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 02:43
- 망상가득한 이치카라 소설
- 나의 ~마츠는 이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여러모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
- 글쓴이의 머릿속이 꽃밭
- 제목은 별 거 없습니다.

*

숨을 들이쉬면 너의 체취가 코로 스며든다. 그 체취만이 나를 안심시켜준다는 말을 차마 너에겐 할 수 없겠지. 몇 번이고 내 곁에서 네가 달아나고 말았던 건 내가 평생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내 곁에 있어달라고 말하고 난 뒤였으니까. 마치 헛소리인 양 하던 말들이 사실이었다는 듯.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데 할 수 없다는 건 이리도 답답한 거였구나. 이 체취를 영영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내 품에서 잠투정하는 널 살짝 쓰다듬으며 차라리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원을 빌어본다.

"아아―선샤인이 나의 안식을 방해하는군. 언제까지라도 잠들어 있을 줄 알았건만, 저 햇살에게마저 사랑받는 게 바로 이, 카라―"
"일어나자마자 잘도 지껄이는군, 쿠소마츠."
기본적으로 나는 카라마츠에게 좋게 말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할 수 없다. 상냥한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 것도 있지만, 그를 놓쳤던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가며 카라마츠를 잃느니 미움받는 사람으로나마 남아야 한다고 말해주기 때문일까. 그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리자 가슴 한 켠이 아파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난 이치마츠에게 미움받는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짓지만 입술 끝의 떨림에서 전해지는 숨길 수 없는 그의 마음은 바늘과도 같이 내 심장을 찌른다. 하지만 그의 서운함을 위로해줬다가 그가 떠나버리는 순간이 올까봐, 더욱 독을 품고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라마츠는 보기에 안쓰러운 패션을 하고선 집을 나선다. 자기 얼굴이 박힌 탱크탑은 대부분의 사람들 눈엔 자의식 과잉의 상징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의 자의식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은 같이 지내는 나라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치마츠! 카라마츠하고 잠자리 정리는 다 했어? 엄마가 집에 있는 거로 알아서 밥 챙겨먹으라 하셨는데 너만 밥 안 먹었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
쵸로마츠의 말에 정신차리고 방을 둘러보았다. 늦게 일어난 사람이 잠자리 당번, 그런 규칙이었는데. 너 이 새끼, 튀었겠다! 소중한 건 소중한 거고, 이따 오면 한 대 치리라. 6명이 누워 자는 커다란 이불을 정리하고, 적당히 남은 밥을 뭉쳐서, 적당히 주먹밥을 만들어 먹으면 쥬시마츠가 다가와 한 입 나눠주고, 설거지를 하고, 마당 쪽으로 나가 고양이들과 노는 시간. 매일매일이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백수 생활. 그런 매일에 변화가 찾아온 건 두세 달 전쯤이었나. 오늘처럼 마당에서 고양이들과 노는 와중에 느닷없이 낯선 기억들이 물밀듯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기억 속에서 나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내가 무엇이었는지 그 기억들 속에서 찾아내는 것조차 어려운 기억도 있었다. 다만, 딱 하나만은 같았다. 카라마츠와 내가 만나고,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면 그가 떠나버린다는 것. '내가 있으면 이 세계는 부서져버린다'는 말도 몇 개의 기억에서 들을 수 있었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뿌리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 후에도 오늘 아침처럼 불쑥 그 기억들이 떠오르고는 해서 혼란스러운 채다. 또다른 당사자인 그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털어놓기엔 믿기에 어려운 이야기라 속앓이하며 화풀이를 겸해 카라마츠에게 거칠게 대할 수밖에. 그도 지금, 자신이 있으면 이 세계가 부서진다는 생각을 끌어안고 사는 걸까. 그 전에, 정말로 그가 있으면 세계는 부서지는 걸까.
"오늘은 밖에 안 나가?"
등뒤에서 토도마츠가 등을 살짝 두드리며 말을 건다.
"그다지...나가든 안 나가든 별 다를 거 없잖아. 나가봐야 골목에서 고양이 찾아다닐걸."
"그래도 상관없어. 나가자, 이치마츠 형!"
수상한 하이텐션. 토도마츠에게는 분명 꿍꿍이가 있어보였다. 어차피 머릿속이 복잡한 거, 그 꿍꿍이에 타주도록 할까.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손목을 붙잡힌 채 토도마츠에게 끌려나간다.

"저기, 이치마츠 형. 요즘 고민이라도 있어? 안 그래도 어둠 오라가 넘치는 형인데 요즘은 뭐랄까, 어둡긴 어두운데 전보다도 혼자 끙끙대는 느낌이 들어서 말야."
토도마츠가 정곡을 찔러온다. 그런다고, 섞여든 기억에 관한 이야기같은 건 할 수 있을 리 없다.
"내버려 둬."
더 파고들지 못하게 날카로운 말투로 받아친다. 그럼에도 토도마츠는 팔짱을 끼며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오늘의 행선지도 카페일까. 토도마츠와 외출하면 카페에 들어가 신작 음료를 권유받아 토도마츠와 나눠마신다. 토도마츠 마음에 드는 음료라면 똑같은 음료를 한 잔 더 시켜서 마시고 그렇지 않다면 와플이라든가 케이크라든가 디저트 하나를 시켜서 먹는다. 이번에 끌려간 카페의 신작은 사과맛인가. 애플 어쩌고라고 써져 있는 이름도 참 긴 음료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는 그런 카페. 토도마츠는 들어가자마자 메뉴를 가리킨다.
