이, 카라마츠의 연기가 많이 늘은 거 같았다. 카라마츠의 과장된 몸짓 하나하나는 궁금증을 자아냈고, 상대역이 압도당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저건 무슨 상황일까, 카라마츠는 무슨 대사를 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와서는 집에서 대본 연습을 거의 하지 않는데. 대신 늦게 들어오니까. 카라마츠의 몸짓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다만 고등학생이 되고 방황하는 사이, 손을 내밀어주는 카라마츠를 밀쳐내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카라마츠는 분명 그런 거 신경쓰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손을 내밀어주는 카라마츠의 손을 이제와서 잡기에는 불편했다. 멀리서 쳐다보는 풍경일 뿐이지만, 카라마츠는 빛나고 있었다. 검게 물들어가는 내가 그 반짝임을 좇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요즘은 대본 연습 안 하는거?"

오소마츠 형이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연극부에서 매일같이 연습하고 오니까. 거기다 집에서 연습하면 다들 시끄럽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그 안쓰런 말투도 관둬주면 안될까, 카라마츠 형?"

"논논. 이건 역할에 몰입하기 위한 내 나름의 노력이니까."
"있지, 카라마츠 형. 이번에는 무슨 연극을 하는데?"

"햄릿이라고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다."

"설마 주인공은 아니겠지?"

"주인공은 아니지만 레어티즈라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햄릿. 어떤 내용이었더라. 복수극이었던건 기억나는데, 레어티즈가 어떤 인물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이번 연극은 언제 하는데?"

궁금증에 내가 입을 열었다.

"오! 이치마츠, 연극을 보러 와 줄 생각인가?"

카라마츠의 눈이 반짝였다. 아마 자기가 나한테 미움이라도 받고 있을거라 생각했겠지. 그래서 저렇게 기쁜 표정을 짓는 걸까 혼자 생각했다.

"시간 나면."

애매한 답을 내뱉는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난 카라마츠의 몸짓이 완성되는 그 연극을 보러 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 해 겨울, 바쁘다는 토도마츠를 제외하고 모두들 카라마츠의 연극을 보러 갔다. 내가 몰래 관찰하던 카라마츠의 몸짓들은 무대 위에서 대사와, 분위기와, 상대역과 합쳐지며 더 강한 의미를 자아냈다. 주인공은 햄릿일 텐데, 카라마츠가 연기하는 레어티즈의 분노와 복수심이 안에 밀려들어오면서 햄릿을 압도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카라마츠가 이렇게 연기를 잘 했던가. 무대 위에 서 있는 인물은 레어티즈 그 자체였고, 카라마츠가 검에 찔려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파지기까지 했다. 이게 과몰입인가. 

그렇게 카라마츠의 연기에 나는 빠져들었다. 2학년 때는 카라마츠와 같은 반이 되어서 이런저런 핑계로 카라마츠의 연습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고, 카라마츠가 서는 연극 무대는 빠짐없이 보러 갔다. 방과후에는 나만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땐 카라마츠도 연극부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 나만의 시간마저도 이전처럼 카라마츠의 연기를 관찰하곤 했다. 대신 그 외에 1학년 때 정립시켜놓은 나의 일상들은 삐걱거렸다. 카라마츠는 멍청하니까, 일과시간에 밖으로 나돌면 나를 찾으러 헤매고 다닐까봐 시야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쉬는 시간에는 다른 녀석들과 잡담을 떨거나 하는 시간들을 쪼개어 말을 걸어와서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을 방해받기도 했다. 썩을마츠라고 부르며 쫓아내기도 했지만 녀석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극 연습이 힘들었던 다음 날이면 쉬는 시간에 잠들어버려서 한숨 돌리기도 했다. 


2학년 말에는 꽤나 큰 사건이 있었다. 오소마츠 형이 진지하게 우리들을 불러모아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렇다곤 해도, 오소마츠 형은 이미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라 둘의 대화 후 나온 결론을 들어보는 거 뿐이지만. 형제들의 대답은 대부분 똑같았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 없음. 진학도 취업도 노 플랜. 앞일따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들다워서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카라마츠는 혼자 우두커니 있었다.