"뭐 마실래? 아니면 디저트 먹을래? 여기 애플파이 맛있다고 SNS에서 소문나있던데, 오늘은 이치마츠 형이 먹고 싶은 걸 고르고 내가 거기 맞춰서 고를게. 언제나 내가 먹고 싶어하는 거 먹고 마셔줬으니까 오늘은 특별히!"
토도마츠는 기본적으로 밝은 편이지만, 방금은 유독 하이텐션이였다. 무슨 이유가 있나. 하여튼 그동안 고를 일이 없었다보니 메뉴를 봐도 핑 돌 뿐이었다.
"그럼 난 저거...애플 시나몬 어쩌고 하는 신작 메뉴로."
"그걸로 괜찮겠어? 날 위해서 신작 음료 골라준 건 아니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보더니 계산대에 가서 메뉴를 유창하게도 얘기하는 토도마츠였다. 나라면 분명 혀가 꼬였을 테지. 토도마츠는 자기가 계산하는 대신 음료가 나오면 받아달라고 하고 먼저 자리를 잡으러 갔다. 평소와는 다른 구석진 자리. 창밖에서 여자들이 지나가는 모습이나 커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짜증을 내던 녀석이었는데. 무언가 고민이 있나. 나보고 고민있냐고 물어보더니 사실은 자기가 비밀스런 일을 털어놓고 싶어하는 것인가. 음료 두 잔과 애플파이를 받아들고 자리로 향하면 토도마츠는 고맙다며 웃음짓는다.
"...이치마츠 형은 전생이라든가 윤회설? 뭐 그런 거 믿어?"
"글쎄... 있을 거 같긴 한데."
"하기야, 형은 내세내세 그러면서 가끔 지금 삶에 미련없는 척하니까 믿으려나."
미련없는 척이라니.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난 그런 거 안 믿었는데, 정확힌 안 믿었다기보단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뜸을 들인다. 신작 음료라던 라떼를 토도마츠가 한 입 마시고 나자 입술에 거품이 묻어났고 그는 자연스레 거품이 묻었을 부분을 혀로 핥아냈다. 어쩐지 목이 타서 집어든 다른 음료는 핫쵸코였나. 달지만 텁텁해서 더 목이 타고 말았다.
"만약에, 우리 6쌍둥이중 누군가가 세상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들으면 어떻게 할 거야?"
에?
"단순한 악몽이겠지만, 그런 꿈을 한 두 달 전부터 계속 꾸고 있어서. 그것도 흘러가는 결말은 똑같은데 꿈에 나오는 세계는 계속 바뀐단 말이지. 그리고 그 세계의 내가 사라질 때마다 얘기하는 거야. 그 녀석을 없애야 했어. 내가 주저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사라져버렸다고."
내가 꾸는 꿈과 같다. 아니, 조금 다른가.
"...요즘 원한이라도 품은 사람이 있는 거 아냐? 누굴 없애야 한다고 후회하는 꿈이라니 무서운데, 드라이 몬스터."
그냥 꿈 얘기일지도 모르니 시덥잖은 투로 얘기했지만, 목소리나 표정에 불안이 묻어날 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형들한테 원한같은 거 품지 않은 건 아니지만."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중에 누군가 세상을 파괴하는 사람이라 그 사람을 없애야 한다면, 형은 어떻게 하고 싶은가야. 꿈에서 내가 하는 절규가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사실은 꿈이라기보단 길을 가던 중에 머릿속으로 멋대로 흘러들어온 기억들이라 농담처럼 넘길 일도 아닌 거라 생각해. 그래도 말이야. 그런 말을 듣는다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무표정은 이내 일그러지며 눈물이 고인다.
"그런 말 하기 전에 그 녀석이 누군지를 얘기해야지. 설마 그게 나라고 얘기하고 싶은거야?"
같은 기억인걸까, 아니면 다른 걸까. 확실히 해둬야 했다. '그 녀석'이 카라마츠였다면 카라마츠를 부르지 않았을까. 왜 나를 불러낸 거지.
"형의 잠꼬대 들은 적 있어. 카라마츠 형한테 사라지지 말라고. 그걸 듣고 확신했어. 나랑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카라마츠 형이 어딘가의 세계에서 '자기가 있으면 이 세계가 부서져버린다'는 말을 해서, 그리고 어딘가의 세계에서 나는 그런 카라마츠 형을 없애지 못해서 후회하며 사라져버리는 거였다고. 꿈하고는 달랐어, 하지만 어딘가 털어놓기도 어렵고 믿고 싶지도 않고, 그럼에도 점점 믿게 되버리는 그런 심정이라 일단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었어..."
평소와는 달리 주위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눈물을 닦으며 우는 토도마츠에게 냅킨을 건네주었다.
"나도 비슷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나는 세계가 부서지는 장면은 못 봤지만 카라마츠가 그 말을 하는 건 몇 번이고 들었어."
최대한 덤덤하게 얘기를 한다. 그도 그럴게, 난 매번 카라마츠에게 고백을 했고 카라마츠가 떠나는 일의 반복이었으니까. 카라마츠가 세계를 부순다, 같은 스케일이 다른 황당무계한 얘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부끄러운 감정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기억들을 믿어야 하는 걸까. 카라마츠가 있으면, 이 세계는 부서지는 걸까..."
한가한 카페에서 갑작스런 세계의 종말론을 이야기한다.
"이치마츠 형은 고를 수 있어? 만약 카라마츠 형을 없애서 세계가 무사하다면, 그 길을 고를 수 있어?"
흐느끼면서 토도마츠는 말을 이어간다.
"애초에 이런 걸 믿고 고민하는 것도 바보같잖아. 그런데, 카라마츠 형이 소중해서, 다른 형들도 엄마 아빠도 소중해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소중해서, 만약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토도마츠는 진지하게 고민해왔던 모양이다. 아니, 나도 나 나름대로 진지했지만 방향성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내가 카라마츠에게 고백하면 카라마츠가 사라져버릴까봐, 그러니까 카라마츠를 사랑하는 일 따위 없게 하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세계가 사라지는 스케일이라. 그건 뒷전이었던 것이다. 그걸 뒷전으로 하는 게 잘못된 것인가? 애초에 어디서 흘러들어온 지도 모르는 기억이지만. 그걸 믿어야 할 지조차 모르는 거지만.
"카라마츠한테 물어보는게 가장 빠르지 않을까..."
나도 물어보질 못하면서. 그리고 그걸 물어보는 자체가 분명 카라마츠에게 상처를 줄 일이란걸 알면서, 편하게 대답해버린다. 토도마츠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또한 생각해 봤던 일일 것이며, 그게 카라마츠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뒤엔 서로 나누는 이야기 없이 나는 애플 어쩌고 하는 라떼를, 토도마츠는 핫쵸코를 홀짝이며 애플파이를 먹었다. 과연 맛있는 애플파이였지만, 미각을 느끼는 순간은 찰나였고 그저 씹어 삼키는 시간만이 길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을 데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치마츠 형도, 조금은 고민이 줄었어?"
토도마츠는 무리하게 밝은 톤으로 말했지만, 카페에 들어왔을 때보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도마츠는 어쩌면 나에게 답을 얻으려 했던 것일지 모른다. 의존하고 싶었던 거다. 카라마츠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아니, 그보다는 자신에게 흘러들어왔던 기억을 부정해주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조차도, 카페에 들어왔을 때보다 고민이 커졌다. 카라마츠가 나를 떠나버리고 나면 그 뒤 세계는 부서져버리는 결말이 오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그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은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길은 우연찮게도 인적이 드물었다. 그 장면이 유독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심란할 대로 심란한 나와 토도마츠는 그저 걸었다. 집에 카라마츠만 있다면 최고로 심란하겠는걸.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행히도 집에는 파칭코에서 털리고 왔는지 널브러진 오소마츠 형과 자격증 수험서를 거꾸로 읽고 있는 쵸로마츠와 야구배트를 코에 올리고 넋나간 듯 누워있는 쥬시마츠가 거실에 있었다. 아니지, 이것 또한 심란한 상황인데.
"헤에, 다들 심한 꼴 하고 있잖아. 무슨 날인가."
시덥잖은 농담을 내뱉었다.
"그쪽 두 사람도 충분히 심한 얼굴 하고 있는데. "
책을 거꾸로 든 쵸로마츠가 태클을 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더더욱 무서운 일이었지만.
"카라마츠 빼곤 다 있는 건가?"
널브러져 있던 오소마츠 형이 몸을 일으키며 얘기한다.
"그 녀석 오늘은 저녁 늦게 들어온다고 얘기했으니까 빼놓고 형제 회의 하자고."
형제 회의라. 그것도 카라마츠 빼놓고. 어쩐지 주제가 예상이 갔다. 2층으로 올라가 모여앉았다. 다시보니 쵸로마츠도 평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다들 심란함이 끼어있었던 탓일까 애써 태연하려 만들어낸 얼굴 표정인지도 모른다.
"까놓고 얘기해도 되지? 다들 이상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지? 카라마츠가 세계를 부순다던가 하는 그런 황당한 기억 말이야."
오소마츠 형이 말을 꺼냈다. 그는 황당하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런 점이 모두를 안심시켰는지 조금 긴장이 풀어진 표정을 했다.
"너희들 일이라면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지만 사실 쵸로쨩 얘기 듣고 떠본 거지만."
떠본거냐.
"쵸로쨩이라 하지마. 기껏 고민하다가 털어놓았더니 그런거 믿냐고 실컷 웃고선 자기도 그런 일 있었다며 말했던 것도 분해 죽겠는데.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더더욱."
불만스럽게 얘기했지만, 쵸로마츠는 오소마츠 형에게  털어놓고 마음이 편했던 걸까.
"그래서, 우리는 뭘 하면 돼?"
쥬시마츠가 사뭇 진지하게 묻는다. 우린 뭘 하면 될까.
"일단 모두의 이야기를 모아보는 게 좋지 않겠어? 다들 어떤 기억들이 들어왔는지 얘기해보자고."