"아직 고민하고 있는거야, 카라마츠?"

오소마츠 형과 이미 얘기했을 텐데, 카라마츠만은 결론을 내지 못했었나보다. 

"아...아니 뭐, 나도 진학이라든가 일을 배운다던가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아."

그 얘기를 하는 카라마츠는 조금 주눅들어 보였다.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카라마츠.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굳이 형제들 장단에 맞추지 않아도 되니까."

"자신을 높이고 싶고, 사람들에게 꿈을 배달하고,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게 지금은 연극밖에 안 떠오르는데. 딱히 대학까지 간다거나 연극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진 않지만,"

뭐야, 의외로 현실적이잖아.

"그래도 역시, 하고 있으면 즐겁거든."

카라마츠는 힘들게 본심을 꺼냈다. 그래도 그와 동시에 형제들과 같이 진학은 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조금 아쉬움이 남아 있어 보였지만, 아마 자신도 확신을 가지지 못해서겠지. 이렇게 형제들의 의견을 모아 오소마츠 형은 3학년이 되기 전, 잘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우리들이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느냐며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분명 피해갈 수 없는 진로 이야기가 공론화되어서 닦달당하기 전에 선수를 칠 생각을 한 오소마츠 형도 대단했고, 그렇게 당당하게 나와버리니 오히려 부모님이 이해해줘서 적어도 한동안은 집안이 소란스러울 일이 줄었다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새해가 되고, 카라마츠는 졸업 전 마지막 연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진학을 포기했으니 상관없지만 3학년은 수험생이 많아서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은 유급되지 않는다면 1년이나 남았지만, 3학년이 되면 카라마츠도 자동적으로 연극부에서 나오는 걸로 되어버린 것이다. 연극에 미련이 남았던 카라마츠는 어쩌면 자기가 서게 될 마지막 무대를 위해 온 힘과 정신을 쏟아냈다. 

카라마츠는 정말로 연극에 빠졌구나.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는 카라마츠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연극을 준비하던 3월, 카라마츠는 캔커피를 건네며 드물게도 내게 상담을 해왔다. 

"같은 반이니까 너에게만 얘기할게, 이치마츠."

2학년 때 카라마츠와 의외로 많은 시간을 보내서였을까. 그의 연습을 많이 구경하러 가서였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하고 싶은 게 있어?"

"없다고 했잖아. 기억 못하냐, 썩을마츠."

한번 끝난 이야기를 캔커피나 건네주며 끄집어내는 녀석의 의도는 뭘까. 

"그런가..."

"그러는 너는, 역시 연극이 계속 하고 싶은거야?"

카라마츠의 답을 기다리며 캔커피를 따서 마셨다. 3월이지만 아직 추워서 따뜻한 캔커피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게 기분이 좋았다.

"...이번 무대가 끝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어."

카라마츠는 슬쩍 웃어보이며 답했다. 안심시키고 싶다는 의도였을까. 그렇게 웃어보여도 눈은 하나도 웃고있지 않은걸. 

그때 수업 종소리가 울리고 이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다. 

카라마츠는 마지막 무대이니만큼 간만에 연기 연습을 집에서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할 정도로 카라마츠는 열심이였고, 내가 몰래 지켜보던 시절보다 한층 빛나 보였다. 

아, 이쯤 되면 별처럼 빛나고 있다고 해야되나. 

카라마츠의 연기는 형제들 누구나가 감탄할 정도로 발전해있었다.

"우와...진짜 다른 사람같아, 카라마츠 형."

토도마츠는 그간 카라마츠의 연극을 보지 않았으니 그 놀라움이 더 큰 모양이었다.

"대본 완벽소화? 대단한데."

전에 집에서 연습할 땐 시끄럽다고 핀잔주던 쵸로마츠도 감탄했다.