쵸로마츠가 의견을 내서 모두가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다. 다들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이름과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갔지만 어떻게든 여섯이 얽혔던 모양으로, 카라마츠가 자신이 세상을 부수는 존재라고 얘기했던 몇 번의 일이 있었던 것과 그 말마따나 카라마츠에 의해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카라마츠가 어떻게 세계를 부수는 지는 누구도 정확히 보질 못했지만 카라마츠로부터 서서히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딱 한 번이지만 쥬시마츠가 봤다고 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치마츠는 혹시,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지 못한거야?"
오소마츠 형이 물어온다. 그렇지. 사실 나는 카라마츠가 떠나는 장면만 수없이 봤을 뿐 그 뒤에 세계가 부서지는 일은 보지 못했으니까.
"나 알고 있는 게 있는데 이야기해도 될까, 이치맛쨩?"
이렇게 또 그는 집요하게 밀고 들어온다. 알고 있는 거라니...
"이치맛쨩, 엄청난 순애보던데?"
에? 순애보? 아, 설마!
"순애보라니 무슨..."
토도마츠가 물어본다. 다들 내 쪽을 보고 있다. 잠깐!
"그렇게 세계가 부서지는 강렬한 기억 속에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좋아하는 모습이 몇 번 보였단 말이지. 마치 지금처럼 말이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데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방황하는..."
"그런 거 아니야!"
오소마츠 형의 말을 끊었다.
"미안한데 다들 눈치채고 있거든? 아, 카라마츠는 모를지도. 그 녀석 눈치는 너무 왔다갔다 한단 말야."
쵸로마츠도 한 마디 거든다.
"어...그러니까...어..."
말문이 막혔다. 일부러 더 튕겨내고 구박하고 그랬는데. 눈치채고들 있었던 거야? 그리고 다른 세계의 내가 그러고 있는 거조차 다 들킨거야? 죽자. 당장.
"걱정마. 다들 응원할거야, 그쪽 면은. 사람의 감정이란게, 그런 거잖아?"
그런 식으로 위로하지 말라고! 망할 장남 새끼가!!!
"너처럼 그 뭐냐...연인이 되고 싶다던가 그런 감정이 아니더라도 우린 카라마츠가 소중하니까. 카라마츠를 없애야 한다고 듣는다면 그 말대로 정말 없애야 할지 어떨지 고민하게 되잖아? 저울질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없애야 했다는 절규조차도 정말 그걸로 세계가 부서지는 게 막아지는 것인지 알 길도 없고 말야."
냉정한 척 하면서 얘기하지만 쵸로마츠의 말에는 역시 카라마츠를 없앤다거나 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다는 말이 담겨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안심해도 되는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럼...이미 알고 있으니까...내 기억도 얘기할게..."
내가 고백하면 카라마츠가 떠난다는 것을 말했다. 내게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카라마츠가 날 떠나는 이후에 세계가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하는 결론을 조심스래 내리자, 다들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쳐내기만 하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토도마츠는 슬픈 표정으로 얘기했다.
"카라마츠 형이 떠난다는 것이 형의 고백을 받지 못하고 떠나든 자신을 미워한다고 하는 형을 위해 떠나든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떠난다고 했지만 우린 카라마츠 형이 세계를 부수는 걸 봤으니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린다는 의미랑은 좀 다른 거 아닐까? 어떻게 해서 세계가 부서지는지, 그 원인을 모르는 이상..."
"하긴. 다른 세계에서는 지금처럼 서로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을테니 단순히 없애면 된다는 결론을 내려도 이상할 것 없었지만,  이치마츠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다면 얘기가 좀 다른가."
음? 얘기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러면 아예 이러면 어떨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고백을 받아주고 둘이 사이좋은 연인 사이가 되면 해결되는 거 아냐? 다른 세계에서 그런 모습 못 봤고, 시도해 볼 만한 거 같은데."
황당한 소리하지 말라고 장남!!!
"카라마츠를 때려 죽이는 것보다는 나은 거 아닐까. 애초에 카라마츠를 없애면 이 세계도 같이 빠이빠이 해버리는 걸지도 모르고. 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동조하지 말라고 딸딸마츠!
"그것 참 뭔가 세계를 구하는 아름다운 작전 같아서 어쩐지 마음에 들어. 열심히 도와줄게, 이치마츠 형!"
아까 울면서 카페에서 얘기한 건 뭐가 되는 거냐고!
"아하하, 카라마츠 형이 웃으면 분명 해결되는 걸거야, 힘내 이치마츠 형아."
그런 문제였던 거냐, 쥬시마츠!
"잠깐...나 이 상황을 따라갈 수 없는데?"
얼떨떨한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대응하자는 것인지.
"당연하지.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이 상황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으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에 걸어보는 거야."
오소마츠 형이 씨익 웃으면, 어쩐지 그 말대로 하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모두에게 해피 엔딩을. 그 해피 엔딩을 자기가 억제해왔던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 것이다. 다만, 수많은 세계에서 나는 카라마츠에게 거절당했다. 허튼 고백은 수많은 세계에서와도 같이 절망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말 것이다. 도와줘,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나를 보고서 웃어주었다. 세계를 구하는 고백 작전의 막이 올랐다.

**

언제나의 다리에서 헌팅, 산책, 그리고 치비타네 가게에서 오뎅을 먹으며 수다떨기. 우연히 마주친 오소마츠에게는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간다고 말을 해 뒀지만, 사실 별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일찍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이치마츠에게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잠결에 그가 따뜻하게 자신을 안아줬던 걸 느꼈다.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솔직하게 얘기해주질 않았다. 최근의 이치마츠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가시돋친 말들에 애정이 담겨있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데에선 나를 아껴주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이지.
기분나쁘다고.

***

고백이라고는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도 그럴게 우리 모두 동정이고. 고백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성공해본 적이라곤 없었고. 그리고, 그동안 미워하는 모습만 보였던 상대에게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카라마츠도 우리처럼 다른 세계의 기억을 가졌다면 경우의 수는 더 복잡해진다. 그가 자신이 세계를 부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다른 세계에서처럼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런 사람이니까. 상냥하니까. 어느 세계에선가, 그 세계의 카라마츠는 그 세계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세계를 부숴버리는 천하의 악당이라, 누군가 곁에 있어달라고 바란다고 해도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 가장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 나같은 건 나쁜 녀석으로 남겨두고 더욱 사랑하는 것을 찾기를 바란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푸른 불꽃이 세상을 뒤덮었던 기억이 난다. 그 불꽃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지만, 아마 그 불꽃에 그 세계가 삼켜졌던 것이겠지.
다른 형제들은 박아뒀던 연애지침서나 스마트폰, 잡지 같은 걸 뒤적이고 있다. 보기만 해도 촌스러운 고백하는 방법 찾기에 열을 올린다. 자기가 할 고백이 아닌데도 진지하게 임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솔직히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좋은 방법을 찾는다 한들, 내가 그걸 해낼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치마츠 형도 생각하고 있는거지?"
토도마츠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물어본다. 아마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보다 이치마츠 형아는 카라마츠 형한테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 아냐? 분명 카라마츠 형아는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
이런데서 예리하네. 쥬시마츠 말도 맞다만. 어느날 맨날 괴롭히던 녀석이 미안하다고 하면 상대방은 어떤 기분일지 모른다. 용서하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전에 에스퍼 냥이 써보면 어때? 진심을 전해줄 거 아냐?"
"가볍게 말하지 마, 바보 장남. 자기 입으로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사과가, 사랑 고백이, 그렇게 쉽게 상대방의 마음을 열 것 같아?"
"하아? 어느 입이 그런 소리를 할까? 맨날 사과할 일 있으면 눈치보다 미안하다고 작게 중얼거리고 뻔뻔하게 아무일 없는 양 구는 딸딸마츠가 할 말일까나?"
"조금만 틈이 나면 놀리지! 그러는 넌 사과 제대로 하기는 하냐? 놀림받고 난 뒤에 제대로 사과받은 적 거의 없거든?"
차라리 저런 관계였다면 고백이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차에 카라마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달려나갔지만 나는 방 안에 주저앉고 말았다. 카라마츠가 돌아오자 조금 무거운 공기가 되고 말았다. 황급하게 고백 관련한 것들을 숨기고 이 방 저 방에 흩어져서 태연한 척을 하느라. 카라마츠는 어떻지? 다른 세계의 기억을 갖고 있는 걸까? 그래서 그 무거운 마음에 이제야 들어온 것일까. 저녁밥을 혼자 밖에서 때우고 온다는 건 드문 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만 카라마츠는 나 혼자 있는 방에 잠시 들렀다 나가버렸다. 곧이어 TV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모두가 잠들 때까지 카라마츠는 거실에 머물렀다. 아니, 아예 거실에서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오늘의 옆자리는 허전했다.

****

불행 하나. 카라마츠는 고백을 결심한 그날부터 날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엄마 앞에서 능숙하게 기침을 하며 감기 걸렸다는 핑계를 대며 거실에서 혼자 잠을 잔 지 벌써 일주일 째. 나와 단 둘이 남는 일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집에도 잘 남아있질 않았다. 공원에서 자주 시간을 때운다는 쥬시마츠의 보고가 있었다. 거기서 기타를 치기도 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고도 했다. 다른 세계의 일을 알고 있는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조차 물어볼 수 없었다.
불행 둘. 썩을 동정놈들답게 고백을 어떻게 할지조차 난항을 겪고 있다. 그냥 심플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리라는 말을 들어도, 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고백 얘기를 하기 전에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 사과를 할 타이밍을 찾기도 어려운 게 현재 상태.