카라마츠가 읊는 대사와 표정, 그 몸짓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으며 반짝임을 만끽했다. 지금 집에서 잠옷 입고서 하는 연기도 저정도인데, 무대에 가면 도대체 어떤 광경을 보게 될런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윽고 카라마츠의 마지막 무대의 막이 올랐다. 이번만큼은 형제들이 모두 연극을 보러 갔다. 이번에는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카라마츠에게 공연장은 휘둘렸다. 카라마츠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그의 손짓은 아쉬움을 내뱉던 그의 한숨도 담겨있는 듯 했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안에 담아두고 있던 본심을 전하는 듯 했으며, 그의 눈빛은 어딘가 초월해버린 것같아 보였다. 이건 나만의 생각이라, 카라마츠의 연기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느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 형제들은 좀처럼 빛나는 일이 없다. 

마지막 무대에 선 카라마츠가 마치 초신성처럼 빛났던 그날 이후.

우리 형제 중 그 누구도 빛을 내는 일은 없었다.

다만, 녀석의 반짝임에 반해버렸는지 난 그 반짝임을 잊을 수가 없다.

초신성은 별이 죽어가면서 짜내는 최후의 빛을 내는 거라고 하던가.

그래서 마지막 무대에서 녀석은 그렇게 아름답게 빛났던 걸까.

카라마츠가 떨어지는 모습을 본 그 때를 떠올린다.

녀석은 어느새 어둠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어버린 걸까.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니트로서 폼이나 잡으며 다니는 안쓰러운 녀석이 된 지금,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녀석은 어둠을 집어삼키게 된걸까.

혹시,

나 때문인걸까.

그 이후, 나는 카라마츠와 그다지 어울려다니지도 않았고, 녀석의 안쓰러운 면모가 더해갈수록 심한 말을 하는 일이 잦아졌었지.

그 전에도 나는 녀석에게 심하게 대한 걸 후회해왔다. 거기에 카라마츠의 자살 시도를 목격한 이후, 카라마츠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목을 조여와 카라마츠를 피하기 시작했다. 지금 병실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것도 죄책감이 나를 덮칠까봐 두려워서다. 

머리만 텅 비었던 녀석은 마음 속도 텅 비어버렸다. 

그걸 메워주지 못한 초봄의 그날부터 나의 죄가 쌓이기 시작한 거다. 

카라마츠가 눈을 떠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카라마츠의 마음을 메우지 않으면 아마 카라마츠는 스스로 텅 빈 자신을 버리려 들 것이다.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이젠 복도에서마저 내 죄책감은 나를 옥죈다.

같은 공간에 있다간 집어삼켜져버릴 거 같아. 

병원 바깥을 향한다.


나는 카라마츠에게서 도망치는 거 밖에 할 수 없다. 

   


 


       

     

  



 

---------------------------------------------------------------------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여기가 1/2 지점이네요. 아, 4월에나 끝나버리는 거 아닌가 이거
중요한 건 정말 자기만족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소마츠상 볼때마다 제 안에서의 캐해석이 막 뒤바뀌고 뒤집어지고 하니까 그게 여기에도 고대로 반영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죄송해요. 그래도 전 편 읽으면서 혼란주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구상하다보니 청춘물을 쓰고 싶어졌는데 그냥 이 시리즈가 아니라 단편으로 낼걸...하다가도 어차피 아무도 안보는데 여기 넣어버리자, 차피 카라마츠 과거썰은 풀어야겠지 해서 좋아하는 이치카라에 넣었습니다. 앞에서부터 봐주셨다면, 카라마츠가 왜 자기를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팠는데 잘 전해졌을까요.  
그리고 이거, 아무래도 커플링이 아니라 조합으로 써야 할 거 같은데, 일단은 최대한 브로맨스 테이스트를 느낄 수 있게 쓰고 있으니까 뭐, 취향껏 즐겨주세요. 죄송합니다. 변변찮네요 ㅠㅠㅠ 


Posted by 하리H( )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