불행 셋. 다른 세계의 기억들은 점점 더 우리 형제를 잡아먹어만 갔다. 모두 악몽을 꾸고 일어난다. 나에게도 이젠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에 카라마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마다 거절당하는 내가 있다. 반쯤 연인이었을 때에도, 종속관계로 얽혀 날 거부할 수 없을 때에도, 나는 수많은 세계의 카라마츠에게 끌렸고 그때마다 지금 세계의 형제인 카라마츠에게도 강하게 끌렸지만 그 마음이 전달되지 못하고 좌절하는 순간을 반복했다. 아니지, 마음은 전달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때로 웃으며, 때로는 날 힐난하며, 때로는 무표정으로 내 마음을 쳐냈다. 그 결말이 모두 세계를 부수는 카라마츠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싫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나를 좋아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제각각의 나의 고백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실패의 암시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나의 고백이 성공할 가능성 같은 건 0에 수렴해가고 있었다. 고백방법을 의논해주던 모두도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더이상 누군가에게 맡겨둘 수는 없었다. 깊게 생각한 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고백하자. 그런데 만약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땐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거절당한다면 그걸로 괜찮지만, 고백에 실패한다면 세계가 부서질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기세좋게 달려나갔다가도 멈추고 만다. 일단 공원으로 향한다. 아, 정말로 카라마츠가 있어. 카라마츠는 기타를 치고 있었다. 노래까지 부르면 안쓰러웠을텐데 그저 기타만을 튕긴다. 입고 있는 복장의 안쓰러운이 주변 사람들이 다가오는 걸 물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멀찍이 기타 선율을 듣고 있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나도 멀찍이서 그 선율을 듣고 있었다. 아쉽게도 무슨 노래인지 모르지만. 자작곡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타 소리가 멈추고 정신을 차려보니 카라마츠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기타를 챙겨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셈인지 공원 밖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뒤를 쫓았다. 둘 다 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걸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지 않도록. 신호등에 걸려 카라마츠를 놓칠까 싶으면 카라마츠는 그 자리에 멈춰서 나를 보았다. 초록불로 바뀌면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그렇게 강둑에 도착해서 또 걸었다.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으려 했고, 그는 속도를 올리지 않은채 그저 걸었다. 어느새 나는 카라마츠 옆에 와있었다. 그 상태로 계속 걸어나갔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말 한마디 없이 걷다 카라마츠가 멈춰섰다.
"이치마츠. 나는 잘 모르겠다."
며칠만에 나에게 한 첫 말이다.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날 좋아해주는 네가 보인다. 그런 게 언젠가 기분나쁘게 느껴져서 며칠은 널 피해보려 했다. 그러면 네가 날 찾으려 한다. 네 마음을 모르겠다. 싫어한다면 싫어하는대로 좋아한다면 좋아하는대로 표현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걸 기다리기는 게 지친다. 이런 게 보통의 형제의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투닥거리는 오소마츠와 쵸로마츠와는 달라. 서로 다정하게 아껴주는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와도 달라. 깨어있을 땐 독을 품고서 심한 소리를 해대는 네가 내가 잠든 사이에 다정하게 대하는 걸 느껴버리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의 감정이 한 가지로 수렴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이제는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을 하든 싫어한다고 말하든 네 감정을 생각하는 일을 포기하고 말 것만 같다. 더는 상처받기 싫고, 널 생각하느라 고민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며칠 이렇게 너에게서 도망쳐서 다니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마 이전처럼 널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
고백도 전에 차였다. 그것도 엄청 딱딱한 말투로.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카라마츠는 나를 이해하려다 포기하려 한다. 안돼. 그러지마. 포기하지 마. 그것보다. 내 말을 들어줘. 사과하게 해줘. 내 마음을 전하게 해줘.
"그건 안돼."
작지만 분명하게 말을 꺼냈다.
"너무 늦었지만, 얘기하게 해줘."
카라마츠는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놀랐던 모양인지 눈이 평소보다 커진 느낌을 받았다. 물론 카라마츠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미워하지 않아...그보다 좋아하고 있다고. 안쓰러운 말투나 행동에 심술을 부렸던 게 어느샌가 평범하지 않은 감정이 커지면서 카라마츠를 밀쳐내는 걸로 바뀌어가고 말았어. 상처를 줘서 미안해. 늘 상냥하니까, 이해해준다고 멋대로 착각해서 미안해. 잠들었을 때같이 직접 대면하지 않을 때에야 상냥하게 대해서 미안해. 이렇게 카라마츠가 배려해줘서 시간을 만들어 줄 때에야 비겁하게 사과하는 나라서 미안해."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꽉 쥐었다. 용서받지 못해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이렇게 사과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기회를 만들어준 덕이니까. 카라마츠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깜깜해지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쌀쌀한 바람이 스친다.
"진작 이렇게 얘기해줬으면 좋았을 걸. 나도 빨리 용서할 수 있었을텐데. 서로가 더 상처받기 전에 끝났을 텐데."
과거형으로 말하는 그로부터, 어쩐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용서할 수 있어. 이해했으니까. 하지만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겠네."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어? 어째서?
"평범하지 않은 감정이 커져서 날 밀쳐냈다고 하니까. 형제애 이상의 감정인거지?"
아.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개를 끄덕일 때가 아니지.
"그래. 언젠가부터, 카라마츠가 좋아졌어. 늘 같이 있고 싶고, 손 잡고 싶고, 더한 것도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졌어. 평범하게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그런데..."
그러고보니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흘러들어오기 전에도 나는 그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형제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그 감정을 묻어두기만 했다. 묻어두는 반발로 카라마츠에게 심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흘러들어온 기억 속에서 카라마츠가 떠나기보단 차라리 내 감정을 숨기고서라도 옆에 남아있어줬으면 하는 게 우선시되어 더 밀쳐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말하고 붙잡아야 한다. 수 십번을, 수 백번을, 셀 수 없는 삶을 돌고 돌아 여기서 그를 붙잡아야 한다.
"카라마츠, 사랑해."
그렇게 말하고 끌어안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저 고백하는 걸로 끝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세계가 부서진다니, 황당무계한 사랑 이야기라면 당연히 행복한 결말이어야 한다고. 카라마츠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 상태에서 입을 맞췄다. 입을 꾹 다물고 버티던 카라마츠는 이내 저항을 멈추고 혀를 내 입술로 밀어넣었다. 혀를 섞으며, 눈을 감으며,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으...으으..."
갑자기 카라마츠가 혀를 빼더니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고선 비명을 질렀다.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과 터져나오는 절규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이치...마츠..."
이름을 겨우 불러주었다.
"미안...하다...역시...혼자 있게..."
"무슨 일이야? 많이 아픈 거야?"
"내가...내 탓에...이 세계가 부서진대..."
이 시점에서 다른 세계의 기억이 흘러들어와버린 것인가?
"어느 세계에서의 내게 내려진 벌이라나봐...그런가...이치마츠..."
카라마츠는 한 손으로 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미안하다...넌 수없이 많은 세계에서...지금처럼 날 좋아해 줬구나...그리고 난 그걸 다 거절했지...여기서 나는 널 받아들여야 할지...거절해야 할지...그걸로 무언가 바뀌는지..."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이 고통과 불안감은 가슴팍을 타고 내게 전해졌다.
"밑을...보지 마...그리고 여기서...전력을 다해 도망쳐..."
카라마츠는 나를 밀쳤다. 어느새 카라마츠의 심장 부근으로부터 바닥을 향해 균열이 이어지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발바닥에는 검은 균열이 점차 퍼져 내 발밑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 균열이 뻗어가 세상이 부서지는 것일까. 순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형제들이, 부모님이, 친구인 고양이들이, 알고 있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달린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할 수야 없겠지만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카라마츠를 다시 끌어안았다.
"무슨 짓이야, 이치마츠..."
"널 두고 갈 수 있을리가 없잖아. 마지막을 함께 하자고. 대신 딱 한 마디만 해줘."
"무슨..."
"이번엔 거절하지 말아줘."
"그런가. 나도 사랑한다고, 이치마츠."
조금 무서웠다. 조금이 아닌가. 바지에 오줌을 지려도 넘칠 정도로 무서웠다. 그래도 카라마츠가 함께 있다. 세계가 카라마츠 탓에 부서져버린대도, 거기에 내가 끼어드는 운명이 계속 된대도, 그 결과 이런 결말을 맞는대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서로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진다면, 그건 분명 해피 엔딩이겠지. 메리 배드 엔딩이라고 하던가. 이런거.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며 다시금 키스했다. 이 감촉을 잊지 말고 다른 세계로 전하자. 카라마츠가 날 끌어당겼다. 나도 카라마츠를 끌어당기고서 세계의 종말을 맛봤다.

*****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다. 니트 여섯 쌍둥이는 늘어져 있다가 한낮이 되서야 몸을 일으킨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은 카라마츠. 커다란 이불을 개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한다. 쌀쌀해진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다같이 산책을 하러 나섰다. 왁자지껄 떠들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제각각 자신의 놀거리를 찾아 나선다. 카라마츠와 나는 단둘이 남겨졌다. 공원에 들러 벤치에 앉아 고양이와 놀았다. 고양이와 논 것은 나 혼자로 카라마츠의 주변에는 고양이가 다가오지 않아 카라마츠는 울먹거렸다. 공원을 나와 걸었다. 내가 뒤쳐지면 카라마츠는 멈춰서서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강둑에 도착해 계속 걸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어둑해졌다. 오늘 하루동안 낙엽이 제법 떨어졌는지 사각사각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쌀쌀한 바람이 스쳤다. 그럼에도 우리는 걸어나갔다.
"시간 참 빠르네."
"벌써 가을이라니 빠르긴 하지. 벌써 올해가 다 가버리는군."
그 말도 맞네. 벌써 올해가 다 간다니. 니트라 실감은 못 하지만.
"오늘 하루가 빨리 간다는 얘기였어. 해가 빨리 져서 그런가."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딱 밤이 되기 전 이 시간이 참 로맨틱하지 않은가."
"로맨틱은 무슨. 추워서 얼어죽게 생겼어. 바보 아냐?"
"이런 날에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따뜻해지라고 불을 질러줄 수 있을 것 같다만."
"로맨틱은 무슨 음흉하잖아. 최고야."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강둑 어느 지점을 돌아 다시 집 방향으로 걸었다.
"불이라도 지필까."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브라더?"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길을 걸을 예정이거든. 1초 뒤에."
그러고선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
"훗, 과연. 혀의 마찰열로 불을 지펴볼까."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갖다대는 그를 맞이하여 입술을 부딪히고 혀를 섞었다. 시간 참 빠르다.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며칠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의 종말을 맞이했을 터였다. 어둠에 삼켜져, 세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며, 그럼에도 서로를 끌어안고 세계가 부서질 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아득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계가 무너지기 전 강둑에서 카라마츠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카라마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런 카라마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이치마츠."
"뭐가 정답인데."
"너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길 잘했다는 거다.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왔어."
그런 게 어딨어. 편의주의 전개인가? 겨우 고백 받아준 걸로 세계를 구한 거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네.
"다른 세계인거 아냐? 우리들 기억만 가지고 있는 거라든가."
"그렇지 않다. 아직 이 세계는 다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서 균열이 보이거든."
주변을 둘러봤지만 균열이 있지는 않았다. 이것만큼은 카라마츠에게만 보이는 건가.
"벌이라면 이제 충분하다고, 나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라는군."
카라마츠는 세계를 부수는 존재라는 벌에서 해방된 모양이다. 애초에 왜 그런 벌을 받게 되었는지, 그런 일이 왜 필요했는지 궁금증은 산더미같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마도 곧,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은 잊혀진다고 하네. 다른 세계의 기억 같은 거, 갖고 있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원래라면 그렇지만, 조금 서운했다. 카라마츠가 고백을 받아준 이유 중에는 수많은 세계에서 이치마츠가 고백했던 것과 그걸 거절한 그의 기억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테니까.
"중요한 건, 감정이겠지. 그런 기억 없이도 난 널 좋아했다고."
조금 삐진 듯 얘기해버렸다.
"아, 알고 있다. 그런 기억 없어도 나도 널 좋아할 테니까."
그렇게 돌아와서 모두에게 보고를 하고, 커플이 된 기념으로 모두에게 쳐맞고, 간만에 같은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슬슬 기억이 옅어지는 거 같네." 
"훗, 세계의 균열도 제법 옅어졌다."
"나도 보고 싶은데, 그 균열. 발밑에 시커먼 균열만 봐서 세계가 어떻게 갈라졌는지 궁금하거든."
"별로 좋은 것도 아니다. 마음 한 켠에 죄책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세계가 나를 트리거 삼아 사라진 것도 사실이니까."
"이젠 괜찮으니까. 그렇게 떨지 마. 끌어안고 있기보다 뛰어서 집에 가는 편이 훨씬 따뜻하겠어."
"그러지. 가서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강렬한 아픔을 희석시켜 보자고, 허니."
"허니라는 말은 집어치워, 썩을마츠."
"슬슬 애칭으로 부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치마츠."
"이치마츠로 됐어."
"논논. 허니, 베이비, 마이 리틀 이치~"
"어디서든 그런 식으로 부르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을거야...제발 평범하게 불러."
발걸음이 빨라졌다. 카라마츠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내 속도가 느려지자 카라마츠가 손을 잡아주었다. 손을 잡고 함께 달렸다. 달리다 보면, 겨우 고백해서 그와 연인이 되었다는 실감이 난다. 무엇이 날 고백하도록 떠밀어주었던가. 아. 카라마츠가 삐져서 며칠을 날 피해다녔었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고백하려 했었지. 왜 다른 형제들이 나를 위해 고백 방법을 찾아주었지. 아무렴 어때. 이렇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다. 그걸로 분명,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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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라이더 네타를 썼다 해야하나.
전부터 가면라이더 디케이드의 설정은 한 번 쯤 써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별 생각 없이 깊게 이야기를 안 짜고 써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파괴자라니 이 무슨 중2중2한 설정인가. 거기서도 왜 주인공이 파괴자인지 목적은 무엇이고 그런 거 안 나왔으니 여기서도 대충입니다. 고백이 성공하면 세계가 구원받는다는 건 데이트 어 라이브도 생각나고 하여튼 그렇군요. 평행세계를 좀더 자세히 쓸까 하다가 살짝이 힌트만 넣었습니다. 평행세계의 기억들이 들어왔을때 반응도 좀더 쓰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집중하기 위해 뺐습니다. *만큼만 썼을 땐 카라마츠를 없애자는 1356과 그럴 수 없어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는 4의 이야기였는제 1356의 태세전환을 시켜줬습니다. 사실 오소마츠는 그렇게 해서라도 다른 형제들을 지키려면 카라마츠를 없애자는 쪽으로 내볼까 하다가 관뒀습니다. 모두의 해피 엔딩을 꿈꿨습니다. 간만에 단편치고 좀 길게 썼는데 반으로 나눌 계획이었을 때와 플롯이 또 틀어져서 그렇네요. 단편 쓸때도 이럴진데 장편 쓸때는 엄청 흔들리죠...늘 죄송합니다...
이치마츠가 무척 이치마츠답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기세로 이해해주세요.
오소마츠상이나 2차창작에 대한 열의가 많이 식었지만 망상이 멈추지 않으니 가끔 이렇게 쓰는 것도 좋네요. 극장판 영화도 나오고 하니 3기가 또 기대되는 건 저만은 아니겠죠.대충 뭐, 늘 이치카라 행쇼입니다. 카라른 행쇼고, 그 외에도 다 행쇼에요ㅠㅠ 올해 안엔 장편 저거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편 준비했습니다. 이어지지만 이 편 하나로도 자체완결이니 꼭 읽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만 조금 더 설정설명이 된 부분이 있어서 읽어주시면 진자 떙큐합니다. 진엔딩...같은 거?
Circle of Life (true end)
http://heartrainon.tistory.com/188
Posted by 하리H( )Ri